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45화
“이, 이거 정말 저희끼리 가도 괜찮은 거 맞나요? 이게 맞나요?”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생략된 말을 이해한 고영은은 비명을 삼켰다.
김솔음은 상사들을 설득한 후, 동기 둘을 데리고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 테라스룸을 나왔다.
‘논리적으로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겠지.’
아이템 소유자가 우리 중 하나라고 말해뒀으니, 그 사람이 움직여야 안 어색할 터다.
…백사헌과 ‘우리’로 묶이는 게 좀, 찝찝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묘하게 얌전하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그럼 양초를 꺼내겠습니다.”
네!
고영은은 김솔음에게 받았던 종이를 다시 돌려주었고, 김솔음은 그 종이를 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원통형의 묵직한 연보랏빛 왁스 덩어리가 그의 손아귀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진짜 양초였다.
“…!”
크레용으로 그렸던 틀이 박 입힌 무늬처럼 남아 있는 게 직관적으로 알게 했다.
그림이었던 양초가 실제가 된 것을.
‘…와.’
상황을 잊고 감탄했다.
이제부터 저 양초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간략히 설명을 들은 머릿속에 기대감이 부푼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김솔음은 심호흡을 한 후, 라이터를 꺼내서 그 양초의 심지에 불을 붙이려 했다.
훅.
불꽃이 심지를 가로지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왜… 불이 안 붙지?
심지어 김솔음은 허공에 동전을 튕겨 제3의 손을 불러내는 미친 능력을 선보이며 그걸로 불꽃을 붙이려고도 했지만, 역시 되지 않았다.
“…아.”
김솔음이 퍼뜩 생각난 듯 양초 키트의 설명서를 꺼내 들더니 빠르게 다시 읽어내렸다.
“문제 있나요?”
“…….”
그리고 어딘가 건조한 얼굴로 설명서를 내렸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알았다.
엉망진창 검붉은 글씨로 적힌 안내문의 끝, ‘취급 및 사용상의 주의사항’에 적힌 문구 중 하나.
‘권장 이용자’를.
※해당 완구는 현대 지구인의 피로를 풀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외계인, 타계인, 비지성체, 신, 그 외 모든 인간이 아닌 지성체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난 해당 사항이 없을지도.’
김솔음은 사실 이곳의 사람이 아니니까.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우선 순위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돌발행동을 할 확률이 낮고, 사회성과 도덕성을 갖춘 사람.
“산양 씨.”
“…!”
“부탁드립니다.”
고영은은 결국 침을 삼키며 양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넘겨받아서 떨리는 손으로 양초의 심지 위에 댔다.
훅.
불꽃이 심지를 가로지르고….
타올랐다.
“…!”
그리고 양초의 몸통에서 불빛이 비쳐 나오듯이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뽑았던 카드의 키워드들.
[명예] [방해] [거짓]
-아까 양초를 만들 때 뽑았던 카드를 기억하십니까? 앞으로 만들어질 양초가 어떤 능력을 가질지 알려주는 겁니다.
김솔음에게 들었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동시에 양초에서도 다른 글귀들이 떠오른다.
기도자는 이 촛불을 들어 명예로운 대상을 향해, 방해하는 권능을 힘입어, 거짓된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양초를 든 기도자에게 가호가 주어집니다.
고귀함의 사칭자.
고영은은 양초를 치켜들었다.
양초에서 둥그런 불덩어리가 마치 호롱처럼 솟아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작은 스포트라이트처럼 은은하게 자신의 주변이 밝아졌다.
‘와…….’
“예상했던 효력 그대로군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것을 보던 김솔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산양 씨 주변 두 명까지는 이 양초의 영역에 영향을 받으니, 저와 염소가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예.”
백사헌 말고 다른 사람을 섭외하면 안 됐을까 싶지만, 이 아이템을 만든 건 김솔음이었기에 고영은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솔음이 다시 속삭였다.
“다만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저희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저희는 촛불을 든 자 뒤에 가려져 있어야 효과를 받습니다.”
“……예.”
“그리고 양초를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당신의 정신이 양초에게 침식될 수 있습니다.”
고영은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어깨를 조였으나, 고영은은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게 자신의 특기였으니까.
“아까 출구는 지상층에 있다고 하셨으니까… 그럼 중간층인 4층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죠? 그편이 경우의 수가 가장 줄어드니까요.”
“예. 좋습니다.”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일을 떠올리면 그 자체가 사람의 척수를 싸늘하게 만들었으나, 고영은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내가 제일 간이 작은 것 같은데 양초를 들다니.
‘최선을 다해야 해.’
