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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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인 공영수의 거처로 떠나기 전까지 소연을 붙들고 같은 말들을 반복하며 실토하기를 종용했던 동천은 결국 실패로 끝나자 성질을 내며 마차에 혼자 올라탔다.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는 계집이라니까? 에이!”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은 적어도 그 용독경이 자신과 만독문과의 관계가 탄로 날 만한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느낌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기에 동천은 추호의 의심조차 안 했다.
“걔가 그 책의 행방을 알고있는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가 불지를 않네? 혹시, 가지고 나갔다가 파손을 시켰나? 훗,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라고.”
맞추고도 바로 진실에서 멀어지는 동천. 그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에이, 골머리 아픈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자. 어차피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고, 정 급하면 다 불게 하는 수단이 있으니까 그때 그 방법을 쓰기로 하지 뭐.”
이리하여 다시 생각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 동천은 그 잠깐 사이에 낮잠을 청했다. 그러나 제대로 눈을 부칠 사이도 없이 사형의 거처에 당도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잔 것 같지도 않은 기분이 든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흐아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가라고 말할 걸 그랬나?”
긴 하품을 끝마친 그는 사형을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눠야할지 대해 잠시 고민에 빠졌다.
<끄응, 병신하고 놀아주면 같이 병신이 된다고 하던데……, 가서 꼭 놀아줘야 하나? 쓰읍! 이거 고민되네?>
이렇듯 그가 씨알도 안 막히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난한 인상의 중년인이 다가왔고, 상대방의 공손한 안내를 받게된 동천은 그를 따라가다 심심해져서 물었다.
“자네는 올해로 나이가 몇인가?”
중년인은 예의를 갖추고 대답해주었다.
“소인은 올해로 마흔 둘입니다.”
“오오, 많이 늙었군!”
순간 중년인의 얼굴이 실룩거렸지만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했다.
“그래도 아직은 정정하답니다.”
동천은 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게 생각한다니 본 소전주가 다 기분이 좋구먼. 허면, 가정은 이루었고?”
중년인은 별걸 다 묻는다고 생각했지만 지체 않고 소전주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소전주님의 은혜로움 때문인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돌연 동천이 흠칫했다.
“저러언? 괜한 것을 물어봤구먼. 부인이 죽었다니. 쯧쯧, 가슴 아프겠어.”
중년인은 황당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예에? 소신의 부인이 죽다니요?”
동천은 기겁하는 중년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안 죽었어?”
다소 흥분한 중년인이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인사를 나누고 왔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잠시 착각했던 동천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주었다.
“하하, 그랬던 거야? 난 또 아들하고 딸들만 언급하기에 자네 부인은 일찍이 저 세상에서 늴리리야 하고 있는 줄 알았지 뭔가. 하하, 미안하이!”
어처구니가 없어진 중년인은 남몰래 이를 갈았다.
<으으! 이 좃만한 자식이……. 콱, 죽여버릴라!>
내심 동천을 후려갈긴 중년인은 가족들이 눈에 아른거리자 급격히 분노가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 참자. 저 새끼 성질 더럽다는 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가 아니었던가!>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힌 중년인 다행이 소전주를 무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아담한 전각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는 입구 쪽으로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시지요. 이 공자님께서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족의 웃음을 띄운 동천은 소매 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래, 수고가 많았네. 수고비랄 것은 없지만 아들딸들을 키우는데 곤궁해지면 자네가 알아서 벌어다 먹이길 바라네.”
그리곤 왜 꺼냈는지도 모를 돈주머니를 다시 소매 속으로 갈무리했다.
“…….”
수고비인 줄 알고 굽실거리며 손을 내밀었던 중년인은 상당히 쪽팔렸던지 붉어진 얼굴로 슬그머니 손을 원위치 시켰다. 그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천에게 꾸벅거렸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동천은 당연한 인사를 받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까지 감격할 필요는 없다네. 하하하!”
즐거이 웃으며 입구 쪽으로 걸어 들어간 동천은 단순한 구조로 만들어진 통로가 이어지자 계속 안쪽으로 신형을 옮겼다. 잠시 후 수수한 용모의 시비가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동천을 발견한 시비는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방안의 공영수에게 말했다.
