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3화 – 그래도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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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3권 3화 – 그래도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그래도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빼앗겨 버린 신체

“따라라!”

비류연은 아무 말 없이 내밀어진 빈 잔을 조용히 다시 채웠다. 그러나 비류연의 그런 부단한 노력에도 잔은 금방 다시 비워졌다. 잔 밑에 구멍이 뚫려 있지는 않았 다. 뚫려 있는 쪽은 사부의 위쪽이었다. 저 배는 이상한 게 술에 대해서만은 저장 용량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술잔을 말끔히 털어낸 사부가 잔을 또다시 내밀며 물었다.

“여기가 사지(死地)라는 건 알고 있었느냐?”

다시 한 번 빈틈없이 채워진 잔을 들이켜며 사부가 비류연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제자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왜 모르겠어요. 머리에 칼 맞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세상에서 그 사실을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죽으러 왔느냐? 너 바보구나.”

풋 하고 웃으며 사부가 말했다.

“바보 아닙다요. 잘 먹고 오래오래 잘사는 게 제 원대한 목표 중 하나라구요.”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것참 어려운 목표를 세웠구나. 그것만큼 이루기 어려운 게 없다는 게 노부의 생각이다.”

창칼과 무력이 난무하는 무림에서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산다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태평성세가 된다 해도 그 난이도에 변함은 없을 터였 다.

“어려운 목표니까 이루는 게 의미가 있는 거죠.”

그 목표가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 시점에서 이 세상을 깔보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얕잡아 보는 이는 결국 안이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 식 으로 해도 행복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 그건 정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이루기 어려운 일 중 하나였 다.

“그럼, 죽고 싶지도 않으면서 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죠, 이것밖에는.”

알면서도 올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다.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 흐흠, 그것참.”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비류연은 하나도 재미없었다. 게다가 지금부터 점점 더 재미없어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러설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왜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지 그 이유를 끄집어낼 차례였다. 이것은 일생일대의 승부였다.

“전 협상하러 왔습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정색하며 말했다.

“협상? 노부랑 말이냐?”

다시 한 잔의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사부가 반문했다. 향기로운 풍미가 입 안 가득히 퍼져 나가는, 실로 천상의 물방울이라 칭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미향이었 다.

“여기 다른 사람이 있을 리 없지요.”

“그래? 고작 협상을 통해 목숨을 보존할 자신이 있다 이거냐?”

사부의 입가엔 조금 전보다 훨씬 싸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동요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게 없었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큭큭, 무척 당돌하구나. 자신만만하기도 하고. 뭐, 나쁜 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노부를 움직일 만한 패가 준비되어 있겠지? 이 술이 비록 좋은 술이긴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한데?”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비류연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 조건이란 걸 들어볼까? 얼마나 준비할 수 있느냐?”

노사부의 질문은 참으로 노골적이고 단도직입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저런 걸 아무런 부끄럼 없이 스스럼없게 물어볼 수 있다는 점이 사부의 무서운 점이었다. 

“십만 냥입니다.”

사부의 눈이 처음으로 술잔을 떠나 비류연을 향했다.

“십만 냥? 정말이냐?”

십만 냥이란 금액은 사부의 평정을 잠시 흩뜨려 놓을 만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역시 돈으론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사부가 반응을 보이자 비류연은 희망을 느꼈다. 귀신뿐만 아니라 저런 자연재앙 급 노괴물도 움직일 수 있다는 돈의 위력은 참으로 신통방통했다. 조금 더 자신을 얻은 비류연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물경 십만 냥입니다. 어떠세요? 그 정도면 사부께서도 만족하실 만한 금액이라 생각합니다만?”

그 정도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노괴물은 귀신보다 더 급이 높았다. 사부는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다. 네가 뭔가 착각한 것 같구나. 노부는 네가 정말 구할 수 있는 금액이 고작 십만 냥뿐이냐고 물은 것이야.”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지만, 노괴물을 움직이려면 파산도 각오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선 수지가 맞지 않는다.

‘역시 목숨은 무가치하다 이건가!’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의미에서 목숨은 무가치했다.

“고작이라뇨? 십만 냥을 너무 대면대면하게 보시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십만 냥을 보고 적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비류연이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적다!”

사부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런 날…….’

연비가 막 분노의 한숨을 터뜨리려는 순간, 사부가 그 말을 잘랐다.

“날?”

제자를 바라보는 그 눈에 어린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날 다음에 뭐라고 하려 했느냐?”

사부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아니, 뭐… 생선은 날로 먹어야 맛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죠.”

일단 시치미를 떼본다.

“바른 대로 불어라.”

역시 소용이 없다.

“뭘 바른 대로 불란 말입니까? 소년, 억울하옵니다. 증거있으신가요?”

비류연이 항의했다.

