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640화


-이봐.

누군가 동천을 불렀다. 어두운 곳에서 두리번거리던 동천은 이내 상대를 찾았다. 상대의 얼굴을 본 동천은 놀라야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동천도 놀라는 중이었는데 상대 또한 의외였던 듯 눈썹을 깊게 꿈틀거렸다가 다시 회복하였다.

“뭐야.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어?”

대답하면서도 동천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말은 이전에도 언젠가 해본 듯한 말이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상대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너야말로 꽤 버티는군. 아아, 하지만 지금 그걸 쟁점화 시킬 생각은 전혀 없어. 난 그저 네가 점점 도태되는 것을 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니까 말야.

동천은 비위에 거슬리는 말에 화를 냈다.

“뭐? 너 죽고 싶어? 비 오는 날에 때려도 왜 먼지가 피어오르는지 우리 한 번 실험해볼까?”

-후훗, 지금이야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매일 빈둥거릴 때 나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알려주고 싶은 거야. 물론 네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은 하더군.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멀었어. 난 선의의 경쟁을 하고픈 것이지, 낙오자를 달래고 이끌어주려는 것이 아니거든.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난 동천은 참지 못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그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동시에 비호같은 몸놀림으로 달려들자 상대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막아갔다. 몇 합을 막아내던 상대는 검은 기류를 뿜어대기 시작했고 동천도 이때만큼은 방심하지 못했다.

급히 영향권에서 벗어나 뒤로 돌아 상대를 공격했다. 또다시 막는 입장이 된 상대는 제법 능숙하게 동천의 공격을 막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움직임이 둔해지고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류도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하하! 마지막이다, 이놈아!”

퍼억!

-크으읍! 아, 아직 인가?

신이 난 동천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보, 보면 몰라? 크크큭, 까불고 있어.”

상대의 말투를 따라한 그는 비록 웃고는 있었으나 속으로는 놀란 상태였다. 저번보다 확실히 강해진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응? 저번보다? 저번에 언제 이런 일이 또 있었나?’

모든 것이 잡힐 듯 말듯 모호해서 확실하진 않았다. 그러나 언제인가 겪어 보았던 일이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상하네. 언제 그랬던 거지? 평범한 천재를 넘어선 이 몸이 그런 것을 기억해내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상대는 기억을 더듬는 동천에게 뻔히 보인다는 듯 말했다.

-소용없어. 그것보다는 여전히 실력이 답보상태로군. 열심히 수련하기 바란다. 나는 싱거운 싸움에는 관심이 없거든. 후후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는지 상대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이었던 동천은 서둘러 그를 불렀다.

“어? 이봐! 야! 야 임마! 너 거기 안 서?”

동천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잠깐 구분이 안 갔다. 그러나 그것도 구분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어쩐지 그는 숨이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헉헉, 꿈이었나?”

막상 꿈이라고 생각한 순간 꿈속의 내용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전혀 기억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현상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고민할 것도 없이 개꿈으로 치부한 그는 어느새 아침이 다가오자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걸어나왔다.

“으그그극! 아하, 역시 새벽공기가 제일이로세.”

사정화와의 일이 있은 지 벌써 2달 정도가 흘렀다. 그녀는 약속대로 평소와 같이 그를 대했지만 워낙에 심기를 드러내지 않는 그녀여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지 어떤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동안 일어난 일이라고는 석추양에게 잡혀갔던 자들이 약속대로 모두 풀려났다는 것이었고, 이틀 뒤에 남쪽을 다녀와 그간의 일들을 보고 받은 아수전의 부전주가 사정화에게 대죄를 청했으며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새로운 책임자로 요림의 림주인 요화(妖花) 금요랑(金妖郞)이 수하들을 이끌고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동천으로서는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혈각주보다는 친한(?) 관계여서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뭐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갈아치울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먼저 운기조식을 한 뒤에 간단하게 무공으로 몸을 풀고 지도를 제작하러 나가면 되겠지?”

