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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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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그간 홀로 수행을 쌓으시느라 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이렇게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것을 뵈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무리의 제일 선두에 나와있던 중년인이 그렇게 말을 건넸다. 바로 약왕전의 부전주인 소진이었다. 길은 잘 잃어버려도 안면을 튼 사람의 얼굴까지 잊어버리는 바보는 아니었기에 동천이 즉각 반응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모두 부전주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소진은 예의바른 동천의 대꾸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전주의 됨됨이는 시간이 흘렀어도 변화가 없군.’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안내를 받은 동천이 소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소진은 마차에 오르길 권했으나 걷고싶다는 동천의 말에 이의 없이 동의해주었다. 자신이라도 오랫동안 외지에 나갔다 돌아왔다면 감회에 서려 천천히 걸어보고 싶어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그들의 뒤로 약왕전의 주요 인사들이 우르르 따라가는 진풍경이 벌어졌지만 소전주의 귀환이었으니 딱히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소진은 걸어가는 동안 소전주가 지루하지 않게끔 보이는 건물들을 가리키며 옛 기억에 떠오를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동천은 기억이 안 나도 간간이 대꾸를 해주며 계속 걸어갔다.

“허허, 저곳은 약간의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나 원형은 그대로 놔두었기에 예전과 그대로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천이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안 그래도 무언가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소진은 감탄하며 말했다.

“한번에 보시고 그것을 느끼시다니, 역시 소전주님이십니다.”

으쓱해진 동천이었지만 모르는 것을 길게 끌고 가봤자 좋을 것이 없기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과찬이십니다. 헌데, 사부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어서 뵙고 싶군요.”

그러자 소진이 깜빡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제가 소전주님의 귀환에 흥분하여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군요? 지금 제가 안내하고 있는 곳이 전주님의 집무실입니다.”

“그랬군요! 하하, 이거 떨리는데요?”

떨린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심하게 떨리는 것은 아니었고 미약한 흥분과 설렘이 교차하는 그러한 떨림이었다. 뒤따라오는 소연은 감회에 젖었는지 촉촉해진 눈으로 좌우를 둘러볼 뿐이었고 나름대로 눈치가 늘어난 화정이는 자신의 양팔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있는 호연화와 조용히 놀았다. 유일하게 표정의 변화가 없는 도연은 이따금씩 긴 호흡을 내쉬며 사색에 잠기는 정도로 쥐 죽은 듯 일행을 따라갔다.

“다 아시겠지만 이곳으로 들어가셔서… 으응? 허허, 전주님께서 이미 나와 계시는군요. 무리도 아니지요.”

소진의 기척을 느꼈던지 마당 한가운데에서 제자리를 맴돌던 역천이 들어오는 동천 일행을 바라보았다.

“……!”

순간적으로 정적이 일었고, 한순간 굳어버린 역천은 뒷짐을 진 그 상태로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바람도 여전히 이 몸의 뺨을 스치는구나. 집 나간 사촌 동생이 어느 날 이 몸을 찾아와 돈 좀… 이라고 했을 때 참으로 가슴 아팠지. 후우, 나도 늙었나벼…….”

모두들 뭔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할 때 동천만은 그 속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자신을 만나게되자 너무도 감격에 겨워 무의식중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절대고 있는 것이었다. 가슴 깊이 역천의 마음을 느낀 동천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사부님! 접니다, 동천!”

그제야 맨 정신으로 돌아온 역천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정말로 이 몸의 사랑스러운 제자, 동천이란 말이더냐?”

동천은 고개를 움직여 크게 끄덕였다.

“예, 사부님! 흑흑, 틀림없는 사부님의 사랑스러운 제자 동천입니다!”

“오오! 천지신명의 도우심이로다!”

바람을 가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역천은 재차 확인을 해보려는 듯 우악스러울 정도로 동천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동천의 입장에서 아픈 것은 당연한 이치.

“아이고, 사부님. 모가지 부러집니다요!”

역천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엉? 그래선 안되지?”

황급히 동천의 얼굴을 놓아준 역천은 가만히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코끝이 찡함을 느꼈다. 그는 동천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덥석 안아주었다.

