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17화 – 황금빛 여명이 빛을 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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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17화 – 황금빛 여명이 빛을 발하다

황금빛 여명이 빛을 발하다

– 사생결단

연비의 손에서 돌멩이가 화살처럼 날아가더니 백교의 텅 빈 오른쪽 눈을 정확히 강타했다.

키에에에엑!

분노한 백교가 무시무시한 괴성을 터뜨리며 머리를 홱 돌렸다. 눈이 없는 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남아 있는 붉은 눈동자는 적의를 불태우며 연비를 똑바 로 노려보았다.

‘아뿔싸!’

연비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인 거지만, 이 상황에서 백교를 건드리다니, 엄청난 실수였다. 살짝 눈을 돌려보자 등 뒤에서 린이 돌기둥처럼 굳어버린 것이 보였다.

그때 백교가 느닷없이 펄쩍 하늘로 뛰어올랐다. 날아오른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도약이었다.

“피, 피해!”

연비는 린을 안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단숨에 날아올랐던 백교의 아가리가 방금 린이 있었던 장소에 떨어졌다. 땅이 갈라지고 옆쪽의 나무가 뿌리째 기울 면서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곧장 피하지 않았다면 삼켜지기도 전에 몸이 으스러졌으리라.

“린, 괜찮아요?”

잠시 린을 돌아보는 순간, 백교는 다시금 땅을 박찼다.

“으윽!”

연비는 당황하며 린을 두 팔로 감쌌다. 그 덩치로 수풀 속에서 그렇게 민첩하게 연속 공격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순간 눈을 뗐던 것이다.

“으아아아악!!”

난데없이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된 건지 생각할 새도 없이 연비는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눈에 띈 수풀 속 바위틈새에 린을 밀어 넣고는 다시 앞 으로 달려나갔다.

연비는 수풀과 공터의 경계선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나무가 빽빽한 수풀 속이 백교의 공격을 막기에는 그래도 좀 더 유리했지만, 린을 보호하려면 앞에서 대치하면 서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엔 없었다.

“으우욱…….”

연비는 백교를 보며 욕지기를 억누르느라 애썼다. 땅에 떨어져 있는 백응의 숫자가 결국 둘로 늘어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우적거리는 백교의 아가리에서 보초의 머리와 오른쪽 팔이 삐져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땅에 피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연비는 왜 백교가 곧바로 자신들을 덮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아마도 피리를 부는 순간 보초가 백교에게 대신 당한 것 같 았다. 그가 린을 피신시키는 동안 백교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위험을 무릅쓰게 했던 아비 백응도 아마 그 와중에 덧없이 목숨을 잃고 만 듯했다.

외눈박이가 된 백교는 그 한쪽 눈으로 연비를 비웃듯 노려보며 보초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재빠른 계산이 연비의 뇌리를 스쳐 갔다.

‘연락은 됐겠지?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버티면 린은 안전해지는 거야. 저 녀석도 어른 하나를 잡아먹었으니 움직임이 조금은 느려질 테지.’

그러나 연비가 미처 비도를 펼쳐 내기도 전에 제이격은 곧바로 날아왔다.

부웅!

무거운 바람 소리를 내며, 어른 허리만 한 백교의 꼬리가 채찍처럼 연비를 향해 날아왔다. 무심결에 몸을 날려 피하려던 연비는 몸을 굳혔다. 자칫 뒤로 물러나다 가는 린이 위험해진다.

연비는 급히 양손을 교차해 단전으로 가져갔다. 밑에서부터 올려치듯 날아오는 백교의 꼬리를 온몸으로 받아낼 셈이었다. “크악!”

연비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공중으로 치솟아올랐다.

“연비!”

뒤쪽에서 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교의 입가에 미소와 비슷한 것이 걸렸다. 이미 반쯤은 요물이 되어가는 백교였다. 지금까지 숱한 강적들을 해치웠던 역전의 필살기, 아름드리 나무도 일격에 부 러뜨리는 자랑스러운 꼬리치기다. 말만 할 수 있었으면 이 수법을 쓸 때마다 그럴듯한 기술명이라도 외쳤을 텐데, 라고 아쉬워하듯 백교는 붉은 혀로 입가를 핥았 다.

그러나 이번 먹잇감은 상당히 끈질겼다.

그대로라면 나뭇가지에 등이 꿰뚫릴 것처럼 솟구치던 연비가, 순간적으로 신형을 뒤집으며 나무를 박차고 땅으로 떨어졌다.

콰가가각!

불완전한 자세로 착지한 탓에 거칠게 흙먼지가 날렸다. 연비의 한쪽 무릎은 어느새 꺾여 있었다.

“우웩!”

연비는 입으로 한 줌의 피를 토해냈다.

‘일부러 몸을 날렸는데도, 역시 완전히 흘려내긴 힘들구나.’