“소녀도 아니고 소년은 무슨! 심증뿐이지만 확실하다. 게다가 날로 먹으려 드는 것은 노부가 아니라 네 녀석이잖느냐?”

“나, 날로 먹다뇨? 제가 뭘 날로 먹었다는 겁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네 녀석은 사문의 비보를 훔쳐서 달아난 죄가 돈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느냐? 다른 곳 같았으면 벌써 사지근맥을 끊고, 내공을 폐한 다음 참수에 처했을 것이다!”

사부의 일갈은 무척이나 지엄하기 그지없었다.

“훔치다니요, 그냥 잠깐 대여한 것뿐이에요. 빌린다는 뜻이죠.”

비류연이 항의했다.

“대여? 삼 년 동안? 그렇다면 그 연체료만으로도 네 녀석은 사형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사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형씩이나…….?

그러나 다른 반박의 말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잘 돌아가던 혀도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대의명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였다.

“이제 날로 먹으려 드는 게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겠느냐?”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그래도 지기 싫은지 끝까지 저항해 보는 비류연이었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꺾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말발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는데 오늘에 와서 드 디어 사부에게 지고 말았던 것이다. 제대로 임자 만난 것이다. 역시 누구에게나 천적은 있는 법인 것이다. 음과 양, 두 가지 축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 에서는 절대라는 것이 존재하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럼 이제 이 사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구나?”

“예, 어느 정도는요.”

즉, 십만 냥으로는 절대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하나 알긴 너무나 잘 알지만, 아는 것과 들어주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부가 던져 준 화두에 대해 비류연 이 고민하고 있을 때 사부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더 있을 것 아니냐? 더 써라.”

그 말을 들은 비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죠?”

물론 사부는 그런 무식한 능력이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충분히 괴물이었다. 아득히 예전부터 독심술이 없다 해도 그에 버금가는 귀신같은 눈치를 보유한 존재라 여러 번 골탕먹기도 했던 것이다. 때문에 본인 역시 마음을 비우고, 의식을 차단하고, 생각이 육체를 통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막는 수법들을 익혔 던 것이다. 이제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상당히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뢰문의 무공 역시 상대에게 기술이나 기척을 간파당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다. 사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고민할 것 없다. 네 녀석이 처음 말한 금액이 사실일 리가 없으니까! 틀리느냐?”

그 입가에 걸린 미소가 마치 넌 아직 나한테 안 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해서 무척 기분 나빴다.

“쳇, 어쩜 그걸 그리도 잘 아십니까?”

한숨을 내쉬며 삐뚤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저 속에 구렁이 수백 마리는 기르고 있는 능구렁이 영감을 상대로는 아직 전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 태도가 짐짓 귀여워 보였는지 사부는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연하지. 노부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졸지에 사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는 모범적인 제자가 되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참 자랑이십니다.”

기쁘지도 않은데 말이 기쁘게 나올 리 없었다.

“후후. 그래, 그래서 얼마냐?”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인가! 비류연은 잠시 고민했다. 숨길 것이냐 드러낼 것이냐? 숨겼을 때 최후까지 숨길 수 있는가, 그 뒷감당을 할 수 있는가? 이미 속 내를 읽힌 이상 더 숨겨봤자 구차함의 정도가 점입가경으로 증가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십만 냥입니다.”

비류연이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 대답만 순순했고 내용은 순순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이십만 냥 이상이라는 것이구나! 사십만 냥은 안 넘겠군. 반 이하로 부르진 않았을 테니. 그럼 삼십만 냥이더냐?”

비류연은 뜨끔했다.

“그냥 점쟁이 하시죠?”

역시 안 본 사이에 새로운 괴술(怪術:괴이한 기술)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사부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더 높아졌다.

“역시 노부의 예상이 맞았구나! 음허허허허!”

“꼭 그렇게 웃으셔야겠습니까?”

민망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뭐 어떠냐? 내 맘이지.”

“총상금이 오십 만 냥이긴 하지만, 일등에게 돌아오는 건 삼십만 냥뿐입니다. 게다가 나머지 두 사람이랑 같이하는 거라서 그것도 다 받아올 수는 없다구요. 일단 이익은 정당히 분배해야 하니깐요.”

이것은 사실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동업자를 홀대하다가는 나중에 더 큰 이익을 놓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둘 중 한 명은 평생 동업자라고 쓰고 동반자 —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흠, 그건 좀 아쉽군. 그래도 네가 정확히 삼등분할 녀석이더냐?”

“흑, 이 제자를 그렇게 못 믿겠단 말씀입니까?”

세상에 불신이 만연한 사태에 개탄하며 비류연이 절규하듯 호소했다.

“엉!”

사부의 대답은 참혹하리만큼 짧았다. 비류연도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말했다.

“쳇, 물론 그건 아니죠.”

그 사부에 그 제자였다.

