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70화
#59
“내일로 미루라고?”
나갈 준비를 하고있던 냉현은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산관은 지시 받은 그대로 이야기 해주었을 뿐인데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봐 전전긍긍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렇사옵니다. 교주님께서 생각을 바꾸시어 만독문의 소문주를 배려해주셨다고 합니다.”
냉현은 아버지의 결정이었음에도 찡그려진 얼굴을 도통 펼 생각을 안 했다. 평소 같으면 무시를 하거나 하달 받지 못했다고 잡아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상대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아버지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일 날이 밝자마자 찾아가도 된다는 소리겠지?”
산관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날카로워져있는 소교주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냉현은 의외로 쉽게 한발 물러섰다.
“좋아. 내 특별히 이번만큼은 내일까지 참아주기로 하지. 때론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으니까.”
‘후우! 겨우 한고비 넘겼군.’
일단 급한 불을 꺼 안도해하는데 냉현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항광의 일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어 있지?”
움찔한 산관은 온몸에 진땀이 솟아남을 느꼈다. 진척된 것은 거의 없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물어보니 그로서는 피 말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그것이 되려 걸림돌이 되어 자료를 수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실정입니다. 이번 처리 건은 절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좀더 넓은 아량으로 넉넉한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냉현은 차가워진 눈으로 말했다.
“시간을 더 달라?”
산관은 입안이 바싹 말랐지만 침으로 갈증을 해소할 사이도 없이 급히 대꾸했다.
“예, 예에! 급하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수색에 박차를 가했다간 이쪽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 상대가 미리 방비를 할 수도 있기에……, 억?”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뺨을 얻어맞은 산관은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냉현은 흥분했지만 차가움을 간직한 채 매서운 눈으로 산관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미리 방비를 할 수도 있다고? 멍청한 놈! 일이 이렇게까지 진척되었거늘, 상대가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매일 같이 의심 가는 놈들을 만나고, 뒤를 캐고, 이제는 그 당시에 본교를 들렀던 내 나이 또래의 녀석들까지 뒤지고 다니는 판에 아버님께서 추진한 일을 물 먹인 녀석이! 아니, 집단일 수도 있겠지! 그런 녀석이 지금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듯 보이냔 말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산관은 오히려 차가워진 마음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때는 대담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쪽이 덜 맞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시정하고 좀더 강력한 추진력으로서 정보를 수집하겠습니다!”
그의 예측대로 먹혔던지 냉현은 노려보기만 할 뿐 별다른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누그러진 냉현은 뒷짐을 지고 돌아서며 말했다.
“알았으면 이제부터라도 일 처리 좀 제대로 해. 그렇다고 대놓고 정보를 캐라는 것은 아냐.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알 리가 없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던 산관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알고있다는 듯 안면을 깔았다.
“물론입니다!”
뚜벅뚜벅.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본 냉현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좋아. 나가봐.”
“존명!”
힘차게 대답한 산관은 후줄근해진 옷깃을 휘날리며 물러갔고 여전히 창가에 서있던 냉현은 걸어나가는 산관의 뒷모습을 싸늘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올 때 저 녀석이 아닌 철소(鐵召)를 데려올 걸 잘못했군. 젠장…….”
때늦은 후회는 돌이키기 힘든 것이리라.
“아니, 벌써 나가셨다고?”
다음날 아침 일찍 냉현을 찾아온 산관은 이미 나갔다는 시비의 대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차 물었다.
“만독문의 소문주에게 간 것이냐?”
시녀는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하며 대답했다.
“감히 물어보진 못했고, 다만 기대된다며 혼잣말을 하시는 것을 얼핏 들었습니다.”
산관은 침음했다.
