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39화
사정화는 얼굴이 심하게 부어서 처량 맞게 자신을 쳐다보는 동천을 보고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넌 내가 두 번째로 받아들인 완전한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첫째는 수련이고, 둘째가 너야. 물론, 너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내게 충성심을 보이는 자들은 널려있어. 그들 중에서 네 충성심의 순위를 매기자면 아마도 넌 하위권에서 맴돌 것이 분명해. 그러나 나는 생각했어. 비굴하고 성질은 더럽지만 근본은 악하지 않다고. 그리고 또 눈여겨봤지. 이 녀석은 왠지 모르게 사람을 잡아끌며 행운에, 아니 악운(惡運)에 특히 강하다는 것을…….”
여운을 남기는 말이 잠시 끊겼다. 이제야 말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한껏 긴장하며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정화야, 이 몸은 너를 믿어. 너는 틀림없이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야. 으으, 사실 이 몸도 도망자 신세는 처하고 싶지 않아. 만일 네가 여기에서 나쁜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이 몸을 때려놓고도 무시하는 처사가 되는 것인데, 그 뒷감당을 받아낼 자신이 있기나 하는 거니? 너 한 번 믿었던 수하에게 밟히고 싶어? 아니지? 그러니까 제발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려주길 바래. 제발! 응응?’
동천이 나름대로 그녀에게 간청하며 마음을 졸이는데 사정화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악운이 언젠가 나에게 큰 도움을 주리라는 예감을 느꼈어. 그렇기에 난 오늘 네가 벌인 짓이 악운에 강한 너를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믿고 싶어. 비록, 내가 생각했던 종류의 악운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거쳐가는 단계로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지금 너를 찢어 죽이고만 싶은 심정이거든.”
츠으으으.
그녀가 끝내 살기를 터트리자 동천이 파랗게 질려서 오들오들 떨었다. 전신에서 푸른 마기를 뿜어내던 사정화는 분위기를 전환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자신이 손을 쓸 것만 같자 애써 이를 악물며 들끓는 살기를 진정시켰다.
“후우, 그만 두자. 어쨌든 네가 날 구해준 것은 사실이니까 말야. 그리고 이번 일은 네게 약속했던 대로 불문에 부치겠어. 단!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갔다간 난 정말 너를 죽여야 할지도 몰라. 동천, 가벼운 너지만 이번 일만큼은 얼마나 입이 무거워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겠지?”
언제 떨었냐는 듯 안색이 점점 환해진 동천은 급히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아가씨! 잘 알고 있습니다요!”
이럴 때는 길게 말해서는 안되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상대의 신뢰를 깨트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던 동천은 가능한 짧게 대답한 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정화는 말했다.
“좋아. 오늘 일은 모두 잊어버리도록 해. 나도 깡그리 잊을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흑흑흑!”
동천은 왜 울음이 나오는 것인지 몰랐지만 알고 보면 그는 지금까지 짐짓 허세를 부렸던 것에 불과했다. 진정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은 아니었어도 15세의 나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강한 척을 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동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정화는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사정화의 이 일련의 행동은 그저 잘하라는 식의 격려를 내포했다고 볼 수도 있었는데 진실을 파고들자면 이렇다. 그녀는 울먹이는 동천의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너무도 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포착되자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감지한 동천이 몸을 부르르 떨자 되려 움찔한 사정화는 손을 거두고 물러섰다. 그리고는 한 번 내뱉은 말을 번복할 뻔한 자신이 수치스러웠는지 말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던 것이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순간 얼떨떨했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다. 동천은 잠시 자신을 꼬집어보았다. 안 아팠다.
‘헉? 정말로 꿈인가?’
그러다 살짝 꼬집어서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진짜로 꼬집었다. 그러자 확실히 아픔이 느껴졌다.
“으아! 내가 안 죽었구나! 오오, 하늘님이 보우하사! 우리 동천 만세! 으하하하! 살았다, 살았다구!”
그제야 이제 발뻗고 편히 잘 수 있다는 안도감에 동천은 허물어졌다. 그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며 모든 영광을 하늘님에게 돌리려다가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뻐하던 그는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자 갑자기 허탈해졌다. 정말로 그녀가 불문에 부치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우씨!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다 말해버릴 걸, 괜히 버티다가 죽어라 맞았잖아? 아, 젠장! 이 몸의 잘난 얼굴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흐미…….”
