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하고 좀 못될 것
-진정한 교류
“한 번 더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 하나?”
막다른 복도 끝, 남궁상은 살짝 닫혀 있는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섣불리 들어갔다간 돌이키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이, 괜찮겠지.’
남궁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의든 타의든 대장을 맡게 된 이후부터 계속 무거워지고 있는 어깨였다. 마천각은 사실상 적진이나 다름없다. 그 적 진의 한복판에서 떠밀리듯 대장이 되었으니 이만저만 부담이 되는 게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염도나 빙검, 유은성과 진소령에게 자문을 청하고 싶었지만 이들은 학생들 간의 사소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어차피 사절단으로 온 것이니만큼 생사지로의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각자 ‘천무학관의 무인’으로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기에는 이곳 마천각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래서야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뜬금없이 나타나 미폭국 어쩌고 하던 남자가 괴이한 초대장을 남기고 간 시점에, 남궁상에게는 무지의 어둠을 밝혀줄 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초대에 응하기로 했으니 험한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시급하게 정보를 긁어모아야 할 판국이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위치를 파악해서 찾아온 곳이 이 복도 끝, 정보 담당관으로 결정된 비연태의 방문 앞이었다.
남궁상은 마하령의 마뜩찮은 반응과 여성 관도들의 적대적인 평가를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방문을 두드렸다. 이미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똑똑!
들어오라는 말에 남궁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발을 들이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비연태의 방은 뜻밖에도 이미 사람들이 북적이는 상태였다.
열기 충천의 주범들은, 조그만 탁자 앞에 둘러앉아 문서들을 펴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덩치 큰 뚱보 셋이었다. 비연태, 변태남,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내가 등을 돌 리고 앉아 있었는데, 다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들 무슨 시험 준비라도 하시는 겁니까?”
“아, 남궁 대장인가. 잠시만 기다려 주게. 아직 작업이 덜 끝나서.”
자리에 앉은 채 비연태가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기다리지요.”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해진 남궁상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비연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음은 관설지.”
관설지? 남궁상은 갑작스런 호명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자 한치.”
비연태의 유급 동료이자 애소저회의 부회주인 변태남이 즉답했다.
“정보 수위는 이급, 정보 단가는 이조 삼항으로 적용합니다.”
남궁상 쪽에서는 등만 보이는 사내가 연이어 답했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좋다. 다음 화설옥.”
“두자.”
변태남의 즉답에 나머지 사내도 질세라 답했다.
“정보 수위는 삼급, 공개 단가는 삼조 일항 적용합니다.”
‘저 목소린??
남궁상은 그제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달았다. 그는 분명 주작단 중 한 명인 금영호가 확실했다. 도대체 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음, 남궁산산.”
이번에는 남궁상도 무척 잘 아는 이름이었다. 혈육, 그것도 쌍둥이니 오죽하겠는가. 심상찮은 대화에 남궁상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역시 두 자.”
“잠깐!”
변태남의 답을 금영호가 제지하고 나섰다. 비연태는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말해보게.”
“그건 낡은 정보입니다. 남궁산산은 최근 식이 조절을 통해 두 자였던 것을 한 자 아홉 치로 줄였습니다. 정보 갱신을 요청합니다.”
“승인하네. 남궁산산, 두 자에서 한 자 아홉 치로 변경 승인.”
“확인했습니다. 신규 정보이므로 일급, 단가는 일조 구항으로 책정하겠습니다.”
“그럼 계속 다음으로 넘어가지. 마하령은?”
비연태가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남궁상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두 자 한 치와 미확인 수치가 하나 더 존재.”
잠시 사내들 사이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음… 그 수치는 봉인해 두도록. 혈겁을 부를 수 있네.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잊지들 말게.”
“알겠습니다, 회주.”
일제히 대답하자 비연태는 서류를 덮으며 선언했다.
“오늘은 손님이 왔으니 이쯤에서 중단한다.”