“함부로 삥땅 뜯으려 하지 마라. 노부의 두 눈이 아직도 시뻘겋게 부릅떠져 있으니!”

“저런! 눈병이신가 보네요! 빨리 의원에 가보시는 게…….”

딱!

징벌의 꿀밤이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그럼 협상은 타결된 겁니까?”

확인차 비류연이 물었다.

“음.. 좋다. 까짓것 맛난 술도 받았으니 노부가 선심 쓰마.”

“주머니 바닥까지 탈탈 털어가는 선심도 있습니까?”

사부에게 다 털어주고 나면 자신에게 떨어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자, 그럼 여기!”

그러면서 품속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사부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냐?”

“계약서요. 서명하시죠. 도장 찍으셔도 됩니다.”

“마지막 문항이 웃기구나. 을은 약속한 금액을 받은 다음, 갑을 절대로 죽이지 않을 것을 약조한다.”

즉, 반드시 비류연을 살려줘야 한다는 조약이었다.

“누가 보면 살인 협박범인 줄 알겠구나. 그렇게도 이 사부를 못 믿겠단 말이냐?”

“당연하죠.”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잠시 살펴본 다음 사부는 마지못해 서명했다.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무엇에 대한 아쉬움인지는 모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됐냐, 제자야?”

서명한 계약서 중 보관용을 받아 든 비류연은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조심스럽게 품속에 갈무리했다.

“됐습니다.”

계약은 타결된 것이다. 일단 생명의 위협에선 벗어났다고 봐도 좋았다.

“자, 그럼..

“그럼?”

“다시 마시자!”

술병 안에 술을 남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범죄라는 것이 이 노사부의 신념이었다.

술 마시는 도중에 다른 일로 입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외치는 듯한 기세로 달의 이슬을 홀짝홀짝 들이켜던 사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술병의 오분의 사가 비워졌을 무렵이었다.

“아참,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다.”

“뭔데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비류연이 반문했다. 이제 용건은 끝났고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했던 비류연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언제 저 망할 사부가 제자의 사정 따위를 고려해 준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데 비류연은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비류연은 조용히 두 눈을 두 번 꿈쩍였다.

“뭐가요? 뭐가 안 된다는 거죠? 제자는 통 모르겠는데요?”

짐짓 시치미를 떼며 순진한 척 반문했다.

“짐작 가는 바도 없단 말이냐? 분명히 있을 텐데?”

사부는 집요했다. 제자의 비상한 눈치를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꼭 사부가 입 아프게 입을 놀려야 쓰겄냐?”

“세상에는 직접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현실이란 거죠.”

“오냐, 네 녀석이 끝까지 발뺌을 하려고 하는구나. 넌 어떻게 자진납세도 모르냐?”

“모릅니다.”

비류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아, 그렇다면 노부가 알려주마. 네 녀석이 가져간 사문의 비보는 원래 모두 사문의 것.”

사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곤 제자를 바라보았다. 비류연 역시 사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서늘한 바 람이 되어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서… 설마…….”

사부는 고개를 한 번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노회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바로 그 설마다. 다 내놓거라. 좋은 말 할 때!”

번쩍!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사나운 강풍이 불며 창문이 덜컥거렸다. 순간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그럴 순 없어요! 말도 안 됩니다!”

비류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혹시나 했지만 에이 설마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최악의 가정이 사부의 입을 빌려 나오자 비류 연의 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평정심이 깨져 나갔다. 감정을 차갑게 유지할 수 없었을 정도로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말 된다!”

사부의 짧은 대꾸는 비정하기까지 했다.

“그… 그럴 수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만큼 그것은 황당하고 무리한 이야기였다. 사부는 자신이 말한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그 얘긴 곧 자신의 신체 일부를 싹둑싹둑 잘라서 접시 위에 진상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야기였다.

“저… 잠깐 생각해 봤는데요, 아주 심각하게, 그러니깐… 안 돌려주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보관하기도 힘든데 제자가 대신…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살살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됐다. 일없다.”

사부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저… 꼭 돌려줘야 하나요?”

소태 씹은 듯한 얼굴로 비류연이 말했다.

“당연하지.”

“열 개 다요?”

“그래, 전부 다.”

사부의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삼십만 냥이나 드리는데도요?”

일말의 기대를 걸며 비류연이 물었다. 자기 몫에 대한 귀찮은 계산은 생략한 채였다.

“그건 대여료잖아? 연체료까지 합치면 수지도 안 맞는 장사야.”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선언했다.

“무슨 대여료가 그렇게 오질나게 비싸요!”

비류연이 거세게 성을 내며 항의했다.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었다. 그러나 노사부는 꿋꿋하기만 했다. 저 뻔뻔한 철면피는 타인의 비난이나 질책에도 흠집 하나 나 지 않았다.

