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13화 – 업(業)의 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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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3권 13화 – 업(業)의 양면

업(業)의 양면

-비책

“연비, 그 아이 잘하고 있을까요?”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나예린이 물었다.

“아마 잘하고 있을 거예요, 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마 실패하는 일은 거의 없을 듯했다.

“믿고 싶지 않네요, 제가 살고 있는 현실 한 켠에 그런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류은경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이 인간이 지닌 어둠이죠. 가장 고결하게 될 수 있는 만큼, 가장 사악하게 변할 수도 있는 게 바로 인간이 지닌 업(業)이니까요. 무한의 가능성이란 일방통행 이 아니라는 거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업(業)인가요… 피할 수 없는……. 그런 무한(無限)은 필요없는데…….

인간의 추한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뭐, ‘지나친 혜택’이란 것인지도 모르죠. 인간이 그걸 다룰 수 있을지 없을지 보려는 신의 심술인지도 모르고요. 뭐, 그게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지금 바로 이 순간 아니겠어요? 그 아가씨가 여자로 태어난 것도 사실, 그 아가씨의 동생이 남자로 태어난 것도 사실. 그것은 이미 바꿀 수 없는 숙명이죠.”

숙명은 운명과 다르게 태어나는 그 순간 정해지며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건 왜죠?”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숙명은 바꿀 수 없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으니까요. 움직일 수 있기에 운명인 거죠.”

“사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가져야 하다니…… 정말 불공평해요.”

나예린 자신도 지금까지 만일 여자가 아니었다면’이라고 생각될 만한 상황들을 많이 만나왔었다. 거의 대부분은 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만큼은 항 상 그녀의 편이었고,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셨던 것이다.

“여자로 태어난 건 잘못인 건가요?”

***

씁쓸한 어조로 소녀가 자조했다.

무림은 힘이 지배하는 세계. 여자의 가녀린 몸으로 버티기엔 너무도 험난한 곳이었다. 그러나 연비는 류은경의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여자로 태어난 것에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쓸데없이 폭력만 양산하는 남자보단 여자가 훨씬 나아요. 적어도 아름다움이 있 으니까. 인류의 존속은 삼분의 이 이상 여성에게 주도권이 넘겨져 있다고 보면 돼요. 남자 따윈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덴 별로 도움이 안 되거든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이 세상에 차이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차이가 없다면 세상은 그 자리에서 정체한다. 완전한 평등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연비는 류은경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좋아요. 이렇게 된 이상 실력으로 손에 넣어주는 거예요. 그런 코딱지만 한 가문은 실력으로 접수해 버리면 그만이라구요. 어때요? 간단하죠?

전혀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한 류은경이 반문했다.

“시, 실력으로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가문은 언제나 자신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렇게 덧붙였다.

“아마, 그 남동생 이런저런 생떼 다 들어주고 키웠다면 어떤 몰골이 되었을지 대충 안 봐도 뻔해요. 그런 허접한 놈에게 패배한다면 그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죠. 내가 보기에 아가씬 그 정도로 약골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사고가 경직되어 있었던 것뿐이죠. 그런 집단 관념이야말로 사람의 운명을 좀먹는 주박(呪縛)이 라구요. 고정관념만큼 무서운 저주도 없죠. 사람이 가진 재능의 날개를 꺾고 그 발에 족쇄를 채우니까요. 그런 것 따윈 새로 만들어 보이면 돼요. 어차피 예외란 언 제나 존재하는 법. 그렇다면 아가씨 자신이 예외가 되면 되지 않겠어요?”

“그, 그럴 수는…….”

류은경은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비의 말은 너무나 상궤에서 벗어나 있어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럴 수 없다고 누가 정해놨나요? 한 번 해보기는 했어요?”

“……..”

류은경은 침묵했다. 그동안 지녀왔던 상식을 단숨에 부수는 연비의 날카로운 언어의 칼날은 이미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되 뇌는 모습은 그동안 쌓아놓은 주박의 최후의 발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목표가 없다면 지금부터 가지면 되잖아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어디 사는 누군가가 말했다지만, 소녀가 야망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는걸요. 게다가 그런 조그만 소원, 야망이랄 것도 없어요. 나처럼 무림정복 정도 된다면 모를까.”

“무림정복?! 그 소원 정말이에요?”

“아뇨. 물론 농담이에요.”

연비가 싱긋 웃었다. 어쩐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게 더 무섭네요, 라면서 은발소녀는 살짝 웃었다.

“가져 봤자 별로 이득이 될 것도 없는 걸 정복해 봤자 손해일 뿐이죠. 무림을 정복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계산하고 그 후에 돌아올 이익을 계산해 보면 가격 대 성능비가 너무 나빠요. 그런 소원은 사내들이나 가지는 거예요.”

나중에는 무림맹주도 여자로 바꾸자고 할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군요.”

부친의 미래가 잠시 걱정되는 딸이었다.

“비정한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은 것은 칭찬해 주죠. 비록 어리석고 착하긴 해도 말이에요. 자, 어떻게 하겠어요? 이대로 그냥 운명에 굴복하겠어요, 아니면 그것과 맞붙어 그걸 뛰어넘어 보이겠어요?”

류은경은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한 탓이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인정받겠어요.”

그것은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도와주겠어요. 사실 할 의지도 없는 사람 도와줘봤자 헛수고거든요. 그리고 난 헛수고가 정말 싫어요.”

특히 자신이 도와주기 위해 쏟은 노력이 개무시당할 때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밀려오기도 한다. 때문에 그런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길을 열어주겠어요!”

스스로 앞으로 나갈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만 길을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다. 걸으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 길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럼 어떤……?”

연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한텐 남궁상을 꼬실 만한 비책이 있는데, 관심있어요?”

류은경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긴 있나요?”

세상에 대해 불신이 깊은 류은경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요. 물론이죠. 이런 일 가지고 농담하는 취미는 없어요. 분명 이 비책을 쓰면 옴짝달싹 못하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비책, 부디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류은경이 말했다.

“흐흠, 어쩔까나…….”

연비는 예의상 한 번 튕겨주었다.

***

“비책까지 알려줬으니 분명히 성공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린.”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요.”

“잘될 거예요, 아마도.”

꽤나 태평한 대답이었다.

“우리 조의 세 번째 선수로 받아들일 걸 그랬나요?”

나예린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겠죠. 하지만 궁상 대장 쪽하고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게다가 우리한텐 이 소저도 있잖아요?”

분명 자기를 끼워주지 않으면 크게 삐칠 게 분명했다.

“아참, 그 아이가 있었죠. 제가 잠시 깜박했어요.”

그러나 차라리 깜빡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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