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227화
생각해 보자.
백사헌은 이 종이배를 지산 마을에 두고 갔다. 아마도 그때 만난 ‘포도 요원’에게 남긴 것일 터다.
물론 포도라는 요원 명은 모를 테지만.
‘그걸 알았다면 이미 내가 김솔음이라는 걸 깨달았을 텐데.’
몰랐으니 소통 아이템을 두고 갔지.
그러니 지금 상황에선 요원답게 대답해야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 좋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단정하게 글을 적었다.
녹아내려 슈트에 욱여넣은 몸에선 힘의 분배가 튀어 필체가 약간 흔들린다.
그쪽은 지산 마을에서 뵀던 시민님
맞습니까?
맞다면 어쩔 건데요
무사히 대피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백사헌은 답변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적은 글자는 확인한 건지 자연적으로 잠시 후 사라졌고, 나는 이어서 글을 적었다.
답변이 늦은 건 죄송합니다. 발견이
늦어서 그래요.
종이배를 펼쳐야 사용할 수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바보세요? 왜 이걸 모르지
오냐. 너 그럴 줄 알았다.
‘독사 인성이 어디 가지 않는군….’
요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이 자식을 눌러야 생산적 대화가 가능할까 생각한 순간.
뭐 모를 수도 있긴 한데
……?
별로 경험 없나 봅니다 이런 것도
제대로 추측 못 하고
그쪽 요원된 지 얼마 안 됐죠?
예. 맞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나름대로 잘 대처했던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침묵.
‘뭐야?’
어쨌든 이런 통신용 종이를
남기셨다는 건
혹시 제보하실 게 있어서입니까?
제보 같은 소리 하네
물어볼 게 있어서 남긴 거죠
거침없이 나오던 글씨가 이번에는 약간 시간을 두고 갱신된다.
마을 어떻게 됐어요
지산 마을 말입니까?
그럼 내가 여기서 다른 마을물어보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거기죠
그때 어떻게 됐냐고요
[맙소사, 반년 전 일로 내 친구를 귀찮게 만들다니. 저 게으름에 노루 씨가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음… 게으르다기보다는.
‘무서워서 확인하지 못했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백사헌은 그때 도망친 이후로 지산 마을 쪽은 가까이 가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도망치면서도 지산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리나 압력으로는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마을에서 오던 연락 자체가 아마 끊겼겠지.’
벌써 곧 10월이다. 곧 추석이 돌아오니 더 불안해진 게 아닐까 싶다. 혹시 내려가야 하는 건가, 재난관리국도 실패하고 마을은 더 끔찍한 꼴이 된 건가 싶고.
나는 간결하게 선언했다.
당신이 걱정하던 초자연 재난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뽑기도, 축제도 없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술로 빚어 서낭당 아래 눌러놓았던 지네지승은 없어졌으며, 재난관리국의 소관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유입니다.
한참 동안, 백사헌은 응답이 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다만 현재 마을의 상태가 어떤지
확실하게 알 순 없으니, 방문은
유의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계속 다른 초자연
재난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자세한
소식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진실이다….
조금 우울해질 뻔했으나, 나는 요원이라면 고지해 주었을 정보를 끝으로 말을 끝마칠 수 있었다.
물론 시민님은 해당 초자연 재난의
경험자시니, 재난관리국에 공식적으로
연락 주시면 더 안전하게 조치를 해줄
겁니다.
물론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됐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글씨 진짜 못 쓰네
‘근데 갑자기 인신공격을…?’
거참 미안하게 됐다. 너도 뇌부터 몸까지 곤죽이 되면 섬세한 힘 조절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힘들다는 걸 알게 될 텐데 말이다….
이 종이를 뭉개 버리지 않은 게 용한 상황이라고.
죄송합니다.
손을 좀 다쳐서요.
또 답장이 끊겼다.
그러더니 화제를 바꿔 연락이 돌아온다.
저기요
지금도 어둠에서 연락한 거예요?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둠’이라는 명칭을 쓰신 것
말입니다만.
저 어디 다니는지 이미 알면서 뭘
물어보는 척 하세요그쪽이랑 있던
요원 나 알아보는 것 같던데
이런 걸로 협박해 봤자 효과없습니다
이놈은 신입 오티 때부터도 그러더니 왜 이렇게 급발진을 하는 거지?
시민님을 협박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화할 때 상대가 정말로
협박을 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받아치지
말고 자리를 피하세요. 그게
안전합니다.
또 침묵.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던 것뿐입니다.
백일몽에 대해서 말입니다.
미쳤어요? 내가 그런 걸 대답해 줘서
괜히 회사에 책잡힐 일 맨입으로 만들
줄 아나ㅋㅋ
헛수작 그만 부리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당연히 어떤 미끼로 낚아볼까 옵션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슬그머니 글자가 뜬다.
뭐가 궁금한 건데요
뭘 어쩌자는 거냐?
