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10화
주인님을 도와 그녀의 방으로 다친 사람들을 옮긴 소연은 여유 있게 뒤따라온 화정이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해. 분명 주인님께서는 생각 없이 명령하신 거였지만, 쇠사슬을 손으로 끊어보라고 명한 것을 정말로 이행해내다니……. 쟤가 그렇게 강했었나?’
그것은 정말 괴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연의 생각대로 생각 없이 명했던 동천도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미묘한 옷차림의 화정이를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소연은 옆방으로 끌고 가서 은은한 하늘색 상의와 백합이 수놓아진 연두색 치마를 입혔다. 화정이를 다시 데려온 그녀는 사람들의 상태를 물었다.
“도연과 중 대인의 상태는 어때요? 그리고 그 강시도요.”
먼저 화정이의 위아래를 훑어본 동천은 아쉬워하는 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연이야 가벼운 내상에 잠깐 질식해서 기절한 것뿐이지만 문제는 여기 소구 자식이랑 저기 운성현이야.”
소연은 어깻죽지와 팔 등에 붕대를 칭칭 감고있는 중소구와 뭉개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운성현을 번갈아 본 후 다시 물었다.
“그분들이 왜요?”
동천은 중소구부터 가리켰다.
“이 인간은 저 인간에게 피를 많이 흡혈 당해서 오락가락하고있는 중이고, 저 인간은 몸에 독기가 쌓인 것 같은데 이 인간의 피를 마셔서 조금 중화시키긴 했지만 화정이에게 맞은 것도 있고 해서 그런지 깨어날 생각을 안 해. 더군다나 이 몸의 견해로는 그 독을 제거해줘야만 할 것 같아. 문제는 그 독이 아주 치명적이라는데 있지만.”
운성현의 몸이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을 확인하고 귀의흡수신공으로 중화시켜주려고 했던 동천이었지만 되려 중독 될 뻔한 경험을 한 뒤로는 근처에 갈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아아, 운성현은 민낭께서 심혈을 기울이셨던 강시인데 이렇게됐으니 어쩌면 좋아….”
소연이 슬퍼하는 눈빛으로 운성현 쪽을 바라보자 그녀를 빤히 바라본 화정이는 한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빼내서 버릴까?”
소연은 짐짓 엄하게 지시했다.
“버릴까, 가 아니라 버릴까요, 야. 알았어? 다시 해봐.”
찔끔한 화정이는 다시 정정해서 말했다.
“내가 빼내서 버릴까요?”
그 말을 끝으로 잘했냐는 듯 소연의 눈치를 보자 동천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좋아라 웃어댔다.
“파하하! 잘했어! 아주 잘했어. 우리 화정이 뽀뽀해줄까? 쪽! 아이구 예뻐라!”
동천의 낯 뜨거운 행동에 얼굴이 붉어진 소연은 당황한 얼굴로 제지시켰다.
“주, 주인님. 걔 그러다 버릇되면 큰일나요.”
동천은 씨익 웃었다.
“에이, 질투하는구나?”
얼굴이 확 달아오른 소연은 양손을 교차해가며 손을 저어댔다.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니에요. 저, 정말예요.”
“히히, 알았어. 그보다 화정이 말을 마저 들어보자고. 화정아, 빼내서 버린다는 게 무슨 소리지?”
이유 없이 신이 난 화정이는 운성현을 가리켰다.
“그거? 그러니까 쟤한테 나쁜 것을 빼내서 버린다는 말이야. 나 그래도 돼?”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인간의 독을 빼내겠다고? 지금 그런 소리야?”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화정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런 거야!”
역심무극결을 끌어올린 동천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힐끔 화정이를 바라보았다. 화정이는 그런 주인의 눈빛이 두려운 듯 몸을 떨어댔다. 그녀는 자꾸 소연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나, 나아, 저런 동천 무서워. 히잉.”
가늘게 미소짓고 심법을 푼 동천은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좋아, 자신 있으면 해봐!”
그러자 언제 떨었냐는 듯 밝게 웃음 지은 화정이는 곧장 운성현에게 다가갔다. 걱정스러워진 소연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 치명적인 독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설명을 요하는 항의 섞인 그녀의 물음이었다. 동천은 화정이가 하는 행동을 예의 주시하며 대답해주었다.
“그랬지. 헌데 생각해보니까 쟤한테는 치명적인 게 아니더라고. 네 대가리로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 그러니까 인면지주의 음기를 섭취한 것은 운성현이 아니라 바로 화정이 쟤라는 거야. 그래서 인면지주의 독이 쟤한테는 통하지 않는 것이고. 이제 알겠어?”
놀란 소연은 한 손으로 벌려진 입을 가렸다.
“그, 그렇다면…….”
그때 운성현의 독을 손으로 다 빨아들인 화정이는 그 손을 떼고 꾹 쥐었다. 검은 국물 같은 것이 걸레에서 짜여지듯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바닥이 소리도 없이 녹아 내리자 동천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녹아 내렸던 것이다.
