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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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주인님.”
“우걱우걱… 아드득! 왜요?”
소연은 신나게 먹고있는 동천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어제 수련이를 만나러 갔거든요?”
동천은 먹기에 바빠 건성으로 대꾸했다.
“얌냠. 근데?”
“네, 그런데 그 와중에 사 아가씨를 만나 뵙는데 오늘 좀 오시라고…….”
“커헉―! 무, 물! 물물물!”
음식물이 목구멍에 걸린 동천이 허우적대며 물을 찾자 소연이 급히 물을 떠다 주었다. 그것을 꿀꺽꿀꺽 들이마신 동천은 잠시 살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반응했다.
“뭐이? 아, 아가씨께서 이 몸을 찾았다고?”
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돌아왔으면 응당 한번 보러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던데요.”
불안해진 동천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물었다.
“그, 그래? 그런데 그때 아가씨께서 화나신 듯한 눈초리였어?”
잠시 생각한 소연은 느낀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건 잘 모르겠고요. 예전에 말씀하시던 그대로의 분위기와 목소리이셔서 아마도 화까지 나시지는 않은 듯 하셨어요.”
동천은 냅다 소연의 머리를 때렸다.
딱!
“야! 원래 화가 나도 무표정한 인간이 그 녀어어언……. 흠흠! 정정하마. 원래 화가 나셔도 무표정한 분이 아가씨인데 니가 뭘 안다고 분위기와 목소리만 듣고 화가 나시지 않은 듯 하다는 거야? 엉?”
때아닌 날벼락에 집어먹던 젓가락을 바닥에 떨군 소연이 아픈 머리를 비벼댔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의했다.
“아야아, 아파라… 그냥 그렇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이었을 따름이었어요. 아니면 마는 거지 왜 때리시고 그러세요.”
의외의 반항이자 동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니가 감히 눈을 부릅떠?”
소연이 위축되어 말했다.
“그, 그건 주인님이 떴잖아요.”
“아니 이게 그래도? 확! 엎어버릴라!”
성질이 난 동천이 식탁을 뒤엎으려 했다.
“꺄악!”
겁에 질린 소연이 소리까지 질러줬건만 뒤엎어져야할 식탁은 무사했다. 시도는 하려고 했는데 아직 먹지 못한 음식들이 산재해 있자 자신이 저지를 뻔했던 엄청난 잘못을 깨닫고 은근슬쩍 식탁에서 손을 뗀 것이었다. 대신에 그는 소연의 양 볼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아 짜증나. 왜 괜히 그딴 데를 가서 일을 벌어오고 지랄이야? 도대체가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돈을 잘 벌기나 하나, 뒷간에 가기를 잘 하나, 아니면 비위를 잘 맞춰 주기나 하나. 이건 도무지 근심만 쌓이게 만드는 계집이라니까?”
소연은 거기에서 뒷간 이야기가 왜 나올까 했지만 물어봐 봤자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이기에 아픈 볼이나 쓰다듬기로 했다. 화정이는 동천이 화를 낼 때 먹던 것을 중지하다가 그가 젓가락을 들자 그제야 다시금 먹어대는 눈칫밥을 보여서 무사히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꺼억! 좀 모자라긴 하지만 자알 먹었다.”
화정이와 함께 식탁 위의 음식들을 쓸어 먹은 동천은 맹꽁이 배가 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고 사정화에 대한 문제가 떠오르자 심히 거북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자꾸 거기에 갈 생각을 하니까 잘 드신 게 얹히겠네?”
인상을 쓰는 동천의 눈은 소연에게로 향해있었다. 즉, 너 때문에 자신이 가게 되었다고 갈구는 것이었다. 참으로 속 좁은 짓이었으나 원체 살아온 인생이 그러하니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뭐, 그럴 사람이 있다면 피해자인 소연이 정도?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아가씨의 전언(傳言)을 전해주려고 사람이 왔을 텐데 괜히 나만 갖고 그러셔.>
속으로 혼자 구시렁댄 소연은 이미 이렇게 된 거 비위라도 맞춰서 편하게 지내고자 했다.
“주인님, 후식으로 과일 좀 내드릴까요?”
동천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아아, 배부르니까 됐고. 떡 좀 내와. 그것 좀 먹자.”
소연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부르다면서요…….”
“이씨! 그러니까 떡 좀 먹자는 거 아냐! 떫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였지만 힘없는 소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당사가 먹겠다는데 그녀가 어쩌겠는가. 가져다 준 참깨찹쌀떡 한 접시를 깨끗이 비워버린 동천은 오후에 깨우라는 말과 함께 다시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소연의 입장에는 밤새 그렇게 자놓고도 곧바로 다시 잘 수 있는 신체적인 무난함에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고 말이다.
“누구시죠?”
난데없이 고운 목소리가 동천의 귓가를 때렸다. 동천은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뒤 대꾸했다.
“그러는 낭자는 누구십니까?”
그곳에는 의문의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무언가 슬픔을 간직한 듯한 서글픈 눈매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은 곧 무엇을 깨달았는지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아? 제가 무례하게 들어온 셈이니 먼저 신분을 밝혀야겠군요? 저는 …….”
흔들흔들.
“주인님, 일어나세요. 주인님.”
동천은 소연이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부스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는 소연의 위아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니가 신분은 무슨 신분이 있다고 밝힌다는 거야?”
“예?”
동천은 영문을 몰라하는 소연에게 대충 얼버무렸다.
“아아, 됐어. 개꿈을 꿨더니 기분이 더러워서 그래.”