“으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면 강소홍에게 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떼어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심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마, 부진한 일 처리에 실망을 느끼시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냉현이 그를 대동하지 않고 간 이유는 애초에 그를 이런 일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냉현의 호위대인 흑혈이살(黑血二殺) 중 흑살에 해당하는 철소(鐵召)와 혈살에 해당하는 산관은 대외적으로 동급으로 치부됐지만 실질적인 총애는 철소가 도맡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냉철함과 결단력이 어우러져 강인함까지 갖추었으니 그 3가지 중 강인함만 갖추고있는 산관으로서는 아무래도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군이 찾아주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안되겠다고 생각한 산관은 제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서둘러 소운정으로 향했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그는 급히 마차를 몰아 소운정에 당도했지만 소교주께서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도 오시지 않았다? 허면, 도대체 어디에 가셨다는 소리인가!”
그가 기가 막혀 하고 있는데 때마침 한 대의 마차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산관도 아는 마차로서 바로 소교주의 마차였다.
“음? 네가 이곳에는 어쩐 일이더냐.”
마차에서 내린 냉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물어보았고 산관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아침 일찍 떠나시는 줄 알고 찾아뵈었는데 이미 떠나셨다기에 이곳에 오실 줄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냉현이 자못 놀란 얼굴을 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미리 알고 기다렸다는 소리냐?”
어떻게 일이 꼬이려다 제대로 풀렸지만 미리 기다린 셈이 되어버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잠시 침묵한 냉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산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오늘 이곳밖에 찾을 곳이 없으니 네가 이곳을 예측하고 찾아온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서부터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야 하는 것처럼 네가 그러한 기미를 보였으니 잘했다고 칭찬해주지 않을 수 없구나.”
산관은 실로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라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냉현은 씨익 웃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야 좋지. 음, 들어가자.”
“옛, 소교주님!”
홀로 오려다 산관을 대동하게된 냉현은 지나치는 자신을 대하곤 포복하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인들의 모습에 살짝 비웃음을 내비쳤다.
‘흥, 쓸모 없는 것들.’
그는 죄 없는 하인들을 구타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울고 아우성치며 빌어대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끼고 싶었다. 어쩌면 이곳에 강소홍이 있어서 짓밟고 싶다는 욕망이 우회적으로 표출된 듯도 싶었다. 그러는 사이에 객방에 도착한 그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아리따운 소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는 것을 보았다.
“흐음!”
무언가 묘한 기분을 자극하는 몽혼(夢魂)한 표정의 여인이었다.
“소저가…….”
“모시고 오너라.”
하마터면 그는 눈앞의 소녀가 만독문의 소문주인 줄 알고 예의를 갖출 뻔했다. 아마도 그는 안쪽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제길! 망신을 당할 뻔했군!’
그가 내심 언짢아하고 있는데 시비로 보이는 소녀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왼손을 움직여 안쪽을 향하게 했다. 당연히 그는 움직였고 소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를 안내했다. 분위기에 이끌려 바로 심기를 푼 냉현은 안쪽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있는 소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일어났으니 행색이 초라해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람의 심신을 안정케 하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진 냉현은 미소하며 말했다.
“초라하다니 그 무슨 말씀이오. 고개를 드시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강소홍은 수줍은 듯 고개를 들었고 냉현은 한순간 눈동자를 빛냈다. 결코 탄성을 자아내는 외모는 아니었으나 어디 한군데 흠잡을 곳이 없었고 우수에 젖은 듯한 눈동자와 단아한 이목구비는 감추어진 도발과 정열을 대변하는 듯 했기 때문이다.
‘대어로군!’
냉현은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수많은 여인들을 대내외적으로 접해보았지만 사정화 이외에 이렇듯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여인은 강소홍이 처음이었다. 둘 다 장점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정화가 돋보이는 차가운 장미라면 강소홍은 편하고 부드러운 한 떨기 수선화였다. 그로서는 쉽사리 한쪽에 치우칠 수 없는 여인을 만나게된 것이다.
“저어…….”
냉현은 수줍어하는 강소홍을 접하곤 그제야 너무 빤히 쳐다보았음을 깨달았다.
“아? 하하, 이거 실례했소이다. 내 소저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이 나갔나보오.”
강소홍은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자 냉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아니라니까 그러는 구려. 내 진심으로 소저의 아름다움을 보장하외다.”