사내들이 척척척 문서들을 정리하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남궁상은 미심쩍은 눈길을 비연태에게 향했다.
“비연태 선배님, 저 문서들은 어디에 쓰이는 서류들입니까?”
“아, 소중한 학술 자료지.”
남궁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술 자료요? 정말 학술 자료입니까?”
“물론! 면학 활동의 필수 지참물, 음… 그보다는 학문의 집대성을 위한 연구 자료라는 게 더 정확하겠군.”
비연태는 진지한 얼굴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 그렇군요. 선배님에게 그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복잡한 수치나 금전 단위가 논해지는 것을 보면, 일종의 회계학 같은 겁니까?”
끊임없이 언급되던 여관도들의 이름을 애써 무시하며 남궁상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비연태의 답은 역시나였다.
“설마. 일종의 여성학일세.”
.여, 여성학입니까?”
“그렇다네. 특히 오늘의 문서들은 미녀들의 삼부수치와 정보회계학을 접목시킨 궁극의 자료들이지. 이 학문 체계가 집대성되면 미래에는 남자들이 배워야 할 궁 극의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될 걸세. 어때, 자네도 우리와 함께 연구해 보겠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런데 금영호, 자넨 왜 여기 있나?”
남궁상은 정중히 거절하며 아예 말을 돌려 버렸다. 난감하기도 하거니와, 뭣보다도 금영호가 왜 여기 있는지 의아했다. 남궁상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금호상회의 아 들, 주작단의 황금두꺼비와 동일인물인 그 금영호가 언제부터 비연태나 변태남과 의문의 갑론을박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금영호 본인은 태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몰랐나? 난 여기 애소저회의 회계를 맡고 있다네.”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말투였다.
“선배님들, 그게 사실입니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남궁상은 비연태와 변태남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잠깐 더듬으며 비연태가 대답했다.
“당연히 사실이지. 한 일 년 된 것 같은데?”
“그래, 그쯤 되었지.”
서류 정리에 여념이 없던 변태남도 가볍게 맞장구쳤다. 같은 주작단의 동료로서, 그리고 단장으로서 일 년 동안이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상당한 충격이 아 닐 수 없었다. 게다가 금영호뿐만이 아니었다.
존재감이 미약한 터에 아까부터 시야 한 귀퉁이에서 그늘로만 인식되던 왼쪽 방구석으로 남궁상은 시선을 옮겼다. 침상 위에 여리여리한 몸매의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침대 이불보를 깔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의 한 중심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수상쩍은 열기에 밀려난 듯한 모습으로, 청년의 연분홍빛 옷엔 매화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자넨 준호 군 아닌가?”
남궁상이 방구석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화산파 제자 윤준호였다.
“그렇습니다. 용케 알아보셨군요.”
윤준호는 어두운 그늘에서 애소저회 정예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소외된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창백한 안색이었다.
“자네가 왜 여기에?”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실망했다는 눈으로 남궁상이 자신을 바라보자 윤준호는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거렸다.
“아, 아닙니다. 사실 오늘은 딱히 달리 갈 곳도 없고, 그저 이 방은 제 방이라서…….”
“…..그냥 애소저회의 면학 활동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해도 굳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는데.”
윤준호는 남궁상의 불신에 찬 시선에 각혈이라도 할 법한 얼굴이 되었다.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비연태 선배님과 같은 조여서 같은 방을 배정받았을 뿐입니다.”
“……..”
남궁상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숙소 배정은 원래 같은 조에 속한 두 명이 방 하나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역시 이래저래 문제가 많은 방 배정이었다.
“유은성 노사님께 부탁은 해봤나?”
그의 질문에 윤준호는 한풀 더 기가 꺾여서는 힘없이 답했다.
“안 그래도 노사님을 찾아가 여쭤보았더니, 같은 조에 방 바꿀 사람이 있으면 교체해 주신다 하셨습니다만…
“그런데?”
“다들 그냥 사양하겠다고…….”
