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4화 – 옜다, 이거나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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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3권 4화 – 옜다, 이거나 써라!

옜다, 이거나 써라!

-신검? 신봉? 신막대기?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표정이구나? 좋다, 이 사부가 선심 쓰마.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진(眞) 비뢰도를 회수한 사부가 눈에 띄게 침울해 있는 제자를 향해 물었다. 비류연은 어떻게든 정신을 수습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망할 사부 앞에서 방심 상태인 모습을 계속 보여줬다가는 두고두고 약점 잡히는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진 비뢰도를 가져가신 건 좋습니다. 할 수 없죠. 대신 예비용이라도 주세요!”

당찬 목소리로 비류연이 요구했다. 원래 비뢰문에는 연습용으로 쓰던 비뢰도가 있었다. 진본보다는 못하지만 충분히 쓸 만했다. 사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 도 아니었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약간 부족하더라도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것도 안 돼.”

사부는 마치 오늘은 ‘된다’는 말을 하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건 또 왜요?”

비류연이 따지듯이 물었다.

“이 사부가 예전에 가르쳐 주지 않았더냐? 무기에 너무 의지하는 건 좋지 않다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사부가 말했다.

“의지하지 않습니다.”

날이 선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엄청 억울하기만 했다.

“그래, 그럼 아무 문제 없겠구나? 다행이네.”

하나도 안 다행이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비류연이 소리쳤다. 큰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둘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의지하지 않는 거랑 필요하지 않다는 거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부가 비류연 의 오른편에 놓인 ‘현천은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게다가 네겐 그 검은 우산도 있지 않느냐? 그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역시 눈치 하난 귀신같은 사부였다. 하지만 그렇습니다라고 냉큼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충분합니다!”

비류연이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부를 상대로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듯했다.

“그럼 노부가 뭐라 말할 것 같냐?”

사부가 시험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아, 불충분해? 그럼 충분하게 만들면 되겠네! 라고 하겠죠. 십중팔구.”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너무 잘 알고 있어도 피곤할 때가 있는 법이다.

“자~알 알고 있구나. 하지만 언제든지 말하거라. 충분하지 못하면 당장에 팔아버릴 테니 말이다. 필요도 없는 걸 갖고 있어 뭣하겠냐? 척 보니 팔면 꽤 값이 나갈 것도 같고 말이다.”

욕망에 번뜩이는 눈빛이 현천은린을 향했다. 손수 자작한 데다 만들 때 꽤나 공이 들어갔던 비류연으로서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쿡쿡,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설마 이 사부가 대신할 물건 하나 안 주겠냐?”

그렇게 인심 나쁜 사람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정말입니까?”

사부는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그러면서 옆에 있던 ‘그것’을 집어 비류연 앞에 내밀었다.

“옜다! 이걸 가져가거라!”

비류연은 눈을 홉뜨며 외쳤다.

“이… 이것은…….”

“흐흐, 어떠냐? 고맙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부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성질난 비류연이 빽 소리쳤다. 사부가 내민 그것은 비류연이 직접 제작 과정까지 지켜본 물건으로, 그 몸체에는 ‘타격각성 정신봉’이라 적혀 있었다. 좀 전에 급조 된 구타용 막대기를 싸울 때 쓰라고 내밀었으니 비류연이 발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이걸 쓰라고요?”

자기 앞에 내밀어진 급조된 티가 역력한 투박하고 거친 쇠몽둥이를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비류연이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그래.”

사부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농담이시죠?”

“어허, 농담이라니? 엄연한 진담이다. 그리고 이 막대기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느냐? 원래 달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고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이거 혹시 복수입니까?”

눈치 빠른 비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걸 거부하면 넌 달인 축에도 못 든다는 이야기였다.

“응? 복수라니? 무슨 복수 말이냐?”

노사부는 팔짱을 끼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짐짓 시치미를 뗐다.

‘역시 복수가 확실해!’

그 태도를 보고 있으니 점점 더 확신이 굳어져만 갔다. 그러나 지금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왜, 싫냐?”

사부가 물었다.

“당연히 싫죠. 하지만 저걸 쓸 수밖에 없겠죠? 정말정말정말 싫어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역시 성격 하나는 끝내주는 사부였다. 이럴 때마다 자신이 누구한테 배웠는지 상기하게 되고 마는 비류연이었다.

‘젠장!’

욕이 저절로 나왔다.

“현명한 판단이다.”

흡족한 듯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부가 대답했다. 그 희희낙락한 모습을 보며 비류연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와신상담이란 사자성어가 왜 생겨났 는지 알 것 같았다. 저 희희낙락한 얼굴을 구겨 뜨리기엔 아직 자신의 역량이 부족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하아, 좋습니다, 좋아요. 복수하신다 이거죠. 제자 골려먹으니 퍽이나 재미있으신가 보네요! 어쩔 수 없죠. 까라면 까야지. 그럼 적어도 좀 전에 보여줬던 기술이 라도 가르쳐 주세요.”

“응? 무슨 기술?”

“아까 보여줬던 그 까망 구슬과 하얀 구슬이 빙글빙글 도는 기술이요. 비급은 남아 있었다면서요?”