하지만 나는 일단 준비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혹시 신입 중에 이전에 다니던 사람이
재입사한 경우가 있는지,
그리고 시민님이 보기에도 아는
얼굴이 있었는지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먼저 장허운 씨의 확인.
곽제강에게도 물어볼 수 있으나,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내가 장허운 씨를 정도 이상 특별히 신경 쓴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지 않다.
‘호기심을 유발하잖아.’
아무리 ‘빨간 손가락’으로 구속했다고 해도 그 미친 사람에게 어떻게든 우회로를 찾아내겠다는 동기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특히 약속한 본인이 아닌 주변인에게는 더더욱.
‘같은 의미로 고영은 씨나 은하제 대리님에 대해서도 안 물어보고 있지.’
물론 백사헌에게도 맨입으로는 안 될 테니 당근과 채찍 중에 뭘 쓸까 다시 고르는 와중….
좀 기다려 봐요
내일 출근해서 알아볼 테니까
‘…??’
뭘… 잘못 먹었나?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어쨌든 해준다니 나야 좋다만.
감사합니다.
성의 표시 잊지 말고요
쓸 만한 아이템 준비해 놓으란
말입니다 커피 기프티콘 같은 거
보내는 짓 하지 말고요
야. 난 커피 기프티콘도 못 사는 상황이야….
그러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현재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나중에 구해서 주겠다고 빌 생각도
없습니까? 사람이 정말 눈치도 없고
융통성도 없는데 잘도 지금까지 요원
일을 했네요
[무슨 그린치가 따로 없군요.]
내 말이.
그렇다면 차후에 생기는 대로
지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흐음.’
아마도 ‘포도 요원’은 지산 마을 사건으로 백사헌에게 모종의 신뢰를 얻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한 거지?’
모르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심지어 난 이미 요원도 아닌데.’
요원으로 계속 소통하게 됐다는 점이 얼떨떨하군.
어쨌든, 이 첫 번째 질문에 백사헌의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단계를 위해 얌전히 별관 근무를 해야 하는 구간이기도 했으니까.
[이제 푹 쉬고 내일의 근무를 준비할 시간이군요, 친구!]
맞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아주 얌전히 별관 프론트 근무를 계속하고 있으며, 월급날에 반드시 봉급을 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회사에 계속 넣고 있다.
참고로 이 사이에 어둠 수집하러 한 번 더 나갔었고, 이번에도 무사히 포획해 왔다.
<어둠탐사기록> 위키에 있던 어둠이라 제정신으로 매뉴얼을 분석하니 크게 위험하거나 어렵진 않았지. 공포가 둔하고 감정이 둔한 상태라 더더욱.
그 외에는 제법 평화로웠다. 놀랍게도 이성해 대리님은 이후로도 우리의 별관 근무 중에 간식을 들고 몇 번 찾아와 주셨고 말이다.
‘소화 기관을 찾아서 재조립하면 언젠가 먹어볼 수 있으려나.’
일단은 경비반장님께 모두 넘겼다.
백사헌의 종이배는 아직 반응이 없다. 아마도 이번 신입 얼굴을 다 확인하진 못한 듯하다.
그리하여 오늘, 근무 형태가 조금 변경되기까지 시간이 흐른다.
[단독 근무라! 지루함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친구. 이 재치 넘치는 만담꾼이 당신의 옆에 있으니!]
그렇다.
바로 야간 1인 근무다.
회사에서는 내가 일주일 넘게 얌전히 근무하자, ‘이 정도까지 시험해 보자’라고 생각한 듯, 나를 프론트에 단독 배치해 놓았다.
‘나라면 이런 시도 안 했다….’
하지만 하니까 괴담 세계관의 미친 회사겠지.
경비반장과 박민성 주임은 각각 본래 하던 업무를 하며, 혹시 내 쪽에서 보안 호출이 들어오면 출동하는 형태.
그리하여 나는 프론트에 열린 이동장 형태로 덩그러니 남았다.
그 결과.
“…….”
“…….”
프론트에 접근하던 사람 열 명 중 일곱 명꼴로 머뭇거리고 있다.
‘후우….’
그나마 며칠간 이동장을 봐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보안팀 호출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
“저기…. 이동장님? 직원님? 황혼 등급 ‘스스로 쿠키’에 접근하려고 합니다만.”
출입증 배부
나는 연기를 이용해 글자를 만들고, 동시에 이동장에서 신체의 일부, 왼손만을 꺼내어 출입증을 등록하고 상대에게 던졌다.
“가, 감사합니다…?”
안전한 이용 요망
도망가듯 복도로 들어가는 직원들에게서 의외로 일을 잘한다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으로 추정되는 이동장 앞에서 다 들리게 그런 평가 하시는 거 아닙니다….
‘신입이신가.’
유독 많이 보인다.
입사 시험 이후로 며칠이 지났으나, 슬슬 신입들에게 별관 등을 소개하고 스스로 이용해 보도록 만드는 타이밍이긴 했다.
나도 해봤으니까.
‘……이맘때에 전용 장비를 만들었던가.’
D조의 상사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던 시절이 떠오른다.