‘왠지 그 마음도 납득이 되어버리는군.”
남궁상은 윤준호에게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안됐지만 적응해 보게.”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남궁상도 잔혹하게 거기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남궁상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작은 방에 대체 몇 명이 들어와 있는 거야!’
자신까지 합하면 이미 세 명이 인원 초과이거늘, 알고 보니 윤준호의 옆에 앉아 면벽을 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지 않은가!
그는 벽과 유사한 색의 얇은 천 조각을 머리에 걸친 채 심지어 의복까지 벽과 비슷한 색으로 차려입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벽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것처럼 보 이는 것이, 아마 작정하고 은신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공을 수련해 온 남궁상마저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니, 누군진 몰라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쪽에 계시는 이는 뉘시오?”
남궁상은 경계심 어린 존댓말로 물었다.
“눈썰미가 좋으시오. 그냥 안 보고 지나쳐도 상관없는데.”
무척이나 의기소침한 목소리였지만, 남궁상은 듣자마자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장 형 아닙니까? 아니, 장 형은 또 무슨 일로 이런 곳에 있습니까? 그것도 그런 독특한 모습으로.”
“그냥 잠시 피신 중이니 신경 쓰지 말고 말씀들 나누시구려.”
평소의 당당하던 장홍은 온데간데없어졌는지, 말의 끝 무렵엔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피신? 대체 무엇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으로부터. 더는 알 것 없소이다. 그냥 단순한 개인 사정이오.”
장홍은 머리를 가려두었던 천을 내리더니 남궁상을 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남궁상도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주제넘은 짓일 수도 있 지만, 그는 대장으로서 관도들의 문제에 대해 숙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게 사건으로 발달될 가능성이 높을 때는 더욱더.
“흠. 원한 관계요? 일단은 대장 직위를 맡은 만큼, 대략 장 형이 어떤 위협을 느끼는지는 알려주시는 편이…….”
장홍은 원한 관계라는 부분에서 몸을 움찔했다.
“원한 관계라… 아마 그렇겠지. 아마도…….”
회한에 담뿍 젖은 목소리였다. 남궁상은 더욱더 걱정이 되었다. 원한 관계라면서 저렇게 숨으려 하다니, 누가 봐도 장홍 쪽이 ‘원한을 산’ 입장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서 피신이 되겠소?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금방 알려질 텐데.”
장홍은 고개를 저었다.
“그 문제라면 은신술로 보완하고 있소. 그리고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오. 어떤 여인이라도 설마 여기까지 들어오진 않겠지.”
아무래도 그가 피하고 있는 인물은 여성인 모양이었다. 특히 애소저회를 꺼리는 여성이라면 아마도 미인일 확률이 컸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곳이 안전하긴 하겠군.’
입맛을 다시는 남궁상에게 비연태가 물었다.
“그런데 무엇을 원하나?”
“아! 선배님께 정보 담당관을 맡아주십사 부탁하려고 왔습니다. 수집해 주셨으면 하는 정보도 있고요.”
“정보 담당관? 허허허. 이제야 대외적으로 나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군. 좋아. 정보 수집이야 본래 내 일이니까. 그래, 누구 것이 알고 싶나? 진 소저?”
비연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 소저라뇨?”
남궁상이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자네라면 응당 진 소저의 정보를 부탁하려는 것 아니었나?”
역시 비연태는 정보통답게 연애 정보에도 빠삭했다.
“절대 아닙니다. 최소한 선배님이 여성학이라 말씀하시는 정보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남궁상이 대답했다.
“그거 말고도 뭔가 궁금할 게 있단 말인가?”
비연태에게 있어선 그것보다 절실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상에게는 절실하고도 다급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우선은 우리가 초대받아 갈 곳이 어딘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으음, 이제부터 찬찬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오전, 천무학관 사절단 일행의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담한 화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붉은 꽃들을 잔뜩 쌓아놓은 채 꽃잎을 따서 바 구니에 담아 나르던 미폭수호단 여인들은 끔찍한 방문객을 맞이해야만 했다. 바로 비연태였다.
