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41화
같은 시각 약왕전.
연구실에서 혈도들의 상생관계에 대해 몰두한 역천은 아무리 검증된 연구 결과를 복습하고 있다지만 지극히 위험한 실습이기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약지 끝에 침을 한 대 놓았다. 원래는 자원자에게 시술하거나 극악한 죄인에게 시술해야하는 것이나, 너무 늦은 시간이고 사람을 불러 준비하려면 귀찮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에게 직접 침을 놓고있는 상황이었다. 과연 역천답다고나할까?
“그러니까 여기에 한 대 놓고, 팔뚝 아래의 두 치에 전혀 소용없다고 알려진 태겸혈(態兼穴)에다 삼분지 이까지 한 대 또 놓고…….”
나름대로 긴장한 역천이 조심스럽고 매끄럽게 절반 정도를 찔러 넣었을 때였다. 한심이 느닷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전주님! 전주님!”
“으엑?”
푸―욱!
깜짝 놀라 찌르는 손에 힘을 가한 역천은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 보이지도 않는 침을 바라보며 이럴 때엔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찌르는 방향이 틀어져 태겸혈을 비켜나갔다는 것이었다. 만일 제대로 찔렀다면 경기를 일으키고, 잘못하면 사경을 헤맬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헛? 전주님! 팔목에서 피가 납니다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역천은 재빠른 솜씨로 침을 뽑아낸 뒤 대뜸 고함을 질렀다.
“이 띠발놈아! 이 몸이 연구실에 들어올 때는 조용히 들어오라고 그랬지! 넌 이 몸의 말씀이 개 똥으로 들리냐?”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는지 한심이 어깨를 움츠리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요, 사안이 워낙 중요한 사안인지라…….”
일단 피부미용을 위해 화를 가라앉힌 역천은 무사해서 되었으니 한심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 무슨 사안이기에 이 야심한 밤에 허겁지겁 달려왔느냐.”
긴장된 얼굴로 잠시 주위를 둘러본 한심은 품속에서 작은 두루마기를 꺼내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역천이 펼쳐보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 글을 본 자는 반나절 이내에 30장을 필사(筆寫)하여 주위사람들에게 유포시켜야한다. 만일 이것을 어겼을 시, 가족 모두가 큰 화를 당할 것이며 일년간 재수가 없고…….
역천은 더 볼 것도 없이 두루마기를 접었다.
“이게 뭐냐?”
한심은 되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냐니요! 저는 전주님을 끝으로 30장을 유포시켰으니 전주님도 얼른 필사하여 주위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할게 아닙니까요! 자자, 저주가 내릴 수도 있으니 어서 필사……, 크에에에엑! 컥? 사, 살류! 끄아아악!”
역천은 뭐 이런 놈이 있나했다. 잘못을 해도 정도 것 해야 봐줄 것이 아닌가.
“이 시꺄! 이 시꺄! 믿을게 없어서 이따위 허접떼기를 믿냐? 더군다나 이 따위 걸 들고 오면서 뭐? 중요한 사안? 네놈이 요새 풀어줬더니 아주 간 땡이가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구나? 오냐 좋다. 퉤, 오늘 한번 너 죽고 나 살아보자. 죽어! 죽어, 이 시꺄!”
“자, 잘못했슈! 으악? 케헥―?”
동천이 예지력의 꿈을 꾸긴 제대로 꾸었다. 역천이 피를 보았으니 틀린 꿈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게 개꿈에 가까웠다는 것이지만…….
“으아함! 쩝, 벌써 아침인가?”
새벽에 깨어나 사부님 걱정으로 잠을 설친 동천은 화정이와 잠시 놀다(?)가 다시 잠들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피곤하여 늦게 일어났을 것이나 동천이기에 배가 고프자 저절로 깨어난 것이다. 운기조식의 여부는 뭐라도 먹어야 활동할 마음이 생길 것 같았다. 그는 채 뜨지도 않은 눈을 비비며 소연을 불렀다.
“야, 가서 물 좀 떠와. 목마르다.”
그러나 소연 쪽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창가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는 호연화의 ‘냐옹.’ 거리는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잠시 의아해하다 뒤늦게 어제의 일을 생각해낸 동천은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호? 그랬었지? 큭큭큭, 어디 된통 혼나봐라. 한 몇 달간은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 줄 테다!’
번쩍 뜨인 눈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고함을 지르기 위해 입을 반쯤 벌렸다가 허무하게 마무리했다.
“어? 이게 어디로 갔지?”
재미없게도 소연은 자리에 없었다. 잠들어있는 화정이를 살짝 넘어 침대에서 내려온 동천이 욕실까지 둘러보았지만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심지어는 문밖에서 쪼그리고 자는 것은 아닌가 싶어 살펴도 보았지만 허사였다. 다시 들어온 동천은 움직이는 소리에 깨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있는 화정이를 볼 수 있었다.
