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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23화


“어휴, 힘들어! 헥헥!”

동천은 귀주에 거의 도착한 일행이 여장을 풀자 그도 따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힘들거나 구토가 치밀어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무공 수위를 가늠해서 마차의 속력을 알맞게 늦춘 이유도 있었지만 동천도 예전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동천은 나직이 괴소를 흘렸다.

‘큭큭큭! 정화야 어쩌니? 이젠 하나도 힘이 안 드는데? 큭큭, 감히 물 먹일 분이 없어서 이 몸을 물 먹이려고 해? 두고보자, 이년.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저 킥킥거리는 것일 뿐이었지만 동천은 그 나름대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물론 그 복수가 제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그때 주루에 들어갔던 약왕전의 식구들 중 10명 안팎의 의원들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소전주님. 주루에 방이 모자라는 관계로 저희는 근처의 다른 곳에 머물겠습니다.”

동천은 그들이 밖에서 노숙을 하건 객사(客死)를 하건 알 바가 아니었지만 오는 동안 이런 일이 종종 있어서 그런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언제 바닥에 앉아 있었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음, 그래? 알았어. 하지만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마. 애꿎은 일에 휘말리면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시간이 넉넉지 않을 테니까.”

“예, 소전주님.”

동천은 의원들이 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길가에 서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점소이는 밖에서의 대화를 대충 들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동천에게 다가왔다.

“일행 분들 중 아름다운 아가씨와 몇몇 분들은 별채에 드셨고 나머지 분들은 이층 투숙실로 올라 가셨습니다.”

점소이는 아름다운 아가씨 부분을 언급할 때 약간(?) 넋이 나간 얼굴을 보였는데 그것을 본 동천은 인간 폐인이 또 하나 생기겠다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사정화의 면사를 사줘야겠다고 다짐한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별채로 안내하게.”

정신을 차린 점소이는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예, 손님.”

대답을 마친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별채에 당도한 동천은 부전주인 소진이 보이자 점소이를 물리고 다가가 물었다.

“제 방은 어디입니까?”

소진은 방향만 가르쳐주어도 될 것을 직접 안내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담한 듯 보이는 방 앞에서 멈춰 선 그는 그곳을 가리켰다.

“여기입니다, 소전주님. 그리고 오늘 내내 달려오셔서 피곤하실 테지만 목욕은 꼭 하시고 한숨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피곤하다는 이유로 목욕을 거른 적이 종종 있었던 동천은 최대 3일 동안 안한 적이 있었는데 평소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정화의 지시로 하루에 3시진 이상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던 것인 만큼 흙먼지와 땀에 절은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의 몸에서는 이상야릇한 쉰 냄새와 소금에 절인 냄새가 범벅이 되었고 사람들은 더러운 소전주의 성격을 알기에 냄새가 역해도 쉬쉬 거리며 피해 다녔다.

그나마 나선 것은 소진 정도밖에 없었지만 동천은 알겠다고 대답만 한 뒤 당연히 실천은 안 했다.

결국, 그의 3일 천하는 사정화로 인하여 끝을 맺게 되었는데 의외로 폭력 없이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다.

그녀는 ‘씻을 때까지 밥 주지마.’ 라고 말했을 따름이었다.

여하튼, 소진은 그때부터 착실하게 몸을 씻는 소전주를 보았지만 언제 거를지 몰라 가끔씩 이렇게 상기를 시켜주려고 말했던 것이었다.

동천은 대답했다.

“하하, 목욕은 거르지 않고 있으니 이제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살짝 웃어준 소진은 알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운기조식을 끝마친 후에 별채의 뒤편에 마련된 공동욕실에서 대충 몸을 씻어낸 동천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일까지 요모조모 따져가며 자신의 모든 것을 챙겨주던 소연이 없자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며 새삼스레 그녀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절감하게 되었다.

“아, 짜증나. 옷 갈아입는 것에서부터 마음놓고 구박하는 것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시팔! 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 혼자 나다니고 싶으면 자기나 조용히 다닐 것이지, 왜 생각도 없는 이 몸까지 끌어들여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거야?”

