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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04화


그런 것일랑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을 듣고 밖으로 나온 교관은 그 즉시 각주의 거처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여 문 앞에서 대기하던 그는 들어오라는 소리에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였다.

“마중 나오시지 못한 사정에 대하여 해명을 미뤘으나 내일 설명해주시겠다는 각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다행이 그쪽에서 이해해주는 눈치였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듯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던 각주 형위광(馨威光)은 슬쩍 교관을 바라보았다. 헌데, 은중각의 각주 신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얼굴이 심하게 상해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마중을 나오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듯 했다. 그는 같은 식구인 교관에게도 자신의 다친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었던지 자신을 바라보는 교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빤히 바라볼 이유가 있는가?”

뜨끔한 송 교관은 재빨리 고개를 다시 숙이며 속으로 못마땅해했다.

‘젠장, 그러게 누가 밖에서 맞고 돌아오라고 했나…….’

관문을 담당하던 경비무사에게 들은 바로는 각주의 얼굴이 얼마나 떡이 되어있었던지 못 알아보고 공격할 정도였다고 했다. 덕분에 암흑마교에서 위협을 가해온다 하더라도 응전할 각오를 다지던 살수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의뢰를 받고 나갔던 식구들마저 실패했다는 소식에 은중각 내부는 말이 아닌 상태였다.

“죄, 죄송합니다. 말씀을 듣고자 고개를 들었던 것인데 어찌 하다보니 그렇게 된 듯합니다.”

각주 형위광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산재한 문제들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작은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교관은 재빨리 맞장구를 쳐주었다.

“지당하신 말씀이라 사료되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형위광은 말했다.

“으음, 그놈들을 쳐서 실패해도 위약금을 물어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승낙하기는 했지만 본각의 피해가 너무도 커. 아무리 마교의 의뢰여서 거부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음, 그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고. 적어도 두어 달은 자잘한 의뢰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니 송 교관은 훈련 성과가 우수한 녀석들을 추려서 인원을 보강하도록 하게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송 교관은 너무 이른 투입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각내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으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형위광은 계속 말했다.

“그건 그렇고 문제로군. 배신자들 때문에 본각이 암흑마교에게 꼬투리가 잡힐 빌미를 마련해주었으니 말일세.”

그것은 공감하는지 교관은 비통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약소전주라는 자가 가벼워 보이긴 했으나 나머지 다른 자들은 녹녹치 않아 보입니다. 특히, 살각의 좌봉공이라는 늙은이를 조심하셔야할 듯 싶습니다. 그 자는 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았음에도 허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경청한 각주 형위광은 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그 말인 즉, 내일 대면 시에 좌봉공만 떼어놓으면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게 또 그렇게 되자 교관은 고개를 들어 각주를 바라보았다.

“아, 묘책이십니다!”

각주는 말했다.

“눈 깔게.”

“예? 예에…….”

다음날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은 아침을 먹고 시간을 때우던 중 도연을 통해 교관이 찾아왔음을 듣게 되었다. 당연히 상대를 불러들인 그는 반갑게 교관을 맞이했다.

“하하, 어서 오시게.”

동천의 환대에 고개를 숙인 송 교관은 인사치레의 말부터 건넸다.

“편히 주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식사가 입에 맞으셨는지요.”

자기 집처럼 편안할 수야 없겠지만 딱히 불편했던 것도 없었던 관계로 동천은 후한 점수를 매겨주었다.

“덕분에 잘 자고 잘 먹었네.”

교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 썼던 것인 만큼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약속대로 모시러 왔으니 소인의 뒤를 따라와 주십시오.”

드디어 상대를 만난다는 것을 실감한 동천은 약간 들뜬 기분을 만끽하며 교관을 따라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멈춰서야만 했다.

“어? 나 혼자만 가는 것인가?”

송 교관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각주님께서 이르시길 이런 일에는 대표자끼리 상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며 한적한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동천은 자신을 높이 사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으나 바보는 아니어서 호랑이의 굴로 혼자 들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하, 뭘 좀 아시는 분 같으나 미안하게도 그럴 수는 없네. 살각의 좌봉공께서 나들이 겸 놀러오신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런 일에 그분을 떼어놓고 본 소전주 혼자서만 갈 수 있겠는가.”

예상외로 동천이 머리를 굴리자 교관은 준비해두었던 패를 던졌다.

“아! 그렇기도 하겠군요. 실은 저희 쪽에서 작은 성의를 준비해 두었사온데 아무래도 다른 분들과 함께 가신다면 그것을 분배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홀로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만 이렇듯 주위 사람을 배려해주시는 약소전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희 쪽의 생각이 짧았음을 시인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다른 분들께도 기척을 하겠습니 다.”