“와아, 저런 걸 내가 중화시키려고 했었단 말야? 내가 미쳤지.”
그것으로 행동을 끝내려던 화정이는 웬일인지 운성현의 몸에 손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그의 몸에 음기를 투여해주었다. 인면지주의 내단을 섭취한 그녀에게 인면지주의 음기는 필요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내단이 음기의 결정체라면 인면지주의 음기는 그 주변에 내려앉은 서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음기였으니 내단의 효능에 비하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귀찮은 혹을 뗀다고 생각하면 가장 무난하리라.
“쟤 또 뭐 하는 짓이냐?”
동천의 물음에 소연이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도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건 그렇다고 생각한 동천은 갑자기 운성현의 몸이 하얘지더니 주위를 얼려 가는 것을 발견했다.
쩌저저적!
음기의 확산이 순식간이자 기겁을 한 그는 소연의 허리를 껴안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다행이 도연이나 중소구의 근처까지는 침범하지 않았다. 동천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저런 싸가지 없는 계집애를 봤나! 위험하다면 위험하다고 말해줘야 놀라지나 않지!”
엉겁결에 허리를 잡히게 된 소연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이제 놔주세요.”
“응? 그래.”
동천이 다른 상황이었다면 장난기가 발동할 수도 있었지만 눈앞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군말 없이 내려주었다. 반대로 은근히(?) 바라고있던 소연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사이 쓸모 없는 음기들을 모두 쏟아 붓고 난 화정이는 개운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성현의 주위와 그에게 덮어주었던 모포자락은 조각조각 깨어져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화정이의 옷자락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동천에게 날아 내린 그녀는 칭찬해달라는 듯 머리를 내밀었다.
“나 쟤한테 나쁜 것도 빼내주고 화정이한테는 필요 없지만 쟤한테는 아주아주 필요한 것도 넣어줬어. 잘했지? 잘했지?”
동천은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칭찬해주었다.
“그래, 아주아주 잘했어. 그런데 말야. 다음부터는 시킨 일 외에는 하지마. 알았지?”
“아, 아파! 아파 동천!”
그녀의 볼을 놔준 그는 운성현에게 다가가 쓰윽 둘러보았다. 얼굴 부위는 물론이고 다른 곳의 외상들도 말끔히 완치된 상태였다.
“아주 음기를 퍼부어 줬구만? 하긴, 인면지주의 음기정도라면 화정이가 감당하기에 좀 벅찼겠지. 견딜 수 있을 정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이놈한테 넣어줬나? 뭐 어쨌든, 언제 봐도 재수 없는 얼굴이란 말야?”
내단까지는 생각 못해 동천의 예측이 빗나가긴 했지만 대강 뜻은 비슷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사이 또 운성현의 중요한 부분을 힐끔거리던 소연은 뜻하지 않게 주인님과의 시선이 마주치자 도둑질하다 걸린 아이 마냥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 그냥 본 거예요. 호호, 진짜예요. 호호호!”
눈치채지 못했는지 동천은 뚱하게 대답했다.
“누가 뭐래? 이제 이놈은 무사하긴 하지만 다시 담가놔야 하니까 화정이를 데리고 지하실로 가서 연혼수가 담긴 관인지 뭔지 들고 와.”
소연은 살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 주인님. 근데 주인님은…….”
내가 갔다올 동안 넌 뭐하고 자빠져 있을 거냐는 물음이었다. 의외로 동천은 조용하게 말했다.
“난 이놈의 소구 자식을 보살펴야해. 이 몸께서 귀의흡수신공으로 기운을 북돋아 주지 않으면 골골대다 뒈지는 수가 있거든. 내공도 별로 회복하지 못했는데 하여튼 귀찮게 하는 인간이라니까?”
소연은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하는 주인님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지었다.
‘요 며칠간 보아왔던 바로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렸었는데, 알고 보니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셨구나. 훗, 역시 주인님이야.’
“그럼 전 화정이 데리고 다녀올게요.”
“그래, 알았어.”
그녀들이 나가고 나서 중소구의 상처를 중심으로 진지하게 귀의흡수신공을 투여하기 시작한 동천은 이내 음흉한 웃음을 띄었다.
‘히히, 뒈지면 큰일이지.’
그 웃음의 의미는 오직 동천만이 알고있을 따름이었다. 하긴, 고운 마음씨로 중소구를 치료한다면 그게 어디 동천이겠는가?
“도옹천! 이것 봐라?”
화정이가 다가와서 보여주는 것은 인면지주의 알이었다. 당연히 그게 무엇인지 알 리 없었던 동천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 그거 뭐냐?”
화정이는 동천에게 달라붙다시피 앉아서 건네주었다.
“이거 방울방울이라는 건데 갖고있으면 시원하고 재미있어.”
동천은 안쪽이 비치지 않는 인면지주의 알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물었다.
“방울방울?”
잽싸게 그것을 가져간 화정이는 큰 거 보여준다는 얼굴로 생글거렸다.
“봐아, 이렇게 꾸욱 누르면….”
쯔끅, 쯔끅.
