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27화
그녀가 이곳 향화곡(香花谷)에 은신한지도 어언 15년 정도가 흘렀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지만 그 사랑이 문제여서 집을 뛰쳐나온 그녀였다. 처음에는 남편의 애를 태우려고만 했다. 그러나 은신한 장소가 문제였다. 그녀가 세상에서 몸을 의탁할 곳이라고는 향화곡 밖에 없어 돌아온 것이었는데 사정을 듣게 된 그녀의 의부(義父)가 불같이 대노하며 남편과의 인연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세월은 참 빠르게도 흘러간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을 터인데, 하고 후회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고통은 빠르게 아물어 갔지만 깊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 줄을 몰랐다. 아마도 이 상처는 남편과 아들과의 재회를 통해서만이 아물 수 있으리라.
“후우!”
습관이 된 듯한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만 먹었다면 의부의 눈을 속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그녀였건만, 젊었을 적의 그녀는 자존심이라는 벽에 가로 막혀 남편이 찾아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을 다짐했었다. 무정한 남편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지만 나중에 의부께서 임종하실 때 말씀하시길 몇 번이나 찾아온 남편을 몰래 내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의부의 죽음은 슬프기 그지없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모순되게도 기쁨의 물결이 그녀의 가슴을 고동쳤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의부도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해주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 후로 9년이 흘렀다. 집을 나온 지 15년 정도가 흐른 오늘이 되었건만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정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의부가 남편이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만 해주지 않았더라도 슬픔과 그리움에 못 이겨 되돌아갔을 터였는데, 집을 나선 동기가 그녀에게 유리했었던 만큼 수그러들던 그녀의 자존심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었다. 때가 되면 남편이 다시 그녀를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사람으로 추정되는 기운들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후 여럿의 기척들이 추가로 느껴지자 호기심이 일어나는 한편, 자신만의 공간에 스며든 자들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설마, 남편과 아들이 찾아온 걸까?’
가슴이 살짝 뛰었다. 그러나 그녀의 본능은 자신만의 공간을 침입한 자들이 절대 남편과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대번에 침착해진 그녀는 품속에서 낡은 피리를 꺼내 나직이 그것을 불었다. 허나, 신기하게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되려 소리는 침입자들 쪽에서 들려왔다.
“헉?”
“이, 이런! 쥐 떼다!”
최대한 조용히 억눌린 소리였지만 그녀가 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잠시 소란을 떨던 침입자들은 불리함을 깨달았던지 급히 되돌아갔다. 그녀는 확실하게 처리를 할까도 생각했으나 무고한 자들이라면 되려 나서지 않고 쫓아보내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로운 것임을 알고 그만두었다.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그자”
에게 걸린다면 살아남기를 포기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난데없이 등장한 엄청난 쥐 떼에 기겁을 하고 물러선 혼천부의 정보원들은 방금 전의 상황이 인위적인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것인지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은 결과 인위적인 것으로 중론을 모았다.
“조장,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상대에게 들킨 듯 보이는데 잠시 물러났다가 다른 길로 침투해 볼까요?”
조장이라 불린 사내는 신중하게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신경이 곤두 서 있는 마당에 어디로 침투한들 성공하겠느냐. 오늘은 그른 것 같으니 내일 새벽을 노리고 다시 움직이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조원들은 다음날 새벽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그들은 신속하게 물러났다. 최대한 흔적이 남지 않게 물러서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계곡의 초입이 보이매 알게 모르게 긴장이 풀어진 그때, 전방의 한 부분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환영인 양 냉막한 기도를 지닌 중년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두 눈을 부릅뜬 혼천부의 침투조원들은 멈춰버린 자신들을 느끼지도 못한 채 갑자기 등장한 초고수만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자다! 방금 보여준 그 한 수는 절대 혈각주님의 아래가 아니다!’
너무도 놀라 자신의 본분까지 망각했던 조장은 곧 정신을 차리고 의문의 중년인을 향하여 포권을 취했다.
“대단한 실력을 지니신 분을 뵈어서 실로 영광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성대명(尊姓大名)을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중년인은 약간 쉰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새 산을 휘젓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어도 묵인해주었거늘, 이곳까지 침입해 들어오다니. 네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로구나!”
흠칫한 그들은 한껏 굳은 신색으로 대비자세를 취하는 한편 조장이 계속 중재에 나섰다.
“혹시, 살인마왕 석추양 노선배님이 아니신지요.”
중년인은 조장의 정중한 물음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늘게 모았다. 그는 침묵이라고 말하기엔 약간 모자란 시간이 흘러서야 입을 열었다.
“석추양? 그게 누구더냐.”