당장이라도 내장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인형설삼의 힘이 없었으면 실제로도 내장들은 뱃속에서 엉망진창이 되었으리라. 다행히 분뢰수로 손을 단련해 온 덕 인지 방금 전의 일격으로도 두 팔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어디, 끝까지 버텨봐야겠지!’

더 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방어만 하기도 위험했다.

“미완성이긴 해도 쓸 만한 기술들이 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이런 때를 대비해 사부가 내려준 처방이…….’

“네 녀석의 성취는 말할 것도 없이 미완성! 그런데 제자야, 어디서 뭘 주워 먹었는지 지난 일 년간 내공이 부쩍 늘었더구나.”

분명 이런 말로 시작했었지. 그런데 제자의 성취가 늘어나면 보통은 ‘아, 이 녀석 분골쇄신 열심히 수련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나?

“진짜 분골쇄신 시켜주랴? 이런저런 걸 주워 먹고도 여태껏 ‘밤[夜]의 경계(境界)’라니, 이 사부는 제자의 무능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런 말이나 하면서 괜히 섬뜩하게 눈이나 희번뜩거리고 말이야.

“아무튼 이 사부가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처방을 내려주마.”

아, 그렇지. 안광까지 빛내며 내려준 사부의 처방.

“조금이라도 센 놈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촤라라락!

양팔을 쫙 펴자 연비의 손에 여덟 자루의 비도가 잡혔다.

“어설프게 실력이 늘면 간덩이도 부어오르지. 하지만 그런 놈이야말로 제일 먼저 목이 떨어지는 법이다. 만에 하나 어쩔 수 없이 부딪쳤으면, 후딱 도망가도록!”

“젠장, 이미 도망갈 수가 없다구요오오!”

역시, 처방 따위는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 생사결단을 낼 작정으로 전력을 다해 적을 상대하는 수밖에.

비뢰도(飛刀) 오의(奧義).

초절기교(超絶技巧)의 장(章).

팔뢰난무(八亂舞).

연비의 소매에서 뻗어 나온 여덟 줄기의 섬광이 현란하게 사방을 뒤흔들며 백교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백교는 수십 번에 걸친 변화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 자 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파차창!

연비의 화려한 기술은, 터무니없이 강력하고 무식한 비늘에 파해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 못하도록 상대방의 시야를 교란시키는 게 변초의 목

적. 얌전히 맞아주겠다는 상대 앞에서는 무의미한 힘의 낭비일 뿐이었다.

백교는 마치 약을 올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연비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좋아! 그렇다면 최근에 터득한…….’

미완성이라도 그것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비뢰도(飛刀) 오의(奧義).

뢰명풍운의 장(章).

뢰광류하곡(雷光流河曲).

신들린 악사가 금을 연주할 때처럼 연비의 열 손가락이 초절하게 움직였다. 손끝에서 열 줄기의 번개가 뻗어 나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백교에게 날아들었다. 번개 들은 또다시 백교의 몸에 맞아 모조리 튕겨 나왔다. 그러나 그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연비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뇌령사 위를 누볐다.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튕겨 나갔던 번개가 다시 한 번 궤도를 바꿔 쏘아져 나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지!’

그러나 백교는 열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열 줄기의 번개는 맞았다가 튕겨 나가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힘이 약해졌다. ‘그렇다면!’

아무리 단단한 비늘을 지닌 생물이라도 약점은 있다. 이를테면 눈, 그리고 입.

비도들의 목표는 눈과 입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백교도 이제는 예측과 대비를 마친 참인지, 눈을 노렸던 다섯 개의 비도는 백교의 눈꺼풀과 머리에 사방으로 튕 겨 나갔다. 입속을 노렸던 나머지 다섯 개는 상황이 더 나빴다. 세 개는 튕겨 나갔고 두 개는 황당하게도 앙다문 이빨에 맥없이 잡힌 것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맹수들이 이 기술들로 인해 밥상 위의 반찬이 되었던가. 그런 기술이 깡그리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따로 없었다.

“잘 들어라. 괜히 잔머리 굴리다가 후회하지 말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부의 충고가 떠올랐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기술은 단순한 기교일 뿐이지. 예언컨대, 미리미리 힘을 길러두지 않으면 네 녀석은 언젠가 기교만 믿다가 호되게 당하는 날이 올 게다.”

과연 그랬다.

그렇게나 단정적인 말투로 불길한 장담을 하더니만 이렇게 보기 좋게 들어맞아 버리다니, 심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도 찝찝해서 그 뒤 힘 단련을 좀 해뒀기에 망정이지…….”

무엇보다도 사부의 예언은, 현실의 변수를 한순간에 면밀히 계산해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점이 제일 무서웠다. 자신이 그대로 있으면 벗어날 수 없는 미래라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가볍게 흘려 버리고 말겠는가.