그러자 동천은 말했다.

“자암깐! 음, 생각해보니 좌봉공께서 요새 무릎 관절이 안 좋아서 고생 중이시네.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삼강오륜을 배운 본 소전주가 어찌 다리가 성치 않은 분을 혹사시킬 수가 있겠는가! 고로, 그냥 우리끼리 가세나.”

교관은 득의하면서도 약간 튕겼다.

“그래도…….”

“어허! 그냥 가자니까.”

“예, 예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소전주님의 깊은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대답과는 달리 내심 비웃은 교관은 이런 놈이라면 물량 공세로 쉽게 구워 삶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암흑마교가 본각을 너무도 쉽게 생각했거나 적당히 위협만 가하여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놓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아니라면 이렇게 어리버리한 놈을 앞세웠을 리가 만무하니까 말이야.’

행여 좌봉공 일행이 눈치라도 채면 곤란했기에 그는 재빨리 동천을 안내했다. 이미 좌봉공 일행은 은중각 쪽에서 사람을 보내어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눈치를 채고 따라 붙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신경에 거슬리는 인간들이 뒤따라오자 자연히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들은 약소전주님의 시녀와 수하가 아닙니까? 수하는 그렇다 쳐도 감히 시녀 따위가 이런 중요한 일에 말없이 뒤따라오다니! 썩 물러가거라!”

무서운 눈으로 화정이를 노려본 교관은 그녀를 질책했다. 그러나 화정이는 전혀 기죽지 않고 되려 교관을 아는척했다.

“어? 연화에게 손가락 물린 아저씨네? 헤헤, 다친 거 다 나았어?”

“야옹∼.”

안 그래도 고양이에게 손가락이 잘릴 뻔했던 일이 그의 생에 최대의 치욕이었는데 화정이가 그때의 일을 상기시킴은 물론 어느 순간에 나타난 고양이 새끼까지 울어대자 교관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괘, 괘씸한! 어린것이 상전을 공경할 줄 모르고 교만에 방자함까지 곁들였구나!”

분개하는 그의 모습에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동천은 말했다.

“지금 그 말……. 본 소전주가 아랫것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꼬는 겐가?”

화들짝 놀란 교관은 이런 실수를 한 자신을 이해 못하면서도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다만 경우를 잘 모르는 이 아이를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바로 잡아주어야 밖에 나가서도 약소전주님께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 사료되어 감히 주제넘게 훈계를 가했던 것이었습니다. 부디 깊은 혜안으로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음, 깊은 혜안을 지녔다는 말만 안 했어도 이단 옆차기로 후려치는 건데 너 운 좋았다.’

그것보다는 성의를 보여준다고 해서 참았던 이유가 더 많았지만 그가 내세운 명분은 어쨌든 그러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명분을 세우고 흐뭇하게 미소한 동천은 교관의 무례를 용서해주었다.

“되었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집어낸다면 어디 세상 살맛이 나겠는가? 자네의 의중은 다 알았으니 그냥 안내하도록 하게나.”

“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심 안도한 교관은 뒤따라오는 도연과 화정이가 여전히 눈에 거슬렸으나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임무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일사천리로 동천을 안내했고 일각이 채 지나기 전에 각주의 빈청(賓廳)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안에 계실 터이니 들어가 주십시오.”

“음, 그런가? 수고했네.”

문이 열리고 동천이 안으로 들어가자 도연과 화정이가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교관은 기다렸다는 듯 막았다.

“저 방은 약소전주님과 각주님 이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네. 예외를 둘 수 없으니 이곳에서 기다리시게.”

아무래도 덜 떨어진 듯한 화정이와는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교관은 도연에게 말했다. 그러나 도연은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주군께 한시도 떨어져있지 말라는 약전주님의 명이 계셨습니다.”

교관은 바로 제동을 걸었다.

“이해는 하나 솔직히 자네가 뒤따른다 해도 만일의 불상사가 벌어졌을 시 대처를 할 수나 있을지 의심이네. 물론 그런 일은 결단코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걸세.”

표정이 굳어진 도연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미숙한 점. 인정하겠습니다. 하여 돌아가서 좌봉공님을 모시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교관님의 말씀대로라면 적어도 그분 정도면 인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뜻밖의 의표를 찔린 교관은 눈을 살짝 치켜 떴다.

