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13화
“와아, 새다! 새다!”
소연은 새를 향해 신형을 띄우려는 화정이를 제지시켰다.
“화정아, 쫓아가면 안 돼. 내 뒤만 바싹 쫓아와.”
화정이는 못내 아쉬운 듯 입을 내밀며 작은 주인의 말을 따랐다.
“우웅! 알았어.”
소연의 안내를 받으며 두어 개의 산을 내려온 동천 일행은 형운곡을 다 벗어나지는 못했어도 쫓기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물론 사소한 문제 거리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야, 좀 근질거리지 않냐?”
동천이 몸을 긁적이며 도연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몸이 간지러우십니까?”
동천은 그 즉시 긁는 것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자신만 긁고있는 것 같아 기분이 구렸던 것이다.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는…….”
그는 곧 화살의 방향을 바꾸었다.
“야, 너도 안 간지러워?”
소연은 죄송한 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전혀…….”
‘으윽? 얘도 멀쩡하단 말야?’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마지막 남은 화정이를 살펴보자 그녀도 괜찮은 것 같았다. 한순간 침묵을 지키던 동천은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히히, 사실은 나도 안 간지러웠어. 그냥 해본 소리야.”
억지로 참으며 횡 하니 달려간 그는 안 보이는 숲 속에서 온몸을 마구 긁고 난 뒤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나왔다. 그나마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일행을 재촉했다.
“뭐해. 빨리 가자고. 제대로 된 음식 좀 먹게.”
대략 추측은 하고있었겠지만 동천의 간지러움은 가루약의 과다 사용에서 비롯되었다. 많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효과가 증대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차이가 대단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동천은 화정이와 마찬가지로 가루약이 필요 없는 존재였다. 독공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만독혼원공을 익힌 몸이니 거의 모든 독 종류에 내성이 생겨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또한 인면지주의 힘을 그대로 이어받은 화정이로 인해 모든 독물과 독충들이 피신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자면 동천은 물론이고 나머지 일행까지 가루약이 필요 없었다.
만일 이 사실을 동천이 알았더라면 죄 없는 소연이나 화정이를 들볶았을 테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나머지 자신만 이상한 괴질에 걸린 것이 아닐까, 속으로 조마조마하고있을 뿐이었다.
“아? 저기예요, 주인님. 보이죠? 마을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천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신법을 사용해 마을로 내려간 것이다.
“와아! 술래잡기! 술래잡기!”
동천의 행동을 술래잡기로 오인한 화정이가 그 뒤를 쫓았다. 도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연에게 말했다.
“우리도 따라가자.”
“응? 으응.”
조그마한 마을에 동천이 가봤자 거기가 거기였기에 그들은 달려가는데 있어 그다지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동천이 들어간 곳을 확인한 상태여서 더더욱 보통 속력으로 당도한 그들은 우물가에서 물을 끼얹고 있는 동천과 화정이를 볼 수 있었다.
“어이, 시원타!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나도 시원하다. 나도 좀 살 것 같다. 호호호!”
씻는 것이 절실했던 동천은 그렇다 치고 화정이는 그저 주인의 행동을 따라하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속살까지 비치진 않았지만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소연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휴, 내가 못살아. 빨리 이리와.”
화정이는 힘없이 끌려가면서도 말로는 확실한 거부의사를 나타냈다.
“싫어싫어, 나 동천이랑 더 놀 거란 말야!”
그런다고 순순히 허락 할 소연이 아니었다.
“너 잠자코 따라오지 못 해?”
“히잉…….”
작은 주인이 인상을 쓰자 화정이로서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맛있는 음식을 빼앗긴 어린애 마냥, 울 듯한 얼굴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도연은 손을 씻으며 말을 건넸다.
“주군, 인기척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루약을 말끔히 씻어낸 동천은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보아하니 젊은것들은 밭일하러 나간 것 같은데, 이렇게 된 이상 일 안하고 빈둥거리는 노인네들을 찾아서 밥 좀 얻어먹고 다음 일을 생각해야지. 넌 그렇게도 머리가 안 돌아가니? 쯧쯧, 어디에다 써먹으려고 그러는지 원.”
타당하다고 생각한 도연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연은 주위를 쓰윽 한번 둘러보더니 그대로 나아갔다. 그가 자신을 지나쳐가자 어딜 가냐고 물어보려 했던 동천이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자신의 명을 받아 집들을 둘러보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해낸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회전에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할 따름이었다.
