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00화
“부럽다.”
결국 그녀는 심중을 털어놓았다. 성숙기인 그녀에겐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지만, 대개 어린 소녀들이 다 그렇듯 눈앞의 콩고물에 미련이 남는 것이었다.
사각사각.
“응? 무슨 소리지? 분명 어딘가에서 소리가 난 듯 했는데?”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소연은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온 뒤로 방안에 두 개의 횃불을 사용했지만 한계라는 것이 있어 구석으로 밀려갈수록 어두컴컴해졌다. 그리고 그 구석들을 보고있자니 절로 무서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빨랫감을 한아름 꼭 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구 있어요? 민낭이세요?”
소리는 방안에서 났지만 혹시나 하여 방 바깥을 내다봤어도 민묘희는 없었다.
사각사각.
“히익?”
바로 뒤쪽에서 들린 것만 같았다. 무서워진 그녀는 의리 없게 화정이를 남겨두고 무작정 도망 나왔다. 동굴 바깥이 빨래터로 나와 숨을 고르고있자 마침 신법을 사용해 가뿐하게 다녀온 민묘희가 차분하게 말했다.
“빨래까지 시킨 일은 없으니 나중에 하거라. 그보다 여기 이 식료품들을 가져다 저장고에 넣거라. 아니, 됐다. 그러고 보니 파훼법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겠구나.”
민묘희는 몇 백 근이나 나갈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루들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그새 정신을 차린 소연은 울먹이며 매달렸다.
“저, 저기요. 제 방에 뭔가가 있어요. 사각사각 거리면서 어딘가를 갉아먹는 듯한 소리가 나더라구요. 흑, 무서워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민묘희는 곧이어 귀찮아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쥐가 들어왔나 보구나. 어떻게 들어왔지? 이곳에서는 쥐가 번식할 여유가 없을 텐데 말야. 혹시, 독에 내성이 생긴 돌연변이종인가?”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소연은 쥐라는 이야기에 절로 수긍이 갔다. 동굴 입구와 그 주변에는 독충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특수 제작된 가루약이 뿌려져있었기에, 이곳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독이 없는 생물들뿐인 것이다. 독충과 독물들로 우글거리는 이곳은 산짐승들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번식력이 왕성한 쥐들뿐이었다. 물론 쥐들의 번식력에도 한계가 있어서 근래에 와서는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그놈들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동굴 내부로 숨어들어 왔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쥐가 사라진 줄 알고 쥐약 뿌리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뿌려놔야겠구나. 우선 들어가기나 하자.”
“예, 민낭. 빨래하고 나서 뒤따라갈게요.”
대답하는 소연은 안도해하는 얼굴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쥐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민묘희가 먼저 들어가고 남아서 빨래를 시작한 그녀는 맺힌 게 있었는지 평소에도 안 하던 과격한 언어구사를 사용했다. 물론 동천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만 말이다.
“뭐야, 그런 거였어? 헹, 보이기만 해봐라. 발로 뻥 차서 날려 보내줄 테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아귀에 힘을 준 그녀는 분풀이하듯 빨래를 하고 난 뒤, 근처 나무 사이로 엮어놓은 빨랫줄에 널었다. 그런 다음 쥐를 잡기 위해 반 시진 가량을 방안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헛수고로 끝이 났다.
“에고, 허리야. 하도 숙이고 찾아다녔더니 허리가 다 아프네. 우선 쥐는 나중에 잡고 방 청소나 해야겠다.”
처음의 대걸레질은 바닥 청소였고, 지금의 방 청소는 주변의 가구나 책들에 쌓여있는 먼지를 쓸어내는 작업이었다. 간단하게 자신의 방 청소부터 끝내고 난 그녀는 신경을 쓰지 않게 사고의 방을 청소하러갔다.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있던 민묘희는 소연이 물걸레를 들고 오자 곧 관심을 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청소를 허락하는 무언의 행동인 것이었다. 허락을 맡아 이곳저곳을 닦아대던 소연은 어질러진 책 무더기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사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그것을 꺼내든 그녀는 손안에 꽉 들어차는 원형의 신분증명패(身分證明牌)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사고의 것인 줄 알았다. 헌데, 한쪽에는 ‘역마(逆魔)’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약(藥)’ 이라고 새겨져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사부에게 들어서 알기론 만독문의 신분패엔 약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곳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생각날 듯 말 듯 하며 꽤나 골치를 썩게 만들었다. 신분패를 돌려가며 역마와 약자를 끊임없이 살펴보던 그녀는 마침내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때가 아마도 3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전주님의 거처 밖에서 먼저 들어가 있는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서너 명의 무리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안면이 돌출되어 굉장히 험악하게 생긴 선두의 사내는 소연을 이곳의 시녀라고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새로운 아이인가? 뭐 어쨌든, 가서 역마대의 대원들이 전주님을 뵈러왔다고 전하거라.”
