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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499화


사각사각.

소연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년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 며칠 모자라긴 했지만 일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고 사고인 민묘희를 대할 때의 어색함도 한결 누그러진 편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화정이의 상태였다. 그녀는 요 일년 동안 세 번 가량을 깨어났는데 공교롭게도 전부 한밤중이었다. 깨어났으면 응당 소연의 지시를 기다렸어야 정상이었지만, 허기를 채우는 것에 급급했는지 인기척도 없이 부엌에 드나들며 그 안의 모든 식량들을 탕진시키다시피 해버렸다. 그런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되돌아와 다시 잠이 들고 말이다.

처음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자 화정이가 깨어날 때를 지켜보겠다고 밤낮을 거꾸로 지새기도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잠깐 한눈이라도 파는 날이면 용케도 깨어나 부엌의 음식들을 훔쳐먹으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배겨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포기한 그녀는 사소한 일만 터져도 무의식적으로 민묘희의 눈치를 보게되었고 그럴 때면 남모르게 한숨을 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에휴!”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어젯밤에 또 화정이가 깨어났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사고에게 상황 설명을 해드리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내가 자고있었다고는 해도 어떻게된 애가 귀신처럼 일어났다가 귀신처럼 돌아오는 거지? 이건 너무도 기척이 없어 내가 무공을 익힌 건지, 아닌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들 정도니 원…….”

푸념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라서 그저 자신의 실력은 멀쩡하다고 자위하는 수준인 셈이었다. 화정이를 째려보았자 만족감에 물든 얼굴로 잠들어있는 모습만을 접하게될 뿐이었다.

“관두자. 진화하는 단계이려니…, 생각하고 마는 거야.”

“천독서고(天毒書庫)에는 아무리 뒤져봐도 강시 진화론에 관해서는 없단 말야? 후우, 용독경이 무사했다면 참고라도 해봤을 텐데.”

용독경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으니 지금에 와서 그것이 멀쩡하기를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도둑 년(?) 심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녀는 다소 창백한 안색의 화정이의 얼굴을 쓰다듬은 뒤 방안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어두워. 민낭께 건의해서 동굴 바깥에 통나무집이라도 한 채 지어보자고 해볼까?”

물론 그냥 해본 소리였다.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혼자 중얼거린 이유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이든 못하랴. 소연은 약간이나마 기운을 차리는가싶더니 다시 침울해졌다.

“아마도 화정이가 먹어치운 식량 때문에 무지하게 혼날 것이 틀림없어. 그러면서 또 화정이의 상태를 맡아보고 싶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벌써 세 번 연속 거절을 해서 이번에 또 거절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죄송스러운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화정이를 건드렸다가 예전처럼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뒤의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입을 꼭 다물었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 죽어나자빠지는 기억은 아무리 좋게 떠올려도 기분 나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니까. 부르르 몸을 떨며 사고의 방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부엌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화정이는 자고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사고였기 때문이다.

“저기, 뭘 하고있으세요?”

꺾어지는 부분에서 신중하게 손을 놀리던 민묘희는 잠깐 소연을 보았다가 다시 원 위치시키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진법을 만들고있는 것이다.”

“예?”

황당하여 목소리를 높였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연이 다시 물어봐야만 했다.

“화정이가요.”

민묘희가 짤라 말했다.

“화정이 때문에 진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저 피차 피곤함을 감수하자는 뜻에서 세우는 것이다.”

소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심 생각했다.

‘그게 그 말이잖아요.’

아니라고는 해도 결국엔 화정이 때문에 작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여태껏 별다른 말은 안 했어도 속으론 어지간히도 비위에 거슬렸었나보다. 사실 약간(?) 결벽증 증세가 있는 그녀로서는 모든 일을 그녀 자신이 처리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성격이었으니까.

“예에…, 그러셨군요.”

한참동안이나 계속되는 사고의 수작업을 가만히 보고있자니 좀이 쑤셨다. 그것을 느꼈는지 민묘희가 손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이것이 무슨 진인지 맞춰보거라.”

그 동안 모진 고생을 하며 민묘희에게 진법에 관해 공부를 해왔던 소연은 흥미를 느꼈다기보다는 ‘이럴 줄 알았으면 잠깐 나갔다가 완성되었을 때 다시 올걸.’ 이라는 얼굴로 조심스레 다가와 앉았다. 가뜩이나 공부가 모자란 데 완성되기도 전의 진법을 알아 맞추기란 여간해서는 성과가 없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틀리기라도 하면 날벼락이 떨어질 터. 그녀는 죽을 상을 하고, 사고가 거의 완성해나가고 있는 손톱 만한 돌덩이들을 살펴보았다.