투덜거리며 욕실에서 나온 동천은 별채의 입구에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소진이 보이자 궁금해진 눈으로 다가갔다.

“아니,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느닷없는 인기척에 흠칫하던 소진은 상대를 확인하곤 멋쩍게 표정을 풀었다.

“하하, 제 표정이 조금 어두웠나 봅니다. 그런 게 아니라 사 아가씨께서 갑자기 방을 바꾸어 달라고 하시기에 별채의 방들을 하나씩 보여드리느라 조금 바빴을 따름입니다.”

동천은 의외라는 눈초리를 보냈다.

“어라? 아가씨의 방이 제일 크고 잘 갖추어져 있을 텐데, 왜요?”

사정화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소진은 가능한 신중하게 생각한 뒤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창가로 보이는 큰 나무 때문에 뒤쪽의 풍경이 잘 보이질 않는다며 무난한 다른 방을 찾으셨습니다.”

‘그년 참 성질머리 하고는…….’

사정화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있었지만 방을 바꾸자고 했을 때 크게 무례한 적은 없었다.

동천이 함부로 생각할 정도의 잘못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천이 언제 그런 것을 따졌던가?

이참에 부모까지 들먹이며 욕을 하려던 그는 생각해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사비혼이자 그래도 그것만큼은 참아주었다.

“아, 그래서 이 방 저 방을 보여주시느라 이곳에 나와 진땀을 흘리신 거였군요?”

정곡을 찔린 소진은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후우, 바로 보셨습니다. 아무래도 한 달 전쯤에 아가씨를 처음 뵈었을 때 그 기세에 눌려 쩔쩔맸던 것이 여운으로 남아서 매사에 아가씨께 조심하는 습성이 생겼나 봅니다.”

단 한번이라도 사정화의 차가운 눈빛을 정면으로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주눅이 드는 것이 다반사인지라 동천은 그럴 만도 하다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부전주의 말 중에서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자 끄덕이던 고개를 중단하고야 말았다.

“이번에 본교를 출발할 때 아가씨를 처음 뵈었다고요? 한 5, 6년 전쯤이 아니라?”

소진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5, 6년 전쯤이라니요?”

동천도 따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정말로 기억이 안 나십니까? 왜 그때 아가씨께서 기혈이 엉켜지셨을 때 제가 급히 치료를 하고 있으니까 중간에 오셔서는 그 뒤를 봐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동천은 이 부전주라는 인간이 암흑마교를 출발했던 날 저녁에도 사정화를 처음 보아서 긴장을 했느니 어쨌느니 입을 놀렸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때는 사정화의 문제로 인하여 골머리가 빠개질 지경이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는데, 오늘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때의 일과 연계되어 이렇게 물어 본 것이었다.

소진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던 안색을 굳히고는 진땀을 다시 흘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아? 하하, 그렇군요! 맞습니다. 제가 뒤늦게 도착하여 아가씨를 치료해드렸습니다. 하하, 이것 참.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사는 건지 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동천이 보기에는 ‘영 아니올시다.’ 였다.

무언가 숨기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동천은 약간 삐딱해진 얼굴로 물어보았다.

“정말 기억이 나신 겁니까? 그럼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네요?”

“음, 그렇습니다만 아가씨의 일로 신경을 썼더니 피곤하군요. 괜찮다면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지요.”

동천은 더욱 수상쩍어졌지만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닌데 붙잡고 늘어질 이유가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역시, 무언가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얼버무리듯 피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 말야?’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그 일에 몰두하며 걸어가던 동천은 어디에선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 소리의 근원지로 걸어갔다.

점점 다가갈수록 경박하게 웃는 소리는 커져만 갔고, 그에 비례해서 누구의 웃음소리인지를 간파한 동천의 얼굴은 찌푸려져만 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방문 앞까지 걸어가 멈추어 선 그는 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큭큭큭큭! 파하하하!”

문을 열고 들어가자 4인용 정도로 보이는 넓은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헤픈 웃음을 짓고 있는 한심이 보였다.

