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00화
귀배(歸排).
“제자야, 어제 잠은 잘 잤느냐? 사람은 모름지기 베개를 낮게 하고 자야만 장수하는 것이니 이 사부는 사랑스러운 제자 네가 그렇게 하고 잠을 청했으리라 본다. 또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뭐 그것이라면 잔병하나 없는 것이 네 장점이라면 장점이니 이 사부는 걱정하지 않겠다. 또 비상약은 챙겼고? 사람은 모름지기 준비성이 철저해야 그만큼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니 제자는 명심하고 또 명심하길 바란다. 에에, 또 해줘야 할 말이 있나? 아! 또 가다가…….”
들떠있던 역천은 자신이 묻고 자신이 대신 대답해주는 기이한 행각을 계속 벌였다.
그가 이렇게 들떠있는 이유는 환영혈과의 일이 있은 지, 정확히 열흘이 지난 시점에서 모든 물밑준비가 끝났다는 살각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보를 접한 동천은 은중각을 향하여 떠나기로 결정했고 역천은 사랑스러운 제자가 최대 두어 달 가량을 외지에서 보낸다고 하자 걱정이 앞서서 이렇게 떠나는 날 아침에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다.
결국 흥분한 사부의 염려 섞인 당부를 듣느라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 동천은 말하는 쪽이 숨이 차서 잠깐 쉬는 사이에 힘차게 대답하며 종결을 지었다.
“사부님! 이 제자,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으니 염려 푹 놓으십시오!”
다시 입을 열려다 깜짝 놀란 역천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 어어, 그래. 아직 이 사부의 말씀이 끝나려면 한참이나 멀었지만 네가 이리도 자신감에 넘쳐 보이니 그만 끝내도록 하겠다.”
이건 진심이었다. 알다시피 역천이 마음만 먹으면 날이 저물어도 계속 당부를 해주고 걱정을 해줄 수 있는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그래그래, 내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뭐 빠트린 것은 없고?”
동천은 그렇다고 대꾸한 뒤 말했다.
“살각의 고수들은 중간 검문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합류하기로 했고, 이 제자는 화정이와 도연이 곁에서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제자에게 직접 듣자 안도가 되었던지 역천은 여유가 생긴 얼굴로 동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잘 해내리라 믿는다. 도연은 몰라도 화정이가 곁에 있으니 적어도 큰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이란 음모가 난무하는 곳이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느니라. 정 안되겠다 싶으면……, 알지?”
특기인 경공으로 튀라는 소리였다.
깊이 감명 받은 동천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험, 오냐. 내 너를 너무 붙잡아 놓은 듯 하구나. 멀리 배웅하지 않겠으니 어서 길을 떠나거라.”
드디어 떠난다고 생각한 동천은 허리 숙여 깊숙이 인사를 올렸다.
“예, 사부님. 이 제자가 다녀올 동안 옥체 보중 하시옵소서.”
“오냐. 헐헐, 기특한 것.”
흐뭇하게 웃는 사부를 뒤로하고 마차로 다가간 동천은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이며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안고있는 소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 이 몸의 체면을 구길 일 있냐? 사람들 보는데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찔끔한 소연은 얼른 눈가를 닦고 가슴에 안고있던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간단하게 주인님의 옷가지 몇 벌을 챙겼고요, 가실 때 입이 심심하시지 말라고 최상급 삼(蔘)에다 약꿀을 발라서 만든 선삼봉밀(仙蔘蜂蜜)을 넣어드렸어요. 맛있게 드시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먹을 것 이야기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그녀의 볼을 톡톡 건드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성의를 봐서라도 금방 다녀올게.”
자신의 마음이 통했다고 착각한 소연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네에…….”
이어 동천은 소연의 곁에 있다가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따라오는 화정이를 마차에 태웠다.
헌데, 언제 다가왔는지 호연화가 그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그런 호연화의 목덜미를 잡아 내려서 시선을 맞춘 그는 바둥바둥 거리며 ‘냐옹∼’ 하고 울어대는 녀석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같이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녀석을 마차에 태우자 호연화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화정이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바로 화정이가 잡아서 가슴에 끌어안았지만 말이다.