“캬아! 난 왜 이렇게 똑똑한 거지? 역시, 평범한 천재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니까? 후후, 자고로 천재 중의 천재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당연히 평범한 천재지. 너무 드러나는 천재는 진정한 천재가 아니란 말씀이야. 알겠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디를 봐도 평범하니 우매한 인간들이 보기에는 그저 어디에나 있는 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흙 속의 진주라는 그런 결론이 나온다는 거지. 흐음, 그래. 이히히히!”
자신에게 말하고도 마음에 들어 배꼽을 잡고 웃어대던 동천은 누군가 뒤에서 다가오는 느낌이 들자 흠칫하여 돌아보았다. 그의 느낌은 정확했는데 재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상대는 동천의 행동이 의외였는지 놀라하는 얼굴이었다. 상대는 동천이 평범한 아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호오…….”
단정한 청색 계열의 옷을 입고 뒷짐을 지고있던 중년의 사내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형형 한 안광을 지니고 있었는데 필시 범상치 않은 고수가 분명했다. 그 사내는 낮은 감탄사를 터트리곤 동천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뭡니까?”
상대의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 동천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어보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중년의 사내가 너털웃음을 뿌렸다.
“하하하, 기분이 상했나보군. 하지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거라. 네가 너무 빛나고 있어 흥미롭게 살펴본 것일 뿐이니까.”
“에? 빛… 뭐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물어보자 중년의 사내가 개의치 않고 대답해주었다.
“빛나고 있다는 말이야. 하하, 넌 빛나고 있어!”
동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군?’
상대할 가치를 잃어버린 그는 중년의 사내를 무시한 채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가만히 두질 않았다.
“내 마흔 두 살을 살아오며 너처럼 빛나는 아이는 몇 번 본적이 없다. 내 일이 너무도 급박하여 그냥 지나치려고 했으나 너의 그 오묘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너에게 다가가니, 내 낌새를 알아차리고 돌아보는 것이 정말 예사로 빛나고 있지 않더구나.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라……. 이 어찌 빛나는 말이 아니던가! 하하하!”
동천은 혼자 지껄이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옮기려다가 돌연 주춤했다. 가만히 듣고있자니 자신을 치켜 세워주고 있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그는 점잖게 중년의 사내와 어울렸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보기엔 선배님이야 말고 빛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년의 사내는 약간 눈을 치떴다.
“으응? 내 어찌 너의 선배가 되느냐.”
동천은 가볍게 머릿결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제 나이 올해로 열 다섯이니 당연히 후배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허! 모르겠도다! 자세히 좀 말해보거라.”
다른 때 같았으면 두 번 말하게 한다고 내심 씨부렁거렸겠지만 지금의 동천은 기분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수월하게 가르쳐주었다.
“요는 이렇습니다. 마흔 둘 빼기 열 다섯은 스물 일곱이 되는 것이니, 적어도 선배님께서는 저보다 스물 일곱 해 이상을 무림에 적을 두고 계셨으리라 보는 겁니다. 무림의 동도들은 한 형제와 다름없는 것! 따라서 제가 선배님 대접을 해드리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옳커니!”
동천의 달변이 마음에 들었던지 중년의 사내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 사내는 적당하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맞는 말이야. 하하, 참으로 빛나는 말이로구나! 그런데 궁금한 것이 어째서 굳이 나에게 선배님이란 호칭을 사용하였느냐.”
무림 동도를 들먹인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둘의 나이 차로 볼 때 선배님이란 호칭을 사용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타당한 질문이었지만 동천의 매끄러운 혀는 잘도 돌아다녔다.
“이것은 ‘굳이’ 가 아닙니다. 너무 높게 올려 부르는 것은 아직 원기 왕성한 선배님을 기만하는 것이고, 너무 낮게 내려 부르는 것은 반대로 우롱하는 것이니 어찌 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턱!
“오오, 빛나고 있구나! 내 후배의 말을 듣고 있자니 너무도 빛이나 현기증이 다 느껴질 정도니라! 하하, 모두가 빛나고 있음이야!”
동천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은 중년의 사내는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는 짓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마다할 동천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마주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들의 웃음이 서서히 가라앉을 즈음, 주위를 둘러보고 온 도연이 돌아왔다. 그는 중년의 사내를 발견했지만 개의치 않고 다녀온 일을 보고했다.
“주군, 마침 한 분이 허락하였으니 그곳으로 가시지요.”
그 말에 옆에서 듣던 중년의 사내가 깜빡 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주군? 그러고 보니 내 후배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구나. 음, 그래. 내 선배의 도리로서 먼저 신분을 밝히도록 하지. 이 선배는 하남 연평곡의 금무량(金無量)이라 한다. 후배는 어떻게 되는가?”
뭐라고 대답해줄까 잠깐 망설이던 동천은 굳이 거짓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동천이라고 합니다. 호북에 거처를 두고 있으나 잠시 유랑중입니다.”