“남아 있었지.”

“그럼 그거라도 알려주세요. 비뢰도도 빼앗겼는데 그거라도 익혀야죠. 그 왜 꿩 대신 닭이란 말도 있잖습니까? 가르쳐 주기 싫으면 비급이라도 주세요, 독학이라 도 하게.”

“비급? 그거 지금은 나한테 없다.”

설상가상이었다.

“왜 없어요? 팔아먹으셨나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옛날에 어떤 놈한테 줬다. 한 쌍의 도검이랑 함께.”

“도검이요?”

“아, 그건 원래 한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도로 펼치는 기술이었어. 원래 비급이랑 한 묶음이었지. 뭐, 노부한테 필요없는 물건이기도 했고, 그러니 가지고 있으면

뭐 하겠냐, 그냥 줘버렸다.”

“설마 공짜로요?”

“허허,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저 드넓은 창천과도 같은 마음과 저 땅 너머에 펼쳐진 대양 같은 배포를 지닌 이 사부가 그런 쫀쫀한 것에 연연할 리 있느냐? 당연히 공짜로 줬지.”

그 말에 비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짓말! 하, 그 사람이 천고절색의 미녀라도 됐습니까? 어떻게 자린고비 좀생이 사부가 그런 팔면 값나가는 걸 공짜로 줄 리가…….”

비류연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 사실은 오늘 안 사실 중에 그를 가장 놀라게 한 사실 중 하나였다.

“미녀는 아니었지. 하지만 예쁘장한 놈이긴 했다. 종종 여자로 오해를 사곤 했지. 길 가다 주워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기루에 팔려갔을지도 모르겠다. 바보 같은 놈이었지.”

갑자기 옛 생각이 났는지 사부는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목구멍에 넘겼다.

“설마 제자였어요?”

사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놈은 제자가 아니었다. 제자가 되길 원했지만 인연이 없었지.”

사부의 술에 취한 눈동자는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곁다리로라도, 야매로라도 가르쳐 줬을 거 아니에요? 설마 생초짜한테 책 던져 주고 독학하라고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럼 좀 기억나시겠네요. 기억나는 것 만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오늘따라 비류연은 꽤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었다. 사부는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기술 말고 딴 건 몰라.”

귀찮다는 투로 손을 흔들며 사부가 딱 잘라 말했다.

“왜 모르는데요?”

답답한 가슴을 안고 비류연이 소리쳤다.

“그야 난 약한 기술엔 관심없으니까.”

달의 이슬을 한 잔 쪼륵 따른 다음 낼름 삼키며 사부가 태연스레 말했다. 참으로 광오한 말이었지만, 이 노인의 입에서 나오면 그게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으으으! 좋아요, 좋습니다. 그럼 그 기술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검은 구슬이랑 하얀 구슬이랑 만들어내는 그거요.”

“이거? 안 돼!”

“아니, 왜요? 왜 또 안 되는데요? 진짜 너무하네!”

분개한 비류연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터뜨렸다.

“니놈한테는 아직 일러! 그러니까 그렇다 왜? 불만있냐?”

물론 불만은 많았지만 이럴 때 있다고 내색하면 가만히 있을 만큼 성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깐 그 말은즉……..”

그러자 자작하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사부가 씨익 웃었다.

“그걸 이제야 눈치 챘냐? 니놈한테 줄 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단다, 제자야! 그러니 분발하려무나! 원래 인간은 맨몸으로 태어나는 거야, 맨몸으로, 그 리고 말이다, 사부가 널 찾느라고 그동안 좀 고생을 했느니라. 가출한 제자를 찾아 나선 늙은 사부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여행기는 일단 미뤄둔다고 쳐도, 제 자네가 고생하지 않으면 이 사부가 좀 많이 섭섭하지 않겠느냐?”

즉, 이 고생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크윽!”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역시 일부러 자신을 골려주려고 가르쳐 주지도 않을 기술을 스리슬쩍 시현해 보였던 것이다. 최선책이 없으면 차선책을 선택하리라는 걸 뻔히 알고서! 아무리 받은 거에 수배의 이자를 붙여 돌려준다는 것이 사문의 가르침이라곤 하나 정말 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지랄맞은 능구렁이 노인네! 두고 보자! 반드시 복수할 테다!”

오늘의 이 수모를 잊지 않겠다고, 반드시 이자까지 붙여 돌려주겠다고 비류연은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아, 그만 가도 될까요?”

비뢰도를 빼앗겨서 우울해진 비류연이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곳에 그리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신체의 일부까지 빼앗긴 느낌이 들어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하고 원통해서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화풀이는 되겠지만 자신한테 무슨 득이 되겠는가. 한시바삐 이 답답한 장소를 빠져나가 자유로운 하늘 아래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일까? 사부가 딱 잘라 말했다.

“안 된다.”

“왜요?”

비류연이 반문했다.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다.”

사부의 대답은 매우 불친절했다. 하긴 사부가 친절하면 그 편이 더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할 일이라뇨? 이런 데까지 오셔서 하나뿐인 제자를 부려먹어야 속이 시원하시겠나이까? 저 드넓은 동정호를 보시고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세요. 속 좁은 마음을 확장하시라 이겁니다, 확장.”