바로 뒤에 이 중 제일 쫄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였다!
터벅터벅.
황동빛 홀에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4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기묘하리만치 안내 기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지는….
“찾았습니다.”
안내 기계의 앞이었으니까.
“…….”
4층으로 올라온 <백일몽 주식회사>의 신입사원들은 기계 소리를 따라간 끝에, 마침내 4층 복도를 담당하는 안내 기계를 찾아냈다.
기이이이이익.
“지금 도망쳐서 촛불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 널 쫓아올걸.”
“나도 알거든?”
김솔음과 백사헌이 주고받는 서늘한 말이 고영은의 심장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저 바늘 같은 부속 부위를 움직여서 눈을 뽑아갈 것 같았으나….
고영은은 침을 삼키며, 앞으로 전진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촛불에 비친 기계의 상이 흔들린다.
마주 선 그로테스크한 거미 형상의 기계 앞에서, 고영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기이이이익.
안내 기계가 움직였다.
여덟 개의 바늘이 허공으로 치켜들어지더니…….
곧 가지런히 정리되며 부드럽게 기계의 몸통 주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기계는 머리를 들어, 정중히 고영은의 발 근처로 가스등을 비추었다.
“…!”
됐다.
고영은은 침을 삼켰다.
지금 그녀에게는 양초의 가호가 성공적으로 적용 중인 것이다.
명예로운 자를 사칭할 수 있는 가호.
-처음 뽑은 카드는 효과의 목적, 두 번째로 뽑은 건 효과의 방식, 그리고 마지막은 효과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잘 조합하자면, 명예로운 무언가를 대상으로 타인을 방해하는 거짓을 만든다….
-아마 사칭이나 눈속임에 관련된 능력일 겁니다.
그리고 지금 고영은은 가장 적합한 ‘명예로운 자’를 사칭 중이었다.
안내 기계가 가장 우호적인 대상.
바로….
‘요금을 제대로 다 지불한 손님!’
고영은은 자신이 짜낼 수 있는 가장 차분한 어투로 안내 기계에게 물었다.
“제 질문에 부정하면 가만히 있어 주시고, 긍정하시면 고개를 끄덕여 주세요.”
정적.
“……관람을 끝마치고 귀가하는 손님들은, 이 지상 4층에서 위층으로 가셨나요?”
…….
“관람을 끝마치고 귀가하는 손님들은, 이 지상 4층에서 아래층으로 가셨나요?”
끄덕.
“……!”
통한다!
양초를 든 자는 희열에 휩싸였으나 간신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이만 관람하러 가보겠습니다.”
안내 기계는 얌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촛불 안 세 사람이 떠날 때까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고영은은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통했다…!”
“천천히 하십시오. 촛불은 2시간 정도 타니, 중간에 꺼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그리고 반복된다.
“관람을 끝마치고 귀가하는 손님들은, 이 지상 3층에서 아래층으로 가셨나요?”
끄덕.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통했다. 세 명의 신입은 이제 짜릿한 탈출의 희망에 부풀어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라면.
‘1층 아니면 2층…!’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예측이 자리 잡았다.
고영은은 들뜨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고 안간힘을 썼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혹시라도 양초를 엎으면 끝장이었다.
눈과 혀, 혹은 팔다리를 뽑힌 채로 탈출하고 싶지 않다면 침착해야 했다.
침착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
덥석.
뭔가가 그녀의 발을 잡았다.
고영은은 얼어붙어서 시선을 내렸다.
거기에는 눈 대신 망원렌즈가 쑤셔 넣어진 인간이 있었다.
엉망진창인 행색으로, 바닥으로 기어와 발버둥을 치며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챘다.
“산양! 산양 씨!!”
“…!!”
“나 좀 데려가 줘!”
R조 조장.
고영은의 상사였다.
* * *
나는 발걸음을 멈춘 앞사람을 보았다.
이유는 알았다.
앞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양 씨! 장비, 날 데리고 나가주면 장비를 만들어줄게! 과장급이 가진 장비를 바로 쓰는 거지! 어?!”
‘고영은 씨는 R조였지.’
아마도 R조의 과장인 것 같다.
하지만 현장탐사팀 한 조의 조장이라고 보기에는 모습이 너무 볼품없었다.
팔다리는 요금으로 징수된 것도 아닌데 몽땅 부러지기라도 한 건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조장급이면 자기 장비와 아이템으로 끝까지 버티며 이리저리 잘 숨어다닐 법도 한데 혼자 저 꼴이 된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죽음의 위기감이 턱밑까지 차오른 상태.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아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아이템을 든 자신의 조 신입이 나타나자 튀어나온 것이다.