동천은 언제까지 저 짓거리를 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낮게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험험!”

“아이고, 좋아라! 하하하!”

“험험험!”

“큭큭, 내가 이 방을 얼마나 탐냈었는데. 큭큭큭!”

‘이런 씹새끼를 봤나.’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는지 한심은 동천의 헛기침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싶었다.

동천은 한심의 지금 모습이 예전에 자신의 모습인줄도 모르고 저런 놈을 낳은 혈귀옹이 참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이보게, 한 당주!”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헉? 예? 아, 소전주님이시군요. 헤헤,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동천은 혈귀옹이라는 존재만 아니었어도 벌써 손이 올라갔을 상황이었는데 그러지를 못하자 주먹이 울었다.

하지만 그는 꾹 참고 말했다.

“어쩐 일로 오긴. 내 방에 들어가려는데 자네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집안을 울리는지라 혹여 실성하지 않았나 싶어 찾아온 것이라네.”

한심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이 방이 너무도 좋아서 그만 흥분했나 봅니다.”

순간 동천은 무언가 집히는 것이 있었다.

“혹시, 아가씨와 방을 바꾼 게 자네였나?”

“예, 헤헤.”

“헉? 설마 자네. 아가씨의 채취를 맡으려고 침대 위를 그렇게 뒹군 것은…….”

“켁!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그, 그러다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전 죽습니다요.”

정말로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 새라 한심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있었다.

그것을 본 동천은 그렇게 무서워하는 놈이 왜 오해받을 짓은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동천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아, 걱정 말게. 이 몸이 누구인가. 약왕전의 자랑스런 소전주일세. 행여 자네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 해도……. 물론, 사내로서 자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닐세. 더군다나 그 나이 먹도록 장가도 못 갔으니 오죽했을까. 음, 잠시 말이 새어나갔군. 어쨌든 나는 자네의 편이란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약왕전의 당주로서 나와는 한식구이지 않은가! 그런 소문은 절대로 퍼지지 않을 것이니 자네는 염려 푹 놓게나.”

동천은 이미 한심을 그렇고 그런 놈으로 단정을 지어버렸지만 듣는 당사자는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해주겠다는 다짐만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희색이 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역시, 제겐 소전주님뿐이십니다. 앞으로 충성을 다해 모시겠으니 잘 좀 봐주십시오!”

내심 혀를 찬 동천은 그러겠다고 대답을 해준 뒤 마침 부전주의 일이 떠올라 그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자네 말일세. 혹시, 요새 부전주님의 이상한 점을 보지 못했나?”

한심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점이요? 글쎄요. 워낙에 부지런하신 분인지라 이상한 점은 보지 못한 걸로 기억합니다. 헌데, 왜 그러십니까?”

“그게 말이지…….”

동천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의외로 한심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하? 그거라면 알 듯도 합니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부전주님께서는 한 2년 전부터 건망증 초기증상을 앓아오셨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에 기억을 못하시는 듯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동천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건망증이라고? 그게 참말인가?”

한심은 소전주가 자신의 말에 수긍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분의 측근들은 이미 알만큼 알고 있으니 확인해보시면 제 말이 맞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동천은 거짓말이 아닌 듯 하자 재차 물었다.

“으음! 헌데, 그렇게 정정하신 분이 어떻게 건망증을 앓게 되셨단 말인가! 그럼 그분도 자신의 병증을 알고 계시는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한심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에에…, 처음에는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쉬쉬해서 모르셨는데 몇 개월 전부터는 약간이나마 눈치를 채시고 계신 듯 합니다. 안에서는 측근들이 쉬쉬해서 모르지만 밖에서는 그대로 노출이 되기 때문이라나요?”

말하는 투로 보아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하지만 고작 건망증 초기증상인데 어찌 5, 6년 전의 일을 기억해내시지 못한단 말인가.”

한심은 자신의 밑천을 다 드러내야만 하자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에효! 이건 확실한 정보는 아닌데 요새는 건망증 초기가 지난 상태랍니다. 한마디로 중기에 가까워지신 게죠.”

“그으래?”