주인님의 심기가 아직도 저조한 줄 착각한 소연은 더 이상 대꾸를 안 했다. 그 대신 그녀는 세숫물을 떠와 대령해주었다. 그 물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은 동천은 꿈에서 본 여인의 얼굴이 너무도 생생 하자 개꿈으로 치부하기엔 무언가 찜찜하다고 생각했다.
<꽤 예쁘던데……. 어느 집 여식일꼬?>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히죽거린 동천은 소연의 앞에서 반 바퀴를 돈 뒤 물었다.
“좀 봐봐. 옷차림새는 괜찮냐?”
제법 꼼꼼히 살펴 본 소연은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로 동천의 어깨를 탁탁 털어 주었다.
“네, 전혀 구겨지지가 않았어요. 곱게 주무셨나봐요?”
동천은 씨익 웃었다.
“후후, 그게 다 이 몸의 평소 행동이 곱기에 그런 것이니라.”
“네에…….”
별로 수긍하고싶지 않은 소연이었다.
“후우! 후!”
사정화의 집 앞에 당도한 동천은 떨림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두어 번 길게 내쉬었다. 그는 같이 온 소연에 물었다.
“나… 떨고있니?”
“…….”
무언가 거부감이 든 소연. 그러나 대답은 해주어야했다. 그녀는 밝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자신감에 넘쳐 보이는 걸요?”
어설픈 위로였지만 의외로 동천의 뛰는 가슴이 진정되어갔다.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그나마 나아졌다. 자, 들어가자.”
“네, 주인님.”
앞선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열어주자 묘한 공기가 감도는 듯한 거실의 내부가 동천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람에… 에또, 에또……. 어쨌든 그러한 이 몸이다. 그런 이 몸을 지가 어찌하겠는가? 좋았어!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거다! 동천! 너는 예전의 동천이 아님을 자각하거라! 아자!>
내심 정신무장을 단단히 한 동천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른쪽의 개인 서재와 연결된 중간 거실로 들어가는 중에 책을 읽어가며 걸어 나오는 사정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냉기가 서린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성숙해진 나이답게 움직이는 몸짓 하나 하나가 충분히 도발적이었다.
<꿀꺽, 저, 저게 정화라니…….>
동천은 이상한 생각으로 침을 삼킨 것이 아니라 예상을 상회하는 사정화의 성숙한 모습에 내심 당황한 것이었다. 한편, 약간의 차이로 뒤늦게 동천을 발견한 사정화는 걸음을 멈춘 뒤 예의 그 차가운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
탁―!
순간적인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사정화의 책 덮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 도, 동천입니다!”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동천이 참으로 얼떨떨한 인사를 올렸다. 사정화는 미약하게 웃는 듯 하다가 원래의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알고 있어. 이리와 앉아.”
“예, 예에.”
동천이 저도 모르게 굽실거렸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그 옛날의 습관이 되살아나는지 말과 행동이 제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사정화가 권해주는 의자에 앉았다. 둘이 마주 앉자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사정화야 익숙했지만 동천으로서는 죽을 맛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그간 더욱 아름다워지시고… 컥?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감도는 것이 대단한 성취를 이루신 것 같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아름다워졌다는 부분에서 사정화가 얼굴을 굳히자 기겁을 한 동천이 그렇게 말을 바꾸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뭐라고 떠들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정화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녀는 말했다.
“너도 어느 정도의 성취는 거둔 듯 보이는구나. 하는 짓은 이상해졌지만.”
왠지 정곡을 찔린 듯 동천의 가슴이 뜨끔했다.
<아아, 짜증나. 아아, 승질나. 아아, 벗어나고파! 내가 미쳤지. 왜 괜히 돌아와서 이런 생고생을 해야하는 거지?>
속으로 투덜대며 짜증을 발산시키자 어느 정도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오랜만에 뵈어서 제가 당황한 모양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정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상태에서 말 없이 동천을 한참동안 응시한 그녀는 동천의 옆에 서있는 소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너도 옆으로 와 앉아.”
놀란 소연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소녀가 주제넘게 어찌 감히!”
사정화는 거부하는 소연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지? 어제는 앉았잖아.”
소연은 대답했다.
“그건… 소녀 혼자였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하는 와중에 옆에 앉아있는 동천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유인 즉, 자신의 신분으로서는 아가씨와의 대화에 주인님과 동석에 앉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사정화는 바로 이해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러하니 강요는 하지 않겠어.”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사정화는 소연의 인사를 받고 동천에게로 시선을 복귀시켰다.
“동천, 네게는 과분할 정도로 총명한 아이야. 사려 깊은 면에서도 네가 한 참이나 뒤쳐지지.”
<이런 씨이! 나보다 사려 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던 동천은 분개했다. 그는 끓는 속을 달래는 한편 겉으로는 진심으로 수긍하는 척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
사정화는 순순히 인정(?)하는 동천의 대답에 그와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미소했다.
“훗, 알고있다니 다행이로구나.”
<아?>
동천은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 미소 하나로 사람의 인상이 저렇게 달라져 보일 수가 있을까, 했던 것이다. 일순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방안이 환해진 듯한 착각을 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리라.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 수가! 아가씨의 용모가 천하절색인 것은 익히 알았으나 그간 냉기가 서린 듯하여 그 용모가 반감되었을 따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나의 착각이었구나. 그 수십, 수백 배는 반감이 되어 있었던 것이야!>
가슴이 두근거려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소연. 그녀는 사정화의 잔잔한 미소 한번에 가슴이 설레져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방안에는 묘한 공기가 감돌았고 그것을 감지한 사정화는 다시금 얼굴의 표정을 지워가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