‘저게 도대체 무슨 진법이람? 환극상행진(幻極相行陣)인가? 아니면 미혼무환진(迷魂舞環陣)? 히잉,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그렇게 배우고 외워왔던 진법인데 워낙 가지 수가 엄청난지라 이게 그것 같고 그게 저것 같은 그러한 혼란스러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고가 힐끔 자신을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유심히 살펴보는 척이라도 했다.

“알겠느냐?”

소연의 입에서 나올 대답은 뻔했지만 그래도 혼나고싶지는 않은지 대답할 듯 말 듯 하면서 시간을 늦추었다. 그 모습에 ‘그럼 그렇지.’ 하는 눈길로 소연을 바라보던 민묘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진법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소연은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이것은 그때 보여주셨던 환상대미로진(幻想大迷路陣)이군요?”

그제야 민묘희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바로 맞췄다. 유일하게 형부가 알고 계셨던…….”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소연이 궁금해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일부러 화정이를 걸고넘어졌다.

“도대체 화정이를 어떻게 간수를 했기에 또 저장고를 난잡하게 만든 것이냐!”

괜히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냈다가 난처하게된 소연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대충 깨어날 시기가 되어 밤낮을 바꾸어 생활했는데, 잠깐 눈을 부친 사이에 일이 벌어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다음부터는 정말로 열심히 지켜볼게요. 더군다나 민낭께서 손수 진법까지 만드셨으니 이제는 걔도 어쩔 수가 없을 거예요.”

민묘희는 그녀가 원하던 방향대로 사태가 돌아가자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와 차분히 대답했다.

“파훼법은 내방으로 가서 줄 터이니 따라오너라. 모르고 들어갔다가는 다시 나오게 만들어져있으니까.”

“예, 민낭.”

한고비 넘겨 안도한 소연은 재빨리 대답한 후 민묘희를 따라갔다. 거기에서 낡은 책을 받아든 그녀는 용독경만한 두께에 혀를 내두르며 책의 겉표지를 읽어보았다.

“만기진여총역본(萬基陣如總譯本)?”

민묘희는 자리에 앉을 새도 없다는 듯 다시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실제로 만가지는 아니니 그리 놀라지 말거라. 대략 천 사백여 가지란다.”

“처, 천 사백여 가지요?”

민묘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소연에게는 충분히 놀랄만한 이야기였다.

‘요 일년 동안 사고께 배운 진법이 고작 스물 한 가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헷갈리고있는 상태인데, 지금 쥐어주신 것이 무려 천 사백여 가지의 진법서라니…….’

멍해진 소연은 손에 들고있는 만기진여총역본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언제 다 보고 다 익히라는 말인가. 다급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민묘희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무얼 잘못 알고있는 모양이로구나. 거기에서 환상대미로진의 파훼법만 끄집어내어 익혀두라는 말이다. 더 살펴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아아, 그런 것이었어요? 휴우, 그것도 모르고.”

소연의 얼굴을 보아하니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낸 그녀는 잰걸음으로 민묘희를 뒤따르며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휙 하고 신형을 돌린 민묘희는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동천 식으로 말하자면 한 대 칠 태세였다.

“지금 몰라서 묻는 것이냐?”

화정이를 떠올린 소연은 아차 싶어 재빨리 아는 척했다.

“아,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민낭께서 밖에 식료품을 구입하시러 가신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이렇게 급하게 가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제대로 찍긴 찍었는지 민묘희의 싸늘한 안광이 어느 정도 풀렸다. 그녀는 다시 걸어가며 말했다.

“귀찮은 일일수록 더욱 신경을 써서 해결해야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해라.”

“예, 민낭.”

그렇게 대답한 소연이 동굴 입구까지 쫄랑쫄랑 따라가자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민묘희가 차분한 어조로 앞으로의 할 일을 시켰다.

“남은 것들을 모아 음식을 만들어 놓았으니 내가 다녀올 동안 사호실의 녀석들에게 간만에 음식 다운 음식을 넣어주거라. 이 호실의 녀석들은 내가 갔다와서 따로 먹일 테니까.”

소연은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밖으로 나가려던 민묘희는 걸리는 것이 있는지 확실히 해두고자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호실의 한 녀석은 색마(色魔)니라. 잘못 걸리면 큰일이 벌어지니 얼씬도 하지 말거라.”

소연은 울상을 지으며 몸을 움츠렸다.

“예, 예에. 물론이에요. 저, 저는 가라고 하셔도 안 갈 거예요.”

민묘희가 생각해놓은 대비책은 아주 확실한 것이었다. 소연에게는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되도록 빨리 다녀오마. 시간이 남으면 돌아다니며 청소도 해놓거라.”

“예, 해놓을 테니까 빨리만 오세요. 알았죠?”

소연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민묘희는 확실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하마.”

“빨리빨리 다녀오세요!”

