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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17화


“주인님, 정말 화정이를 떼어놓고 가셔도 되겠어요?”

이틀 뒤 배웅 나온 소연이 걱정스런 눈길로 그렇게 물었다.

동천은 안 그래고 속이 쓰린데 얘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나 했다.

“내가 그 말 꺼내지 말랬지! 그 생각만 하면 뚜껑 열린다고!”

찔끔한 소연은 급히 대답했다.

“죄, 죄송해요. 이제는 정말로 말 안 할게요.”

더 하라고 해도 헤어지는 마당인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동천도 앞으로 오랫동안은 못 보게 될 터인데 더러운 기분으로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지 화를 풀었다.

“됐고, 알았으니까 질질 짤 생각말고 화정이하고 연화나 잘 데리고 있어. 특히, 수련 그 계집애와는 상종도 말고! 알았어?”

소연과 수련은 동천이 상종하지 말라고 해서 먹혀들 사이가 아니었지만 소연은 주인님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주인님. 당분간은 주인님께 무례한 수련이 반성하라는 뜻에서 만남을 자제할게요.”

동천은 완전히 안 만나겠다는 말보다는 믿음직스럽자 별 말 없이 넘어가주었다.

잠시 후 대문 밖의 마차로 신형을 옮긴 그는 뜻밖의 누군가가 서 있음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장로님들과 있어야할 네가 여긴 웬일이냐?”

먼저 인사부터 올린 도연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떠나시는 것은 배웅해드려야겠기에 잠시 짬을 내어 나왔습니다.”

“음, 그래? 그건 그렇고 너 정화 아가씨께 삼류무공가지고 깝쭉대지 말라고 혼났다며? 쯧쯧, 그러게 이 몸이 무공 수련을 하실 때 옆에서 따라하기라도 하지 그랬냐.”

도연은 아무리 주군이라지만 자신이 배운 무공을 삼류라고 비하하자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가 배운 것은 삼류무공이 아닐뿐더러 아가씨께서도 삼류무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빼고는 주군과 비슷한 훈계를 내리신 것은 사실이니 그 부분들에 관해서는 질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동천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달게? 질책을 달게 받아? 아주 확! 그냥 짠 소금을 입에 처넣을까보다.’

생각하고 보니 기발한 발상이었다.

동천은 그렇게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음을 한탄하며 도연에게 말했다.

“웃기지마, 쨔샤. 원래 장로님들의 무공은 초상승무공이 맞았는데 그런 무공을 익히게 되었다고 자만한 네가 지랄발광 비풍초 똥팔삼을 하는 바람에 삼류무공으로 전락해버린 거라구. 알간?”

순간 도연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는 누구도 그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이었는데 수련에 좀더 임하라는 말들은 가끔 했어도 이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일침을 놓아준 사람은 동천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난 어쩌면 자만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 태강즉절 외에는 다른 무공원리서적들을 들춰보지 않게 되었으며 오직 해답은 태강즉절에서만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아! 이것이 바로 오만이요, 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크게 반성한 도연은 무릎 꿇고 진심으로 주군에게 절을 올렸다.

“실로 크나크신 꾸짖음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 어? 이게 미쳤나?’

원래는 비위를 거슬리게 만들어 도연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것인데, 그가 도리어 큰 깨달음을 얻고 자신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자 동천은 기분이 썩 좋지 않으면서도 괜찮기도 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아, 됐어. 니 그 허접한 절이나 받자고 해준 말 아니니까, 배웅하러 왔으면 간만에 마차나 몰아서 본전의 집결지까지 한번 가봐.”

도연은 재빨리 일어나 명에 따랐다.

“예, 알겠습니다! 어서 타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더 따라올 필요가 없다며 소연과 화정이를 한번씩 안아준 뒤 마차에 올라탔다.

집결지는 약왕전에서 필요할 듯 보이지도 않는 연무장이었는데 그곳 근처에서 내린 동천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자 흐뭇한 미소를 뿌리며 모가지만 까딱거렸다.

“어이구 소전주님. 오셨습니까요?”

동천은 어딘가에서 많이 본 듯한 사내가 자신을 아는 척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잠깐 머리를 굴린 끝에 기억해냈다.

