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94화
“훗, 그놈……. 재, 재롱이 제법 귀엽더군.”
동천을 말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녀석이었는데 마음을 편히 갖자 보는 시각도 달라졌음인지 그의 얼굴에서는 단 한 점의 분노와 미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죽일 요량으로 뒤쫓았던 것이었으니,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하여 머리를 굴린 죄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죽어도 은중각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할 터. 후우, 못할 짓을 하고 떠나는구나.”
환살은 죽기 전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가고 싶었던 듯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과 주위의 자연지물들을 감상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들과 적당히 자생한 나무들과 이끼가 무성한 크고 작은 바위들…….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 그의 눈을 투영하며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주르륵, 눈물이 쏟아졌다. 슬픈 것은 아니었고 알 수 없는 미묘함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후, 이제 여한이 없음에 스르르 눈을 감으려던 환살은 무엇 때문인지 감겨가던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렸다.
“허허, 안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다시 돌아오다니. 상식 밖이로구… 쿨럭! 쿨럭!”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안 쫓아온다고 다시 되돌아온 동천은 언제라도 튀었을 시 안전할 거리만큼에서 조용히 환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살수영감, 죽어가고 있는 거요? 토한 피 색깔을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환살은 큭큭 웃었다.
“그래도 약왕전의 소전주라고 아는 척 하는구나.”
확실히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라고 확신한 동천은 여유가 생겼는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헹, 그건 약소전주라서 알아낸 게 아니라 바로 평범한 천재인 이 몸이니까 알아낸 거요. 에에,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천재에서 진실한 천재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나 할까? 뭐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해도 범인(凡人)은 원래 천재의 깊은 뜻을 모르는 것이니 탓하지 않겠소.”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진 환살은 자신을 깎아 내리는 말이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후후, 그렇다고 치자꾸나. 바로 보았다. 쿨럭, 후우……. 보다시피 나는 곧 죽는다.”
‘이 몸이 그렇다고 아까 말씀했잖아, 호로 영감아.’
환살은 동천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계속 말했다.
“죄스럽고 한스러운 인생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한가지 부탁을 하고자 하는데 들어 주겠느냐?”
뜻밖의 부탁에 눈살을 찌푸린 동천은 물었다.
“귀찮은 거요?”
알다시피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던 동천이 묻자 환살은 미소하며 대답했다.
“허허, 귀찮은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에 합당한 댓가는 줄 수 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한 동천은 죽을 인간과의 약속은 안 지켜도 상대가 이해해줄(?) 것이라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일단 들어나 봅시다.”
허락했다고 여긴 환살은 긴 탄식을 시작으로 여기까지 오게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는 모든 말을 끝마친 후 동천에게 물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니 사실대로 말해다오. 이제와 진실여부는 상관없다만 그래도 인간인지라 궁금하지 않을 수 없구나.”
듣는 내내 지겨워서 하품을 할 뻔했던 동천은 이야기 정말 더럽게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몸도 죽어 가는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취미 같은 거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안 가졌소. 혈살 영감에게서 빼낸 거라곤 은형포단 뿐이외다. 아마도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한 혈살 영감이 근처에 숨겨놓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소?”
환살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생명이 꺼져 감을 감지한 그는 이를 악물며 품안의 물건을 동천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나 힘이 미치지 못했음인지 동천과 그의 중간 사이로 떨어졌다. 보라색 보자기에 쌓인 정사각형의 물건은 작은 크기였는데 그래도 속은 알찼던지 한 눈에 보아도 묵직해 보였다.
‘저, 저런 빌어먹을 영감 같으니라고! 이거 혹시, 수작부리는 거 아냐?’
주우러 가면 살수를 펼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동천은 제자리에 못을 밖은 듯 꿈쩍도 안하고 물었다.
“저게 뭐요?”
환살은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려는지 안면을 꿈틀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 그것은 살예총요의 후반부… 이다. 헉헉, 전반부를 찾아내어 살각에 도, 돌려주기를 바란다. 흐으, 흐으. 그쪽에서는 이미 우리가 살예총요를 훔쳤다는 것을……, 아, 알고 있을 것이기에… 네, 네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쉽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환살에게 살예총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꿀꺽할 생각이었던 동천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신경질을 냈다.
“젠장, 그러니까 나한테 원했던 게 댁이 훔친 살예총요를 살각에 다시 돌려주라는 거였소?”
“그, 그것도 있다만……, 이번 일은… 흐으, 흐으. 우, 우리가 은중각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음을 잘 설명해주길 바란다.”