“공자님, 소전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반가이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시간에 맞춰 왔구나. 어서 안으로 들라 이르라.”
“예, 공자님. 들어오시지요.”
동천은 시비가 열어주는 문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공영수는 수레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예전에 사용하던 낡은 수레의자를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제가 맞구먼!”
다소 경악된 듯한 목소리였다. 순간 그 의자에 정신이 팔렸었던 동천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본심을 숨긴 채 반가워하는 얼굴로 공영수에게 다가갔다.
“소제가 사형을 진작에 뵈었어야 했는데 이리도 늦어 죄송합니다.”
공영수는 밝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그런 소리 말게나. 오히려 사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늘에야 본교에 도착한 이 게으름뱅이 사형의 잘못이 크다네.”
처음 듣는 소리이자 동천이 내심 생각했다.
<뭐야. 타지에 나가 있었던 거야? 그럼 괜히 미안하다고 한 거네? 하여튼 이 병신 새끼는…….>
동천은 시치미 뚝 떼고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씀 말아 주십시오. 사형의 일이 먼저이지 고작 바깥 나들이나 갔다온 소제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일정을 앞당겨 오신 단 말씀입니까. 그래, 가셨다 오신 일은 성과가 있으셨는지요.”
동천은 공영수가 무슨 일로 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부분의 일을 유도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공영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난 일을 털어놓았다.
“성과는 무슨! 그저 새로이 건설 중인 영천각(永川閣)을 둘러보고 왔을 뿐이라네.”
그 정도로는 동천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는 척 말끝을 흐렸다.
“영천각이라면 그…….”
“하하, 사제도 알고 있었군? 바로 그곳일세. 본교와 바로 인접한 하남성 영천에 새로 건립하기로 했던 약재창고로서 그곳의 약재를 본 약왕전으로 신속하게 조달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지. 현재 7할 이상이 건설된 상황이라네.”
듣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오히려 동천은 영천에 건립한다하여 그 건물의 이름을 영천각이라고 지은 그 인간의 상판을 보고싶을 따름이었다.
“저도 그곳의 소식을 들은 것은 며칠 전입니다. 그런데 사형에게 직접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비중 있는 곳으로 만들어질 목적인 것 같군요?”
공영수는 흥미롭게 물었다.
“더욱 비중이 있는 곳이라……. 흐음, 어찌하여 사제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병신아. 기냥 해본 말인데.>
들은 대로만 알아두면 될 것을 뭐가 그렇게 궁금하여 묻는 것인지 동천으로서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내뱉은 말을 아니라고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동천은 가능한 허술하지 않게끔 이야기했다.
“그만한 일이라면 다른 감독관을 붙여줘도 되었을 텐데 거동이 다소 불편하신 사형께 일부러 그 일을 담당시킨 것을 보면 나름대로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공영수는 짐짓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런? 건물을 짓는 것 따위의 감독에는 거동의 유 불리는 따지는 것이 아닐세. 그런 의미에서 사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곳도 아니고 말이지. 뭐 물품조달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는 곳이라네. 하하, 아무래도 사제는 앉은뱅이가 된 이 사형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로구먼?”
<어.>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던 동천은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왔던 속마음을 급히 삼켜버렸다. 아울러 ‘병신새꺄.’ 라는 말까지 추가로 내뱉을 뻔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제의 말뜻은 바깥출입을 자주 안 하시는 사형께서 그 일을 맡겠다고 하실 정도였다면 무언가 있지 않았을까 했던 것입니다. 곡해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공영수는 정말 죄송해(?)하는 사제의 얼굴이자 너털웃음으로 넘어가고자 했다.
“헐헐, 내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 이 사형이 잠시 장난기가 돌아서 그리해 본 것일 뿐이니 사제 또한 개념 치 말게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시녀가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오오, 늦었긴 하지만 차가 왔군. 품질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으나 이 사형이 직접 재배하여 만든 작설차(雀舌茶)라네. 맛이 없더라도 맛있게 들게나.”
동천은 바로 상체를 수그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맛이 없을 리도 만무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마시겠습니다.”
공영수는 농담 인줄 알고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역시 재치가 묻어나는 대답이로세!”
“하하, 과찬이십니다.”
같이 웃어준 동천은 눈앞의 차를 응시하며 저걸 어떻게 먹나 했다.