산 것은 산 것이고, 맞은 것은 맞은 것이었다. 동경(銅鏡)이 없어서 얼굴 상태는 확인이 불가했지만 대충 만져보면 어떤지는 알 수 있었다.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정화를 씹어댄 그는 적어도 내일까지 방안에서 자중해야만 할 것 같자 괜히 성질을 냈다.
그러던 차에 잠깐 부모님에 관해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어쩐지 실감이 안 나자 길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모든 열쇠는 자인설이 쥐고 있었던 만큼, 그녀가 잡히면 그때 심문하리라 여겼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동천은 그녀의 이야기를 그다지 신용하고 있지 않았다. 치우도법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사기꾼은 아닌 듯 싶은데 그렇게 따지고 들면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 아줌마는 언젠가 다시 만날 듯한 예감이 드니까 그때 생각하지 뭐. 쳇, 난데없이 어머니를 안다고 하면 이 몸이 흔들릴 줄 알고? 어림도 없다, 이거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은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지 거칠게 침대 위를 점거한 동천은 몸을 세차게 뒤척였다. 잠시 현실도피 차 정화와의 뜨거웠던 시간을 음미하며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던 동천은 갑자기 눈을 번득이더니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냈다.
“가만! 이 몸이 익힌 게 정말 그 단강수가 맞는 건가?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한 동천은 입이 귀에 걸리는지 코에 걸리는지 모를 정도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돌연, 눈을 부릅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그, 그렇다면 이 몸은 벌써부터 천하제일인의 반석에 올라섰다는 뜻인가? 아아, 장 할아버지 고마워요. 이렇듯 귀한 무공을 제게 전수시켜주시다니. 당장에 생명이 다하셔도 할아버진 복 받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진짜 정말이긴 한데…….”
순간 동천은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보통 큰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 봐라? 이 몸이 익힌 단강수가 왜 그 아줌마랑 연관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단강수를 확인한 지랄마왕이 나를 어떤 자의 아들로 착각한 것은 또 뭐고?”
끈적끈적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방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싹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본능은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합쳐서 생각하면 그 어떤 자는 그 아줌마랑 부부관계이고, 지랄마왕은 그 아줌마를 지켜줘야 하는 임무를 지녔고, 그 아줌마는 이 몸을 첩의 자식으로 알고 있고, 그 아줌마에게는 30세에 가까운 아들내미가 있고, 지랄마왕은 15년 간 이곳에 있으면서도 그 아들내미를 못 봤고, 이 몸의 연세가 올해로 15세이니…….”
부르르!
전율이 일어났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동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씨? 뭐야 이거! 완전히 삼류소설이잖아?”
믿을 수 없었던 동천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버럭 화를 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그 아줌마는 자신의 큰어머니였고 자신은 첩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단강수를 전수해준 장노삼의 정체는?
“으으, 장 할아버지가 누구시기에 그것을 익히고 계셨지? 그리고 단강수를 본 지랄마왕이 대뜸 공손해지며 아버지로 여겨지는 자……, 분의 아들로 착각한 것을 보면 그자… 분도 단강수를 익히고 있다는 이야기잖아? 아, 젠장 머리 아파. 컥? 서, 설마 장 할아버지가 내 아버지?”
너무 비약적으로 앞서간 동천은 자신이 생각했어도 어이가 없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장노삼이 자신과 예사로운 관계인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황룡세가에 있을 때의 장노삼은 항상 자신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
“혹시 장 할아버지도 지랄마왕이 그 아줌마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듯, 이 몸을 보호하는 임무를 띄고 곁에서 머물렀던 건가? 으음, 아냐. 그렇다면 남의 집 종놈으로 있게 그냥 놔두었을 리가 만무해. 크아악! 그렇다면 뭐지? 누가 좀 진실을 말해 줘!”
동천은 자인설이 큰어머니일지도 몰랐지만 굳이 대우해주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여인을 증오하는 듯 보였고 자신도 당한 것이 있어서 결코 좋게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헉헉! 지, 진정하자 동천아. 어차피 장 할아버지는 만나게 되어있다. 그리고 할아버지하고 만날 시기가 1년 정도나 남아있으니 조급해봤자 이 몸만 손해다. 그래! 차라리 그 동안 열심히 수련을 쌓아서 감히 이 몸을 내려다 보는 인간들이 없게끔 노력하는 거야! 아무도 무시할 수 없게끔!”
불타오르는 정열로 굳게 다짐한 그는 오늘은 피곤하니 그냥 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