“흑흑, 제자야! 무사히 돌아와 주어서 이 사부는 기쁘기가 그지없구나!”

“큭! 못난 제자가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오오, 제자야!”

“사부님!”

감격에 겨워 서로들 껴안고 울먹이는 장면은 소연을 비롯하여 도연과 소진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감성이 풍부했던 소연은 약간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바깥에서 두 사제의 감동적인 상봉을 지켜본 무사와 하인들은 지랄들을 한다고 생각했다.


“후후후후. 큭큭큭큭! 푸하하하하!”

감격적인 상봉을 끝마치고 역천의 배려로 우선 암한문(暗寒門)에 당도하게 된 동천은 떠났을 때와 다름이 없는 방안의 모습을 보고 계속 이렇게 웃어대는 중이었다.

“우히히… 응?”

돌연 웃음을 멈춘 동천은 약간 훼손된 듯한 서랍장의 둘째 칸 손잡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이것은 화정이와 허리꺾기 놀이를 하다가 약간의 이가 나갔던 부분이로군. 오오! 여기 이 받침대는 화정이와 메치기 놀이를 했을 때 주로 애용했던 곳이 아닌가! 훗… 즐거운 나날이었지.”

몇 년 만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떠올린 추억들치고는 조잡했지만 워낙에 먹고 자고 놀고, 이렇게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활용했던 인생이었기에 따지고 드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똑똑!

“주인님.”

밖에서 소연이 부르는 소리에 동천이 천천히 대꾸했다.

“들어와.”

“네.”

아직까지 상기된 얼굴의 소연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소녀처럼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그녀 또한 추억이 깃들어있는 곳인지라 들뜬 기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야,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그냥 들어와 본 거야?”

정신을 차린 소연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말했다.

“아? 그게 아니라요, 전주님께 전갈이 왔는데 식사하시러 오시래요.”

동천이 되물었다.

“식사? 지금 당장?”

소연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일단 긴 여행에 피로한 상태이실 테니까 저녁때쯤에 오시라고 하셨어요.”

동천은 크게 감탄했다.

“역쉬, 사부님이로다. 제자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대해와 같이 넓으심이야. 하하하!”

“예에… 그럼 전 이만.”

소연은 별로 수긍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자기혼자 도취해있는 주인님의 방에서 슬그머니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다시 혼자 남게 된 동천은 아까 마차 안에서의 요상한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예지력의 영향이었나 본데…….”

별로 중요한 내용의 예지력은 아니었지만 예지력의 내용과 현실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동천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이 예지몽을 꾸었다는 게 좀 찜찜하네?”

머리를 긁적인 동천은 곧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다. 혼자 아무리 찜찜해 봤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고 예지력이 어긋났다거나 잘못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밖을 내다 본 그는 저녁이 되려면 두어 시진의 여유가 있었기에 약왕전에서의 한가한 낮잠을 즐기기로 했다. 침대 위로 몸을 내던진 동천은 폭신폭신한 감촉에 온몸이 사르르 녹는 듯한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아아, 좋다! 세상의 그 어떠한 재화도 부럽지 않구나!”

온몸을 비비적거리며 침대 안으로 기어 들어간 동천은 돈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잠을 자려다 눈을 말똥말똥 떴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이 몸의 수중에 돈이 얼마 없네? 헉? 이럴 수가! 그때 김천무가에서 받은 은자 백 냥을 빼면 완전히 거지잖아?”

유난히 먹는 것과 재화에 집착이 강했던 동천은 수중의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에 못지 않게 즐겨했던 잠자는 문제를 저만치 옮겨 놓았다. 그는 실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이 몸의 실수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근처의 지단을 돌아다니며 약간의 수금을 했어야 했는데…….”

은자 백 냥이 애들 이름도 아니고 그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는데 뭐가 더 부족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뭐 동천의 경우라면 아무리 퍼 부어줘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니 딴엔 그럴 만도 하겠다.

“쳇!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서 충당하는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어떻게? 으음… 으으으음!”