<아 짜증나! 이 몸이 얼마나 차를 싫어하는데 이따위 걸 드시라고 내오는 거야? 혹시 이 자식, 오늘 날 잡아서 이 몸을 골탕먹이려고 작정한 거 아냐?>
지금의 심정대로라면 공영수의 하체가 병신인 김에 상체까지 병신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런 동천의 심중을 몰랐던 공영수는 한술 더 떠 차를 마시고 난 소감을 듣고 싶어했다.
“어서 들게나. 식어갈수록 맛과 향이 달아나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마셔야만 했다.
“예, 사형. 후르륵.”
공영수는 한 모금을 마신 동천에게 물었다.
“어떤가. 마실 만 한가?”
<니 면상에 토하고 싶다.>
입안에 든 걸 겨우 삼킨 동천은 만면에 가득 미소를 띄웠다.
“대단한데요? 이게 정말로 사형께서 직접 재배하신 것입니까?”
만족한 공영수는 크게 웃었다.
“하하! 쑥스럽게 치켜세워 주지 말게나.”
동천은 더 이상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맛있는 척 마시며 계속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혀끝에서 감칠맛 나는 향이 감도는 것이 돌아가서도 지속적으로 마시고 싶을 정도입니다.”
공영수는 짐짓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으응? 그 정도란 말이던가? 허면, 말린 찻잎 한 통을 선물로 줄 터이니 집에 가서 마음껏 즐기도록 하시게.”
공영수는 동천이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문밖의 시비를 불러들였다. 안으로 들어와 명령을 받은 시비는 잠시 나갔다가 아담한 크기의 작은 차 통을 대령했고, 동천은 기왕에 이렇게 된 것 반기는 시늉이나 해주기로 했다.
“사실 소제가 먼저 부탁드리려고 했다가 염치가 없어 말았는데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정말 감읍할 따름입니다.”
공영수는 정색을 했다.
“어허, 감읍은 무슨! 사형제들끼리 고작 찻잎 한 통으로 그런 말이 오고가서야 쓰겠는가.”
동천은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과 반대로 말했다.
“명심하겠습… 앗, 뜨거!”
자신 쪽으로 차 통을 끌어들이던 동천은 갑자기 만진 손끝이 불에 데인 듯 화끈해져오자 흠칫하여 손을 뗐다. 그것을 본 공영수가 물었다.
“왜 그러는 가. 무슨 문제라도 있던가?”
동천은 통의 겉면을 살짝 건드려보더니 아무 이상이 없자 멋쩍게 웃었다.
“이것 참……. 아무 일도 아닙니다. 갑자기 손끝이 뜨거워져서 놀랐던 것인데 괜찮은 것을 보니 별일 아니었나 봅니다.”
공영수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동천의 걱정을 미루지 않았다.
“사제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고있겠는가 만은 본교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민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니, 평소에 마음가짐을 너그럽게 하고 생활하는 것이 어떠한가.”
동천은 가볍게 읍을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음, 그래. 원래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간에 겪었을 사제의 여행담을 듣고싶어서였는데 뜻밖에도 멀리 수행 차 나가셨던 소교주께서 돌아오셨다는 군.”
“예에? 소교주께서요?”
동천이 놀라했다. 별다른 뜻은 없었고 그냥 지금의 상황이 놀라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랬던 것일 뿐이었다. 이를 알 리가 없던 공영수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네. 그 일 때문에 사제와 오래있지 못함이 유감스러울 따름이지.”
동천은 잘됐다 싶어 대꾸했다.
“네에, 그런데 사형께서는 소교주님과 돈독한 친분을 쌓으셨나보지요?”
약간 얼굴이 굳어진 공영수가 되물었다.
“으응? 그 무슨 소리인가?”
동천은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예정에 없던 소교주께서 오셨는데도 바로 만나실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사이는 아닐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공영수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런 말이었군? 그건 말일세. 소교주님께서 일전에 서찰을 보내어 효과가 뛰어난 해독단을 부탁하셨다네. 헌데,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를 소교주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때를 놓치기 전에 서둘러 그것을 건네 드려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 서둘려고 하는 것이라네.”
동천은 예의상 반응해주었다.
“아하? 그런 숨겨진 일화가 있었군요?”
