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04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그녀에게 그것이 미치는 파장은 하나의 충격이었고 하나의 전율이었다.
‘설마, 설마….’
떨리는 몸을 주체 못 한 그녀는 그만 무릎 위의 장검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깜짝 놀란 소연이 사고를 바라봤지만, 정작 민묘희는 그때까지도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그런 방법이…….’
떨리던 그녀의 입술은 시간이 흘러 점차 생각이 정리될수록 묘한 곡선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만족의 웃음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통쾌하게 웃어주었다.
“호호호호! 그래, 그런 거였어!”
소연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재빨리 물어보았다.
“뭘 말인가요? 확실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셨나요?”
뚝, 웃음을 그친 민묘희는 조금 복잡한 눈길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했다.
“그렇다. 만일 성공하기만 한다면 화정이를 인면지주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지.”
“아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의 말처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의식적인지 몰라도 민묘희는 소연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가 행하려는 것은 소연에게 절망을 안겨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공한다면 말이다.
“이제 시간이 된 듯하구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연이 옆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제가 따라가도 위험하지는 않겠죠?”
민묘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지켜보기만 하겠다면 허락하마.”
소연은 기뻐 소리쳤다.
“물론이에요! 꼼짝하지도 않을게요!”
“따라오너라.”
“예!”
소연의 방 앞에 도착하자 희뿌연 안개가 그녀들의 시야를 현혹시켰다. 침대의 두어 자 위에 고치가 되어 매달려있는 화정이는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순백의 거미줄은 아름다웠지만 그 내면의 날카로움까지는 숨길 수 없었는지 소연의 어깨를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어, 어째 거미줄이 더 많이 쳐져있는 것 같지 않아요?”
민묘희는 소연의 질문을 일축했다.
“착각일 뿐이다.”
소연을 뒤로 밀치고 천천히 자세를 잡은 그녀는 오직 하나의 선을 바라보고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신의 기를 검 끝에 집중하자 현철검의 테두리에 얇은 막 같은 것이 생성되었다.
“하앗!”
우렁찬 기합 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공간을 베었다.
쓰억.
듣기 거북한 소음이 미세하게 퍼져나갔고, 정확히 반 토막이 되어버린 현철검은 허무하게 멈춰서 있었다. 뒤이어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토막 난 조각이 바닥을 뒹굴었다. 민묘희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려고 했거늘 오히려 베였단 말인가?’
방금 전까지 기대에 찬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던 소연은 그 얼굴과 작별을 하고 나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이제, 그럼 이제…….”
민묘희는 동요하는 표정 없이 말했다.
“상관없다. 이번의 일검은 거미줄의 강도를 시험해본 것뿐이니까. 채점을 매기자면 만점 그 이상이고.”
소연은 다시 기대에 찬 얼굴과 감격의 재회를 했다.
“아, 다른 비책이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지극히 기뻐하는 것 아니면 지극히 절망하는 것. 민묘희는 이 두 가지 표정만을 번갈아 보여주는 소연의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보고 해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하리라. 물론 소연이 결코 잘하는 짓도 아니지만 말이다. 민묘희는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실천하려는 듯 대답 없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퍽, 퍼버버벅! 퍼벅!
그녀의 반 토막 난 현철검이 쉴새없이 방안의 벽들을 후려치자 힘없이 나풀거리며 흐트러지는 거미줄들이 속출했다. 그것을 목격한 소연은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직접 거미줄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박혀있는 벽들을 파내 버리면 의외로 쉽게 거미줄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구나.”
그랬다. 거미줄은 자를 수 없지만 거미줄이 파고든 벽면은 충분히 떼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거미줄이 벽 너머의 현철에까지 깊숙이 박혀있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벽면에 박혀버리는 것으로 그쳐있었다.
“치이이잇! 키잇!”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냥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소연이 느끼기로는, 고치 안의 인면지주가 자신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듯 경고를 내보냈던 것 같았다.
“조금 진정시켰다 하세요. 그러다가 화가 나서 빠져 나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잖아요.”
민묘희는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오히려 바라는 일이 아니었어?”
소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대책 없는 상황에서 인면지주가 빠져 나오면 방비할 재간이 없잖아요.”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고 소연을 바라본 민묘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각오도 없이 어떻게 화정에게서 떼어낸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인면지주를 달래서 내보내기라도 해야한다는 말인가?
“걱정 말아라. 인면지주는 절대 고치 안에서 나오지 않을뿐더러, 그 상황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괘, 괜히 나서서 죄송합니다.”