조장은 상대가 발뺌을 하자 정말로 그가 석추양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연관은 있는 듯 느껴지기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하시는 말씀으로 보아 이곳 부근에서 기거하시는 분인 듯 한데, 석 노선배님을 모르신다니 의외입니다.”
“묻는 말에나 답해라!”
조장은 현재 패를 쥐고 있는 자가 으르렁거리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예에, 석추양 노선배님께서는 30년 전에 사천에 등장하시어 실로 찬란한 위명(威名)을 빛내셨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위대한 업적은 저 간악한 청성, 아미, 점창. 이 3파의 협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능히 받아내신 뒤 홀연히 은거에 들어가신 일화를 지닌 분이십니다.”
조장은 상대의 행동이 마도에 가까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찬란한 위명을 빛냈다고 말한 부분을 분기점으로 대처를 달리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상대가 그 부분에서 살며시 미소짓자 적어도 석추양을 좋게 보는 인물이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 혹은 그 자신일 수도 있어서 서슴없이 3파를 깔아뭉갰다.
그런 그의 선택이 좋았던지 상대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그를 대했다.
“흐흐, 그런 분이었단 말이냐? 기분이 좋구나. 한 놈만은 살려주겠으니 알아서 남을 놈들은 남거라.”
상대가 석추양임을 거의 확신한 조장은 현재 그의 나이가 80대임을 감안했을 때 상당히 젊다는 것에 놀라는 한편 마지막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저희들은 암흑마교 내의 혼천부에 속한 자들입니다. 임무 차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인데 대협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윗전에 아뢰어 다시는 이곳에 접근하지 않도록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암흑마교를 내세운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중년인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신중하게 생각한 중년인은 말했다.
“그래? 허면,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은 너희들이 처음이었단 말이지?”
조장은 실마리가 풀리는 듯 하자 내심 안도하며 재빨리 대답해주었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들을 무사히 보내주신다면 최소한의 마찰도 없이 더 이상 얼씬도 않는 방향으로 건의를 드려볼 것을 약속드립니다.”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은 말했다.
“으음, 그렇군. 그렇다면 죽어라.”
혼천부의 집법당주 혁필상은 사정화와 약속한 3일째가 다가오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3번이나 조원들을 침투시켰거늘, 계곡에 들어가는 족족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증발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에 침투한 조에게서 약간의 정보가 들어와 위안을 삼을 수 있었지만 그걸로 끝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난감해하는 것이었다.
‘보고를 올리기까지는 앞으로 반나절 가량이 남아있다. 마지막에 들어온 정보로는 뜻밖에도 석추양이 아닌 중년여인이 기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종으로 경각심이 극에 달한 조원들까지 계속 당하는 것으로 보아 중년여인이 아닌 도와주는 손길이 따로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손길이 석추양일 가능성이 크다. 으음! 그것만 확실히 알아낼 수 있다면 수월한 해결책이 마련될 터인데, 참으로 답답하기가 그지없구나!’
사실상 혁필상이 고뇌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것에 앞서 제일 큰 문제는 조원들의 생사여부였다.
아무리 석추양이라 할지라도 투입되었던 인재들을 모두 죽였을 시에는 혼천부의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것이 아니라 억류 된 상태라면 협상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빼내와야 혼천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서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직접 그곳을 살펴봐야 할 것 같군.”
두 눈을 빛낸 집법당주는 묵묵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수하들을 이끌고 향화곡으로 향했던 집법당주는 다음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밝혀진 것은 다음날 회의가 시작하고 나서였는데, 다들 모인 상태에서 제일 중요한 그가 불참하자 사람을 시켜 알아본 결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사정화는 안색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집법당주가 책임의식이 강했나보군.”
동천은 그런 사정화를 몰래 노려보았다.
‘저런 뻔뻔한……. 야! 니가 내린 명령을 완수 못하면 죽음인데, 너 같으면 안 찾아가고 배기겠냐? 뭐? 니가 내린 명령인데 니가 왜 가냐고? 우씨, 저게 죽을 라고!’
저 혼자 흥분하여 엉덩이를 들썩거린 동천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썩을 놈의 석추양새끼!’
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 의심의 눈길들을 자연스레 걷어냈다.
살각의 수석교관인 형엽산은 동천이 뭔 짓을 하던 관심을 끊고 사정화에게 말했다.
“아마도 별다른 수확이 없으시자 혼천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여서 직접 나서신 듯 합니다. 그분의 실력은 혼천부 내에서도 일절(一絶)로 통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신다면 곧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옳다고 여긴 사정화는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예, 아가씨.”
“물론입니다.”