“헤헤, 재미있지? 그지?”
동천은 약간 물러나며 말했다.
“재미있긴 뭐가 개뿔이 재미있어. 왠지 꺼림직하기만 하구만.”
주인이 싫어하는 듯 보이자 그녀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흐응, 그래? 그럼 나 이거 버릴까?”
동천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있을 듯 보이니까 우선은 가지고있어. 그보다 그거 어디에서 난 거냐?”
잘 기억나지 않는지 화정이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웅, 몰라. 깨어나니까 있었어.”
더 이상 물어봐도 헛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동천은 화제를 다른 것으로 넘겼다.
“근데 말야. 이건 아주아주 중요한 질문이야.”
“물어봐, 물어봐. 화정이가 아는 것은 뭐든지 말해줄게.”
동천은 생글거리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물었다.
“관은 어디 있어?”
그녀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거 말고 아는 것 있으면 뭐든지 말해줄게. 물어봐물어…, 아야야! 아, 아파!”
화정이의 볼을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긴 동천은 이번에도 간단하게 명령했다.
“가서 가져와!”
그렇게 해서 지하실로 되돌아가다가 낑낑거리며 들고 오던 소연과 마주친 화정이는 그것을 가뿐하게 들고 와 결국에는 동천에게 칭찬을 받았다.
“으음, 여기는.”
힘겹게 눈을 뜬 도연은 몇몇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자세히 확인해보려는 지 초점이 모일 때까지 찡그린 얼굴을 그대로 고수했다.
“아? 주인님, 깨어났어요.”
‘소연인가….’
내심 안도하던 그는 아울러 운성현의 일이 떠오르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대가는 컸다.
“크으윽!”
한쪽 어깨를 비롯해 그 주위에 극통을 느낀 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자다가 일어나 허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온 동천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깼냐? 아프긴 하나보지? 질질 짜는 거 보면.”
소연은 신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저는 도연이 우는 것을 처음 봤어요. 호호, 나중에 수련이 만나면 말해줘야지.”
“그 수다 년한테 그걸 뭐 하러…, 아냐, 잘 가르쳐 줘. 기왕이면 상세하게 말야. 히히!”
동천은 수련의 수다가 암흑마교에 널리 퍼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돌변한 것이었다. 소연은 뭔가 불길했지만 일단 고개는 끄덕였고 말이다.
“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손도 자유롭고 족쇄도 풀려있고……, 앗? 화정이 아닙니까!”
“히히, 그건 말야.”
도연의 궁금증을 이리저리 부풀려가며 설명해준 동천은 나중에 가서 설명해주기도 귀찮아지자 그것을 소연에게 떠넘겼다. 소연은 동천만큼 매끄럽게 이어나가지 못했지만 웬만큼은 되었는지 잘 들었다고 대답한 도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허면 이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동천은 소연의 옆에 놓여진 두 개의 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 떠날 차비 다 하고 너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는데.”
흠칫한 도연은 다급히 물었다.
“벌써 열흘째가 다가왔다는 말입니까?”
“나 참, 넌 두 시진만에 깨어난 건데 뭔 소리야. 그게 아니고….”
“동천동천. 누가와.”
화정이의 말에 방금 전까지 여유를 부리던 동천이 크게 놀라했다.
“뭐? 그년이 오고있다고?”
화정이는 이해를 못했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년이 누군데? 오긴 오는데 그년인지는 모르겠어.”
소연도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바, 방울소리도 없이 근처까지 왔다면 민낭이 분명해요. 아아, 이제 전 어쩌지요?”
“침착하고 징징 짜는 소리 좀 하지마! 우리에겐 화정이가 있고 흥정할만한 인질도 있다는 말씀이야? 야, 저기 구석에 있는 거 이리 가져와서 관 뚜껑 열어.”
고개를 끄덕인 소연은 관을 끌고 와 뚜껑을 열어제쳤다. 만일의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다 되어있는지, 운성현이 잠겨있는 머리맡에는 화정이가 떡하니 버티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동천은 의심스런 눈길로 화정이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제대로 알고 지껄인 거 맞아?”
“물론이야. 화정이는 거짓말 안 해. 봐, 소리가 들리잖아.”
그 말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잠시 후에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화정이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동천은 소연에게 눈짓을 주었다.
“가서 이리로 데려와.”
“제, 제가요?”
동천은 눈을 부라렸다.
“이씨, 아까 다 끝난 말 가지고 자꾸 또 하게 만들래?”
당장에는 동천 쪽이 무서웠는지 그녀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쪼르르 걸어나가 민묘희를 마중 나간 소연은 아니길 바랬는데 정말로 사고이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평소 이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어요?”
민묘희는 표정 없이 대꾸했다.
“음, 운이 좋아 처음 찾아갔던 곳에 물건이 있더구나. 그간 별일은 없었느냐.”
“예? 예, 별일이 없었다면 없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따라오시면 별일이…….”
소연이 원래 그녀를 어려워하고 소심하다는 것쯤은 알고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너무 횡설수설하는 것 같자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