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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84화


혈욕조를 한 번 더 사용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좀 더 회춘한다면 노루 씨와 함께 다니는 게 훨씬 수월할 겁니다!

브라운의 이 주장을 수용해 준 것이다.

봉제 인형이 좀 더 커질 수는 있겠지만… 음, 한 번 더 정도는 괜찮을 듯하다. 아직 평범한 키링 인형 사이즈니까.

다만 편하게 내 피를 입욕제로 쓰려는 발상에는 브라운이 정색했다.

-맙소사!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세상에, 주변에 널린 게 지성체의 체액인데 왜 내 친구는 자꾸 자기 피를 보려고 한답니까?

아무래도 지난번에 일부러 겁을 준 것이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했다.

‘뭐, 이번엔 그 정도로 많이 쏟을 생각도 아니었는데….’

좀 심했나 싶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쨌든 그렇다니까 다른 방식으로 혈액을 구해보자고 합의했다.

-좋습니다, 좋아…. 적당한 입욕제를 물색해 봅시다, 친구!

오냐.

사내 정치 한복판에서 신경을 분산할 만한 다른 일이 생긴 게 좀 낫긴 했다….

‘벌써부터 도움이 되는구먼.’

나는 한숨을 쉬며 출근했다.

참고로 어제 백사헌은 아예 사택에 들어오질 않았다.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나 지켜보겠다.

어쨌든 청 이사가 언제까지 기다려줄지도 모르니, 나도 빨리 의사결정을 해야….

“솔음 씨…!”

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리자, 들소 가면을 들고 있는 동기가 들어왔다.

‘장허운 씨!’

어젯밤에 세광공업고등학교에서 만나서 짧고 파란만장하게 동행했던 직원이다.

“무사하셨군요!”

“예. 허운 씨도 잘 탈출하셨나 봅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잘 클리어했습니다….”

어제는 다른 사람들 안부고 나발이고 너무 충격의 연속이라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어쨌든 이렇게 만나니 좋았다.

게다가 장허운은 요원에 대해서 의외로 좋은 인상이 남았는지, 관련 화제가 나오자 꽤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 생각보다 좋은 분이셨습니다. 절 미끼로 쓰시지도 않았고… 끝날 때 관리국에 대해서 설명도 들었고요.”

너무 기준점이 낮은 거 아닙니까….

어쨌든 그 양반 백일몽 주식회사에 유감이 많아 보였는데, 인성 괜찮은 직원과 동행하며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가 싶었다.

어쨌든 큰 문제는 없었으니까 장허운의 안색이 괜찮겠지.

‘다음에 또 괴담 음식 팔 수 있을지도.’

부수입에 약간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그 요원분이 끝까지 솔음 씨를 걱정하던 것 같은데. 그, 그래도 명찰을 드린 건 따로 말씀 안 드렸습니다!”

아, 명찰!

“주신 명찰 잘 사용했습니다. 감사해요.”

사실 교복을 빌린 후에도 명찰 구할 방법이 있긴 했지만, 덕분에 빠르게 잘 쓴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허운 씨에게도 귀중한 명찰이었을 텐데, 절 걱정하셔서 양보하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별거 아니었죠. 저한테 해주신 거에 비하면요.”

“…?”

제가요?

그 순간, 장허운이 주먹을 꽉 쥐며 기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음 씨. 저, 일반팀으로 발령 났습니다…!”

“…!”

“정말로 3개월 버티니까 바꿔주셨더라고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버틴 것 같습니다!”

오오!

정기 발령 시즌에 하도 사건 사고가 많아서 남들 조를 체크하진 못했는데 아주 잘된 일이었다.

나는 반갑게 물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무슨 조십니까?”

“F조에 배정받았습니다…!”

“…….”

헛.

“백사헌… 씨와 같은 조시군요.”

“예! 친절하시더라고요.”

“…….”

아무래도 이 사람, 마무리팀 겪으면서 좋은 사람 기준점이 한없이 낮아진 게 맞는 것 같다…….

‘어쩐지 지난 괴담에서 같이 다니더라니.’

마주친 게 아니라 아예 같은 조였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재밌는 우연입니다. 저는 그분과 사택을 같이 쓰거든요. …다음에 동기끼리 모여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죠.”

“아, 감사…… 예!”

그리고 이 시점, 엘리베이터 앞에서 뜬금없는 조우가 한 번 더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이자헌 과장님!”

“예. 안녕하십니까.”

출근 중인 이자헌 과장과 마주친 것이다.

이자헌 과장은 자신을 향해 꾸벅 인사하는 장허운에게 그렇게 대답하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게 말을 걸었다는 뜻이다.

“솔음 씨, 호출이 있습니다.”

또??

“사무실에… 들를 필요 없이 그냥 바로 이동하면 되는 건가요?”

“예.”

아주 호출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결국 13층 버튼 대신 이자헌이 말하는 대로 25층 버튼을 눌렀다.