사부의 반응은 빨랐다.

“맞을 테냐?”

주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묻는다. 제자한테 마음의 넓이에 대해서 왈가왈부되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아~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한숨을 푹 내쉬며 비류연이 말했다. 이래서 이 방에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던 것이다.

“녀석, 마음도 급하긴. 좀 더 차분해져 보거라.”

“제가 누굴 닯겠어요, 사부 말고. 다 환경의 영향이라고요, 환경.”

곧 죽어도 자기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듯한 제자였다.

“별거 아니고… 노부랑 내일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그게 어딘데요?”

별로 사부랑은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은 비류연이 마지못해 물었다.

“경매장!”

“경매장?”

사부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 사부가 경매시장에 내놓을 물건이 하나 있느니라.”

정확히는 둘이었다. 그것도 세는 단위가 척이었다.

“……?””

“여기 동정호까지 오는 도중에 얻은 녀석들이지. 웬일인지 거기는 남들한테 자주 습격당하더구나. 습격당하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더구나.” “거기가 좀 그렇지요. 그런데 값은 꽤 받을 만한가 보죠?”

사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당한 상등품이다. 이 사부가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 재료를 쓴 데다가 특별 주문 제작품이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분명 꽤나 비싼 값에 팔릴 게 분명해. 꽤 기대되 는 물건이지.”

사부가 장담하며 말했다.

“어떤 물건인데요?”

이제야 궁금증이 도지는지 비류연이 매물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사부가 대답했다.

“배다. 배 두 척을 팔려고 내놨느니라.”

비류연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사부도요?”

“사부도라니?”

이번에는 사부가 반문했다.

“아, 암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밴데요?”

비류연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흑룡선이라고, 시꺼먼 배였지. 배 타고 오늘 길에 귀찮게 방해하길래 접수했다.”

참으로 사부다운 행동이었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은 일부러 무시하는 비류연이었다.

“흐흠… 어디 건가요?”

“듣자 하니 장강수로채네 거라 더구나.”

“…장강수로채?”

“왜 그러냐?”

“아뇨, 그러고 보니 최근에 그쪽과 좀 인연이 있어서요.”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었다.

“설마… 그러고 보니 경매 물품 목록에 다른 배 한 척이 등록되어 있던데 네 녀석 거였냐?”

쳇, 비류연은 속으로 작게 불만을 터뜨렸다.

“아, 그 이야길 듣고 보니 제자도 경매에다가 배를 하나 내놓은 것 같기도 하네요.”

이제 막 기억났다는 투로 비류연이 먼 곳을 향해 아련한 눈빛을 던지며 대답했다.

“그 배는 또 누구네 거냐?”

“장강수로채네 거요.”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 배 이름은 뭐냐?”

“뭐라더라… 굉장히 거창한 이름이었는데……. 아, 맞다. 해신(海神)이란 명이었어요.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바다의 신이라……. 강에서 노는 놈들이 무슨 바다를 안다고, 확실히 건방진 이름이긴 하구나.”

“장강십용사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뜬금없이 암습해 왔길래 암습 실패의 대가로 그들이 타고 온 배를 접수했거든요. 꽤 상등품이더라구요.” “잘됐네. 그럼 그것도 함께 팔면 되겠구나. 그럼 내일, 경매장에서 만나자. 잘 가라.”

그리고는 사부가 짧게 덧붙였다.

“도망치진 마라.”

“안쳐요!”

비류연이 버럭 소리쳤다.

***

드르륵!!

굳게 닫혀 있던 별실 문이 열리며 비류연이 걸어나왔다. 연비의 모습으로 들어가서 본래 모습이 되어 나오고 말았다. 버엉~

평소답지 않게 표정이 어쩐지 멍하다. 귀신한테라도 홀린 듯한 표정이다. 복도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휘적휘적 갈지자를 그린다. 콩!

“아코!”

다시 세 걸음을 못 가, 콩!

“아코!”

날아오는 칼끝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할 수 있었던 그가, 두 팔 벌려도 상관없는 넓은 복도에서 이리저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딪치기만 했다. 그러나 아픔은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아픔과 굴욕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사부의 꿀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비류연은 별채 밖에 서 있었다. 두 발로 대지를 밟은 채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본다. 차가운 밤의 한기가 멍한 정신을 두들겨 준다. 그제야 오른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곳엔 사부가 열 자루의 비뢰도 대신이라며 떠넘긴 쇠몽둥이 하나가 덩그러니 들려 있었다.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었고 횡령도 이런 횡령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걸린 초승달이 마치 사부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처럼 보였다. “젠장, 다 털렸군!”

이제 밑천은 다 거덜나고 말았다. 또 하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비뢰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협상? 웃기는 소리.’

말이 좋아 협상이지, 협상한답시고 들어가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사부에게 주도권을 뺏긴 채 질질 끌려 다니다가 조그만 변덕에 의지해 겨우 살아남은 것 뿐이었다.

붙어 있는 건 목숨뿐. 단지 그것뿐이었다.

실로 굴욕적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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