석추양과 자인설은 끝내 잡아들이지 못했다. 산채가 어수선해서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느라 추적해야할 시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동천은 내심 무능력한 추적대를 탓했지만 제일 피를 본 사정화가 가만히 있자 감히 내색하지를 못했다.

그런 와중에 그가 제일 궁금한 것은 그녀의 호위대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젠 대놓고 그녀를 지키는 호위대가 과연 그때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실신한 사정화가 다른 윗도리를 입은 상태였고 이전에 입고 있던 옷은 찢어져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으니 무언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을 그들에게 물어보자니 의심을 살게 뻔했고, 사정화에게 그 문제를 의논하자니 왜 그때의 일을 다시 거론 하냐며 얻어맞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자 충성심이 대단한 그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한 스스로 거론하거나 떠벌리고 다니는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 일에만 충실한 일종의 충견이었기 때문이다.

“후우우!”

어느새 운기조식을 끝마친 동천은 아침식사 전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아돌자 무공을 수련했다. 동천은 평소 수련시간의 5할 이상을 단강수에 할애했는데 아무래도 수공의 대단함을 알고 난 후였기 때문에 그것을 중점적으로 수련하게 된 듯 싶었다.

장시간 수공을 펼치다가 동작들을 바꾸어 신법을 펼치고 권(拳)과 지(指)까지 혼합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그는 방안에서만 수련하자니 답답한 감이 있었지만 밖은 누가 훔쳐 볼 염려가 있어서 위험했다.

또한 거창하게 주위를 활용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불평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과 같은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누추한 곳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계시다는 것이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었다.

“아, 땀난다. 대충 2각 정도는 흐른 것 같지? 이제 아침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요림주 금요랑이 오고 나서 며칠 간은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인사차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그녀의 이야기 중에 혼자 밥을 먹는다는 말이 계기가 되어 같이 먹는 게 어떠냐고 물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사정화가 지나가는 말투로 다시 여색에 관심이 동한 것이냐고 묻자 바로 같이 먹는 것을 중단했다. 그런 쪽으로 사정화와 얽히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던 동천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간 것도 죄냐며 혼자 있을 때 마구 그녀를 욕했지만 결론은 그녀가 자신과 금요랑의 사이를 질투하는구나로 끝마쳤다. 그래야 당하는 입장에서도 덜 억울했기 때문이다.

“아차차. 세수는 하고 가야하는 걸 잊을 뻔했네? 하여간 세상이 빨리 돌아가다 보니 해야할 것도 간혹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니까? 어푸어푸.”

세수를 간단하게 끝마친 그는 밖으로 나왔다. 사천을 수색하는 지역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벌써 4번 째 산채를 옮긴 상태였다. 그때마다 힘없는 산적들이 세상을 하직했지만 동천은 그것에 관하여 딱히 어떠한 감흥을 느끼지는 않았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정화의 명으로 산채를 점거할 때마다 일부러 살육의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토하는 횟수와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적응력이 빨라져서 준비하고 보는 살인에는 간신히 직시(直視)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었다.

“이런 씨! 밥 먹으러 가는데 왜 하필 그따위 생각이 나는 거지? 아, 짜증나. 오늘은 두 그릇 밖에 못 먹겠네?”

아마도 그 상황에서 동천에게만 그러한 명령을 내렸더라면 그는 쉽게 무너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정화가 곁에서 같이 지켜보게 되자 멀쩡한 그녀를 보며 이를 악물었던 것이 효과를 보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토악질에 급급한 동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천, 잔인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게 마교야. 살인은 목적과 수단에 의해서 정당화되지. 만일 네가 끝끝내 저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너는 평생을 본교의 낙오자로만 살아야 할거야. 생존의 법칙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을 각오를 하고 똑바로 쳐다봐.’라고 말이다.

그래서 동천은 이런 처참한 상황을 자신에게만 보인다고 그녀를 욕할 수 없었다. 그도 느낀 것이다. 이런 살인장면을 목도(目睹)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생소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신에 그는 참으로 독한 년이라고 욕을 했을 따름이었다.

“헤헤, 아가씨. 밤새 편히 주무셨어요?”