“꺄아악! 변태다!”
여인들은 비연태를 보자마자 소란을 떨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살이 뒤룩뒤룩 찐 사내가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으니, 생리 적 혐오감을 담은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그러나 비연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사방의 미녀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눈에 띄는 미녀마다 놓치지 않고 뇌리 속에 새겨둘 태세였다. 그 는 여자만 보면 외모와 삼부수치를 기억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비연태의 시선 끝자락에, 화원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정자(亭) 안에 앉아 꽃바구니에 둘러싸여 있는 미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자군이었다. 그는 여자만 보면 외모와 삼부수치를 기억하는 습관이 있었다.
자군은 두어 가지 요리가 차려진 주안상 앞에 앉아 있다가 비연태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우리 미폭수호단과 나 미폭공자가 머무르는 곳엔 아름답지 못한 자는 다가올 수 없소!”
꽃바구니를 목숨처럼 부둥켜안고 미폭공자 자군의 옆으로 속속 집결하던 여인들은, 그의 낭랑한 목소리에 황홀한 눈길을 보내며 재잘거렸다. 병약 미소년도 좋지 만 역시 왕자님일 때가 더 멋지다는 둥, 미폭국의 미에 대한 추구는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둥,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들이었다.
미폭국 특유의 무형 폐쇄 공간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서도 비연태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쯤은 충분히 예상했던 것. 밤새 철야 작업으로 그는 애소저회 간부 들을 동원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온 참이었다.
미폭공자 자군, 그는 여성들에게는 구름처럼 부드러운 한편 남자들의 존재는 웬만하면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연태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남자들은 언제나 소중한 고객이자 동료였다. 그들이 벌이는 연애 사업만 해도 미소저들에 대한 정보를 갱신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어찌 남성들의 존 재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자군이라는 자는 수려한 용모와 문무를 겸비하고 여성들의 특이 취향을 소화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긴 했지만, 남성들을 등한시하는 것은 기필코 치명적인 결함이 될 터였다. 비연태는 미숙한 자군에게 깨달음을 내려주기로 했다.
“흐음. 육체는 무인이지만, 아름답고 고고한 것을 좋아하고 겁이 많은 심약한 성격. 고결함과 이상, 독특함을 추구하는 정신. 평소 생활은 늘 지루한 느낌. 즉, 미폭 공자의 진짜 이상형은 구 할 구푼의 확률로 거기 있는 소저들 중엔 해당 사항 없다. 그렇지 않나?”
비연태는 단조롭고 느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미폭수호단 여인들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창! 챙! 차랑!
여인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고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허, 헛소리! 우리 자군 공자님은 한 사람의 것이 되지 않아!”
“그래, 맞아맞아! 꺼져라, 변태! 꼬치가 되기 전에!”
분노하는 여인들의 반응을 보며 비연태는 한가롭게 허허 웃었다.
“허어, 이런이런. 오해하지 마시구려. 소저들의 말이 맞소.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 실제와 다를 수 있지. 하나 그가 좋아하는 유형을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 겠소?”
“그, 그건……!”
반박할 수 없었는지 여인들은 웅성거리며 자군의 눈치를 살폈다. 작위적인 자세로 홀로 쓸쓸히 술잔을 기울이던 자군은 훗 하고 웃으며 술을 마셨다. 이번에는 고
독한 방랑검객의 모습을 연출하려는 듯했다.
“천하는 넓다 하나 대장부의 지기는 몇이나 될꼬! 알지도 못하는 자가 까마귀처럼 깍깍대는구나.”
비연태는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할 말을 해버렸다.
“훗. 자네의 이상형은 강인한 여신! 차갑고 이지적이며 신비하고 좀 못될 것. 그리고 최중요 사항은 자네에게 냉혹해야 한다는 것이지! 자신은 쳐다봐 주지도 않는 고고한 미녀일수록 마음이 끌린다! 그렇지 않나?”