금무량이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호오? 호북이라면 이곳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항상 위험이 난무하는 강호를 유랑하기엔 네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보는데…….”
잠깐 턱수염을 쓰다듬던 그는 돌연 생각을 바꾸었다.
“음, 아니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호방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이야기가 틀려지니 과히 유랑할 만도 하겠구나. 그렇다면 이쪽은?”
그가 도연을 가리키자 도연이 직접 나서 대답했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시도했다.
“도연이라 합니다. 여기 이분의 수하입니다.”
도연의 대답 속에 무엇이 그리도 흡족한지 금무량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관심이 동천에게서 도연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렇군, 그래. 눈매가 날카롭고 심지가 굳어 보이니 너 또한 빛나는구나. 네 나이가 올해로 몇이더냐.”
보통 주종간의 사이를 확인했다면 그네들의 신분을 궁금해하는 것이 먼저일텐데 특이하게도 금무량은 나이를 물어보았다. 도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올해로 열 일곱입니다.”
“옳커니!”
흥겹게 소리치고 한 박자 쉬고 난 금무량은 대뜸 목소리를 낮춰 은근히 물어보았다.
“가정은 두었느냐? 아니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라도?”
도연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한쪽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겠기에 차분히 금무량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여인에 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도연의 대답이 끝나자 금무량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맴돌았다. 그는 더욱더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는 도연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관찰까지 할 정도였다. 그 바람에 뒤로 밀려버린 동천. 그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슬며시 끼어들었다.
“선배님, 저도 아직은 여인에 관해 이렇다할 생각이 없습니다.”
동천을 힐끔 쳐다본 철무량은 듣는 둥 마는 둥 대꾸했다.
“그렇겠지. 네 나이 열 다섯이라면 당연한 것이겠지. 아참, 도연이라고 했던가? 으음, 내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주 참한 여식이 있는데 한번 교류를 가져보는 것이 어떠한가. 자네의 됨됨이가 출중한 만큼 그 여식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출중하니, 그야말로 봉황과 금룡의 만남이라! 하하, 이 어찌 모두가 빛나지 않으리!”
‘저런 씹새끼를 봤나.’
졸지에 소외되어버린 동천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남몰래 이까지 갈아댈 정도였다.
‘으득,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별 볼일 없는 자식을 선배로까지 치켜세워 줬거늘 길가의 가로수를 들이받는 미친 황소의 주인 마냥 배은망덕하기가 그지없구나!’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동천 자신도 생각나는 대로 씹었던 것이기에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그런 동천의 분노를 뒤로하고 도연이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나 생각이 없습니다. 뜻을 이루기에 너무 젊은 나이고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여인에 관하여 전혀 생각이 없사오니 그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별 다른 설명 없이 무조건 관심이 없다고만 했다면 금무량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데려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허나, 뜻을 이룬다는 조건이 있었으니 어찌 쉽사리 힘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 대신 그는 도연의 심중을 물어왔다.
“사내대장부가 뜻을 이루려한다면 일개 아녀자가 방해가 될 수도 있는 법! 그러나 그 뜻도 뜻 나름인 법! 그렇다면 자네가 이루려는 뜻은 무엇이던가!”
목청 큰 그의 질문에 주군인 동천을 잠시 바라본 도연은 이내 그에게 시선을 거둔 뒤 금무량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전혀 위축됨 없이 말했다.
“작은 뜻은 제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오, 큰 뜻은 제 주군의 완성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
순간 동천의 신형이 움찔했다. 한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이 그의 온몸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그는 흥분 섞인 호흡을 고르며 인정하긴 싫지만 과연 도연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자신의 뒤를 급속도로 쫓아오는 도연을 지켜 보며 알게 모르게 분발을 했던 동천이었기에 그의 성격에서 이 정도의 인정은 보기 드물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그의 생각을 입 밖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었으나 한 순간이나마 동천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의 내부에서 도연에 관해 무언가 알 수 없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니까.
‘제길! 제길! 모르는 누가 보면 분명 저놈이 주군 같고 내가 수하 같아 보일 것이다! 크으, 지금도 이러한데 점점 더 나이를 처먹으면 더욱 그러한 격차가 커질 것이 자명할 터! 무슨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 으으, 생각해 보자!’
원래대로 돌아온 그가 생산적이지 않는 잡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금무량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과연 빛나도다! 자신의 안위가 작은 뜻이고 주군의 안위가 큰 뜻이니 어찌 그 모습이 빛나지 않으리! 허나 자네의 큰 뜻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루지 못할 것 같군! 포기하는 것은 어떠한가?”