“화정아, 너 혹시 소연이 어디 있는지 아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 지금 깨어난 거야. 그보다, 헤헤.”
쪽!
미소지으며 다가온 화정이는 동천의 입에다 살짝 입맞춤을 해주었다.
“으악? 에잇, 퉤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죽을래?”
기겁을 한 동천이 길길이 날뛰자 화정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동천? 어젯밤에는 수없이 화정이 입술에 뽀뽀해줬잖아.”
“윽? 그, 그건 그냥 심심해서 그랬던 거지! 너 앞으로 내가 먼저 해주기 전에 다시 한번 이러면 맞을 줄 알아! 알았어?”
그래도 안 하겠다는 소리는 없었다. 화정이는 무언가 서운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했고, 그녀와의 문제를 마무리한 동천은 갑자기 사라진 소연을 찾아 근처란 근처를 다 돌아보았다. 역시나 오리무중. 문득 멈춰선 그는 거리의 한복판에 서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혹시… 톡낀 거 아냐?”
잠에서 깨어난 뒤, 맞아 죽을까봐 도망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럴 수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귀여워 해줬건만 감히…….”
그때 화정이가 동천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 소연이다. 동천, 소연이야.”
“가만히 있어봐! 너 때문에 그 다음 말을 까먹, 헉? 뭐라고? 어디어디!”
동천이 고개를 돌리자 양팔에 한가득 야채와 고기를 품고 오는 소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님에게 환하게 미소했다.
“벌써 깨어나셨어요? 헌데, 여기엔 어쩐 일로 나오셨어요? 길이라도 잘못 드셨다간 곤란해지실 텐데?”
그녀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안심이 된 동천은 밖에서 면박을 주는 것보단 그래도 일행이니 만큼 안에서 혼내주기로 마음먹었다.
“따라 들어와!”
소연은 왜 저렇게 화가 난 얼굴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 반대쪽으로 가셔야죠.”
“에잇! 나도 알고 있어!”
투덜거리며 걸어간 동천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대뜸 일갈을 터트렸다.
“네 이년! 네 죄를 알렸다?”
소연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예? 죄라니요? 제가 무슨…….”
동천은 그녀가 진짜로 몰라하는 눈치이자 답답하여 소리쳤다.
“몰라? 몰라? 네가 어제 술 처먹고 이 몸께 술 따르라는 둥 니 인생 책임지라는 둥 개소리나 하고 병나발을 불었잖아!”
소연이 기겁을 했다.
“예에? 제, 제가요?”
“와아! 이게 너구리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네? 니가 결정적으로 그 돌판까지 이 몸께 내던졌잖아!”
동천이 성질을 내며 거세게 몰아붙이자 기가 죽은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흑흑, 하지만 전 정말로 아무 기억이 없어요. 저는 그냥 술 조금 마신 기억하고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조금 속이 쓰린 기억밖에 없어요. 그런 다음 주인님께 맛있는 아침을 만들어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흑흑흑!”
골치가 아파진 동천은 한 손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고, 하늘님! 저년이 또 웁니다요!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
원래 동천의 계획은 잘못했다고 비는 그녀의 양 볼을 잡고, 땅기거나 꿀밤을 먹여가며 아주 단단히 기선제압을 한 뒤, 한 시진이고 두 시진이고 윽박질러서 다시는 자신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헌데, 일이 처음부터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녀가 질질 짜는 것이 아닌가! 여자가 우는 것 중에 소연이 우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동천은 급격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그녀가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전인데 아침이 아직 이었던 그로서는 아주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 쟤 음식 못 만들지 않았나?’
기사회생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고, 동천은 허물어져 가는 모래 위에 다시금 집을 짓기 시작했다.
“떽! 어제 그 지랄을 해놓고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돼? 잘못을 했으면 빌 생각부터 해야지! 그리고 네 음식솜씨야 뻔한 것인데 지금 그거 먹고 체하라는 소리냐?”
“아니에요. 전 정말로 기억이 없어요. 흑흑, 그리고 제가 감히 주인님께 자신 없는 소리를 하겠어요? 제가 가져온 요리재료는 소문난 요리사가 준비해준 것으로 넣고 끓이기만 하면 그 맛을 보장해준다고 해서 사 가지고 온 거란 말예요. 흑흑, 믿어주세요.”
동천은 이미 소연의 요리솜씨에 불신을 가졌기에 아무리 맛있는 것도 그녀의 손에만 들어오면 사흘을 굶은 개도 쳐다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익, 너 끝까지 오리발이냐? 여기 화정이가 증인으로 떡 하니 버티고있는데?”