사정화의 거처로 찾아간 동천은 공손히 인사부터 올렸다. 잠시 명상에 잠겨 있다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사정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좀 늦었는데, 왜지?”

“아? 그게 새로 바뀐 산채 때문에 이곳을 찾느라고 좀……. 하하!”

동천의 방향치를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이해를 했는지 별말 없이 넘어가주었다. 잠시 후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십대 후반의 소녀가 식사를 차려왔다. 요림주가 데려온 수하들 중 사정화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하여 가려진 아이였다. 동천은 시비로 내정된 소녀를 볼 때마다 사정화가 자신도 수련을 동행시키지 않겠다며 자신에게까지 홀로 가기를 강요했던 그 때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결국 시중들 아이를 구할 거면서 이 몸까지 피해를 입히다니. 니가 그러고도 차기 교주야? 우씨, 수하에게 신망 잃고 어디 얼마나 오래가나 두고 보자.’

그때 사정화가 고기 한 점을 씹어 삼키고 나서 물었다.

“동천.”

깜짝 놀란 동천은 반응했다.

“예? 왜, 왜요?”

사정화는 왜 놀라는지 몰랐기에 그의 위아래를 쳐다보다가 크게 상관하지 않고 물었다.

“밤마다 산채 주위를 맴돈다는데 그게 사실이야?”

동천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빛은 쟤가 또 어디에서 허튼 소리를 들었구나, 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그것을 간파한 그녀는 엄한 눈초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던 자유지만 표정으로는 내비치지마.”

‘윽, 귀신같은 년.’

내심 찔끔한 동천은 말했다.

“예, 주의할게요. 그런데 제가 밤마다 산채 주변을 맴돈다니요? 아마 누군가와 착각하신 것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저는 날이 어두워지면 거처에만 있다가 그냥 자거든요.”

동천이 발뺌한다고 생각한 사정화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진 상태인데 정작 당사자인 네가 모르다니 의외인 걸. 보초를 서는 순번이 계속 돌아가면서 바뀌는 것은 너도 잘 알 거야. 그런데 네가 산채에 있을 때면 매일 해시(亥時 : 밤 9시부터 11시) 정도에 몰래 나가서 인시(寅時 : 새벽 3시부터 5시) 정도에 되돌아오는 것을 이미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들었어. 이래도 잡아 뗄 거야?”

어이가 없어진 동천은 언성을 높였다.

“아니, 어떤 씁쌔들이 저를 모함하는 겁니까? 전 결백하니까 정 못 믿으시겠다면 그놈들을 잡아다 주십시오! 제가 대면해서 확실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겠습니다!”

밥 먹다 말고 흥분해서 밥풀을 죄다 튀긴 동천은 사정화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그녀는 식탁에 골고루 퍼져있는 밥풀들을 보자 식욕이 떨어지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입안에 든 것은 다 씹어 넘기고 말 하랬지.”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어쨌든, 특정인을 잡아다 대면할 필요도 없이 근 2달간 계속 벌어진 일이니까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거야. 무슨 이유 때문에 숨기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 억울하면 네가 가서 물어봐.”

“예, 아가씨.”

바로 공손해진 동천은 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요랑과의 식사 건 때문에 사정화에게 잘 보이려고 ‘혼자 드시려니 얼마나 적적하시겠어요?’ 라고 말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렇게 당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정화와 식사를 하려면 늘 긴장해야하고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고 말이다.

“저기, 그런데 각대는 언제까지 차고 있어야 하나요?”

조심스레 그가 묻자 사정화가 대답해주었다.

“본교로 돌아갈 때까지야. 불만 있어?”

동천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요? 헤헤. 아, 오늘 음식이 참 맛있네요? 와구와구.”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밥풀이어서 그랬을까? 동천은 먹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듯했다. 사정화는 약간 비위가 상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둘러 먹고 난 동천은 기회를 노린 듯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씨팔, 안 그래도 오늘 또 외부로 나가봐야 하는데 기분 좋게 보내주지는 못할망정 왜 생떼는 써서 사람을 괴롭히고 지랄이야?”