‘또 현장탐사팀 층을 벗어났구만….’

제발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솔음 씨!”

“네. 허운 씨도요.”

장허운을 배웅한 후, 이자헌 과장과 함께 25층에 내렸다.

땡.

“따라오십시오.”

“넵.”

나는 과장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생각보다 먼 것 같은데.’

몇 번이나 복도에서 빙글빙글 모퉁이를 돌자 회의실 대신 웬 문이 나타났다.

거기엔 뜬금없이 나무로 만들어진, 따듯한 색감의 명패가 달려 있고….

여우 상담실

“…….”

잠깐.

“조장님, 여기…….”

쿵.

그 순간.

나는 이자헌 과장에 의해 벽에 고정되었다.

…?!

“김솔음 씨. 지금부터의 질의에 고민 없이 즉각적으로 대답하십시오.”

-이런!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까요, 친구?

‘아니, 잠깐만…!’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나는 도마뱀을 보았다.

빨간 세로 동공이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제 나와 나눈 대화를 기억합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예.”

“어떤 화제로 대화가 끝났습니까?”

“D조가 정예팀이 될 수도 있,”

“그건 마지막 화제가 아닙니다. 다시 대답하십시오.”

뭐라고?

“마지막 화제 맞습니다!”

“아닙니다. 이후 다른 화제의 대화를 했습니다.”

아니!

하긴 했겠지. 하지만 그냥 잡담이지 않….

“고민하지 마십시오.”

“…!”

“대답하십시오.”

젠장!

“잘 기억이 안 납니다!”

“…….”

“그냥 잡담… 잡담이었지 않습니까.”

무거운 침묵과 압박감이 이어진다.

그리고….

스르륵.

“그렇군요.”

이자헌 과장이 나를 벽에서 놓아주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행….

“김솔음 씨.”

“예.”

“당신은 오염되었습니다.”

“…….”

어?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탐사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하지만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퍽.

이자헌은 상담실의 문을 단숨에 열더니, 내 멱살을 잡아서 안으로 던져넣었다.

“…!”

“상담을 끝마치기 전까진 나오실 수 없습니다. 문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쾅.

그리고 문이 닫혔다.

“…….”

아니.

아니!!

감히 내 친구에게 이토록 무례할 수가!!

자, 잠깐.

너까지 그러지 말고 진정 좀 하자….

‘괜찮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거든.’

나는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썩 내키진 않지만….

‘그냥 상담 한 번 받지 뭐. 정신 건강에도 좋고.’

부작용은… 최대한 생각하지 말자, 확률도 극히 낮지 않은가.

-흐음…. 노루 씨의 의견이 그렇다면야!

후.

결정됐군.

나는 썩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건 탈의실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꽃무늬 표지판이 락커 위에 붙어 있다.

내담자님 정말 잘 오셨습니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들어오세요^^

그리고 사이즈 별로 초록색 풀 무늬가 있는 병원 가운이 주르륵 놓여 있었다.

건강검진룩…?

-의복이라는 것이 편안함만을 추구했다면 우리는 맨몸뚱아리로 다녀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건 그것만도 못한 천쪼가리입니다. 몸을 가리는 것 외에는 어떤 효용도 없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입어야지.’

밖에 괴담을 물리 파괴하는 도마뱀이 지키고 있었다. 상담을 한번 받고는 나가야 했다.

나는 환복을 끝마쳤다.

‘저 커튼이 상담 공간으로 향하는 방향 같은데.’

그리고 탈의실 출구로 보이는 커튼을 걷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문구가 붙어 있다.

여기부터는 내담자님만 허락되는 공간입니다^^

친구, 가족, 보호자는 여기까지!

‘아.’

음… 아무리 복지니 뭐니 해도 괴담이니까 굳이 규칙을 어기지 않는 편이 낫겠지.

“브라운, 잠깐 기다릴 수 있지?”

-오, 염려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이 경우엔 당연히 노루 씨의 프라이버시를 지켜드려야겠지요!

오케이.

나는 락커룸의 탁자 위 화병 주변에 조심스럽게 브라운을 올려두고 커튼을 걷어냈다.

짤랑…

그러자 햇살이 내 머리 위로 가득 쏟아졌다.

“…!”

눈앞에 작고 아늑한 공간이 드러났다.

마음마저 진정되는, 따스한 한낮의 방.

———————=

어둠탐사기록 / 괴담

[여우 상담실]

: <어둠탐사기록>에 등장하는 괴담, 백일몽 주식회사의 식별코드는 Qterw-E-925.

따스한 햇살이 드는 창가, 푹신한 파스텔톤 소파, 그리고 맑은 소리의 작은 은 종 모양 도어벨으로 구성된 상담 공간.

백일몽 주식회사의 E레벨 직원 복지 중 하나로, 정신 안정 및 오염 회복에 다소 효과가 있다.