“아니, 자네는 한 당주가 아닌가! 이거 하도 오랜만에 보는지라 얼굴까지 다 잊어먹겠군.”

굽실거린 한심(寒心)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아버님이 요새 편찮으셔서 수발을 좀 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님이라면 만검전의 혈귀옹이었다.

그래서인지 동천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긴, 이제 갈 때도 됐지.’

동천은 짐짓 정색을 하고 물었다.

“만검전주님께서 아프시다니? 어디가 말인가?”

한심은 바로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입니다. 발목을 삐셔서 거동이 조금 불편하십니다.”

“으음!”

크게 상심한 동천은 고작 그따위 걸 가지고 저따위 얼굴을 하고있는 것이자, 정말이지 당주만 아니었다면 살인이 났을 거라고 속으로 씩씩거렸다.

아울러 이제 그에게서 관심이 없어진 동천은 뒤쫓아오려는 한심을 힐끔 노려본 뒤, 명단표를 들고 인원 파악에 몰두하고 있는 부전주 소진(素珍)에게 다가갔다.

“사부님께서는 아직 안 오셨습니까?”

명단에 적힌 사람들과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대조하여 확인 된 사람의 이름 위에 먹을 찍어대던 소진은 동천을 발견하곤 반갑게 맞이했다.

“아? 오셨습니까? 하하, 뒤늦게나마 통솔권을 맡게 되시어 앙축 드립니다.”

축하 인사에 간단하게 답례를 해준 동천은 불필요하게 명단을 확인하는 소진에게 물었다.

“부전주님이시라면 차출된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살펴보시지 않으셔도 다 아실 터인데 굳이 대조해가면서까지 확인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소진은 자신이 들고있는 명단표를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저라고 본전 내의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오늘 모인 인원들은 이미 사전점검 차 모두 살펴본 자들이지만 이 명단표는 제가 지닐 것이 아니라 2차 집결지에 모여, 수거를 담당하는 혼천부(混天府)의 당주 중 한 명에게 건네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천부라면 암흑마교 내의 모든 정보기관들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서 모든 정보는 그곳을 통해 들어와 그것을 통해 다시 빠져나가야 하는 것을 원칙을 삼고 있었다.

덕분에 혼천부는 교주와 부교주 쪽 그 어느 곳에도 예속되지 않은 채 독립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암흑마교 내에서 거의 유일한 기관이었다.

“아하, 그랬군요? 어쩐지 불필요하게 수고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동천은 소진이 부드럽게 이야기 해주어서 그런지, 괜히 아는 척 나섰다가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창피함에 얼굴을 붉힐 그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참, 전주님께서는 한발 먼저 긴급회의에 다시 소집되셨습니다.”

뒤늦게 동천이 다가오며 물었던 질문을 떠올린 소진이 대답해주자 동천은 무슨 일인가 했다.

“설마 또 암흑대전회의는 아니겠지요?”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단 암흑대전회의가 한번 열리게 되면 당분간은 급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최고위수뇌들만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급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수많은 인원들을 불러들인다면 시간 낭비와 인력 낭비가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암흑대전회의는 형식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마치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졌으니 다들 숙지를 하고 있다가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하게 움직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동천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만한 설명이어서 그런지 지극히 만족하여 입을 열었다.

“호오! 사람을 가르치는 다른 계통으로 나가셨어도 성공하셨겠습니다. 어찌 이리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지 제가 다 신기할 따름입니다.”

소진은 머쓱해했다.

“하하, 너무 띄워주시는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소진과 대화를 나눈 동천은 이제 곧 2차 집결지로 떠나야할 것만 같자 대외적인 문제들은 소진에게 맡기겠다고 말한 뒤 한발 물러섰다.

덕분에 일 처리를 함에 있어 그때마다 동천과 상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었던 소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자, 이제 인원파악이 끝났으니 서둘러 마차에 올라라. 원래 통솔자는 소전주님이시나 중요한 결정들을 제외하고는 뒤에서 지켜보시겠다고 하였으니 그렇게들 알고있길 바란다. 이의 있는가?”

의원들을 비롯한 이제 갓 들어온 신참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소진은 동천이 마차에 오르자 뒤이어 자신도 마차에 오른 뒤 앞장섰다.