뒤이어 동천이 올라탔고 역천이 올라탔다.
“에? 사부님은 왜 타십니까?”
역천은 의아해하는 동천에게 푸근한 미소를 띄우며 말해주었다.
“사랑스런 제자야, 멀리 배웅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요 약왕전 문밖까지만 같이 동행해 주겠느니라.”
의문을 푼 동천은 기꺼이 반겼다.
“하하, 이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때 도연이 마차 문밖에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소신은 전주님과 동석을 할 수 없음이니 뒤의 마차들 중 하나를 골라 타고 뒤따르겠습니다.”
이런 여행에는 마차 한 대만 가는 것이 아니었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물품들을 조달할 겸, 최소 한 대에서 짐수레를 섞어 서너 대의 여유를 더 두는 것이 정석이었다.
원래는 짐수레가 필요 없었지만 동천이 하도 이것저것 챙겨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는지라(거의가 먹을 거다) 짐수레가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동천의 경우는 살각의 고수들까지 편의를 봐주겠다고 이야기가 끝난 상태여서 총 여섯 대의 마차와 두 대의 짐수레가 준비된 상태였다.
어쨌든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동천은 바로 허락했고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눈을 감고 마차의 승차감을 음미한 역천은 말했다.
“흠, 진동도 그리 없고 타고 갈만하겠구나.”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동천은 사부님의 말씀에 내심
‘그런가?’
하고 조용히 승차감을 느껴보았다.
결론은
‘평지라서 그렇다.’
라는 것으로 끝맺었지만. 그러나 어찌 사부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이 제자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다녔는데 역시 사부님께서는 남다르십니다.”
기분이 좋아진 역천은 품위를 갖추고 웃었다.
“헐헐, 존경스럽느냐?”
“예, 사부님.”
“뿌헐헐헐! 뭐 이런 걸 가지고! 우헤헤!”
그거 조금 치켜세워 줬다고 역천이 바로 맛이 갔다. 그래서 동천은 사부의 상승된 기분을 잘 무마시켜주는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중간 검문소에 도착했음을 보고 받은 동천은 살각측의 사람들을 찾기 위하여 마차에서 내렸다.
“어디 보자. 지키는 놈들 둘에 신분패를 보여주며 빠져나가는 인간들 서넛에……. 아? 저자들인가?”
동천은 일곱 명의 사내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마터면 얼굴을 구길 뻔했다.
이유는 이랬다.
‘벼락 맞을 부각주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 귀하디 귀한 살예총요를 찾아서 건네줬는데 아무리 정예고수들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적은 인원을 보내줘도 되는 거야?’
그는 살각의 인심 한 번 더럽게 쪼잔하다며 자기 혼자 마구 욕을 해댔다.
애초에 몇 명이 오는지 확인하지 않은 동천의 잘못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어디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위인이었던가? 그러나 씩씩거리던 동천은 그들이 점점 다가오면 올수록 숨이 턱 막히는 동시에 몸의 운신이 거북해지자 자신이 크게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수가 적긴 적었는데 한사람 한사람이 무시 못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헉? 부각주가 그래도 약속은 지키는 위인이었구나!’
바로 생각의 전환을 시도한 동천은 그들 중에 자신이 아는 잔심마도 양위가 섞여있자 포용력 있게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어서들 오시오. 기다리게들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동천의 눈이 양위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그가 대답을 해주어야 했지만 정작 대답은 다른 자에게서 튀어나왔다.
“허허, 이분이 그 유명한 약소전주이신가?”
살각에서 나온 자들 중 유일하게 늙은 노인이 어느 쪽으로 유명한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나서며 물었다.
잔심마도 양위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꾸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양위의 그런 행동으로 대번에 늙은이가 범상치 않은 신분임을 간파한 동천은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도 예의를 갖추어 양위를 통해 물어보았다.
“실로 기도가 범상치 않은데 누구이신가?”