“……”
뜨끔해하는 자군을 보며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아무래도 비연태의 말이 정답이었던 게 확실했다.
챙강! 찰캉! 사방에서 미폭수호단이 손에서 무기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군님은 못된 여인을 좋아하셨던 건가?”
“흑흑, 착하고 상냥하게 살려고 노력해 왔는데.”
웅성거리는 여인들을 진정시키려 자군이 뭐라고 말하려던 때, 비연태가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괜찮소, 괜찮아.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는 법. 마천 십삼대 동남쪽 야외 정원에서 애소저회의 간부들을 찾으면 세심한 상담 후에 소저들 각각의 개성에 맞는 묘안을 연구해 주리다. 애소저회, 기억해 두시오.”
“헛소리! 변태의 도움 따윈 필요없어!”
“그래그래, 우린 자군님을 믿어요!”
여인들은 그렇게 외치면서 제각기 품속에서 지첩을 꺼내 들고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개중엔 필기도구를 지참하지 못했는지 치맛단을 북 찢어 연지로 연락처를 적 는 경우도 있었고, 눈을 질끈 감고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의 기록을 남기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자군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비연태에게 화살을 돌렸다.
“애소저회? 그런 수상쩍은 단체를 홍보하려고 우리 미폭국에 와서 소란을 빚다니! 어서 돌아가지 못할까, 이 잡상인!”
“무슨 말씀을. 이 몸은 본래 자네와 거래를 하러 온 것일세. 방금 것은 단순한 주의 환기 정도로 생각해 주게.”
“거래라니, 나는 그런 아름답지 못한 행위는 하지 않.. .!”
휘릭!
자군은 말하던 중 비연태가 자신을 향해 던져 준 책자 하나를 무심결에 받아 들었다.
“후회하진 않을 걸세.”
미인도감(美人圖鑑).
표지에 적힌 제목을 파악한 자군은 냉큼 책을 펼쳐 들고 휘리릭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저어 미폭수호단의 여인들을 정자 밖으로 물러나게 한 후 비연태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뚫어지게 책장만 넘겨보던 그는, 마침내 감탄을 터뜨렸다.
“이… 인정하긴 싫지만, 훌륭하군!”
마지막 장을 덮은 자군의 최종 감상이었다. 마치 막혀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는 듯한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가? 거래 재료가 될 것 같은가?”
“크흠, 이 정도 자료라면 확실히 거래할 만한 가치가 있지. 이 정도면 앞으로 미폭국 건설의 초석이 될 만하오. 감탄스럽군.”
어느새 호의적인 자세가 되어 말투도 한결 공손해진 자군이었다.
“계속 그 말이 거론되는 걸 보면, 미폭국 건설이란 말은 실로 농담이 아닌가 보군.”
“아, 본 공자의 오랜 염원이라 할 수 있소. 아름다운 미녀들이 웃고 떠들며 놀 수 있는 낙원을 만드는 것 말이오. 그리고 난 그 낙원의 군주가 되는 것이지.” 물론 그 낙원에 남자는 오직 자기 자신 한 명뿐이었다.
“호오, 그것참, 매우 훌륭한 꿈이군. 사내대장부라면 자고로 그 정도 꿈은 꿀 줄 알아야지. 그런데 그 미폭국이라는 것은 나의 꿈과도 어쩐지 상당히 비슷한 데가 있군.”
지금 이곳에는 이들에게 꿈과 망상의 차이를 뚜렷이 구별시켜 줄 만한 뛰어난 선생이 부재중이었다.
“당신도 미폭국 건설을 꿈꾸는 거요?”
경계심 서린 목소리로 자군이 물었다. 이런 일에 동지가 생긴다 해도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미녀라는 희소 귀중 자원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때 문에 경쟁자가 늘어나면 불리해질 뿐이었다. 특히 저렇게 범상치 않은 경쟁자는 더더욱 사양이었다.