그는 열심히 고민했고 결국 그 고민으로 인해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고민한 보람도 없이 아까운 시간만 흘려보낸 동천은 저녁이 다 되어 사부인 역천의 거처로 가게 되었다. 소연은 마차에 오르려는 동천에게 물었다.

“주인님, 눈이 충혈 되셨네요?”

그것도 고민이라고 신경 좀 썼더니 눈이 충혈 된 듯 싶었다. 동천은 눈을 한번 비빈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쩌라고.”

“예? 아니, 어쩌라기보다는 그냥 그렇다는… 호, 호호!”

한번 눈을 흘겨준 동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정이하고 도연이 자식은?”

소연은 심기가 불편한 듯한 주인님이었기에 재빠르게 대답해주었다.

“화정이는 제 방에서 쉬고 있고요, 도연이는 장로님들에게 간다고 아까 갔어요.”

동천은 다시 물었다.

“연화는?”

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화요? 연화가… 아? 호연화요?”

평소에 호연화로 부르다가 연화라고만 부르자 잠시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다. 동천은 마부가 열어준 문으로 한 발 들여놓으며 건성으로 끄덕였다.

“응.”

“걔라면 당연히 화정이와 놀고 있죠. 둘이 죽이 잘 맞아서 잘 붙어 다니잖아요.”

딱!

“아야!”

소연의 머리를 때린 동천이 말했다.

“걔가 뭐야, 걔가. 엄연히 이름이 있는데 이름으로 불러야지, 이름으로. 니는 니 이름 안 불러주고 야, 너, 콱! 이따위로 불러주면 좋겠냐? 엉?”

아픈 머리를 비빈 소연은 대들어봤자 좋을 것이 하나 없기에 억울해도 반성하는 척 해야했다.

“잘못했습니다.”

“음, 그래…….”

만족했던지 동천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 열린 문 밖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안 올라타?”

소연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예? 저도 타요?”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시중들 일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시중들라고 하리?”

소연은 밉지 않게 혀를 쏙 내밀었다.

“헤헤, 것도 그러네요.”

그녀까지 올라타자 마차는 곧 움직였고 흔들림 없이 안정감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소연은 조용히 있긴 하지만 무언가 고심하는 듯한 얼굴의 주인님을 보고 입이 근질거려 물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눈동자만 굴려 힐끗 소연을 바라 본 동천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음, 이제 너도 알 때가 되었구나.”

소연은 의외로 진지한 주인님의 자세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뭐가 요?”

동천은 말했다.

“세상은 말이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게 되어있어.”

“어중간한 자도 있지 않아… 아야! 자, 잘못했어요.”

소연의 머리를 두어대 더 쥐어박으려다 그만 둔 동천은 다시금 폼을 잡고 입을 열었다.

“어중간한 인간들은 사회의 악이야. 개성이 없다 이거지. 부자면 부자고 거지면 거지지 중산층이 뭐야, 중산층이. 쳇, 이 몸은 그런 게 제일 싫다구.”

소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론만 말해줘요.’

그런 그녀의 바램이 통했는지 동천이 곧바로 결론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몸의 말인즉슨! 이 몸은 거지 보다 당연히 부자 쪽에 속하고 싶다, 이거야. 그렇다면 부자는 어떻게 되느냐. 아주 쉬워. 돈을 벌어들이면 돼. 그럼 또 돈은 어떻게 벌어들이느냐. 아주 쉬워. 지닌 바 능력을 발휘해서 벌어들이는 거야. 허면 그 능력은 어떻게 발휘해야 하느냐. 아주 쉬워. 먼저 자기 자신을 알고, 할 수 있는 한계 치의 허용범위 내의 오차를 계산하여 신중하게 발휘해야하는 거지. 잘 알겠어?”

소연은 모른다고 했다가 맞을 수도 있기에 몰라도 아는 척을 해야만했다.

“네, 주인님…….”

“좋아좋아. 그럼 복습하는 차원에서 니가 설명해봐.”

“예? 아니 그게……. 호호, 잘 모르… 꺄악! 잘못했어요!”

이렇듯 자잘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마차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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