“여기 있다. 원래 그것들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물건들이다. 그걸 무단으로 들고 갔으니 고액의 대여료가 붙는 게 당연하지!”

오히려 공격까지 해온다.

“하, 하지만. 세상에는 엄연히 ‘정도’라는 게 있다고요!”

“정도? 그게 뭐냐? 먹는 거냐?”

정도라는 건 한계의 다른 말일 뿐이라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상상력이 부족하군.”

“크윽!”

그러나 비류연은 승복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런 처사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상대는 바로 그 ‘지상최 대의 적’인 사부였다. 게다가 지금 사부는 가장 무서운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진실’이라는 무기였다.

“뭘 그리 열을 내고 그러느냐? 그것은 원래 네 녀석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 그건…….”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러했다. 그것들은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사부의 허락 없이 사문의 비보들을 몰래 들고 튄 것은 다름 아닌 비류연 자신이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혼란에 빠졌을 때 쉴 틈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사부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하나만 묻자. 네가 혹시 비뢰문 문주냐?”

‘진실’이 휘둘러졌다.

“…그건 아니죠.”

여전히 비뢰문의 문주는 사부였다.

“그럼 정식으로 그 비보(秘寶)들을 계승받은 적이 있느냐?”

그 어떤 명검보다 날카로운 ‘진실’이 비류연의 심장을 꿰뚫었다.

“…없죠.”

어디까지나 무단으로 들고 가출한 것뿐이었다.

“난 또 설마했지. 그렇다면 노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그럼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네 녀석이 노부를 이길 수 있느냐?”

비류연은 잠시 침묵했다. 익히 알고는 있지만 말로 내뱉기는 싫었던 것이다.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됐느냐? 아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기 싫은 거냐? 내 제자란 녀석은 자기 자신의 현재도 보지 못하는 녀석이었 냐? 아니면 볼 수는 있는데 인정을 못하는 거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비류연이 마침내 대답했다.

“…아직 없죠.”

그래,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엔 지금 그 자신의 존재가 너무 나 무력했다. 사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걱정 마라, 기대도 안 했으니.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밖에 안 남았구나. 그래, 그렇다면 네 녀석이 뇌신(神)의 힘이라도 얻은 모양이지?”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침울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아뇨, 아직 풍신(風神)밖에…….”

풍신을 터득했다는 말에 사부는 잠시 멈칫하는가 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계, 겨우 풍신이었냐? 난 또 뇌신이라도 터득하고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지!”

사부의 코웃음에 발끈한 비류연이 소리쳤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뇌신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요!”

그러자 사부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준엄해졌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정말로?”

장난기 가득하던 사부의 눈이 지극히 심원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은 어떤 거짓도 용납하지 않는 눈이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아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비류연이 스스로 시인했다.

“말이란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진짜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알고 있겠지?”

.알고 습니다.”

사부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얼굴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마. 비뢰문의 문주도 아니고 아직 정식 계승자도 아니다. 게다가 노부를 이길 수도 없고, 뇌신의 힘을 얻지도 못했다. 맞느냐?” 

“맞습니다.”

괴로운 가슴을 부여잡고 비류연이 대답했다. 자신의 부족한 걸 인정하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그걸 두 번이나 반복하려니 분하고 원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한심할 데가! 어찌 된 게 어느 것 하나 조건에 부합되는 게 없잖느냐?”

사부의 반응은 의도적이라는 게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호들갑스러웠다. 제자의 약점을 잡았다는 사실에, 그걸 이용해 제자를 마음껏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반론의 여지는 없었다.

두 번 연속으로 비류연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 무기력한 입장에 처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아무리 화술의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비류연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역시 진실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네 녀석이 감히 비뢰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느냐?”

“없죠.”

마침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운 마음을 움켜잡으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럼 이제 원주인에게 돌려줘도 불만이 없겠구나?”

더 이상 사부의 말을 거역할 건수가 비류연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분할 수 없었다.

‘다음에 물었을 때는 절대 지금과 똑같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뼈아픈 사실들을 인정하지만 다음 번엔 절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사부!’ 비류연은 속으로 조용히 맹세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맹세였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은 단순한 오기일 뿐, 그딴 건 자존심도 뭣도 아니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해 참을 수 없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진정으로 자존심 강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연마를 그만둘 수 없다.

철컥! 철컥!

팔이 잘려 나가고 다리가 끊어져 나갔다. 하나를 벗어놓을 때마다 신체의 일부분이 도려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비뢰도 한 자루가 줄어들 때마다 몸은 가벼워 지는데 무력감은 더욱더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

마침내 비류는 양팔의 안쪽 깊숙이 숨겨져 있던 열 자루의 비뢰도를 풀어 사부 앞에 내놓았다.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겐 엄살떨 자격조차 없었다. 아미산을 떠난 이후 처음 맛보는 지독함 패배감이었다.

그렇다. 그는 오늘 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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