“아니, 내가 꿈꾸는 곳은 미폭국이 아닐세.”
“그럼 뭐요?”
날카로운 질문에 비연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문란루주!”
“문란루주?”
“그렇소. 보다 정확히는 ‘문란루’라는 이름을 지닌 누각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특급의 미녀들이 최상의 춤과 최고의 노래를 파는 곳, 그곳이 바로 문란루라네. 극 상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이에게 알리는 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이지.”
“오오! 그런 고귀한 사명감이!”
자군이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 이토록 훌륭한 사명감을 지닌 사내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적할 건 지적해야 했다.
“하지만 문란루(紋蘭樓)라니, 이름이 좀 천박한 것 같지 않소? 난 무엇이든 이름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오만.”
“천박하다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이름 아닌가?”
“그, 그건 그렇소.”
자군이 순순히 인정했다.
“게다가 문란(紊亂)이 아니라 문란. 즉, 둥근 문양이란 뜻이라네.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물레방아가 그 문란루의 상징이 될 것일세.”
“오오, 물레방아라!”
“처음에는 풍차를 써볼까도 했지만, 역시 물레방아가 제격이지. 그 물레방아는 강호 유흥 업계의 전설적인 상징이 될 것일세. 수많은 미녀들이 그곳에서 춤과 노 래를 팔게 되겠지. 하늘하늘한 옷들을 걸치고 말일세. 옷은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좋다는 게 내 지론일세.”
“그건 동감이오.”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를 만난 두 사람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뜨거운 혼이 담긴 시선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다.
“그럼 어떤가? 이제 마음이 바뀌었나?”
“음, 지음(音)을 만난 자리를 자축하는 의미로 거래에 응하겠소.”
“좋아. 거래 내용과 형식은 정보의 가치와 난이도에 따라 서로 적절히 공평을 기해 차근차근 조정하도록 함세. 그럼 일단, 자네가 궁금해하는 정보는 어떤 여인에 관한 것인지 말해보게나.”
“검은 제비.”
자군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요즘 그가 계속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 미녀의 마음을 손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방법, 그러니까 뛰어 난 미모와 매력만으로는 그녀의 마음이 쉽사리 넘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는 것이 선결 과제이리라.
“검은 제비라면 연비, 그 의문의 현의 미녀를 말하는 거겠지?”
“바로 그렇소. 연 소저야말로 장래 미폭국의 안주인, 내 미래의 반려자니까 말이오.”
자군은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사방팔방에 마구잡이로 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군, 잘 알겠네. 그럼 나도 거래 조건을 말하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비연태는 첫 번째로 거래할 정보에 대해 차분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사절단이 온 이후 처음으로 흑백양도 간에 진정한 교류 활동이 벌어지는 순간 이었다.
***
다음날 저녁 술(戌時) 초.
초대장에 적힌 대로 사절단 일행은 동정호 입구의 부두에 집결했다. 초대장에는 ‘그곳’으로 가는 배가 오면 그 배를 타고 와달라고 했다.
그 말에 따라 남궁상은 사절단 전원을 이끌고 나루터로 향했다. 전원 초대라고 했으니 꿍꿍이야 어찌 됐든 이쪽도 그대로 응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정말 그곳 맞습니까?”
남궁상은 아연해하는 표정이 되어 일행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그런 것 같소만……..
백무영이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 옆에 자리한 용천명과 마하령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정말 놀랍군요.”
들어올 때만 해도 무시무시한 귀신 형상으로 그들을 긴장케 했던 귀문 부두는 지금 휘황한 등불들로 화려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주위로 화톳불들이 줄지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즐겁게 다녀오시라고 배웅하는 모양새였다. 잔뜩 긴장하고 나온 사절단 일행은 한마디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하필 밤에 부둣가로 나와서 배를 기다리라기에 좀 더 을씨년스런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했더니, 이건 완전히 잔칫날이네요.”