반대 의견을 낸다면 집법당주의 실력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본 동천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인간들이 참 한심하게 보였던지 나직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모두의 의견을 수렴한 사정화는 특유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정오까지 기다려보겠어. 그 후로도 오지 않는다면 다시 회의를 거쳐 차후의 일을 논할 테니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어.”
“존명!”
힘차게 대답을 마친 사람들은 사정화가 나갈 때까지 공손히 자리에 일어나 있다가 그녀가 사라지자 나름대로 생각에 잠긴 얼굴들을 하고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때문인지 주위에는 걷는 소리들 외엔 전혀 소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천 또한 생각에 잠겨 조용히 걸어갔다.
“…….”
‘오늘 간식은 뭐가 좋을까?’
남들이 들으면 경멸할만한 생각이었지만 동천에게는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천천히 걷던 그는 어떤 한심하게 생긴 인간이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자 재빨리 그 인간을 불러 세웠다.
“어이, 한 당주. 어딜 그렇게 바삐 걸어가나?”
간식을 먹으러 달려가려던 한심은 자신을 부르는 약소전주의 목소리에 급히 멈추고는 돌아보았다.
“아! 소전주님이시군요? 다름이 아니라, 볼일이 좀 있어서 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동천은 무슨 일인지 물어봤자 별것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보다는 갑자기 떠오른 무언가를 대뜸 물었다.
“자네 혹시 외공(外功)에 관심이 있나?”
뚱딴지같은 물음에 한심이 놀란 눈을 했다.
“예? 외공이요? 철포삼(鐵布衫)이나 금종조(金鍾槽) 같은 거 말입니까?”
동천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걸세! 내 일전에 사부님의 서가에서 외공이 적힌 비급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자네를 보니 문득 그것이 떠오르지 뭔가.”
“아, 네∼. 그 외공의 이름이 뭔데요?”
그 따위 외공을 본 적도 없었던 동천은 잠시 생각한 후에 즉석에서 외공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음, 절정금강신공(絶頂剛神功)이라네.”
눈을 번뜩인 한심은 이름부터 대단한 듯 보이자 간식을 먹으려던 생각까지 잊고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오오, 실로 가슴에 와 닿는 무공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왜 제게 그런 말씀을…….”
뒤늦게 깨달은 한심이 물어보았다.
마침내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된 동천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내 자네가 아니면 이런 말은 하지도 않았을 걸세. 아아! 그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자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를 자네는 아는가? 따지고 보면 자네와의 인연은 이 몸이 처음 약왕전에 당도했을 때부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만만치 않은 세월을 같이 보내왔음에도 도움을 준 것이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가슴이 아프더군! 그래서 마음의 아픔은 달래줄 수 없을망정, 육체적인 고통이나마 해방시켜 줄 수는 없을까 고심을 한 끝에 늦었지만 이제야 자네에게 절정금강신공을 전수해주려고 하는 것일세.”
놀란 한심은 입을 쩍 벌렸다.
“헉? 그게 정말이십니까요?”
동천은 믿을 수 없어 하는 한심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하, 나를 믿지 못한다면 본교에서 그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그건 그렇지만 어쩐지 대단한 외공인 듯 하여……. 헤헤.”
땡 잡았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한심이 실실거리자 동천은 내심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짐짓 정색했다.
“이 외공은 절대 자네 혼자만 알아야 할 것이며 외부로 유출이 되었을 시에는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일세! 자네는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가?”
한심 또한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소전주님!”
그제야 되었다고 생각한 동천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고 있다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음, 절정금강신공의 내용이 대충 이러니 잘 듣게. 천지(天地)가 일원(一元)하나 합일(合一)의 경지가 요원(遙遠)하다. 안(內)과 밖(外)의 차이가 어디에 있으며 출발점이 어디인들 목적지가 다를 수 있겠는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뜻이라면,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라”
[무시무종 천지의(無始無終 天地意), 유시유종 인의지(有始有終 人意志)]
“시작과 끝은 언제나 일원일지니……, 그것에…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거기까지 말한 동천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방금 전까지 그가 읊조린 내용은 역심무극결 내의 중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한심을 완전히 매료시키기 위해 거기까지 알려준 뒤 시중에 나도는 운기토납법이나 대충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혼자 생각하고 보는 것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중반부를 생각하며 말하자 문득 잡힐 듯 말 듯한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맴돌았던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천지의 뜻(天地意).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人意志). 그러나 그 둘은 언제나 일원(一元). 일원, 일원이라…….’
잡힐 듯 말 듯한 무리(武理)가 동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심은 잘 듣고 있다가 더 이상의 말이 없자 의아한 눈으로 소전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뒤를 까먹었나?’