잠시 주저하던 강소홍은 마지못해 냉현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정히 그러시다면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냉현은 가볍게 의자의 끝을 툭툭 털었다.
“아름다워서 아름답다고 한 것이니 소저는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소이다. 흐음, 그건 그렇고 일단 자리에 앉아도 되겠소?”
강소홍은 차분히 허락했다.
“그러시지요.”
냉현은 그녀의 뒤편에 서있는 문영을 스쳐 지나가는 눈으로 바라본 뒤 보편적인 대화부터 시작했다.
“듣기로는 오는 길이 많이 피곤하여 아버님께서 어제 하루 쉬도록 배려를 해주셨다던데 이제는 괜찮소?”
강소홍 또한 질문의 성격에 맞게 대답해주었다.
“소녀는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으나 교주님께는 무언가 부족함이 엿보였던 모양입니다. 물론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음, 그랬다면 다행이외다. 화사해 보이니 나 또한 기분이 좋고. 하하!”
냉현은 호탕하게 웃었지만 강소홍은 그 뒤에 감추어진 계산된 행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치 얼굴은 웃지만 눈매는 웃고있지 않는 섬뜩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식전이시라면 아침을 같이 드시겠습니까?”
분위기를 일신시키기 위해 강소홍이 묻자 냉현은 먹고 온 상태이면서도 안 그런 척 능청을 떨었다.
“내심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소? 하하, 그렇게 하십시다.”
고개를 끄덕인 강소홍은 문밖의 시비를 불러 아침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런 뒤 그녀는 문영에게 말했다.
“식사할 동안 옆방에 가서 너도 끼니를 채우고 와.”
끄덕끄덕.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 문영은 사람들에게 생긋 웃어준 뒤 스르르 방을 나갔고, 그것을 본 냉현은 입을 열었다.
“시비에게 상당히 자상하구려. 허나, 너무 잘 해주는 것도 좋지 않으리라고 보는데…….”
막말로 기어오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던 소홍은 냉소천에게도 이미 해주었던 말을 다시 한번 비슷하게 꺼내주었다.
“저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해온 소중한 친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여타 시비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냉현은 피식 웃고싶었으나 참고 말했다.
“그랬소이까? 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 쪽에서도 어렸을 적부터 함께 해온 여기 이 친구가 있으니 나도 배려를 해주어야겠구려. 이보게, 산관.”
“예, 소교주님.”
냉현은 갑자기 언급되어 얼떨떨한 상태의 산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도 저 아이를 따라가 식사를 하거라. 덕분에 이쪽에서도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더냐.”
소교주의 심중을 간파한 산관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존명!”
강소홍은 밖으로 나가는 산관을 바라보다가 그 초점을 냉현에게로 옮겼다.
“훗, 저분은 의외의 상황이라 당황하신 듯 싶은데 무리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냉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리라니. 전혀 그렇지 않소이다. 되려 소저께서 생판 처음 보는 남정네에게 애써 웃음 지으려 노력하는 듯 보이는데……, 제 예측이 틀렸소이까?”
다소 장난기 있는 표정과 물음이었지만 강소홍은 허투루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처음 만난 남녀라면 으레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소교주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냉현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털털하게 웃었다.
“하하! 한방 먹었구려! 소저의 말씀이 맞소. 지금의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니 처음엔 다소 부담스럽더라도 자주 만나기로 합시다.”
강소홍은 말과는 틀리게 자신을 바라보는 냉현의 눈길이 오싹하기만 했지만 그저 웃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으면 원치 않는 행동일지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요. 자주 만나기로 해요.”
냉현은 흡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소,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의 대답이 끝난 뒤 얼마 후에 음식이 들어왔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냉현이 스쳐지나가듯 물었다.
“문주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시오?”
때맞춰 식사를 끝마친 소홍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뒤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아직도 이십대라 여기며 지내고 계십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소유하고 계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냉현은 슬슬 자신이 의도한 질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