비도가 아무리 어지럽게 날아들어도 확연히 우세를 차지한 백교를 봐도 알 수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공격을 멈추면 단박에 달려들 태세였다. 이대로는 점점 불리 한 힘 겨루기가 될 게 자명했다.

‘절대 안 돼, 이런 뱀대가리한테 억울하게 당하다니!?

연비는 이를 악물었다.

날마다 밥 짓기, 여장 하기, 돈 모으느라 아등바등하기, 땀 뻘뻘 흘리며 장작 패기, 그 빌어먹을 무식한 방망이로 날마다 빨래 하기, 팔찌랑 발찌 차고 찬거리 찾느 라 험준한 산봉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등등, 여태껏 그 망할 짓들을 참아온 게 무엇 때문인데!

약하니까, 더 더욱 강해지겠다고 그 애를 썼던 것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이런 굴욕적인 위기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망할 사부 밑에서 이렇게 불우한 시절만 보내다가 인생을 마칠 수는 없어!’

연비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에라, 한순간에 전부 걸어버리자!’

투두두둑!

차고 있던 네 개의 팔찌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전력은 쓰지 마! 이건 구속구이자 보호구다. 잊지 마라. 풀어내고 전력을 쓰면 아직 성장기인 네 몸이 버티지 못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는 백교의 뱃속에서 녹아버릴 뿐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물러나 봤자 뒤에서는 천길 낭떠러지가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 고 있을 뿐이었다.

비뢰도(飛刀) 독문심법(獨門心法).

영사심결(靈心) 오의(奧義).

발동(動).

여명천안(黎明闡眼).

밝아오는 여명에 어둠이 스러지듯, 호안석 같던 연비의 눈에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황금빛의 눈동자는 아침 햇살처럼 찬란히 빛을 발했다. •흩어져 있던 정신의 가닥들이 한줄기로 모여들었다. 물레로 실을 짜듯 한 가닥으로 꼬아낸 정신의 끝은, 마치 송곳의 첨단처럼 날카로워졌다. 집중된 정신은 절대 적인 통제력으로 전신의 신경과 근육을 지배해 갔다. 평범한 인간은 일생 단 한 번도 사용할 일이 없을 잠재력이, 망각의 심연 저편에서 조금씩 깨어나는 순간이었 다.

촤라라락!

양손에 각각 하나씩, 단 두 자루의 비뢰도가 연비의 손에 잡혔다.

문제는 숫자가 아닌 관통력. 저 단단한 비늘을 뚫고 들어갈 절대적이고 순수한 힘이 필요했다. 연비는 모든 변화를 없애고, 실개천처럼 흩어진 힘들을 하나의 강줄 기로 모으기 시작했다.

비뢰도(飛雷刀) 오의(奧義).

검뢰사살(劍雷死殺)의 장(章).

충각(衝角).

영사심결이 발동된 지금, 기회는 오직 한 번뿐. 두 번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온갖 밉살스런 것들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의 어깨를 혹사시키는 도끼, 만만찮게 무식한 빨래 방망이, 푼돈밖에 되지 않는 지긋지긋한 목걸이, 그 밖에 기타 등등의 끔찍한 여러 존재들. 그 뒤에선 궁극의 원인 제공자인 사부가 음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비는 백교의 자리에 사부를 대체시키며 깊고 깊은 울분을 일격 에 담았다.

“쌍섬일격뢰(雙閃一擊雷)!”

두 자루의 비도에 모든 힘의 정수가 응축되었다. 왼쪽 손을 중심으로 온몸의 근육이 한계까지 쥐어짜졌다.

쐐애애애액!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처럼 한줄기 뇌전이 백교의 미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크윽!”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충격에 연비는 신음을 토했다. 정신의 통제가 육체의 내구성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이만한 반동은 각오한 바였다.

백교는 뇌전을 향해 꼬리를 세차게 휘둘렀으나, 이번만큼은 그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가공할 속도로 날아간 비도는 하얀 비늘을 꿰뚫고 들어가 백교의 몸뚱이에 박혔다.

쓰르르르르!

고통스레 혓소리를 울리며 백교가 몸을 움츠렸다. 아가리는 있는 대로 벌린 채였다.

노리고 있던 기회가 온 것이다. 연비는 금빛으로 눈을 반짝이며 두 번째 뇌전을 쏘아 보냈다.

“가랏!”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은 한줄기 뇌전이 되어 백교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키아아아아악!!

쩍 벌어진 입 깊숙한 곳으로부터 괴이한 소리를 터뜨리며 백교는 경련을 일으켰다. 연비는 어미 백응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자 즉각 뒤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앞쪽에서 둔탁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바닥에 착지한 무릎으로 미미한 땅의 진동이 느껴졌다.

‘쓰러졌나…….?