지도 제작은 이제 거의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상되는 모든 지역들을 그리는 것이 1차였고 그 지역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정밀수색에 들어가는 것이 2차였는데, 아직 1차도 중간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 끝을 보려면 시일이 좀 걸리리라고 예상하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동천도 포함되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 몸이 밤에 돌아다니신다는 소리는 또 뭐지?”

정말로 몰랐던 동천은 내친 김에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봐, 혹시 말야. 이 몸이 밤만 되면 산채를 나가셨다가 새벽이 다 되서야 돌아오신다는 소문을 듣거나 직접 목격한 적이 있어?”

“아, 그것은 왜…….”

“음! 그건 말이지. 이 몸은 그런 적이 없는데 어떤 시팔 놈들이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것 같아서 확인을 좀 해보려고 그래. 그리고 그 빌어먹을 놈들은 말이지, 잡히면 아주 사지를 비틀어서 절단해 버릴 생각이야. 뿌득, 감히 없는 말들을 지어내다니! 아참? 여하튼, 넌 알아?”

그렇게 말하는데 안다고 말해줄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이쿠, 그런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요! 소인이 이래 보여도 보초로 잔뼈가 굵은 놈인데 그런 헛소문은 오늘 약소전주님께 처음 듣습니다요.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것은 아니십니까?”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이야기 잘 들었네.”

간단하게 소문의 진상을 파악(?)한 동천은 역시 헛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는 사정화가 계집이라서 그런지 유언비어에 민감하여 그런 것만 찾아 듣다가 괜히 힘없는 자신을 괴롭힌 것이었다고 치부하게 되었다.

“정화까지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줄 몰랐는데 천상 여자라는 건가? 에잉, 쯧쯧!”

혀를 차며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온 그는 반 시진 후 자신의 4조(組)가 떠날 차비를 알려오자 밖으로 나왔다. 늘상 보이는 얼굴들이어서 따로 확인 절차는 없었고 그들은 바로 출발했다.

“이번 작업은 며칠을 예정으로 잡고 있지?”

초철산은 대답했다.

“이틀입니다.”

“이틀 째 되는 날에 돌아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이틀 동안 뭐하고 시간을 때우나 막막해진 동천은 벌써부터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본 초철산은 한심하기가 그지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길을 앞장섰다. 간간이 쉬며 반나절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야영을 준비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어두워질 때 준비를 하게 되어서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동천이 성질을 냈기 때문에 그런 소리 듣기를 싫어서라도 통상보다 일찍 준비해야만 했다.

“약소전주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넓적한 바위에 누워서 빈둥거리던 동천은 식사 때마다 방안에서 기어 나오는 한량처럼 눈을 반짝이며 일어났다.

“오, 그래? 그렇다면 가야지. 하하하!”

동천이 먼저 시식을 하자 조원들은 무쇠 솥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국을 퍼담아 먹기 시작했는데 유일하게 음식에 불만을 표시하는 인간이 발생했다.

“뭐가 이리도 맛없어? 우씨, 니들 입맛은 미개인 입맛이야? 에이, 젠장! 더럽게도 맛없네!”

그러면서도 다 먹고 없자 동천은 또 만들라고 시켰다.

‘으으, 천신께서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저런 놈의 밑에 내가 배정되게 하실 게 뭐란 말인가!’

깊게 한탄한 초철산은 요 근래에 머리카락이 다 빠지자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을 정도로 울화를 참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다른 조로 바꿔주십사 금요랑에게까지 간청을 올렸겠는가. 하지만 그가 다른 조로 옮기게 되면 자연히 다른 곳의 부 조장들 중 한 명이 동천의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고로, 다른 부조장들의 결사반대에 부딪혀서 별로 기대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나 말씀하는 거지만 내일은 좀 맛있게 만들어봐. 알았어?”

“예, 약소전주님.”

“그래, 그럼 수고하고. 이 몸은 이만 주무시러 가겠네.”