한심이 그다운 생각을 하는 사이 동천의 생각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역심무극결(逆心無極缺)의 뜻을 살펴보자면 마음을 거꾸로 움직여 없음의 극에 이르게 하는 이지러진 구결이라는 말이 된다.
결(缺)이란 단어는 이지러지다, 모자라다, 그릇이 깨지다, 흠, 틈, 결점 등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역심무극결이 애초에 완전하지 않은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반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완전하지 않는 것은 천지의 뜻이요, 그것을 완전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니, 일견 불완전한 듯 보이는 무공이지만 그것을 완전으로 이끈다면 불완전은 완전으로 가는 길목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없음은 언제든지 있음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 되고, 없음에서 있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불완전(역심무극결)이란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완전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 그 말인즉, 역심무극결은 불완전하지만 그것을 완전으로 이끄는 해답은 오직 나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 되는 건가? 그런 것일까?’
동천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머리가 옥죄어오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꽝! 하고, 귓가에 작게 울릴 정도의 폭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곧이어 청명한 기류가 그의 머릿속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깨달음이란 환희가 그의 정신 공간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곳에는 오로지 그만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뒤를 이어 여러 구결들이 허공에 생성되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가 깨달은 부분은 역심무극결에 관한 것이었는데 허공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무공구결들은 동천이 익히고 있는 모든 무공들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주위를 감도는 무공구결 중 하나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의 손안에 쥐어진 구결들은 밝게 빛을 뿜더니 곧이어 빛을 잃고 뿌연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렇구나! 그림자의 극에 이르면 몸이 흐르게 된다는 뜻이 단순한 이치에 맞물려 신(身)을 허(虛)하고 허를 공(空)으로 돌리게 하라는 것이었어!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거였어!’
전율을 느낀 동천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생각이 전달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심은 소전주의 몸이 약간 떠오른다 싶더니 팍! 꺼지듯이 사라진 동시에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자 대경하여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란 그는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다행히 동천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지는 못했다.
마치 새로운 경지를 시험하듯 영극류신법(影極流身法)으로 한심의 주위를 소리 없이 맴돌던 그는 또 다시 눈앞에 떠오른 무공구결의 한 토막이 보이자 냉큼 그것을 쥐어 모조리 흡수하듯 빛을 빨아들였다.
이번에는 귀영신법의 1단계인 귀영분광(鬼影分光)이었다.
“아? 아하하!”
너무도 쉽게 무공의 진리가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자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나눈다는 것에는 애초에 한계가 있었다.
분신(分身)은 이형환위(以形換位)에서 유래된 것으로 상대를 얼마나 쉽게 혼란에 이르게 하느냐가 관건인 무공이었다.
귀영분광 또한 이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무공이었는데, 이것이 여타의 다른 분신무공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눈으로도 분간할 수 없는 분신의 개수가 최대 4개인 것을 깨닫자 그것 이상으로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분신을 만들고자 한다면 몇 개인들 더 만들지 못하겠는가 만은 잡기(雜技)를 부려봤자 고수에게는 바로 간파 당할 것이 분명한데 쓸데없이 무공의 질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천은 눈에 보이는 진리를 뛰어넘어 숨겨졌던 귀영분광의 극의를 아렴풋이 깨달았으니…….
‘일원(一元)! 모든 것은 일원이다! 귀영분광 또한 4개의 분신에서 3개로 줄이고, 3개에서 2개. 그리고 2개에서 1개로 모여진다면 하나가 넷이 되고 넷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그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참을 수 없게 된 동천은 영극류신법에서 자연스럽게 귀영신법으로 바꾸었다.
이어 그는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가며 늘렸다 줄이고 줄였다 늘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러던 문득, 그는 한정된 공간이 아닌 드넓은 공간을 요동쳐보고 싶었다.
그의 눈앞은 아직도 어두웠지만 본능이 주위의 장애물들을 간파할 수 있음을 알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질주했다.
동천은 순식간에 산채를 벗어났고, 홀로 남게 된 한심은 동천의 여파로 산발된 머리를 하고 있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헉? 소, 소, 소전주님이 귀신에 홀렸구나!”
소리 없이 뒤에 나타났다가 수많은 분신을 만들고 홀연히 사라졌으니 오해를 할 만도 했다.
벌떡 일어난 그는 양손을 하늘로 치켜들고는 정신나간 놈처럼 산채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소전주님이 귀신에 홀렸다아아아―!”
그러는 사이에도 동천은 쭉쭉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가 향하는 곳의 끝에는 공교롭게도 향화곡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