완전히 도연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버린 금무량은 반말을 배제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어투를 사용하였다. 이에 도연이 싸늘히 대꾸했다.
“그 말씀은 주군을 모욕하는 것이니 사과를 바랍니다. 금 선배께서는 다른 소인배들처럼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시는지요.”
“뭐, 뭣이라?”
금무량은 생각지도 못한 냉대에 잠깐 당황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추스르고 분노를 드러냈다.
“네가 감히 나에게 훈계를 하려는 것이냐? 감히 이 광검무적(光劍無敵) 금무량에게?”
분노에 취한 그가 막대한 기를 뿜어내자 엄청난 위압감에 동천과 도연이 주춤거리며 물러날 지경이었다. 정신을 수습한 그들은 본능적으로 검과 도를 빼들었다. 그들의 자세를 유심히 바라보던 금무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범상치가 않은 내력임을 추측할 수 있으나 너희들의 빛남은 아직 무르다!”
검을 내밀어 도연을 가리킨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었다.
“네가 지금이라도 방금 전 실언을 철회한다면 여기에서 그만둘 수도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이따위 일로 휘말리기 싫었던 동천은 도연에게 전음을 날렸다.
『얌마!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냥 저 자식 말대로 해버려!』
그러나 도연은 그럴 수 없었다. 혼자 떠맡겠다는 듯 주군과 멀찌감치 떨어진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신념을 굽힌다면 사내 대장부가 아닌 법!”
금무량은 씨익 웃었다.
“내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으나 모름지기 사내 대장부라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라. 내 오늘 너와 같은 실수를 했을 때 겪게되는 상황을 미리 체험시켜 줌으로써 사내 대장부에 한 걸음, 아니 두어 걸음 더 일찍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리라!”
번쩍―!
언제 움직였는지도 모를 상황이 이어지고 현란한 빛줄기가 쏟아지자 적이 당황한 도연이 태(太)를 시전 하여 방어에 치중했다. 금무량은 자신의 검세가 약간 무거워짐을 느끼고 5성에서 7성으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 무거움이 사라져버렸다.
“으하하, 고작 그 정도로 내 공세를 막으려고 했더냐? 토끼 똥만큼의 빛남이라고 인정해주마!”
그는 일검에 도연을 고꾸라트릴 수 있었음에도 하늘 위의 하늘을 보여주려는 듯 도연의 옷자락 이곳 저곳을 베어낼 뿐이었다.
도연은 놀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분함이 치솟았지만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가 방어에 치중하던 검을 돌연 내뻗었다.
태의 2초식 촌정태천파(寸靜太天破)가 시전 된 것이다. 촌정태천파는 근접전에 사용하게 끔 만들어진 초식으로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위력이 배가되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은 한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태강즉절(太剛則折)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 일단 시전이 되면 거둘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 초식이기도 했다.
‘헉?’
방심하고 있다 내심 헛바람을 들이킨 금무량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다리에 내려보낸 뒤 보법을 사용하여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기세를 잡게 된 도연은 금무량을 절단 내려는 듯 재빨리 달라붙어 그를 내려쳤다. 내려치는 그의 검 주위에 하얀 기류가 어리고 휘몰아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생각보다 뛰어나고 정말 예사가 아닌 검법이로다! 차라리 도법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구나!’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금무량이었으나 문득 호기가 일어났다. 그는 도연의 공격에 맞서 검을 들어 쳤다.
카캉!
금무량의 두 발이 바닥으로 푹 꺼지고 내려치던 도연의 검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갔다. 내부에 충격을 입은 도연은 끌어 오르는 기혈을 억누르며 손에서 벗어나려는 검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가 겨우 안정시키고 거친 숨을 고르는데 금무량이 껄껄 웃으며 물어왔다.
“참으로 빛나는 네게 어울리는 검법이로다! 방금 그 초식이 무엇이더냐!”
도연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소리쳤다.
“일원태평세(一元太平勢)!”
“음, 그래. 초식의 이름 또한 빛나는군! 좋다, 좋아! 덜 빛나는 네 주군을 제쳐두고 우리 한번 다시금 어울려 보자!”
금무량이 도연에게 달려가는 시점에서 자존심이 상한 동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무량수불이 찢어진 게 주둥이라고 아무 말이나 다 쏟아내는구나! 흥, 그따위 조잡한 기술을 자랑해봤자 무슨 자랑이라고 빨빨거리는 거지? 너 같은 것은 내 일도(一刀)에 끝날 것이 자명하다. 고로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끼겠다!’
성질 더러운 동천이 예상외로 잠자코 있던 이유는 상대가 도연을 해할 의도가 없을뿐더러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이 의외로 안목을 길러준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