긴장이 풀리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팽팽한 신경의 끈이 느슨해지고 전신의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린다. 일부는 이미 파열된 것 같았다. 연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길게 느껴졌어도 기껏해야 반 각(半刻)도 채 안 되는 짧은 전투였기에 망정이지, 좀 더 길어졌으면 십중팔구 사지의 뼈마디마저 남아나지 못했으리라.

“여, 연비! 괜찮아요?”

바위틈에 숨어 있던 린이 뒤쪽에서 급히 달려왔다. 연비는 눈을 번쩍 뜨며 정신을 차렸다. 눈빛은 이미 원래대로 돌아간 뒤였다.

“우욱… 좀 무리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아요. 린은요?”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사지를 타고 달렸지만, 연비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괜찮아요.”

린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린이 숨어 있던 바위틈에선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연비가 계속 등을 돌리고 있었던 탓에, 대체 무슨 수로 백교를 쓰러뜨린 건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른거리는 윤곽과 움직임만 봐도 중요한 내용은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연비가 꼬리에 맞아 날아갔던 것, 백응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보초가 잡아 먹 혔다는 것까지.

“미안해요. 내가 돌아가기 싫어해서 모두들…….”

린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끔찍한 참사가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린은 정말 착하군요. 나라면 왜 그때 돌을 던졌냐고 화냈을 텐데. 나야말로 미안해요.”

연비는 주저앉은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백응을 구하려고 그런 거였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새끼 백응들은 괜찮나 모르겠네요. 같이 가볼까요? 이젠 백교도 쓰러졌으니까.”

연비는 끙끙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연비는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별을 감상하며 둥지를 아예 통째로 갖고 내려왔다. 둥지를 들여다본 린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백응의 둥지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오직 한 마리뿐. 나머지 세 마리는 모두 힘없이 온기를 잃고 있었다. 연비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필사적이었는데…….”

겨우 꼬물거리고 있는 한 마리 역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다. 그대로 놔두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차갑게 식어버릴 게 분명했다. “힘들긴 하겠지만, 데려가서 키워야겠죠?”

린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비는 둥지에서 떼어낸 지푸라기를 손수건 위에 깔고는 그것으로 어린 새를 살며시 감쌌다.

“그럼 잘 부탁해요. 린은 틀림없이 잘 기를 수 있을 거예요.”

“웃, 제가요?”

감싸진 새를 연비에게서 무심결에 건네받다가 린이 당황했다.

“그럼요. 내가 맡는 건 위험해요. 당분간은 계속 따뜻하게 돌봐줘야 할 텐데, 날마다 돈을 버느라 집을 비워야 하거든요.”

“그, 그런…….”

“믿고 맡길 사람은 린밖에 없어요. 이 아이가 엄마나 아빠 백응처럼 자라서 멋지게 하늘을 가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린은 그 두 백응이 떨어져 있는 옆을 돌아보았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하늘을 가르던 백응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그런데 연비, 우리… 묻어주면 안 될까요?”

연비는 고소를 지었다. 극히 무리한 상태라서 이제는 손발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저 서 있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나마 슬슬 사람들이 도착할 때였다.

“한 놈만 빼고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네?”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 린에게 연비는 피식 웃어 보였다.

“저놈 말이에요. 몸도 무식하게 크거니와 이 비극의 원흉이니까.”

그렇게 투덜대며 뒤를 흘겨보는데, 백교의 허연 비늘이 어째 슬그머니 움찔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라? 설마!”

순간, 백교는 눈을 번쩍 뜨며 쾌속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마지막 기회를 노리며 깨어 있던 모양이었다.

쐐르르르르.

내장에 구멍이 났는지 괴이한 소리를 울리며 백교가 날아올랐다.

“헉, 피해!!”

다급히 린을 밀쳐 냈다. 린이 뒤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콰악!

순간 등이 화끈했다. 백교의 독니가 등을 긁고 지나간 탓이었다. 불에 덴 듯 뜨거운 통증과 함께 순식간에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독(毒)……..

연비의 정신도 급속도로 마비되어 갔다.

‘백교의 독은 해독제를 구하기 힘들다고 사부가 그랬는데…….’

—연비, 연비!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아득한 심연으로 추락해 들어가며 연비는 점점 멀어져 가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아, 린의 비명이다. 어서 일어나야…….’

하지만 손도 발도 이미 감각이 없다. 심장 소리도 점점 희미해진다.

-이 멍청한 녀석! 바보짓 좀 작작해라!!

심연의 밑바닥으로부터 사부의 욕설이 들려오는 것 같다.

“시끄러워요, 곧 죽을 제자한테 욕은!’

뭔가 더 그럴듯한 항변을 해주고 싶지만, 이미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연비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아, 다시 태어나면 앞으론 꼭 확인사살할 거야.’

완전한 어둠이 연비의 심신을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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