기분이 좋으면 그래도 사람 대접은 해주었는데 그게 더 가증스러운 초철산이었다. 먹고 나서 바로 잠이든 동천은 비교적 순하게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뜬 동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시 전용 막사의 내부를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온 그는 다른 막사로 들어가서 화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초철산에게 다가갔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초철산은 침착해 보이는 약소전주가 손을 내밀자 미리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람처럼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지도를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동천은 무심한 눈길로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흐음, 앞이 막혀있나?”

초철산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예, 약소전주님. 석산(石山)으로 보이는데 광범위하게 줄기를 퍼트리고 있어서 이곳을 향할 때에는 적어도 나흘의 시간이 걸려야 모든 지세를 소화해낼 수 있을 듯 싶습니다.”

동천은 말했다.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할 만큼의 가치는 없어 보이는군. 지도를 그릴 필요성이 없을 것 같아.”

그러자 초철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한 부분에서 구멍이 생기게 되면 그것들이 쌓여가다가 결국 지도제작에 차질을 빚어낼 것이 분명합니다. 저희도 그것 때문에 쓸모 없는 지역일지라도 꾸준히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동천은 가만히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초철산은 마치 자신의 내부를 휘젓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받고는 은근슬쩍 약소전주의 눈길을 피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쪽 전체가 수색하는 이 북쪽에는 천마동이 없어. 왜 인줄 아나?”

흠칫한 초철산은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확신하시는 듯한 말씀이로군요. 그렇게 장담하실 만한 정보를 지니고 계신 겁니까?”

그것은 아닌 듯 동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만한 것이 있었다면 벌써 건의하고도 남았지 이러고 있겠는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간단하네. 천마도해가 나타나고 천마지가가 나타났으며 그것들은 너무도 쉽게 퍼져나갔지. 천년 이상을 잠자코 이어져 오다가 현 무림에서 일류만 되어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흔하게 된 것이야. 물론, 거기에서 대다수가 천마도해이고 천마지가는 극소수라지만 타 세력들의 움직임을 보자면 그들은 우리가 맡은 쪽에서의 활동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네. 자네도 알 걸? 혈각주께서 본교로 돌아가신 이유가 남쪽에서의 분쟁이 커질 듯 보이자 회의를 거친 후 남쪽으로 투입되셨다는 것을 말야.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제야 무언가 깨닫게 된 초철산은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남쪽의 지세 중에 천마지가의 지도와 흡사한 부분이 발견되었거나 그런 곳으로 추정되는 곳들이 존재하자 모두들 남쪽을 공략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동천은 짙은 웃음을 내비쳤다.

“그 정도 머리는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로군.”

얼굴을 붉힌 초철산은 주위가 어두운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낮에 이런 얼굴을 보였더라면 창피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의아한 점이 떠오른 그는 물어보았다.

“헌데, 지금 말씀하신 정도의 내용이라면 충분히 제시가 가능할 듯 싶은데 어째서 이제까지 함구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이번에 돌아가셔서 회의 때 토론을 해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러자 동천이 피식 웃었다.

“자네는 본교의 인물들을 바보로 아는가?”

초철산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예?”

동천은 말했다.

“요림주께서 왜 이곳에 배정되셨다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실력 면에서는 다른 분들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되시는 분인데 말이지.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하네. 말로는 남쪽과 북쪽을 전부 수색한다지만 본교에서는 이미 천마동의 위치를 남쪽으로 확신한 상태라는 것일세. 만일 북쪽과 남쪽을 동등하게 생각했다면 혈각주님을 그곳으로 돌릴 정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위쪽에서는 전력을 분산시키고 있는 중이지. 어쩌면 아가씨의 안전을 생각해서 북쪽에 계속 잡아두려는 속셈일수도 있고 말야. 음, 그 정도라면 충분히 전력을 분산시켜도 남는 장사이려나? 후후후.”

