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12화
<동천(冬天) 3부 1권 – 움직이는 자들 편>
서장(序章).
운명은 그렇게 찾아온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지금의 감정을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하늘 아래 아스라이 쓰러져 가는 생명들은 마지막에 그 무엇을 좇고 마지막에 그 무엇을 갈망할 것인가. 하찮은 미물들조차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거늘, 지금의 나는…….
과연 지금의 나는 그것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애초에 나의 바램은 한여름 밤의 꿈…….
꿈은 꿈일 뿐이라는 말인가?
어쩌다 마주친 인간.
“흐응, 이제 돌아가는 길만 남았나?”
형운곡 초입을 벗어난 동천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소연과 나란히 걷고있던 화정이가 쪼르르 달려와 동천 곁에 바싹 달라붙었다.
“어디? 어딜 돌아가는데?”
화정이의 어깨에 팔뚝을 살짝 걸친 동천은 씨익 웃으며 멋을 부렸다.
“훗, 어디 긴 어디겠느냐. 바로 본교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때 도연이 다가와 말했다.
“주군, 황룡세가에는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까?”
동천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길 왜 가는데? 너 혹시, 그곳의 하녀와 사고 쳤어?”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도연이 얼굴을 굳히자 동천도 덩달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아니면서 황룡세가에는 왜 또 가자고 하는 거야.”
그는 여인네와 사고를 쳐야만 그곳에 가야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도연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장노삼 어르신과 황룡세가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그 시기가 너무 늦어있지만 말입니다.”
그제야 생각이 미친 동천이었지만 어물쩍 넘어갔다.
“아아… 그거? 짜샤, 그래서 지금 거기에 가고있는 중이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그곳에 들린 후 본교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였다구. 그런데 멍청한 네가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끼여들었다는 소리야. 알겠냐?”
도연은 군말 없이 끄덕였다.
“예, 주군.”
옆에서 소연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눈빛이었으나 감히 입을 열진 못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화정이만 좋아라 깡충 뛰었고 말이다.
“와아! 어쨌든 가는 거지? 가자! 가자!”
“그래, 가는 거야. 가자!”
소연은 마냥 좋아하는 그들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당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신이 본교로 돌아가는 것이 난처했기 때문이다. 암흑마교와 적으로 돌아선 만독문 문도의 제자였던 자신이었으니 어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어쩐지 겁이 났다. 주인의 성격상 귀찮게 된 자신을 떼어놓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천은 어지간히도 신용 받지 못하고 있는 인간인 것이다. 어쨌든 그런 그가 소연을 불렀다.
“야.”
소연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마, 말씀하세요.”
동천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너 말야. 무슨 고민 있냐?”
소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딴에는 가볍게 물었던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돌아오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울러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했다.
“아니면 마는 거지, 뭘 믿고 그렇게 눈깔을 똑바로 쳐들어! 너 한번 기분 좋아질 때까지 죽도록 맞아 볼래?”
그녀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뇨. 잘못했어요.”
틈만 나면 개기는 도연과 같이 있었던 동천은 소연에게 큰소리를 치게 되자 그동안 잊고 지냈던 우월감이라는 감정이 샘솟아 올랐다. 그와 더불어 가슴속에 막혀있던 그 무언가가 뻥 뚫리는 것과 같은 상쾌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까불고 있어. 히히!”
화정이는 득의에 찬 주인에게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동천, 얻어맞는 건데 왜 기분이 좋아?”
동천은 끊임없는 탐구정신의 화정이를 대하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흐뭇함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만일 그렇지 않았을 때에 화정이가 물어봤더라면 필시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따랐을 것이 분명했다.
“오오, 그건 말이지. 인간이 한두 대 정도 맞으면 아파서 죽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까지 맞다보면 어느 순간 아픔이 사라지고 죽었던 가족들 중 한 명이 나타나서 이리 오라는 둥 오면 안 된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일 때가 있어. 그때가 되면 신체적으로 한 대 더 맞으나 덜 맞으나 그게 그것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좋은 기분으로 맞자는 작용이 일어나서 맞아도 아프지 않게 되는 거야. 그렇게 맞다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말야. 비록 그런 상태가 좀더 진행되면 뒈져버리지만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어쨌든 이 주인님은 그것에 관해 말씀하시고 있었던 거였어. 알겠니?”
화정이는 정말 좋은 것 알아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응! 응! 알겠어.”
기특했던지 동천이 그녀의 볼을 토닥여주었다.
“아이고 귀여운 우리 이쁜 화정이!”
주인의 칭찬을 받아 너무도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얼굴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또 해줘. 또 해줘.”
뭘 또 해달라는지 몰랐던 동천은 곧 깨닫게 되었다. 다시 한번 볼을 토닥이며 칭찬해 달라는 것이었다. 못 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아, 그 얘기였어? 아이구, 귀엽다. 귀여운 우리 화정이. 너무도 귀여워서 주체를 못하겠네. 예쁘기는 어쩌면 이리도 예쁜지. 그 옛날 서시나 달기도 우리 화정이를 보면 울고 가겠네.”
“헤헤, 또 해줘. 또 해줘.”
“또 해줘? 아이구 귀여운 화정이. 귀엽다. 참 귀엽다. 히히, 됐지?”
“응, 또 해줘.”
“또? 귀엽다. 귀여운 우리 화정이.”
“동천, 또 해줘.”
“우리 화정이. 귀엽다. 귀여워.”
“또, 또.”