한참을 달려 최종관문으로 진입하기 전인 드넓은 대로변에 도착한 약왕전 일행은 그곳에 무인들만이 즐비하자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의원이었기 때문에 눈빛이 형형한 무서운 기도의 무인들을 보게 되자 절로 위축되었던 것이다.

“흐음, 정말 많이도 모였는걸?”

어느새 다가왔는지 명단표를 혼천부의 인물에게 건네준 소진은 웃음 진 얼굴로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적어도 700명은 모이리라 보았는데 아마도 먼저 떠난 부대가 있는 모양입니다.”

눈을 크게 뜬 동천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같이 떠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소진은 대답해주었다.

“예, 몰려다니면 그만큼 남들의 이목에 포착될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견체계가 복잡해져 분란이 생길 수도 있는 고로, 대규모 이동에는 은밀히 분산하여 떠나는 것이 정석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의 인원도 나뉘어진 2진에 속하는데, 1진은 이미 어제 움직임이 신속한 부대들로 편성하여 본교를 출발했다고 합니다.

미리 그곳에 도착하여 비교적 비정규인원에 속하는 본전과 같은 곳들의 편의를 봐주려는 것이지요.”

이제 완전히 이해를 하게 된 동천은 계속 몰랐던 이야기만 듣게되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짐짓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사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번 통솔을 기념하여 축하주를 주시는 와중에 말씀해주셔서 제가 잠시 망각하고 있었지 뭡니까? 하하, 이것 참.”

소진은 전주님께서 일단 술판을 벌이시면 끝까지 가시는 성미인 것을 잘 아는지라 취중에 가르쳐주었으니 기억해내기가 참 애매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하, 그래도 기억해내신 것을 보면 소전주님의 기억력이 탁월하시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한 건했다고 자부심을 가진 동천은 절로 으쓱해져서 입을 열려고 했다.

헌데, 그에 앞서 한 무리가 또 다시 빠져나가자 그것을 보느라 말할 순간을 놓쳐버렸다.

소진은 그에게 말했다.

“이제 잠시후면 우리도 출발해야할 듯 보입니다. 확인과정은 다 마쳤으니 그저 마부에게 제 뒤를 따라오기만 하라고 명하십시오.”

“알겠소이다.”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근처에 서있던 도연에게 다가갔다.

영특한 도연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던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원하시는 바 뜻대로 다 이루시어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악담이 아닌 바에야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멋들어지게 폼을 잡았다.

“그건 내가 해야할 말인 듯 싶구나. 어쨌든 너도 잘 지내거라.”

“옛, 주군!”

동천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쳐준 후 원래의 마부로 바뀐 방삼에게 소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당부시켜주었다.

마차에 올라 출발하기만을 기다린 동천은 무언가 심심 하자 홀로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며 벌렁 드러누웠다.

헌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확 여는 것이 아닌가?

놀란 동천은 누가 감히 기척도 없이 자신의 문을 열었나 싶어 인상을 험악하게 썼다가 바로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히익? 아,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요?”

느닷없이 나타나 문을 열고 마차의 내부를 둘러본 사정화는 대체적으로 마음에 들었던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똑바로 앉고 그 자리에서 비켜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동천은 일단 명령을 듣고 보았다.

“예에, 여, 여기 앉으시지요.”

그가 비켜준 자리에 사뿐히 앉은 사정화는 쭈뼛한 자세로 마주앉아 양손을 모아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동천을 보곤 한마디했다.

“여기에서 사천까지는 적어도 한달 이상이 걸릴 텐데 그때까지도 그런 자세로 지낼 모양이지?”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회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보다 동천을 경악하게 말들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헉? 혹, 혹시 제 마차를 타시고 사천까지 가실 생각이십니까?”

사정화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론이야.”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였다.

‘으으, 이년이 드디어 나를 잡으려고 결심을 한 모양이구나! 으으, 방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던 년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나 가지고……. 커헉? 수, 숨이!’

뒷골이 당기고 호흡이 가빠진 동천은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설프게 웃으며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하하, 아가씨께서 제 마차가 마음에 드셨다니 실로 다행입니다. 에에,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전 이만. 하, 하하!”

“앉아.”

“예, 아가씨.”