‘허어! 어린놈이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던지 교관이 주춤거렸다. 그러자 안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듯 각주가 전음으로 들여보내라고 명했다. 그에 회답한 송 교관은 약간 굳어진 얼굴로 도연에게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의지가 높을 줄은 몰랐네. 휴우, 이래서는 안되지만 특별히 출입을 허락하겠네. 들어가시게.”

“한발 물러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연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화정이도 뒤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당연히 두 눈을 부라린 교관은 그녀를 막아섰다.

“어허, 네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네 신분으로는 절대 출입이 불가하니 경을 치고 싶지 않거들랑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거라.”

의외로 화정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움… 알았어. 그럼 나도 가서 좌봉공 데려올게. 헤헤, 기다려.”

“윽!”

개나 소나 좌봉공을 들먹인다고 생각한 교관은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만 부들거렸다.

‘으으, 이걸 한 대 칠 수도 없고!’

그랬다간 되려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그는 다친 손가락이 다시금 저리는 것을 느꼈다. 다행이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였으나 화정이도 들여보내라는 각주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송 교관은 운 좋은 줄 알라는 눈빛을 보내며 화정이에게 말했다.

“되었다. 너도 그냥 들어가거라.”

기뻐한 화정이는 어린아이 마냥 좋아라했다.

“와아! 고마워, 교관!”

“교, 교관? 이런 싸…… 가 아니라. 끄응!”

약소전주가 듣는 자리에서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던 송 교관은 겨우 분노를 참을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이제부터 이 싹수없는 계집애의 물음에 철저히 무시를 하자고 내심 다짐했다. 문제는 화정이의 관심이 이미 교관에게서 떠났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동천, 거기 앉아서 뭐해?”

아무 것도 모르는 화정이가 들어가서 무거운 분위기를 깨자 동천은 다소 점잖을 떨며 그녀에게 명했다.

“쉬잇. 조용하고 내 뒤에 서거라.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고개를 갸웃한 화정이는 동천과 마주 앉아있는 각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몇 대 맞은 얼굴의 아저씨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러자 동천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푸웁―! 큭큭큭……. 아? 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안 그래도 은중각의 각주를 보았을 때 시퍼런 한쪽 눈두덩이와 선명한 얼굴 주위의 멍 자국들 때문에 낄낄거리려는 것을 참고 있었는데 화정이가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각주 형위광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역시 한 무리의 수장답게 인내심을 발휘했다.

“하하, 되었소. 틀린 말도 아니거니와 아이가 철이 없어 보이니 이쪽에서 참겠소이다.”

동천은 한번 웃음이 터지자 참을 수 없는 지경이어서 이를 악물며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해해 주셔서 천만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분위기가 잠시 살아났으니 부담 없이 제가 찾아온 용건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만…….”

사실 형위광은 그 이야기에 앞서 자신의 얼굴이 상해있는 이유에 대하여 그럴싸하게 겉 포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이미 만남을 늦춘 이유를 이해했다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지라 도저히 넘어간 상황을 끄집어 낼 자신이 없었다. 새삼스레 거론하자니 치부를 감추려고 안달이 난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변명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십시다. 음, 솔직히 귀교에서 서찰이 날아왔을 때 적잖게 놀랐소이다. 배신자들이 그곳에까지 가서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동천은 바로 제동을 걸었다.

“그 이야기는 저를 안내해주던 교관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터지자 마자 배신자로 치부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거짓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수밖 에 없을 겁니다.”

형위광은 눈썹을 꿈틀했다.

‘수작? 수작이라고? 감히 어린놈이 이런 자리에서 수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다니!’

호랑이 굴로 들어와서 말을 함부로 하자 형위광은 분노하면서도 상대의 대담함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여기에서 몸을 사리면 계속 저자세로 가야할 것만 같은 위기감에 냉랭한 목소리로 강하게 나갔다.

“어느 곳에서나 치부는 있기 마련이외다. 장로들을 죽이고 도망친 자들이 본각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환영혈임을 밝힌다면 우리가 어찌 고개를 들고 떳떳이 강호에 나설 수 있겠소이까! 더우기 살수집단의 내분은 정보 유출을 꺼리는 고객들의 불신을 해소할 수 없음이나 마찬가지이니 우리로서도 피눈물을 삼키며 진실을 왜곡하는 수밖에 없었소이다. 이런 사실은 귀교뿐만이 아니라 귀교 정도의 세력들이라면 이미 다 알만한 사실이거늘 어찌 모른 척 말씀하시는 것이오!”

움찔한 동천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새끼 잘하면 치겠네?’