무서움을 잘 탔던 소연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겨우 말을 꺼내들었다.
“저, 전 이곳의 시녀가 아닌데요.”
“그래? 차림새는 시녀 같은데, 그럼 뭐 하는 아이지?”
상대의 눈초리가 너무도 강렬 하자 소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소전주님의 시, 시녀입니다.”
저희들끼리 소곤거리던 그들은 괜히 건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선두의 사내를 다시 내세워 웃는 낯으로 넘어갔다.
“하하, 됐다. 좀 더 앞쪽에 가면 초향이나 매향이가 있겠지.”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한 소연도 어설프게나마 웃어주었다.
“예에. 호, 호호.”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준 그녀는 그들 중 조금 어벙하게 보이는 사내가 무언가를 떨어트리자 재빨리 집어보았다. 그것은 역마패였다.
“저, 저기요! 이걸 떨어트리셨어요.”
허리춤을 살펴보던 역마패의 주인은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 내가 떨어트렸나 보군. 고맙다.”
“뭘 요.”
물건을 되찾은 사내가 나머지 대원들과 합류하자 그들은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쪽은 전주님의 처소와 정 반대쪽인데 그곳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뒤따라간 그녀는 구석에서 뚜들겨 맞고있는 그 사내를 보았다.
퍼벅퍽퍽!
“이 멍청한 자식! 감히 생명보다 귀한 신분증명패를 떨어트려? 죽어! 죽어 이 자식아!”
“으엑? 켁! 사, 살려우!”
과히 상쾌한 기억은 아니지만 분명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약왕전의 유일한 무력 정보탐색대인(또한 유명무실한) 역마대의 신분증명패였던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는지 심히 궁금해진 그녀는 사고에게 다가가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민낭, 여쭈어볼게 있는데요.”
민묘희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소연을 올려다보았다. 자연 그녀의 얼굴이 사납게 보여졌고 움찔한 소연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 나중에 물어볼게요. 호호, 나, 나중에 말예요.”
소연의 손에서 역마패를 보았는지 민묘희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감돌았다.
“그것은 예전에 살펴보다가 관심을 끊자 어디론가 사라진 물건인데 용케도 찾았구나.”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자 소연은 물러서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청소를 하는데 책 속에 끼여있더라고요. 헌데 어떻게 해서 역마패를 가지고 계신 거예요?”
민묘희는 소연이 뭔가 알고있는 듯 물어보자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답게 태연한 척 물었다.
“예전에 밖으로 나갔다가 주워온 물건이란다. 어느 문파의 것인지 알아보려다 실패했는데 보아하니 네가 알고있는 모양이로구나.”
소연은 사고가 모르고있는 것을 자신이 알고있자 왠지 모르게 우쭐해진 감이 없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푼수처럼 알고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건 말이죠, 역마패라고 암흑마교의 사전(四傳) 중에 제가 있던 약왕전의 전주님 직속 휘하 부대인 역마대의 신분증명패예요.”
민묘희는 대뜸 얼굴을 굳혔다.
“암흑마교?”
그 모습에 ‘아차?’ 한 소연은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다. 사고는 암흑마교를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그러한 곳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아, 아닐 수도 있어요. 확실하지 않거든요. 예, 그래요.”
소연이 과장된 손 동작과 몸 동작을 취해가며 어떻게든 좋게 풀어나가 보려고 노력은 해봤지만 이미 뇌리 속에 박혀버린 그녀의 이야기는 여간해선 빠져나갈 태세가 아니었다. 눈매를 가늘게 뜨며 여러 가지 생각에 몰두하던 민묘희는 말없이 벌떡 일어나 급히 지하실로 몸을 옮겼다.
“어, 어디가세요?”
민묘희가 냉랭해진 눈초리로 돌아보자 소연은 얼른 인사했다.
“다녀오세요.”
동천에게 일년은 마냥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다. 물론 헛된 시간이 좀 더 많았지만 앞서 말했듯 의미 없이 지냈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전신의 혈도가 제압되어 내공이 폐쇄된 동천은 실로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서(감지력을 사용하여 음식을 가져오는 민묘희를 기다릴 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상단전이라는 존재를 깨닫게된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게된 동천은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난 특별한 존재였다.’ 로 시작해서 ‘역시 난 천재였던 거야!’ 로 끝을 맺고 그때부터 상단전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한 달 전이었으니, 결과론적으로 동천은 11개월 동안 헛된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1개월을 의미 있게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후우, 후. 역시 운기조식을 하니 정신이 맑아지는군.”