사절단 일행에 섞여 있던 연비는 옆에 선 나예린을 바라보며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구에 바글거리는 엄청난 인파 때문에 부두는 심히 부산스러웠다. “그러게요. 설마 이렇게 소란스럽고 복잡할 줄이야… 사람들이 너무 많군요.”
나예린도 주위를 빙 둘러보며 감상을 피력했다. 설마 하니 마천각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초대한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런 시각에 부둣가가 이렇게 붐비는 것일 까?
그녀의 말대로 여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모여 있었다. 마치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웃고 떠들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 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어딘지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연비와 나예린 외에도 함께 모여 있던 천무학관 사람들은 죄다 주변을 돌아보며 술렁이고 있었다. 마천각의 괴이한 초대가 사절단 일행을 당황시키는 것이 목적이 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만했다.
“린, 괜찮아요? 안색이 약간 좋지 않은데?”
연비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나예린을 살펴봤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그게 그건데’라고 할 정도의 미미한 차이였지만, 나예린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음을 눈치 챘 기 때문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당황한 것뿐이에요. 제 마음의 수련이 덜된 탓이죠.”
하지만 아무리 수련을 해도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계속 안 되는 법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나예린은 좋아하지 않았다. 성향이 그렇게 자리 잡혔 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거대한 의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무방비하게 있으면 서 있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사념의 덩어리 가 흘러들어 와버리고 만다.
다른 천무학관 일행들 속에 섞여 있는데도 지나가는 행인들은 가던 길도 되돌아오며 나예린이나 연비가 서 있는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 해지기는 했지만, 나예린은 여전히 그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이런, 이쪽에만 오면 길을 잃어버리나. 왜들 저렇게 두리번두리번 흘끔거리는지 모르겠네요. 린의 얼굴 닳으면 어쩌려고.”
연비가 주위를 둘러본 뒤 투덜거렸다.
“사실 다들 연비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굳었던 얼굴을 풀며 나예린이 웃었다. 다른 사람이 듣기엔 별말 아니었지만, 그녀로선 지금 순간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농담이었다. 이 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 마 곁에 연비가 있어준 덕분이리라.
“으윽. 그럴 리가 있겠어요?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네요.”
그러면서 연비는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 검은 우산, 현천은린을 활짝 폈다. 그리고는 예린을 부드럽게 자기 옆으로 끌어들였다. 우산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감쌌 다.
“어때요? 이러면 조금은 가려지겠죠?”
‘웬 우산이야’라며 쳐다보고 지나가는 이들은 더 많아졌지만,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가리는 것엔 즉효였다.
그러나 사절단 일행 중에는 그 모습을 보고 연비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둘이나 있었으니, 바로 이진설과 장홍이었다.
이진설의 경우는 그저 ‘나도, 나도 우산 사서 예린 언니랑 같이 쓸 거야!’라며 옷고름을 질끈 무는 정도였지만, 장홍의 경우는 좀 더 심각했다.
“음, 저렇게 유용한 은신 도구가 있었다니. 이보게, 효룡, 휘, 미안하지만 좀 더 이쪽으로 밀착해 줄 수 없겠나? 누구라도 자네들 사이에 나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선 곤란하다네.”
장홍은 행여 말소리가 새어나갈까 최대한 소리를 낮추며 땀을 뻘뻘 흘렸다. 어디서 독화살이라도 날아올까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탐관오리 같은 모습이었다. 효룡 과 모용휘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뻣뻣하게 붙어 섰다. 탁 트인 지형에서 단체로 줄을 선 마당에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냐고 둘 다 묻고 싶었지만, 핼쑥한 얼굴 로 절박하게 부탁하기에 딱해서 그냥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무튼, 연비에서부터 모용휘에 이르는 이들이 현재 바라는 것은 모두 똑같았다.
“빨리 배가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연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배에 타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사절단 좌측으로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여인들 둘이서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주위를 반복해서 둘러보지만 찾고자 하는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복장이나 말투로 미루어보면 마천각의 누군가를 따라온 시녀들 같았다. “마천각에서 시녀를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두고 있다니. 주인은 상당한 재력가일지도 모르겠네요.”