그는 금방 표정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음, 그러한 고충이 있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허나,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본인은 이곳에 올 때 그러한 정보를 전해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환살이 이미 살각의 비전 무서를 은중각에 넘겼다고 자백을 하고 죽었소. 비급은 사라지고 환살은 은중각에 넘겼다는데 어느 누가 어이 없어하며 ‘네놈들이 은중각을 배신한 줄 다 아는데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하며, 코웃음만을 치겠소. 안 그렇소?”

형위광은 동천의 말투가 순식간에 맞먹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도 힘있는 곳에서 억지를 부린다면 약자 쪽에서는 당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고를 염려하여 그 당시 제거하자고 강력히 주장했거늘, 선대 각주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본각이 이러한 사면초가에 몰리다니……. 허어, 낭패로다!’

이를 악문 그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말했다.

“억지외다! 우리 쪽에서는 환살이 그러한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지 않소!”

동천은 말 한번 잘했다는 얼굴로 받아쳤다.

“흥! 그렇다면 우리 쪽 또한 환영혈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지 않겠소! 또 아오? 본교의 비급을 빼돌리기 위하여 십 수년에 걸쳐 안배를 해놓았다가 실패를 하면 배신자라는 명분을 방패막이로 삼으려고 했을지?”

마침내 얼굴을 일그러트린 형위광은 벌겋게 안색을 물들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색을 회복시켰다.

‘이 잡놈이 혀가 매끄럽기도 하구나. 끄응! 쳐죽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그는 말했다.

“후우! 좋소이다. 환살이 자백했다는 그쪽의 말을 믿겠소. 허나, 그 작자가 자신이 죽게되자 혼자 죽는 것이 억울하여 물귀신 작전을 쓴 것이오. 그러니 본각에서 귀교를 믿어주었듯 귀교에서도 본각을 믿어주시기 바라오.”

그제야 미소한 동천은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며 다소 거만해진 투로 말했다.

“물론이오. 서로 믿지 않는다면 어찌 합의점을 찾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하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본교에서는 은중각을 높게 평가하고 있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이 아쉬워서 이렇듯 바쁜 본 소전주를 이곳에까지 보냈겠소이까.”

형위광은 억지로 웃는 낯을 보이며 대꾸했다.

“하하,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 긴장했었소이다. 말씀만 하시오. 내 본각이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귀교는 물론 약소전주의 어려운 일들까지 성심 성의껏 도와드리리다.”

귀가 솔깃해진 동천은 좋아서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겨우 다물며 생각했다.

‘큭큭! 짜식, 진작에 굽히고 들어올 것이지 말야.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이 괜히 생긴 줄 알아? 그게 다 이 몸을 위해서 생긴 말이란 말씀이야? 훗, 어쨌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벌여 볼까나?’

그는 돌연 정색을 하더니 형위광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믿겠소이다.”

형위광은 덩달아 얼굴을 굳힌 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러자 동천이 말했다.

“좋소, 좋아. 그럼 허심탄회하게 본 소전주가 이곳을 방문한 진정한 목적을 말씀드리겠소. 먼저 살각의 요인들을 따돌리고 독대(獨對)를 원했던 것은 탁월한 선택이셨소이다. 이번 사건의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환영혈과 은중각의 얽힌 부분은 이미 해결을 본 상태이기 때문이오. 즉, 이번 일과 은중각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본교에서도 확인 작업을 마쳤다는 말이외다.”

형위광은 뜻밖에 대답에 놀라면서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느낌상 상대의 말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동천이 바로 손을 내저으며 흥분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아아, 그렇게 눈을 크게 뜨시면 이쪽에서도 부담스러우니 좀더 들어보시오. 그래서 살각에서는 그것을 핑계로 은중각을 통째로 삼키려는 계획을 세웠소. 그러나 본교 내부에서 그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전자는 살각의 의견이고, 후자는 은중각은 역사가 깊어서 강압적인 방법은 언젠가 불화를 낳게 되므로 그것보다는 이번 환영혈의 잘못이 그들의 뿌리인 은중각과 아주 관련이 없다고는 잡아떼지 못할 터이니, 몇 가지 일들을 부탁한 뒤 무난한 관계로 놔두자는 것이외다. 이제 잘 아시겠지만 본 소전주가 바로 그 후자의 측이오. 후후, 이제 왜 좌봉공 일행을 떼어놓고 나를 선택한 것이 탁월했는지를 잘 아시겠소이까?”

“으음!”

깊게 침음한 형위광은 그나마 만만하게 보았던 상대가 이제는 달라 보이자, 송 교관 그 자식은 도대체 뭘 보고 그따위 보고를 했던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는 나중에 단단히 손을 봐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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