상단전만을 움직여 운기조식을 끝마친 그의 목소리는 마치 뽐내는 듯한 인상을 자아냈다. 만성폐혈법을 흔들어보려고 같이 운기조식에 들어간 도연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한발 먼저 운기조식을 끝마친 중소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쳇, 그래봤자 내공을 회복하는 데는 별 소용도 없는 짓이면서.”
짐짓 중소구가 말 걸어주길 기다리고있었던 동천은 부드럽게 받아쳤다.
“후후, 그래서 중 대인은 안 되는 거라고요. 이 몸께서 괜히 상단전의 힘을 모으고있는 줄 아쇼?”
내심 그것이 궁금했었는지 중소구가 관심을 보였다.
“오호? 네 하찮은 머리로도 생각해놓은 게 있긴 있나보지?”
동천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렸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당연히 있지. 댁의 대가리는 어떻게 이 몸을 평가하는지 몰라도 잘 들어봐. 나중에 이걸 최대한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터트려서 만성폐혈법을 뚫어버릴 작정이야. 확률은 아직 반반이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기회를 봐서 탈출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야? 후후, 그러니 지금 잘 보이지 않으면 그때 가서 쪼까 후회하게될걸? 뭐, 그 몰골로 바깥에 나가봤자 아무도 예전의 협객 중소구라고 믿어주지도 않을 테지만 말야.”
그러고 보니 횃불에 비춰지는 중소구의 모습은 일년 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얼굴이 다소 수척해졌고, 그사이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 이유는 민묘희가 중소구에게만 독한 약물을 섭취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중소구는 안 그래도 고민거리인 문제를 애새끼가 들춰내자 분노에 치민 얼굴을 했다.
“뭐, 뭐야? 저런 고얀 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오냐, 내 여기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을 것이다!”
동천은 짐짓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헹, 과연 그럴까?”
“절대로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동천은 상황을 길게 끌고 가고싶지 않았는지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아니면 됐지 뭘 그렇게 날뛰긴 날뛰는 겁니까? 혹시, 그때 가서는 마음이 변할까봐 찔리슈?”
“끄응!”
아니라고는 못하겠는지 중소구는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동천은 나중에 저 인간만 떼어놓고 도망치면 만사 끝이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흥이 일었다. 물론 도연이 반대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 기회에 한 대 쳐서 기절시킨 후, 들쳐 업고 도망치면 될 거라는 계획이 동천의 머릿속에서 착착 진행되고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 흥얼거리듯 말했다.
“아아, 간만에 화정이 꿈을 꿨는데 다음은 언제일까?”
“또 꾸셨습니까.”
동천에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만성폐혈법을 어찌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가 실패한 인간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동천은 나직이 혀를 차며 도연에게 말했다.
“안 봐도 실패할 것을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용을 쓰냐? 그냥 이 몸께서 금제에서 벗어나시면 띵가띵가 놀다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처먹으라니까?”
도연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말씀 안 하셔도 그럴 참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금 네가 하는 짓은 뭔 짓이냐?”
“그저 제 몸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재미가 있는지라 끊임없이 반복하고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것은 몰랐는지 동천이 흥미롭게 물어봤다.
“그러니까 그 짓거리를 계속 하다보면 몸 안의 곳곳을 느낄 수 있는 심안(心眼) 같은 능력이 생겨난다는 말이야?”
심안까지는 아니었지만 적당하게 둘러댈 것이 없자 일단은 수긍부터 했다.
“비교적 그 의미는 정확하십니다. 눈을 감고 막혀있는 혈도를 풀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다보면 예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않던 통로가 느껴지고 하찮게 여겼던 혈도가 좀 더 빠른 길로 인도된다는 것을 깨닫게되더군요. 중 대인께서는 어떤지 몰라도 저는 그러한 이점이 있어 이렇게 쉬지 않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왠지 좋은 수행 방법을 택한 것 같자 동천의 내부에서 질투심과 비슷한 감정이 일어났다.
‘으음, 내가 혹시 하늘님께서 내려주신 기회를 차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아냐. 내게 내려주신 하늘님의 기회는 상단전의 운용일 뿐이야. 하지만 같이 병행해서 해본다면 더욱더 좋지 않을까? 아냐. 괜히 그러다가 상단전을 도발이라도 하게 하면 미숙하지 않은 힘이 작용되어 이도 저도 아닌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이 커. 그래, 평소대로 하자.’
“에헴! 그래? 그럼 말리지 않을 테니까 잘 해봐.”
도연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