겉으로 보기엔 파리 한 번 잡으려다가 허리를 삐끗할 노인네처럼 보였지만 초고수의 반열에 들어설수록 기도가 갈무리되는 현상이 두드러짐을 동천은 알고 있었다. 산 증인이 그의 사부였으니 동천이 어찌 모르겠는가. 역천의 문제라면 평범함을 넘어서 약간 모자란 듯이 보일 때가 더 많다는 것이 탈이었지만.
“이분께서는 본각의 좌 봉공(奉公)이신 섬전비엽전(閃電飛葉錢) 염화수(炎火輸)이십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분께서는 오행은살수(五行隱殺手) 분들이십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금은살수(金隱殺手), 토은살수(土隱殺手), 목은살수(木隱殺手)…….”
양위의 소개가 계속 이어졌고, 하나 하나씩 인사를 해주느라 몸과 입이 바빠진 동천은 그냥 고개만 까딱이다가 한꺼번에 통괄하여 인사를 해줬으면 간단했을 거라고 중간에 깨달았지만 이제와 멈춰서 그렇게 했다가는 나머지 살수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었기에 결국 모두에게 각기 인사를 해주어야만 했다.
‘헥헥, 씨팔! 이런 건 이 잔심부름새끼가 대신 해줘야 하는 건데…….’
동천을 힘들게 한 잔심마도 양위는 그에게 내심 찍혔다. 사실 힘들 것 하나도 없었지만 일일이 인사를 해줬다는 것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때 마차에 머물고만 있던 역천이 문을 열고 나왔다.
“호오, 살각의 좌 봉공까지도 오셨는가?”
염화수의 신분 때문인지 가만히 안에서만 있을 수 없었으리라.
염화수는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자 약간 놀란 표정으로 역천을 반겼다.
“약전주님이 아니십니까. 허허, 함께 가시는 것입니까?”
역천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닐세. 제자를 잠시 바래다주기 위하여 따라온 것이지. 곧 돌아갈 예정이라네.”
염화수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걸출한 제자 분을 두셔서 부럽습니다.”
“푸헤헤! 다 아는 사실을 대놓고 말해주니 부끄럽네.”
위험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급히 사부를 제지시켰다. 가만히 놔두었다간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부님, 조속히 떠나야할 듯 싶은데 서둘러 떠나게 하심이 어떨는지요. 그래야 한시라도 더 빨리 돌아올 테니까 말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여긴 역천은 상황판단에 능숙한 제자의 뛰어남을 내심 칭찬했다.
“그래야 하겠구나. 염 봉공, 실례가 많았네.”
“아닙니다. 이번 일에 참여하여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게 되었으니 제 입장에서는 그저 기쁠 뿐이지요.”
“헐헐, 염 봉공도 뒷방늙은이가 다 되었구먼.”
악의적인 말은 아니었다. 역천의 성격을 감안한 염화수도 그 정도는 느꼈기에 꺼려하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끝으로 서로의 인사를 모두 끝마친 그들은 마차 배정을 받고 각기 나뉘어져 올라탔다. 신분을 밝힐 것도 없이 검문소를 거쳐가게 된 동천은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고, 역천도 따라 올라탔다.
“어? 또 타십니까?”
눈을 크게 뜬 제자의 물음에 역천은 능청스럽게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험! 그래도 사부 된 도리로서 본교의 출입문까지는 바래다주어야겠지 않느냐.”
“아, 예에…….”
어쩐지 조금 불안해진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고 반 시진 정도를 달려 역천이 언급했던 출입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동천은 역천에게 말했다.
“사부님, 출입문입니다. 이 제자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저는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 계십시오.”
자면서 코를 골던 역천은 얼른 깨어난 뒤 흘러내린 침을 닦아냈다.
“으, 으응? 벌써 왔느냐? 헐헐, 그래도 사부 된 도리로서 본교의 경계영역까지는 바래다줘야 이 사부의 마음이 편할 듯 싶구나. 내 거기까지 바래다주겠느니라.”
“…….”
잠시 침묵한 동천은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어색하나마 억지로 웃어주었다.
“하, 하하.”
역천은 제자가 웃자 자신도 웃어주었다.
“푸헤헤!”
“하하, 하하하…….”
“푸헤헤헤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