대답 없이 다시 작업을 시작한 민묘희는 고치 안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거미줄을 떨어트려 갔다. 천천히 침대 쪽으로 기울어지며 흔들거리던 고치는 마침내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소연은 인면지주가 아까 전처럼 위협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조용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침대에 다가간 민묘희는 바람을 일으켜 흐트러져있는 거미줄들을 고치 주위로 몰아넣고 고치를 조심스레 이불로 감싸안았다. 긴장은 되는지 그녀의 고운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버렸다.
“괜찮을까요?”
“네가 입만 다물고있다면.”
걱정되어 물어봤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소연은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민묘희는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화정이가 들어있는 이불을 안아들고 지하실로 방향을 잡았다. 사고가 신법을 전개하자 어쩔 수 없이 따라붙은 소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물어보았다.
“지하실로 가시는 이유가 뭐죠?”
민묘희는 계속 신법을 전개하며 소연을 돌아보았다.
“…….”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민묘희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 지하실의 제일 끝 방에 관해 적어도 한번쯤은 궁금해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왜 그곳만 유독 잠겨있는지, 그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연은 무의식적으로 따라붙던 속도를 늦추었다. 이어 정신을 차린 그녀는 원래의 속도를 회복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번이 아니라 수십 번도 더 해봤어요.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있는 건가요?”
민묘희가 대답하려는 순간 마침내 지하실의 막다른 방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이불을 내려놓은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연 뒤 다시금 이불을 챙겨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왼쪽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며 스산하게 말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거라.”
동천은 일년 동안 모아놓은 상단전의 힘으로 육 개월 전 꿈에도 그리던 만성폐혈법을 뚫고야 말았다, 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의 작전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한순간의 폭발력을 믿고 상단전의 무형의 기를 전신 곳곳에 쏟아 부었지만 그것이 막혀있는 혈도를 뚫지 못하자 무서운 기세로 역류했던 것이다. 기겁을 한 동천은 아무리 용을 써도 제압할 수가 없자 마지막 모험이라는 심정으로 역심무극결을 떠올려 망아지처럼 날뛰는 무형의 기를 차근차근 달래며 상단전으로 다시 인도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주화입마의 위험을 무릅쓰고(알다시피 그로써는 정말 대단한 결심이다) 그 일에 모험을 걸었던 만큼 얻게된 것도 있었다. 바로 역혈심법의 놀라운 효능을 말이다. 놀랍게도 역심무극결은 상단전의 기운을 되돌려놓으면서 막혀있던 두어 개의 혈도를 뚫어낸 것이었다. 이는, 작은 구멍 위에 그보다 큰 돌덩이를 얹어 놓고 밀어보라고하면 지극히 어렵지만 그 반대편의 구멍 쪽에서 돌덩이를 밀어보라고하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밀어낼 수 있는 이치인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역혈심법이라는 것은 여타의 사술들과 한통속으로 취급되면서도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게되는 인세의 보기 드문 신공(神功)으로 변모하게된다. 뭐라고 해도 정파인들에겐 사술이지만 말이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역혈심법의 효능은 얻게된 것이 아니라 알게된 것이라고 해야하나? 그렇다면 진정으로 얻게된 것을 이야기해보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역심무극결을 운용하면 그때만큼은 ‘역’의 성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심법을 멈추면 원래의 성격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고.
‘흐음, 방금 세 명이 감지된 것 같은데 좀 이상하군. 한 명에게서 두 명의 기운이 느껴진 것도 같아. 그렇다면 총 네 명인가?’
역심무극결의 운용 말미에 지나치는 민묘희 일행을 느낀 동천은 운기조식이 끝나자 손과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는 곧 굳어있는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후아,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네. 그 망할 놈의 할망구가 이제는 혈도란 혈도는 다 집는 구만?”
동천이 몸을 움직이자 그의 말처럼 백여 군데의 혈도를 막는 것을 목격했던 중소구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것을 3일 만에 다 뚫었다는 말이냐?”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지금 장난하쇼? 아무리 평범한 천재인 이 몸이라고 해도 그걸 어떻게 다 뚫어요. 그냥 사지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뚫었지. 에휴! 남은 거 다 해치우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걸요? 짜증나 죽겠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도연은 웃음 지으며 말했다.
“주군께서 민낭이 제압하러오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 안에 혈도를 풀 때까지입니다.”
못마땅한 듯 동천이 불평을 터트렸다.
“말이야 쉽지 임마. 한시도 쉬지 않고 혈도나 풀어봐. 이건 아주 죽을 맛이라고.”