자동적으로 다시 앉게된 동천은 사정화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시간이 흐를수록 허리가 뻣뻣해지고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소전주가 된 이후로 눕고 싶으면 눕고, 자고 싶으면 그냥 퍼 질러 잤던 그였기에 긴장한 상태에서의 고정된 자세를 유지하자니 상당히 고통스럽게 다가왔던 것이다.

“동천, 긴장 풀라고 했지.”

마침내 꺼낸 말이 그것이자 동천은 속에서 화딱지가 치밀어 올랐다.

‘이년아! 그게 명령으로만 해결되는 거였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

나름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사정화는 해를 끼칠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던 반면, 동천은 언제 싸대기가 날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민해져있는 상태였다.

“험험, 긴장하다니요?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정화는 빤히 보이는 동천의 수작질을 바라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내젓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다보면 큰 잘못이 아닌 이상 맞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몸소 체험할 테니까 말이다.

그때 마침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약왕전의 차례가 되어 밖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으으, 차라리 날 죽여라! 이런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약왕전의 소전주로서 고결하게 죽고 싶다!’

혼자 욕을 해봤자 힘만 빠지는 것은 동천이었다.

왜냐하면 그 욕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가능성은 결단코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 동천이 미쳐서 정말로 죽고 싶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동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정화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천상선녀도(天上仙女圖)를 방불케 하자 절로 감탄한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만져보려고 손을 올렸는데, 그것을 그만 눈치챈 사정화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지?”

“예?”

사정화는 동천이 다소 멍한 표정으로 되려 반문을 하는지라 눈살을 찌푸렸다

“그 손 뭐냐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동천은 자신이 미쳤었나보다고 속으로 호들갑을 떨다가 급히 손을 내리고는 변명했다.

“에에, 그게 그러니까. 아? 갑자기 허공에 먼지가 떠다니기에……. 헤헤, 제가 가끔 떠다니는 먼지를 잡아서 밖에다 버리는 습관이 있거든요. 아가씨께서는 개의치 마시고 계속 보세요.”

그 말을 믿을 사정화가 아니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어쩌면 이러한 일들이 하나둘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폭발하려고 준비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정말로 혼자 가시는 겁니까?”

어느새 창가로 다시 시선을 돌린 사정화는 고정된 자세로 대답해주었다.

“그래.”

동천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간결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나중에 그녀와 결혼할 남자는 평생을 가도 ‘응, 그래, 아니.’ 이 3가지 대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물론 그 남자가 만일 자신이 된다면 쥐어 패서라도 쌀쌀 맞고 간결하게 말하는 버릇을 꼭 고치게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되려 얻어맞고 살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지만 말이다.

“예에, 그렇군요. 헌데, 부교주님께서는 쉽게 허락해주시지 않으셨을 텐데 용케도 허락을 받으셨네요?”

순간 사정화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내가 왜 아버님의 허락여부에 눈치를 봐야 하지?”

잘못 건드렸다고 생각한 동천은 이놈의 입이 방정이라며 스스로 두어 대를 때리려다가 그래놓고도 사정화의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자신만 손해이기에 중간쯤 들어올렸던 손을 살짝 내려놓았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제가 말실수를 했나봅니다.”

사정화는 고개를 조아리는 동천에게 말했다.

“동천. 내 경고해두겠는데 나와 아버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일절 거론할 생각하지마. 만일 또다시 이런 일로 심기를 불편하게 할 시에는 아무리 너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

여기에서 나올 동천의 대답은 뻔했다.

“예예, 물론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무조건 알겠다고 굽실거린 동천은 궁상맞게 구석에 몸을 사리고 앉아 사정화의 눈치만 보고 있다가 문득 ‘아무리 너라 해도’ 라는 부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너라 해도? 그게 무슨 뜻이지? 그 말은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해준다거나 특별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기는 한데? 물론, 내가 저 계집애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아까의 어감은 그것보다는 좀더 농도 짙은 감정이 실린 듯 보였는데……. 헉? 서, 설마 저년이 이 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천은 자신의 매력적인(?) 외모를 본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녀의 신분이라면 따로 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자신과 단둘이 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심적인 증거라고 동천은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실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 이걸 어쩐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인데 갑자기 밤중에 나를 덮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그때 사정화가 불렀다.

“동천.”

“왜 불러 이 계집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무심결에 입을 놀린 동천은 곧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사정화에게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그는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 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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