“그게 끝이오? 뭐 어렵지도 않으니 그렇게 하십시다. 그럼, 이 몸에게 합당하다던 그 댓가는 어디에 있소?”
한순간 몸을 부르르 떤 환살은 아주 미약하게 입을 열었다.
“보자기에… 가, 같이……. 끄르륵.”
마침내 그가 죽자 동천은 깜짝 놀랐다.
‘헉? 뒈졌나?’
무의식적으로 환살의 상세를 살피기 위하여 뛰어가려던 동천은 주춤거리며 멈추었다. 상대가 어디 보통 살수이던가?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잠시 죽은 척하는 것이라면,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천은 죽은 환살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죽었소?”
“…….”
죽은 자가 대꾸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동천은 믿기 힘들었다. 그는 혈살을 죽였을 때 사용했던 검을 스르릉 뽑아들며 엄포를 놓았다.
“안 죽었으면 잘 들으시오. 에에, 이제부터 이걸 댁의 심장에다 던질 거거든요?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피하라는 얘기요. 자아, 갑니다!”
휘익! 쐐에에엑!
전심전력으로 던졌는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눈부신 속도로 날아간 검은 곧 목표물에 적중했다.
푸욱―!
박히긴 박혔지만 환살이 아닌 뒤편의 아름드리 나무였다. 왜냐하면 애초에 동천은 그 나무를 노렸었기 때문이다.
“얼레, 진짜로 죽었나?”
말로는 심장을 찌른다고 했지만 그가 무슨 피에 굶주린 살인귀이거나 냉혈인도 아닌데 어찌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대충 비슷한 방향으로 던지면 알아서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꿈쩍도 안 하자 그는 환살의 죽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의심은 또 더럽게 많아서 조심스럽게 움직인 동천은 재빨리 물건을 집어든 뒤에 후다닥 사정권 밖으로 다시 물러섰다.
“흥, 똥이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겠느냐?”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소심한 행동을 나름대로 변명하고자 중얼거린 그는 보자기를 풀어서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어? 이거 뭐야. 찢어진 책이잖아?”
풀자마자 제일 위쪽에 놓여진 책을 접한 동천은 절반 가량이 뜯긴 책을 조금 읽어보았다. 그는 곧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었다.
“뭐야. 그러니까 살예총요라는 책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져 있던 게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반으로 뜯어놔서 전반부, 후반부 이랬던 거야? 이런 무식한 영감탱이들 같으니라고!”
별것 아닌 걸로 화를 낸 동천은 흥미를 잃고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렸다. 그것들은 대충 예상하고 있던 물건들이었기에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환음살경(幻陰殺經), 영음살경(影陰殺經)? 쳇, 그럼 그렇지. 지가 이거말고는 뭐 줄게 있다고 폼은 우라질 나게 잡고 지랄이야?”
말투만 보자면 입술이 튀어나와도 석자나 튀어나왔을 정도였는데 표정은 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흐흐, 이 몸께서 사용하시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 잡술(雜術)이지만 그래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으히히!’
영살의 무공책자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무공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영살이 치명타를 입었을 때 부상이 없는 환살이 도맡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재빨리 은형포단을 꺼내어 중간쯤 풀었다가 그 안에 집어넣고 둘둘 말은 뒤 생각했다.
“어? 그렇다는 것은 혈음살경은 죽은 혈살의 몸을 뒤지면 나온다는 소리이고, 또 그렇다는 것은 이 몸이 이럴 때가 아니로세?”
얼른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동천은 환살도 데려가야 하는데 죽었는지 아닌지가 아직도 의심스럽자 일단 혼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때렸다.
“으으, 으으! 아? 혈도!”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는지 한스러웠던 동천은 가까이 다가가서 재빨리 혈도를 집었다. 그제야 안심하고 맥박과 체온을 살핀 뒤 쓸데없이 눈을 까뒤집고 턱수염을 두어 번 당겨본 동천은 대단히 어려운 진맥이라도 한 듯 침음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으음! 진짜 죽었군.”
그래도 괜찮은 물건을 받았다고 생각한 동천은 업어서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준 것도 없이 뒈졌으면 줄로 다리를 묶어서 질질 끌고 갈 그였기 때문이다.
“영감, 영광인줄 알아. 이 몸의 등에 업힐 수 있는 건 정말 극소수라서 이 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림도 없거든.”
그로서는 다행이 돌아가는 길은 수월했다. 이곳의 지리적 토양이 원체 무르고 자국이 잘 남아서 아무리 방향치인 동천이라도 조심조심 흔적을 찾아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어 개의 산을 넘자 상황이 달라졌다. 무른 토양의 질이 변하며 흔적이 잘 남지 않는 암석과 억센 초지들로 뒤바뀌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누가 산을 이따위로 만들었어! 너야? 아니면 너?”
