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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566화


#55

서장(序章).

누군가 말했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은 뜻하는 바대로 움직일 수 있음이다, 라고.

다른 누군가 말했다.

자기가 거슬렀다고 생각한 운명 또한 정해진 운명일 지도 모른다, 라고.

본좌는 말한다.

좀 더 살아보고 나서나 이야기해 보라고…….


흐름의 시작.

“주인님, 주인님!”

웬일인지 헐레벌떡 달려온 소연이 문을 열고 동천을 불렀다. 아침을 먹고 호연화와 함께 침대 위에서 잠시 한가한 시간을 즐기고 있던 동천은 느낌상 귀찮은 일일 것 같자 벽을 보고 늘어져 있던 몸을 바깥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아따, 다 큰 처자가 오두방정이네. 누가 죽었냐? 뭘 그렇게 헉헉거리며 달려와?”

주인님의 말씀에 약간 얼굴을 붉힌 소연은 침착해진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게 요, 만독문의 소문주가 본교에 도착했대요.”

움찔!

잠시 몸을 경직시킨 동천은 슬며시 상체를 일으키더니 소연 쪽을 바라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음, 드디어 때가 왔구나.”

소연은 자못 심각해진 표정의 주인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요?”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본 동천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긴 뭐야. 온다더니 결국 왔다는 이야기지. 근데 걔가 니 친구냐? 어디서 감히 만독문의 소문주가 왔다며 반말을 까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자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부분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제가 잘못했는데요. 방금 주인님도 걔라고 하셨잖아요.”

동천은 대뜸 눈을 부라렸다.

“뭐? 누가 누구보고 뭐라고 해?”

잘못 말했다고 생각한 소연은 급히 말을 돌렸다.

“에에, 그게 아니라요. 만독문의 소문주께서 교주님을 만나 뵈러 가시는 중이라는데……, 구경하러 가보실 거죠?”

솔깃했는지 동천이 찌푸렸던 얼굴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꾸었다.

“가서 봐도 된다니?”

소연은 으쓱거리는 몸짓을 보여가며 말했다.

“딱히 된다 안 된다 정해놓은 건 아닌 듯 하고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러 간다기에 저도 가보려고요.”

동천도 같이 가고 싶었던지 계속 물었다.

“어딘 줄 알고 보러 가는데?”

소연은 어렵지 않게 대꾸해주었다.

“교주님이 계신 **적룡등천각(赤龍登天閣)**까지 조용한 길로 가실 줄 알았는데 대로(大路)를 경유해서 가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약왕전을 나서서 그쪽으로 통하는 길목에만 있으시면 분명히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점점 가보고 싶어진 동천은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척했다.

“흐음, 그래?”

소연은 살짝 고개를 숙여 수긍해주었다.

“네, 주인님.”

그 말에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동천이 물었다.

“오전 중으로 지나가는 거겠지?”

소연은 자신 없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확실치는 않고요. 거리가 거리인 만큼 이 부근은 정오쯤에나 지나갈 확률이 높을 듯 보이는데요.”

“뭐? 그렇게나 늦게? 이씨, 그럼 이 몸의 식사는 어떻게 하고?”

소연은 왜 그 문제가 안 나오나 했다. 어쩔 수 없어진 그녀는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해주었다.

“그거야 뭐 좀더 일찍 식사를 하신 뒤에 보러 가셔도 되고, 아니면 밖에서 해결하시다가 만독문의 소문주께서 지나가실 때 얼른 보시는 것도 괜찮고, 그것도 아니면 도시락을 싸가서 고정된 장소에서 기다리시는 것도 좋고……. 음, 뭐니뭐니 해도 주인님께서 마음에 들어야하니까 편하신 대로 하세요.”

동천은 알겠다는 듯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주방장을 데려가서 맛난 거나 만들라고 시키지 뭐.”

다소 깨는 결정이자 소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예? 그, 그건 좀…….”

“그건 좀? 왜, 불만 있어?”

소연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요. 사람들의 이목도 있는데 주방장까지 대동하고 식사를 하며 밖에서 지켜보시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인상을 풍길 수가 있어서요. 생각해보세요. 남들 다 평범하게 끼니를 해결하는데 보란 듯이 주방장을 대동해서 자리 펴고 냄새까지 풍기며 먹는 장면을 요.”

동천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참나, 그게 뭐 어때서? 주방장이 있어서 그 주방장에게 뜻깊은 일을 시키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 꼽나? 어휴, 하여간 없는 것들이 시기심은 많아 가지고. 에이!”

어렸을 적에 그가 소위 있는 것들을 씹고 다녔다는 것을 지금의 그가 알고나 있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심히 못마땅한 얼굴로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소연의 말이 걸리긴 하는지 자신의 결정을 은근슬쩍 번복했다.

“가서 이 몸이 나가실 때쯤에 도시락이나 근사하게 만들어놓으라고 그래. 식어도 맛있는 걸로.”

그제야 안도한 소연은 기쁘게 명령을 받았다. 그녀로서는 주인님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 주인님! 특별히 맛있는 걸로 만들라고 전달할게요.”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나가려는 소연을 붙들었다.

“근데 말야. 화정이 얘는 왜 안 보이냐? 다른 때 같으면 연화하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호연화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침대 위에서 털을 핥다 말고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자 중단했던 털 핥기를 계속 이어갔다.

“아? 화정이요? 걔는 지금 제가 화장을 시켜주기 위해 가만히 있으라고 한 상태예요. 같이 나갈 거니까 예쁘게 치장해주려고요.”

그러자 동천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이 같이 나간다고 한 적이 없는데 으레 그러려니 앞서 생각한 부분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 녀석 데리고 나가면 쫑알쫑알 귀찮아지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우리 나가면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고 해.”

‘무슨 개도 아니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소연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건 좀…….”

딱!

“아야!”

결국 꿀밤을 맞게된 소연이었다. 동천은 아파서 머리를 감싸는 소연에게 바로 말했다.

“한대 더 맞을래?”

계속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매를 벌 것이냐는 협박성 물음이었다.

“아, 아뇨. 그냥 집이나 지키라고 할게요. 네, 그럴 게요. 호호.”

억지로 웃고 난 소연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런 소연의 뒷모습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본 동천은 팔짱을 낀 후 대충 시간계산을 했다.

“어디 보자. 걔를 본 뒤에 사부님께 수련을 받으러 돌아가자니 좀 빠듯하겠네?”

사실 그것을 빌미로 수련을 하루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동천이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봐도 건질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흐응, 그나저나 드디어 그쪽의 얼굴을 본단 말이지? 기대되고 흥분이 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왕 재수 자식에게 넘기긴 아까운데 말야…….”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냉현이나 동천이나 그놈이 그놈이었지만 당사자인 동천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자니 사활이 걸린 문제이고, 남을 주자니 아까워서 배를 아파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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