마지막 생명줄임을 직감하고서.
“산양 씨! 그거 아이템이지! 허어어어, 조, 좋아 보이네. 어, 나, 나도 좀 같이 가자, 어?”
“와, 무섭지도 않나? 막 떠드네.”
백사헌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영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괴물 기계가 소리 듣고 오는지 한번 확인해 보죠? 어차피 저 상태론 도망도 못 칠 것 같은데.”
“예? 그게 무슨 개소리….”
“…….”
고영은에게 애걸하던 R조 조장이 백사헌을 올려다보았다.
망원렌즈가 번뜩였다.
“너 어느 조 신입이야?”
“…….”
“아. 그래. 안 중요하지….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는 거지. 근데 말이야……. 우리 조 신입이 쓰는 아이템, 양초 형태네? 소모품이구나.”
“…!”
“불꽃… 불꽃을 매개로 하는, 응, 방어용인가?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내가 흔들어서! 불꽃이 꺼지면 어때?”
“악,”
순간 휘청거릴 뻔한 고영은이 날쌔게 양초를 다잡았다.
‘이런 미친.’
내가 당장 허공에 전용 장비를 불러내서 손 세 개로 R조 조장을 뜯어내려던 순간, 조장은 고영은의 발에 다시 매달렸다.
“내가 이 꼴이어도 신입들보다 아는 게 적겠어?? 데려가!”
“…조장님은 저 두고 가셨잖아요.”
고영은이 음산하도록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기계 나오니까, 저 밀치고 갔잖아요.”
“…!”
직원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진입했으니, 고영은 씨도 그간 같은 조 사람을 못 만나고 혼자 다녔던 건 줄 알았는데….
그래서 혼자 있었던 건가.
“아냐! 난 할 만큼 했어! 신입 살리겠다고 죽을 순 없으니까 두고 간 거지! 넌 지금 나 데려갈 수 있잖아! 여건이 되면 인간이 인간답게 굴어야지!”
조장이 발악하듯 외치며 매달렸다.
렌즈로 변한 눈구멍에선 눈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안 데려가면 살인이야, 살인! 두고 가려고만 해봐, 너. 내가 그 아이템 망가트릴 줄 알아. 어떻게든!! 어…!”
퍽.
“…!”
스르륵.
R조 조장의 몸이 축 늘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백사헌이 조장의 관자놀이를 후려갈긴 자기 왼발을 도로 원위치했다.
“…….”
그리고 나도.
R조 조장의 뒷머리를 후려친 제3의 손을 장갑에 도로 불러들였다.
‘수, 숨은 쉬고 있는 거 맞지?’
아니 한 사람만 쳤어야 하는데 하필 이게 겹쳤네.
어쨌든 사태는 소요된 것 같았다.
나는 쓰러진 남루한 40대 직장인을 보았다.
‘…현장탐사 짬은 짬인가.’
딱 신입이 마음에 찔릴 법한 애원과 두려워할 만한 협박을 밸런스 있게 섞어서 궤변을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고영은은 양초를 안정적으로 붙들고 있었으나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직속 상사의 비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사헌이 가볍게 말했다.
“됐네. 이제 머리만 뜯어가죠?”
…뭐?
“안 됩니다.”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저쪽은 편해지고 우리는 플랜B 필요할 때 쓸 요금도 얻고. 나쁜 점이 하나도 없는데도?”
“목을 자를 때 산양 씨의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십시오. 지인을 직접 죽이고 평정심을 유지하긴 힘들 겁니다.”
백사헌과 내가 양쪽에서 말할수록 고영은 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 이건 무슨, 아니…….”
“뭐라는 거야. 사람이 살려면 뭐든 못 해, 충분히 할 수 있다니까?”
“못 합니다. 듣지 마십시오, 산양 씨.”
“산양….”
“잠깐!”
“…….”
“…….”
“그냥… 이렇게 할게요.”
고영은은 양초를 꽉 잡은 후, R조 조장을 발로 차서 어둑한 소파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면 당장 기계한테 들키진 않을 테니까…. 이제 가죠. 양초 닳기 전에.”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백사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일 복잡하게 하네. 어차피 죽을 거.”
“…자기는 착한 사람 덕에 목숨 건졌으면 그런 이야기 하지 말죠?”
“…….”
고영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두 분 다 고마워요. 눈 뜨고 휘말릴 뻔했네.”
“아닙니다.”
의외로 백사헌은 입을 다물었다. 비꼬거나 뭐라도 뜯어내려들 줄 알았는데 의외다.
“갑시다.”
“네.”
우리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한바탕 방해와 사건도 끝났다.
고지가 눈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