사실 동천이 운기조식을 하며 짜증나는 일은 없었다. 그때가 되면 성격 그 자체가 변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성을 띠는 것이다. 다만 운기조식이 들어가기 전과 그것이 끝나버렸을 때가 되면 반복되는 생활에 지쳐 짜증을 내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에 와서 유일한 희망은 주군뿐이니 힘을 내셔야합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조금이나마 쉬게 좀 내버려둬. 으아, 죽겄다!”
처음 역심무극결로 몇 개의 혈도를 풀었을 때는 좋았다. 그때는 당장이라도 봉해져있던 내공을 회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혈도를 푼 것에 깜짝 놀란 민묘희가 다시 혈도를 점하고 거기에 추가해서 또 다른 금제를 걸어놓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에그, 그냥 기회를 봐서 한꺼번에 뚫고 만사를 도모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놀라보라는 심보로 개겼다가 이 꼴이 뭐야. 뭔지도 모를 금제가 무려 여섯 개나 걸려있고 거기다가 전신 혈도까지 폐쇠시켜놓고. 꼼지락거릴 생각도 말라는 건가? 크으, 전신 혈도를 풀기 전 까진 도연이 먹여주는 것을 받아 먹어야하는 신세이니……. 쩝, 그래도 받아먹는 게 의외로 편하더구만? 비록 사내새끼가 먹여줘서 거북하긴 했지만.’
일년 전 민묘희가 조심스럽게 치우도법의 구결을 원했을 때, 동천은 민묘희의 조심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 동안의 진수성찬을 흥정해서 역심무극결부터 넘겨주었다. 그러나 처음 구결대로 운기해본 그녀는 익힐 수 없는 심법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닫고 뿌드득 이를 갈았던 적이 있었다. 동천을 다그쳐 얻어낸(이번에도 흥정하려다 맞아 죽을 뻔했다) 치우도법의 일초식까지 분석해봤지만 역심무극결이 아니라면 전개해봤자 무용지물인 도법이었다. 그래서 포기한 그녀가 혈도를 푼 동천에게 어떻게 된 연유냐고 물어보자 당연히 동천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알려줘 봤자 득이 되는 것은 없으니까.
딱 두 대 맞고 실토를 한 동천은 이왕 말해주는 김에 역심무극결의 효능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인세에 보기 드문 도법을 얻고도 결국에는 포기해야만했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려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혈도를 막는 자와 푸는 자의 기나긴 싸움이 육 개월간 이어졌고, 경이적인 동천의 솜씨에 자극을 받은 민묘희는 여섯 개의 금제를 가하다 못해 전신의 혈도를 봉하는데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아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어두 침침한 곳의 생활도 이젠 질렸다고. 이러다가 아주 돌아버리시는 거 아냐?”
지속적인 독한 약물의 투여로 이제 머리카락이 다 빠지다시피 한 중소구는 어림도 없다는 듯 내뱉었다.
“이놈아, 미쳐도 탈출한 다음에 미쳐버려. 알겠어?”
동천은 아니꼬운 듯 대꾸했다.
“알겠수다. 꼭 탈출한 뒤에 미쳐 가지고 댁을 형운곡에다 다시 처넣어 드리리다. 됐소?”
“…….”
소연은 의외의 추위에 몸을 떨었다. 이미 서늘함에 익숙해져있는 그녀로서는 문 하나 열고 들어갔다고 기온이 뚝 떨어지는 현상이 기기묘묘할 따름이었다. 횃불을 따라 걸어가자 유독 환하게 보이는 곳이 있었다. 네 개의 횃불들이 관을 둘러싸듯 불을 밝히고있었던 것이다. 투명한 관 뚜껑 외에는 무쇠로 만들어진 관인 듯 싶었다.
“저 관은….”
민묘희는 화정이를 둘러싼 이불을 내려놓고 가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화정이와는 다른 체계의 강시가 잠들어있는 관이지.”
“예에?”
민묘희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연을 잠시 물러서 있게 했다. 잠시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힘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육중해 보이는 관을 새로 가져왔다.
쿵!
강시가 잠들어있다는 관과 똑같이 만들어져있었지만, 그것과 비교해서 약간 크다는 것 빼고는 별다른 이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뚜껑을 열자 연녹색 액체가 그득히 들어차 있었다. 민묘희는 품안에서 꺼낸 푸른 분말가루를 뿌려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일을 위해 연혼수(淵魂水)가 차있는 관을 하나 더 준비해두길 잘했군.”
소연이 들었는지 물어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무 것도 아니다. 신경 끄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