흠칫한 소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화정이게 물었다.
“화, 화정아. 정말로 내가… 그랬니?”
화정이는 심각한 상황인 것은 알겠는데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서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어쭈구리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라고도 했고. 너 임마, 힘 좀 세다고 나를 때리겠다는 거야 지금? 이라고도 했고, 어떤 녀석에게는 돈 내고 처먹으라고도 했고. 에 또, 몸도 주고 마음도 줬건만 이제는 때리려고까지 하네? 내 인생 돌려줘. 라면서 울기도 했어. 그리고 고기 먹던 돌판도 동천에게 던지기까지 하고. 음음! 또 있는데 더 할까?”
동천은 놀랐다.
‘웃? 저게 나보다 기억력이 좋네? 쓰발.’
괜히 쓸데없는 것에 질투를 하는 동천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따위 생각을 하고있을 때 파랗게 질린 소연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아! 내, 내가 그랬었다니!”
동천은 툭 쏘아붙였다.
“그럼. 이 몸이 그랬을까봐?”
창백하게 질린 소연은 픽 쓰러져버렸다.
“으음…….”
“어어? 야! 야, 정신차려!”
놀란 동천이 재빠르게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몇 대의 뺨을 때렸다. 힘없이 눈을 뜬 그녀가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감히 주인님께 그런 짓을 했다니……. 흑, 주인님을 뵐 면목이 없어요.”
안도한 동천은 그녀를 매정하게 밀어내고 노려보았다.
“그런 당연한 소리나 할거면서 쓰러지고 지랄이야 왜, 차라리 죽을병에 걸려서 쓰러졌다고 말해보지?”
소연은 서러움에 눈물을 쏟아냈다.
“흑흑흑!”
“에이씨, 울지마! 뭘 잘했다고 질질 짜? 차라리 그럴 거면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리던가!”
뚝!
순간적으로 울음을 그친 소연은 손을 사용해 눈물을 닦아내고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손잡이를 빼어들자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가 예리한 곡선을 자랑했다. 흠칫한 동천이었지만 지가 설마 어쩔까 싶어 별 표정 없이 말했다.
“그건 또 왜 꺼냈어? 그거 가지고 과일이나 깎게?”
소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 감히 그런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에 살고싶은 생각이 없어요. 흑, 소녀는 죽을죄를 지었으니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슈악!
놀랍게도 그녀가 지체 없이 단도를 내리찍었다. 기겁을 한 동천은 냅다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이, 이게? 미쳤어? 너 미쳤어? 죽긴 왜 죽으려고 해!”
소연은 거칠게 몸부림쳤다.
“놔요! 놓아주세요! 흑흑, 주인님의 눈밖에 난 것……. 살아봐야 무얼 하겠어요!”
‘아아, 짜증나. 아아, 짜증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싫어하는 동천이었기에 한 대 쳐서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안 보는 사이에 깨서 진짜로 죽어버리면 큰일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야만 했다.
“후우! 누가 널 눈밖에 놨다고 그러느냐. 사람이 살다보면 큰 실수를 하는 법이다. 내 딴에는 그것을 바로잡아주고자 따끔하게 혼을 냈던 것뿐인데, 그럴 때마다 죽는다고 하면 세상사람이 어디 남아있을 것 같으냐? 내 너의 충격이 이리도 클 줄 몰랐으니 다음부터는 조심하기로 하고 이제 조용히 마무리를 짓자꾸나.”
“저, 정말인가요? 봐주신다는 게?”
소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아는 주인님은 이런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천은 내심 짜증을 냈다.
‘거 더럽게도 못 믿네. 이 몸이 손수 니 귓구멍을 후벼주리? 그래야 안 물어보겠어? 엉?’
동천은 애써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소연을 달래주었다.
“그래그래. 하하, 우리 소연이가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로구나? 어제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줄 터이니, 가서 네가 가져왔다는 그 음식이나 만들어 보려무나. 이거 배가 고파서 살 수 있어야지. 하하하!”
“주인님, 정말로… 정말로, 용서를 해주신다는 건가요?”
동천은 하마터면 소연의 머리를 한 대 후려칠 뻔했다. 안 그래도 느끼한데 그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같은 거 또 물어보는 짓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참에 골고루 해라, 골고루.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느냐…….’
이런 아랫것을 둔 자신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 성격은 생각 않고 소연만을 탓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 참, 그렇게 못 믿겠느냐? 다 사실이니 어서 아침을 준비하거라. 자꾸 이러면 없었던 일로 한다?”
그제야 믿게 되었는지 밝아진 소연이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녀는 요리재료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는 만들만한 용기와 도구들이 없어서 주인의 허락을 맡고 주방의 한 구석을 사용해야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착한 주방장의 선심으로 재료만 건네주고 기다리게 된 소연은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모를 주인님을 찾아본 것이다. 곧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아직도 거세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긴장이 풀려 온몸의 힘이 빠지자 근처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사, 살았다.”