여우상담실의 이용 기록 전문은 해당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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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분위기 좋은 방은… 맞긴 하다.

-유용한 상담 세션이 되길 바랍니다, 친구!

제발 그러길 바란다.

나는 커튼을 다시 잘 친 후,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에도 안내 문구가 보였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바깥 풍경을 구경하세요!

그 말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꼈다.

뭐, 분위기야 좋다만….

‘어차피 무슨 일 일어날지 다 알고 있어.’

정말 신기해요. 내가 잃어버렸던 의욕을 되찾게 해주고, 잊고 있던 것들을 기억나게 해줘요…….

-이정은(주임) 상담 이후 인터뷰

창밖으로 누가 등장해서 상담해 주는 거다.

뭐가 나올지는 사람마다 커스텀된다.

어쨌든 내 트라우마와 연관된 인물이나 물건을 보여주고, 그게 잘 해결되는 상황을 연출해서 관람하게 해줄 확률이 높겠지.

깊게 몰입한 사람이 결국 일종의 심정적 치유 효과를 얻고, 엉엉 울거나 편안한 얼굴로 자리를 뜨는 게 이 ‘여우 상담실’ 괴담 이용 기록의 클리셰였다.

‘이미 다 아는데 과연 효과가 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도 회의적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햇살이 가득한 아름다운 야외정원을 한껏 보여주는 거대한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정원 옆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

그건….

나였다.

지치고 어두운 인상의 ‘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야외정원에 서 있다가, 방 안의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게 뭐야.’

무슨 도플갱어도 아니고.

찝찝함과 거부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야외정원에 서 있던 ‘김솔음’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의자 하나를 챙겨서는 창가 바로 앞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생글거리며 나를 마주 보고 웃는 것이다.

“…….”

‘그냥 일어설까.’

한 시간이 흘러야만 문이 열린다지만, 문 앞에서 죽치고 있는 것도 가능하겠지….

점점 자리가 불편해지던 찰나였다.

“김솔음 선생님.”

“…!!”

“오늘 상담하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상담사예요.”

창밖의 내 모습을 한 무언가가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몸이 많이 피로하신 듯한데, 혹시 최근 잠드실 때 어떠신가요? 얼마나 주무실까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럭저럭 잡니다.”

“그렇군요…. 혹시 구체적인 수치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5시간 이상?”

“……그럴 때도 있죠.”

“그렇군요. 혹시… 때로 적은 시간만 주무시는 게, 회사 일이 힘든 것과 연관되어 있을까요?”

와!

‘미치겠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모습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니 거부감만 듭니다만.”

“왜 김솔음 선생님께선 거부감을 느끼실까요?”

“원래 사람이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보면 존재의 위협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김솔음 선생님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지성체랍니다.”

뭐?

“한번 찾아보시겠어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나는 무심코 상대를 훑었다.

눈, 코, 입, 몸, 의상.

“……똑같습니다만.”

“그럼 좀 더 잘 비교하게 거울을 한번 볼까요?”

드르르륵.

순간 내가 앉아 있던 소파 옆 책장이 움직이더니, 그 안에서 전신 거울이 나온다.

나는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피로한 직장인.

“…….”

“한번 비교해 보시겠어요?”

비교하든 말든 완전히 똑같…….

“…….”

“어떠세요?”

“……제 쪽이,”

나는 거울 속을 보았다.

“더… 안색이 안 좋은 것 같기는…… 합니다.”

기분 탓… 아닌가?

“그렇군요.”

그러나 창밖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런 차이가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조금 더 관찰해 봅시다. 뭔가 더 보일지도 몰라요.”

나는 다시 창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번갈아 보았다.

눈, 코, 입, 어깨, 팔…….

팔목.

“문신.”

나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쪽한테 문신이 하나 없습니다.”

테마파크에서 남았던 문신은 있었다.

그런데….

: 恩主 :

이게 없었다.

내 인벤토리 역할을 해줬던 그 문신이.

“어떤 문신이죠? 아, 그거로군요!”

“예.”

“이런 문신을 하신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 효과가 있던 걸까요?”

“이 안에 물건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지금도 이런저런 물건이 있나요?”

“예.”

“한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 혹시 보여주시기 꺼려지시면, 그냥 제가 안 보이는 곳에 내려놓으셔도 괜찮고요.”

“……네.”

나는 문신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아이템, 장비, 동전…….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다 꺼냈습니다만.”

왜 이런 짓을 시킨 건지 모르겠다.

이게 창밖의 나와 뭐가 다른 거지?

“김솔음 선생님.”

“예?”

“제 생각에는 아직 문신 속에 뭐가 더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조용!

“저한테 한번 손을 내밀어 보실까요?”

알고 싶지 않

“아니에요. 선생님은 알고 싶고, 하실 수 있어요.”

“…….”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 바로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창밖의 내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문신 안으로 손을 휙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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