한심은 슬며시 턱을 쓰다듬는 동천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소전주님.”

그제야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했던 부전주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이런 중요한 작전수행에 건망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가만. 사부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

한심은 이제 소전주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믿어주는 듯 하자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입을 놀렸다.

“헤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도 부전주께서 스스로 자신의 병증을 깨달으실 정도면 건망증 초기는 이미 지나신 상태인 듯 싶은데, 그 정도 가지고 일선의 임무가 아닌 의료 활동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너무 한다 싶으셔서 그냥 맡기신 게 아닐까요?”

보통 건망증이라고 하면 무언가를 해놓고도 잠시 잊어버리는 생활 속의 작은 병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이 건망증이라는 것이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면 상당히 무서운 병에 해당했다.

어떠한 일을 지시받거나 무언가를 해놓고도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니 당최 일을 맡길 수가 없을 뿐더러 당사자 또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실례(實例)로 어느 순간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거든 주머니 속 종이에 적힌 지시사항을 읽고 행동하라고 일러주었음에도 그 지시사항의 존재 마저 잊어버리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다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의 집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번 일을 마치고 본교로 돌아가게 된다면 내가 좀 사부님께 말씀을 드려봐야겠군. 부전주의 자리가 명예직도 아닐 터인데 그런 불안한 병을 앓고 있는 부전주를 계속 놔두어서는 아니 되지 않겠는가.”

그런 동천의 중얼거림에 눈을 반짝인 한심은 갑자기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적극 찬성해주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소진 부전주님의 시대는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 약왕전의 부전주가 건망증이라뇨?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동천은 이 인간이 왜 흥분을 하며 찬성하는가 싶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드러났다.

“헤헤, 그럼 부전주의 공석은 정해진 이치인데 차기 부전주로는 누굴 추천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덕을 갖추고 교양이 넘치며 무엇보다 의술에 정통한 자가 부전주로 추대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런 분이 부전주직을 맡으셔야 하고 말고요. 하지만 소신은 이것만은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전 영원한 소전주님의 종(鐘)이라는 겁니다. 딸랑, 딸랑. 에헤헤.”

“…….”

어이없어진 동천은 할말을 잃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가 약왕전을 말아먹으려고 환장했나. 니가 부전주가 될 수 있으면 이 몸은 부교주도 될 수 있겠다, 씨팔놈아.’

앞으로 동천이 약왕전을 이어받아 꾸려가려면 그를 추종하는 인재가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한심 같은 인재는 수십, 수백 명을 거저 준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되려, 미친 저능아를 데려왔다고 칼부림이나 안 나면 다행이리라.

“험! 그 말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네. 부전주의 병증이 언제 호전되리란 보장이 없을뿐더러 그의 건망증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그간의 공로를 보건대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일세. 하지만 만일 그가 물러나게 된다면 내 힘을 좀 써보도록 하지. 험험!”

만일 소진이 부전주의 자리를 내놓게 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하늘이 두 쪽이 나지 않는 한 동천이 한심을 밀어주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심이 쓸모 없는 존재일지라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실현 가능성도 없는 것인데 당장에 눈앞에 대고는 무슨 말인들 못해주겠는가.

또한, 정말로 소진이 물러나게 되더라도 다른 인물을 부전주로 앉혀놓고, 한심에게 가서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지만 아쉽게도 탈락이 되었다고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안배를 해놓은 동천이 당장에 먹기 좋은 떡을 잘 포장해서 한심에게 내밀자 그는 감격스러워 하는 얼굴로 그것을 덥석 받아 물었다.

“흑흑, 소신은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동안 절 무시하고 깔보는 인간들이 약왕전에서 태반이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한 생활을 20년도 넘게 해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크윽! 하지만 두고 보십시오. 제가 차후에 부전주에 오르기만 한다면 그동안 절 멸시했던 그놈들을 당장에 외지로 좌천시켜버리고야 말겠습니다! 이는 하늘에 두고 맹세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으음!”

역시 이 인간을 부전주 자리에 앉히면 약왕전을 말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자신의 생각을 더욱 공고히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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