‘…….’
그렇게 조용히, 연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별관의 현관문이 열리고, 또 다른 정장 차림의 사람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저, 안녕하십니까….”
또 신입인 듯했다. 장신의 남성이다.
그런데 이 자는 걸어들어오다가 프론트에서 나를 보고 굳었다.
‘음. 그럴 수 있지.’
질문 : 출입증의 필요성
“…!”
내가 만든 문장에 신입직원의 발이 빨라지더니, 거의 허겁지겁 프론트까지 온다.
‘…어?’
정확히는, 열린 이동장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와 노란 불빛을 보고.
마치 알아보는 것처럼….
…….
……!
나는 다급히 문장을 띄웠다.
질문 : 입사 당시 상황
별관 지하 13층의 방문 여부
“…!!”
타다닥, 프론트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커진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이 말투.
체격, 아마도 정중한 표정, 비교적 긴 머리….
“저, 아마도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시는 게 아닐까, 식별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질문 : 이름
…….
천천히, 녹아내린 모자이크 같은 얼굴에서 입이 열린다.
“허운입니다….”
…….
역시.
“…직원님.”
나는 다시 만난 동기를 마주했다.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입사 이유
“…찾아야 할 게 있어서요.”
프론트 책상에 놓인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풀린다.
CCTV가 있으니, 더 자세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내 추측이 맞았던 건가.’
아무래도 소원권으로 인간이 된 장허운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다시 백일몽에 입사한 모양이다.
“저, 직원님.”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건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는 안 될 것 같다.
‘일단 서로 인지는 했으니까 됐어.’
출입증 배부
“……감사합니다.”
나는 상대가 말하는 황혼 등급의 어둠에 출입 권한을 배정해 주었다.
하지만 장허운 씨는 잠깐 별관 안을 들여다보더니, 곧 내게 출입증을 반납하고 밖으로 나갔다.
“또 찾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
‘…처음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건가?’
별관 프론트에 안개를 쓰는 보안팀 직원이 있다는 것.
즉, 내가 있다는 것 말이다.
가능성은 있었다.
‘…후.’
일단, 그래도 인간으로서 무사하다는 점을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리조트 직원으로 오염된 상태로는 꿈결 추출이 되지 않아 현장탐사팀으로 합격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백사헌에게 괜히 물었나.’
다른 정보를 알아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금방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마침 사람도 없으니, 나는 이동장의 연기 속에 묻어두었던 백사헌의 종이배를 CCTV 사각지대, 철장의 그늘이 지는 곳으로 꺼내어 폈다.
‘아.’
마침 그사이에 답변이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까, 신입 중에 이전에 다니던 사람이 재입사한 경우가 있는지, 아는 얼굴이 있는지 물어본 내 질문에 대한 백사헌의 응답은….
없습니다
…….
뭐?
백일몽에 재입사한 신입 없고요, 제가
아는 얼굴도 없어요 뭐 유명인 같아 보
이는 사람도 없던데
이거 알고 싶던 거 맞습니까?
…….
잠깐만.
그럼….
지금 별관에서 나간 장허운은 뭐지?
…….
저기요
확인했잖아요 왜 답이 없습니까?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종이배를 다시 접어서 연기에 넣었다.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 몰아친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 둘 다 거짓말일 가능성, 둘 다 진실이나 오해가 있을 가능성.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방법도 떠오른다…….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가장 간단한 방식이.
…….
‘브라운.’
[오, 무슨 일이죠 친구?]
방울 덕에 명징한 정신과 둔탁하게 지나가 버린 흐릿한 충격 속에서, 내 이성이 묻는다.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는, 내 옆에 붙어 있는 착한 친구에게.
‘아까 그 사람, 내가 알던 장허운… 들소 가면을 쓴 백일몽 주식회사의 직원이 맞았나?’
그리고 답변은.
[이런, 그건 그 누구보다 노루 씨가 더 잘 알 텐데 말입니다!]
내가?
[그럼요! 하지만 잊어버린 것 같으니, 이 사회자의 힌트를 하나 들어보십시오…….]
듣기 좋은, 고전적인 억양의 방송인 목소리가 세 단어를 말한다.
[플라워 골든 리조트.]
…!!
‘아.’
나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잃어버리지 않은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
플라워 골든 리조트의 마스코트.
그건 계약과 성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난 마스코트의 권속이자 리조트의 직원인 장허운 씨를 언제든지 부를 수 있었다…!’
[정답입니다!]
[당신은 그자를 친히 리조트에 정규직으로 고용까지 해두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해선 뭐든 마음대로 알 수 있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지요.]
‘맞아.’
애초에 그래서 재난관리국으로 그의 신변을 양도할 수 있던 것이기도 했다.
다만 재난관리국에 신변이 넘어갔기 때문에, 거기서 오염된 장허운 씨를 사람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건드리지 않았던 거고.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한번 불러보는 편이 낫다.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인간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니 안심해도 되니까.
‘…….’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불렀다’.
장허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