이제는 하다하다 무생물과의 대화까지 시도한 동천은 환살을 내려놓은 뒤 분풀이 식으로 주위의 만만해 보이는 나무들과 널린 돌들을 꺾고 집어 내던졌다. 결국 제풀에 지친 동천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후우, 후우. 뭐 그렇다고 치자.”
뭘 그렇다고 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경우, 길을 모르는 상태에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던 그는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은 뒤 살예총요의 후반부를 꺼내들었다.
“여기에서 기다리면 지들이 알아서 찾으러 오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살예총요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감상을 해 보신다, 이 말씀이야?”
엄지와 검지에 침을 퉤퉤 묻히고 한 장 한 장을 차근차근히 넘기며 살펴본 동천은 살인 기예라기보다는 상승지학의 무공 같자 흥미로워하면서도 특유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거 뭐 살예총요라고 하더니, 살인지도(殺人之道)는 간데 없고 살인잡공(殺人雜功)들만 쓰여져 있네?”
살각의 비전무예를 비하시킨 동천은 그러면서도 상당한 집중력을 보였다. 잠깐 본다고 익힐 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공도 있다는 것을 알아둬서 간접적으로나마 안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말이다.
“음, 그렇군. 그래, 이렇게 움직인 다음에 뒤로 물러서면 걸린다 이거지? 아니기만 해봐라.”
어느덧 시간이 상당히 흘렀지만 살예총요에 흠뻑 빠져버린 동천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답지 않게 질리지 않고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해서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좌측 너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화들짝 놀란 동천은 급히 살예총요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도연 혼자만 보였다면 상관없었는데 수십의 무리들과 함께 왔기 때문이다.
‘이런 씨! 애새끼들은 왜 같이 데려온 거야?’
만일 아직도 위급한 상황이었다면 정말 잘 데려왔다고 반가워했을 그였지만 알다시피 지금은 아니었다. 상황 따라 변하는 게 동천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호오, 이제야 왔느냐?”
도연은 주군이 멀쩡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음 짓는가 싶더니 입을 두어 번 뻐끔뻐끔 하다가 그대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흠칫해서 벌떡 일어서려던 동천은 보는 눈이 많자 체면을 생각해서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땀을 비 오듯이 쏟아내며 창백하게 쓰러진 도연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피를 흘린 와중에도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켜서 실신한 게로군.”
도연과 함께 온 죽립의 무리들 중 검은 죽립의 사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건 없었다. 대충 앞뒤 상황을 정리하면 누구라도 다 나오는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동천은 상대가 자신을 높여 부르자 그의 위아래를 쳐다보며 폼을 잡았다.
“어디 소속의 누구인가.”
흑립의 사내는 포권을 취하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마라혈대(魔羅血隊)의 대주 양위(陽威)라고 합니다. 여기 이 소형제가 혈도에 집힌 것을 발견하고 약소전주님의 안전을 지켜드리고자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양위를 욕했다. 왜냐하면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마라혈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나……. 어디 소속인지 그것도 가르쳐 줘야지, 이 좆만아!’
암흑마교는 대표적인 기관들만 보자면 누구라도 수월하게 외울 수 있을 정도의 숫자였지만 그 산하기관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분상 꼭 알아두어야 해서 모든 산하기관들을 외워야하는 특수기관의 종사자들이 아닌 이상 수천에 달하는 산하기관을 외우고 있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마라혈대라면 살각의 주요 기관들 중 으뜸을 달리는 부대였기 때문에 웬만한 무지렁이들이 아닌 이상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동천이 달리 동천이었던가? 놀고 먹는 일 아니면 스스로 해내는 것이 없는 그였기에 언젠가 역천에게 들었음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것이었다. 여하튼, 약소전주로서 상대의 소속기관조차 모르고 묻는다면 이는 동천 자신뿐만이 아니라 약왕전의 수치였기에 그는 넌지시 물었다.
“호오? 이번 일에 마라혈대까지 동원되었다니. 의외로군. 그래, 파견된 인재들은 마라혈대 뿐이던가?”
잔심마도(殘心魔刀)의 별호를 지닌 양위는 동천의 신분 때문인지 공손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의 아니게 본 각의 내부에 사정이 생기어 부각주이신 파천살왕(破天殺王) 귀풍형(鬼風形)님께서도 나서셨습니다.”
그제야 동천은 이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