무슨 뜻일까?
오직 그녀만이 알 일이다.
그로부터 나흘 후 도연이 돌아왔다. 제갈세가로 떠난 지 보름하고도 하루가 더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천은 같이 따라온 사내아이를 보고 도연에게 물었다.
“얘는 누구냐?”
도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살짝 내비쳤다.
“주군, 문정(雯整)이 아니옵니까.”
자세히 보자 정말로 그랬다. 원체 돈 아니면 먹을 것이다 보니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쳇, 누가 뭐라고 했어? 그렇다는 거야. 근데 넌 임마. 오랜만에 영광스런 본 사부님을 뵙고도 아직까지 인사를 안 하는 저의가 뭐냐?”
일부러는 아니고, 그럴 틈을 주지 않아 머뭇거렸던 문정은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을 대하자 ‘제 놈도 컸으니까 조금은 달라졌겠지…….’ 라고 기대를 했던 자신이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지체 없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부님. 실은, 너무도 오랜만에 뵈어 감격하는 바람에 미처 대응이 늦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그랬었느냐? 하하! 기특한지고. 헌데… 너, 얼굴이 좀 꺼멓다? 죽을병이라도 걸렸냐?”
‘윽? 이 자식은 말을 해도 꼭!’
문정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겨우 원상복귀 시킨 후에야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있던 곳의 환경이 좀 더워서 탔나봅니다.”
“그래? 아님말고.”
그때 화정이가 물었다.
“동천, 얘는 뭐야?”
잠깐동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 동천은 깜빡했다는 얼굴을 했다.
“아하? 화정이하고 소연은 얘 모르지? 얘가 바로 이 몸께서 초년에 맞아들인 제자야. 하는 짓은 별로 인데 질질 짜면서 제발 제자로 받아달라고 빌기에 하는 수 없이 받아준 거지. 뭐 긴말은 필요 없고, 서로 인사하고 앞으로 잘들 지내봐.”
소연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을 건넸다.
“주인님의 시녀인 소연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문정은 동천의 헛소리에 기가 막혀하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예, 예에. 문정이라고 합니다.”
“반가워! 나는 화정이…….”
“자암∼깐!”
동천이 그네들의 대화에 갑자기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영문을 몰라하는 소연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이씨, 나이도 어린놈에게 무슨 존댓말이야? 그냥 야, 임마, 뒈질래? 이러면 되지.”
소연은 뜻밖의 말씀에 당황하여 대꾸했다.
“하, 하지만 주인님의 제자 분인데 소녀가 어찌…….”
동천은 더욱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라면 하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이 몸의 방식으로는 먼저 들어오고 나이가 많으면 윗분이니까, 좋은 말씀하실 때 그렇게 해. 알았어?”
소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긴 알겠지만 그래도 좀.”
“알았으면 됐지 뭘 그렇게 꼼지락거려. 빨리 평대로 말해봐. 하대를 해도 무방하고 심심하면 몇 대 때려도 무방한 애야. 걱정할 거 없다니까?”
주인님이 심어준 용기(?)에 소연은 손을 흔들어가며 겨우 말을 건넸다.
“아, 안녕? 반가워.”
문정은 또 동천의 싸가지 없는 소리에 기가 막혀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소연의 말을 받았다.
“예,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문정이라고 합니다. 저도 사부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편하오니 서슴없이 말을 놓으십시오.”
“네에… 아니. 그래, 알았어.”
어렵사리 그들의 인사가 끝나자 화정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난 화정이!”
문정은 오는 동안 화정이에 관해서도 들었기에 이상하게 생각 않고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문정이라고 합니다.”
손을 내린 화정이는 반대쪽 손을 들고 활기차게 소리쳤다.
“나도 반가워!”
문정은 약간 생소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예, 저도요.”
그렇게 자기 인사를 마친 화정이는 잠시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침대 머리맡에서 뒹굴고있는 호연화를 낚아 채왔다.
“얘도 반갑데! 호연화야!”
“예에…….”
마침내 모든 인사가 끝나자 동천이 나서서 말했다.
“근데 어째서 너 혼자만 왔냐? 장 할아버지는? 너 장 할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것 아니었어?”
‘으이그! 빨리도 물어본다, 소악마야.’
동천에게서 살짝 고개를 돌리고 내심 씨부렁거린 문정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실은 그것에 관하여 길게 말씀을 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동천은 살풋이 미간을 모았다.
“짧게 말해.”
“예? 예에, 짧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부님과 헤어진 후, 장 어르신과 같이…….”
짧은(?) 문정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