공영수는 사제가 말 길을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내심 안도했다.
“그렇지. 그 때문에 오늘의 만남을 여기까지 하려는 것이었다네. 본 사형도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만나고자 한다면 기회는 무한하니 앞으로 자주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세나.”
동천은 무슨 개소리인가 했다.
“저 역시 바라고있었던 바이옵니다. 자주 소제를 청해주십시오. 한달음에 달려올 터이니 말입니다.”
만족한 공영수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이 약왕전이 더욱 흥하려면 우리들부터가 먼저 합심해야 하는 것이니 앞으로 이곳에 오고싶거든 내 집이다 생각하고 부담 없이 찾아오게나. 이곳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을 테니까 말일세.”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역시나 속으로 공영수를 씹었다.
<미친 새끼! 이 몸이 그렇게 한가하신 분인 줄 아냐? 이언 후진 곳에 다시 오게? 퉤! 내가 다시 여기에 오면 네가 개새끼다!>
이렇듯 다시 왔을 때의 명분까지 세워 놓은 동천은 단 한 시라도 공영수와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안 그런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소제는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끼릭, 끼릭!
바퀴 달린 낡은 의자를 움직인 공영수는 동천의 한 손을 덥석 움켜쥐고 잔잔히 흔들어주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세나.”
동천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예, 사형!”
고개를 끄덕인 공영수는 아직 나가지 않고 대기 중인 시비에게 명했다.
“소전주를 바깥까지 잘 모셔다 드리거라.”
“예, 공자님.”
다소곳이 허리를 숙인 시비는 바로 명령에 따랐다.
“소문주님 소녀를 따라오시지요.”
동천은 품위를 지키려는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알겠다. 앞장서거라.”
그의 명령에 살짝 끄덕인 시비는 우아하게 앞서 동천을 안내해주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고 어느 정도를 걸어가는데 동천이 물었다.
“내 잠시 손을 씻고자 하는데 여기 그럴 만한 곳이 있더냐?”
시비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하지만 우물이라서 조금 돌아가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동천은 개의치 않았다.
“물론이다. 가능한 빨리 가자꾸나.”
“그러하시면 이리로.”
순순히 시비의 뒤를 따르던 동천은 그녀의 걷는 폼이 상당히 일정하자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흐음, 잘도 걷는걸?”
흠칫!
약간 굳어진 얼굴로 동천을 돌아 본 시비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여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절도 있는 생활이 몸에 베였기에 그렇게 보이셨나 봅니다.”
동천은 생각 이상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랬었더냐? 근데?”
대번에 무안해진 시비는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 그냥 그렇다는…….”
피식 웃고 난 동천은 말했다.
“알겠으니 어서 앞장서기나 하거라.”
“예에.”
서둘러 걸어가는 시비의 뒷모습은 방금 전에 비하면 눈에 뜨일 정도로 엉성해져 보였다. 그것을 발견한 동천은 바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허어! 아무리 지 주인이 병신이라도 그렇지. 아랫것까지 병신 티를 낼 것이 무에 있다고……. 쯧쯧, 말세야.>
그 와중에 오전의 일을 상기시킨 동천은(겁먹은 시녀의 일) 자신의 말을 생트집으로 오인한 이 시녀가 지레 겁을 먹고 허술하게 걷는 것이라 단정 지었다. 그는 큰마음 먹고 선심을 써주기로 했다.
“네가 긴장을 한 듯 하구나. 하하, 엉성하게 걸을 것까지는 없었으니 원래대로 걷거라.”
그러자 우뚝 멈춘 시비가 찰나간 차가워진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허나 순간적인 일이었고 바로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은 죄송하다 못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죄, 죄송하옵니다. 소녀는 소전주님의 심기를 거슬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오라…….”
개뿔도 모르는 동천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아아, 너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이니 네가 편한 대로 걸으라는 말씀이니라. 내 말 잘 알겠느냐?”
“…….”
시비는 동공 속 깊은 곳에서의 복잡한 감정들을 정리한 후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동천이 보는 앞에서 소심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상당히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알겠사옵니다. 소녀, 다시 앞서도 되겠는지요.”
“음, 그래. 말릴 생각이 없느니라.”
“그럼 이쪽으로…….”
소전주의 허락을 받고 시비는 다시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