연비가 지나가는 말처럼 나예린에게 속삭였다.
매우 대비되는 색깔의 두 사람은 운집한 군중의 무리를 이리저리 헤치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영령 아가씨가 이쪽으로 사라진 게 맞니?”
“맞다. 나는 이쪽으로 알고 있다.”
둘 중에 발랄해 보이는 시녀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거론되었다. 그런데 그 처음 들었어야 할 그 이름이 나예린은 생경하지 않았다.
‘영령?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분명히…….’
잠시 기억을 뒤져 보자 스쳐 지나갔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아, 그렇군. 옥 교관이 입에 담았던 그 사람.”
그제야 납득이 간다. 나예린에게 필적할 기도라는 평에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호승심은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기회가 아닌 듯했다.
‘이곳에 왔다는 것은 저 배를 탄다는 것이겠지? 그럼 저 배가 도착하는 곳에서 혹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인연이 있다면 분명 그렇게 되리라.
“왜요? 무슨 생각해요, 린?”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나예린을 연비가 현실로 끌어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천각에서도 나중에 한 번 만나보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이 생겨서요.”
살짝 미소 지으며 나예린이 대답했다.
“어머, 별난 일이네요. 혹시 남자?”
“아니요, 여자예요.”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돼서.”
연비가 싱긋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 지금 뭐라고……?”
“아뇨,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연비는 나예린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때, 어두운 수면 저편에 불빛 하나가 나타나더니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불빛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하긴, 이 많은 사람들을 태우려면 하나로는 부족했 을 것이다.
“배가 왔군요. 의외지만.”
막 도착한 세척의 배를 바라보며 나예린이 말했다.
“그러게요. 저 배, 생각했던 것보다 뭐랄까…….”
연비는 우산을 접으며 잠시 뒷말을 찾았다.
“상당히 화려하군요.”
나예린이 뒷말을 받았다. 연비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마주쳤다.
“맞아요.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침한 배를 보낼 줄 알았더니.”
도착한 배는 상상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돛이 너덜너덜한 유령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았다. 다만 지나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화 려했다. 돈이 남아돌아서 배 여기저기에 돈을 처바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설마 홍등가 같은 곳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요?”
배의 생김새는 연비가 결국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그렇게 평할 만했다. 장식도 화려하고 불빛 속에서 휘황한 색색의 등이 빛을 발하는 배였지만, 그것들은 홍등가 에 걸린 색등처럼 너무도 경박한 빛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빛에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꽤나 화려한 복장을 갖춘 마천각의 사람들이 그 배를 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들이 탈 자리가 있을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요?”
아직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요. 하지만 이렇게 사람도 많으니 이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하룻밤에 세 척의 배가 운행된다니,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 배의 목적지로 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 다들 움직입시다!”
부둣가 앞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남궁상을 위시한 일행들은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정해진 배로 승선하기 시작했다.
사절단 일행이 타는 배는 적, 녹, 황, 주, 청으로 색색이 빛나는 오색등이 배 위를 화려하게 빛내는, 가장 요란스레 장식된 배였다. 음침하기는커녕 똑바로 쳐다보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곳곳에 설치된 금장식들이 불빛을 받아 금빛 휘광을 발하며 배에 올라타는 사절단 일행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
대나무 발 너머에 드리워진 한 그림자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영령의 모습은 지극히 공손하고 경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저 대나무 발 너머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 깊숙한 곳에 새겨진 절대적 명령이라서 영령은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다 는 점이 아쉬울 뿐.
“그럼 부탁하겠다, 령.”
사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해 있던 영령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제 생명은 주군의 것, 반드시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그 한순간, 영령을 굽어보고 있던 인영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자신의 복종을 나타내기 위해 그림자 건너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영령은 그 짧 은 흔들림을 볼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