이리하여 이 호실의 안전을 확인한 민묘희는 마음놓고 신법을 사용해 사라졌다. 그리고 님을 떠나보내는 여인네처럼 한없이 손을 흔들어대던 소연은 자신의 할 일을 잊지 않았는지 부엌에 가서 음식을 퍼 날랐다. 걸쭉한 국물을 살짝 맛보자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으음, 맛있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맛있었다. 따스하게 혀를 아우르는 국물 맛은 삼키고 난 다음에도 감칠맛을 자아냈다.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음식 솜씨야.”

사람의 음식 솜씨는 싸늘한 겉모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되는 순간이었다.

“내 정신 좀 봐. 할 일이 태산같은데 말야. 얼른 아저씨들께 식사를 가져다주고 청소를 해야겠다.”

모든 것을 거의 혼자 처리하는 민묘희였지만 사호실의 역마대 일행만큼은 어느 정도 소연에게 일임하고있는 형편이었다. 민묘희로서는 별로 기대도하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이 일이 뒷바라지와 비슷한 형식이어서 의외로 잘 해내는 소연이었다. 그래서 민묘희도 내심 그것 하나만큼은 소연을 인정해주는 실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지하로 내려간 소연은 이 호실을 재빨리 지나 사호실로 들어갔다.

“식사 왔어요. 오늘은 평소에 드시던 약재가 아니라. 으음, 뭐랄까. 아? 잡탕이에요.”

민묘희의 앞에서는 무표정이지만 소연이 들어오면 역마대의 얼굴에 반가움이 자리잡았다. 그녀의 순진함이 가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되자 볼 때마다 절로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하하, 잡탕? 잡탕이라는 것이 의외로 맛이 있지. 그것은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야.”

부대주가 웃으며 말하자 소연이 동조했다.

“맞아요. 제가 살짝 맛을 보았는데 굉장히 맛이 있더라고요. 이따가 민낭이 돌아오시면 어떠한 재료가 들어갔는지 물어볼 생각이에요.”

그때 대주가 물었다.

“민낭은 어디에 갔느냐?”

소연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예, 잠깐 식료품을 충당하시러 근처 마을로 내려가셨어요.”

대주는 소연이 너무도 순진한 것 같자 묶여있는 처지에도 한마디 해주었다.

“사람이 묻는다고 그렇게 순순히 대답해주면 어떻게 하느냐. 만일 우리가 딴 마음이라도 품었다면 이런 기회를 호기로 삼을 것이 아니더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연은 급히 내뱉었던 말을 정정했다.

“아? 그게 아니라…, 벌써 돌아오셨어요. 제가 깜빡하고 아까 전의 일을 말씀드렸지 뭐예요? 맞아요. 그거예요.”

대원들과 마주보며 소리 없이 웃어대던 대주는 소연의 말을 믿어주었다.

“알겠다. 놓고 나가거라.”

소연은 괜히 무안해진 얼굴로 음식을 내려다놓고 물러갔다. 확실히 두 번 열었다 닫았으니 식사를 하는데는 무난하리라.

“어휴, 얼굴 달아오르는 것 좀 봐. 쓸데없이 먹히지도 않는 거짓말을 해서…….”

콩 하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은 그녀는 서둘러 동굴 곳곳을 청소했다. 인공적으로 깎이고 다듬어진 곳이라 그런지, 천연 동굴처럼 천장의 종유석에서 똑똑 물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환기가 부족한 탓에 생각 없이 쓸다가는 먼지를 공기로 알고 들이마시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택한 것이 대걸레질이고 말이다.

“퉤퉤. 그럼, 시작해 볼까?”

신법을 사용한 대걸레질은 의외로 손쉬웠다. 먼저 열 십자로 나있는 길들을 두세 번 왔다갔다한 후에 나머지 방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대충 걸레질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동굴 색이 그게 그거인데 세세하게 닦지 않았다고 어디 티라도 나겠는가? 일년동안에 그녀가 터득한 나름대로의 방법. 이래서 요령이라는 것도 피워 볼만한 것이었다.

“자아, 다음은 빨래!”

제일 먼저 사고가 벗어놓은 것들을 한아름 챙겨든 그녀는 자신의 것을 챙겨들었다.

“아차차. 화정이의 옷을 갈아 입혀줘야 하는구나.”

나갔다가 금세 되돌아온 그녀는 잠들어있는 화정이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능숙한 솜씨를 발휘해 속옷까지 전부 벗겨냈다. 자연히 드러난 화정이의 젖가슴은 언제 보아도 풍만했다. 괜히 위축되어버린 소연은 자신의 가슴 섶을 들어 살짝 내려다보았다. 엄청 차이가 났다.

“…….”

한동안의 침묵 후 그녀는 밝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다구! 아마도 몇 년 후면 저 정도는 상대도 안될걸?”

의기양양하게 떠벌리긴 했지만 뒤이어 깊은 한숨과 함께 어깨가 축 쳐졌다. 그녀는 화정이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며 부러운 듯 화정이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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