“…….”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라고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화정이의 행동 또한 그러했다. 동천의 성격상 두 번 이상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그런 것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으니 지금 그의 심기가 어떠하겠는가. 슬슬 동천의 불편함이 얼굴에 드러나려는 찰나 눈치 빠른 소연이 황급히 화정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저기, 얘가 좀 지능이 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좀……. 호호호.”
너그러이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화내기도 뭐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누가 뭐라고 했냐? 쳇, 그따위 정도는 이 몸도 알고있다고.”
동천은 은근히 골이 난 얼굴을 하고 휙 돌아서서 다시 걸어갔다. 그러고 보면 소연은 오랜만에 주인님을 만나긴 했어도 은근히 조종(?)했던 그 옛날의 솜씨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아? 주인님.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가셔야해요. 그쪽은 진법이 쳐져있어서 가시면 곤란해지거든요.”
소연이 틀리게 가는 방향을 바로 고쳐주자 진법이라는 것에 껄끄러움을 느낀 동천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르며 물었다.
“근데 그런걸 니가 어떻게 아냐?”
“이곳에 있으면서 민낭의 심부름으로 아랫마을에 내려간 적이 꽤 있었거든요. 아, 맞다. 어디에다 뒀더라?”
주섬주섬 몸을 뒤지기 시작한 소연은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하얀 가루약이 들어있는 청색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동천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뭐냐?”
그가 그것을 흔들며 묻자 소연이 성심껏 대답해주었다.
“이곳에는 독충과 독물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물리지 않으려면 몸에 살짝 뿌려둬야 해요. 그것들을 살상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다가오지는 못하게 하는 효능이 있거든요. 심부름 갈 때마다 뿌렸기 때문에 효능은 확실한 거예요.”
무엇이든 간단명료한 것을 선호하는 동천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뿌리면 안전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안 그래도 독물에 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던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보증전표인 셈이었다. 소연이 살짝만 뿌려도 된다고 했지만 욕심이 많았던 동천은 거의 절반 이상을 머리 위부터 뿌려댔다.
그것을 지켜보며 질린 얼굴을 한 소연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뿌렸다고 나섰다가 괜히 불똥이 튀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서리가 낀 듯이 보일 정도로 가루약을 사용한 동천은 선심을 쓰듯 남은 것을 도연에게 건넸다.
“자, 양은 충분하니까 알아서들 나눠 써.”
아무리 봐도 나눠 쓰기에 모자랐지만 도연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소량을 사용하고 소연에게 건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혼자 쓰기에도 모자란 양이었다. 내심 난감해진 그녀는 차마 모자란다는 표정을 짓지도 못하고 혼자서만 끙끙댔다. 그때 동천이 말했다.
“혹시 화정이의 분량까지 생각해서 그래? 그런 거라면 너 혼자 다 써도 돼. 화정이는 인면지주의 힘을 흡수해서 독에 관해서는 두려울 게 없는 상황이거든.”
“아? 그렇겠네요. 아휴, 나도 참.”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연은 남은 가루를 골고루 몸에 뿌렸다.
“재미있겠다. 재미있겠다. 나도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 화정이는 소연을 끝으로 상황이 종결되자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화정아, 넌 필요 없어.’ 라는 작은 주인의 말을 듣고는 우는 아이 보채듯 앙앙거렸다. 잠시 후 참다 못한 동천이 소리쳤고 말이다.
“시끄러워! 니가 애냐?”
그래도 동천의 불호령이 무서웠던지 재빨리 입을 다문 화정이는 가려지지도 않는 소연의 뒤로 숨어서 훌쩍거렸다. 하지만 성격상 어쩔 수 없었던지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원상태로 돌아오는 화정이었다. 생글거리기 시작한 그녀는 걸어가는 그들의 주위를 뛰놀며 가끔씩 수준 낮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를 들면 ‘동천, 동천은 왜 그렇게 눈이 작아?’ 라든지 ‘동천, 콧구멍은 왜 두 개야?’ 라든지 ‘동천, 전에 있던 곳의 사람들이 동천보고 싸가지가 없데. 싸가지가 뭐야?’ 등등 상식 이하의 질문들을 해댔다. 지능이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있는 화정이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질문이었지만 성인인 동천이 듣기에는 수준 낮은 질문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회피할 동천도 아니었다.
그는 첫 번째 질문에
‘이년아, 세상에서 제일 치사하고 더러운 짓이 남의 얼굴 갖고 헐뜯는 거란 거 몰라? 뭐? 모른다고? 소연! 야 이 계집애야! 넌 그런 것도 안 가르치고 여태껏 뭐했어! 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이년아! 이게 다한 거야? 니 눈엔…, 놔! 말리지마!’
라고 답해주었고,
두 번째 질문엔
‘넌 콧구멍이 두 개인 게 싫으냐? 그럼 한쪽은 막고 다니면 되잖아. 아니면 내가 막아주리? 얼굴 대봐, 이 주인님이 시원하게 막아 줄 테니까. 뭐? 싫어? 너 이리 안 와? 잡히면 죽는다? 놔! 도연 이 자식! 말리지 말라니까?’
라고 첫 번째에 이어 격하게 답해주었고,
세 번째 질문에는
‘어떤 자식들이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고 다녔어!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뭐? 님의 품에 얼싸 안겨? 지랄하고 있네! 내 이놈의 자식들! 돌아 가면 다 죽여버릴 테다! 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라고 대답해 주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길길이 날뛴 동천도 동천이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물어본 화정이 또한 만만하다고 볼 수 없으리라.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계속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