초철산은 약소전주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을 보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오늘 새삼스레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마치 음모의 주재자가 된 듯한 착각을 느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다! 저녁만 되면 다른 인간이 되어서 미친놈이 별 짓을 다한다고 생각했거늘, 이건 마치 일파(一派)의 차기 문주감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가 동천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은 거의 2달 전의 일이었다. 그때가 아마도 오늘처럼 지도제작 차 산에서 야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러 간다고 들어간 그가 얼마 후에 도로 나오더니 갑자기 차갑고 이지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처음에는 남자 사정화가 서 있는 줄 착각했을 정도였으니, 그 당시의 초철산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치 극과 극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을 보인 동천은 잠시 주위를 거닐겠으니 그리 알라고 말한 뒤 새벽녘이 되어서야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앞으로 종종 오늘과 같은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지만 신경을 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거라는 차가운 목소리를 남기고 말이다.

‘그때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어서 어린놈이 해괴한 놀이를 하나 개발했다고 그런가보다 했는데, 야영을 하게 될 때마다 점점 자신을 드러내더니 이제는 이런 모습까지 보여준단 말인가? 도대체가 뭐가 뭔지 알 수 없구나. 아무리 인위적이라지만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뒤바꿀 수는 없다. 적어도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이 녀석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뭐지?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으으, 귀신이 되려 홀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홀리긴 개뿔!’

의외로 동천이 그런 것에 약하다는 것을 안다면 귀신을 되려 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버렸겠지만 그것을 알았다 해도 귀신에 홀린 것은 아니었으니 별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여하튼 오늘 수고했네. 본 소전주는 오늘도 수련을 쌓으러 홀로 떨어져 있을 것이니 찾을 생각말고 푹 자게나.”

퍼득 정신을 차린 초철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지척이지만 막사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잠시 거닐던 동천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는 힘차게 숨을 빨아들이며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운반해 들여놨다.

“후우! 역시 밤은 수련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로군.”

그는 천천히 역심무극결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대전에 홀로 앉아 용좌(龍座)에 팔꿈치를 기댄 뒤 조용히 턱을 괴며 턱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하던 암흑마교의 교주 냉소천은 문이 스스르 열리는 것이 보이자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그러나 찰나간의 순간이어서 열린 문으로 공손히 들어온 사내는 냉소천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살각주(殺閣主) 신휘(呻徽)가 위대한 교주님을 뵈옵니다.”

안으로 들어온 사내. 즉, 살각의 각주 신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냉소천은 일어나라 명한 뒤 이야기했다.

“그래, 상황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는가.”

“본교 쪽에서만 천마지가를 상당수 모은 것이 아닌 듯 무림맹에 이어 오련과 환마교. 그리고 혈사교까지 대파산맥의 남쪽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냉소천은 굵은 이마를 꿈틀거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코가 아주 개 코로군.”

신휘는 얼른 동조해주었다.

“그런 듯 합니다. 현재 천마지가의 보유상황이 본교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는 무림맹은 우연의 일치로 본교의 수색대와 마주친 후 확신을 하는 것 같았고, 턱없이 모자란 나머지 것들은 본교과 무림맹 간의 알력 싸움에서 냄새를 맡고 달려든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조금 곤란하게 된 냉소천은 붉은 턱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그곳이 발견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텐데, 그에 관해서 대책이 있는가?”

“아시다시피 천마동의 개조는 완전히 끝난 상태입니다만 적어도 천년 이상 사람의 때가 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1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때 냉소천이 자르고 들어왔다.

“본좌가 지금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듣자고 했는가?”

신휘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본교가 보유한 천마지가들을 몇몇 개 위조해서 환마교와 혈사교 등에게 은밀히 뿌린 후 나머지가 현재 대파산에 주둔한 무림맹의 손아귀에 있다고 퍼트릴 계획을 잡고 있사옵니다. 허락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냉소천은 깜짝 놀랐다.

“그것을 위조할 수 있었다고? 아니, 그게 가능했단 말이냐?”

흥분한 교주의 물음에 신휘는 내심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천우신조인지 위조의 달인인 신작수(神作手) 표풍(漂風)을 포섭할 수 있었나이다.”

잠시 흥분했던 냉소천은 급히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신작수 표풍이라……. 위조의 천재라 불리우는 그자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오오, 용케도 끌어들였구먼. 어떻게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 어떻게 천마지가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 질문에 관해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지, 신휘가 죄송스러운 얼굴로 냉소천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그런 것으로 먹고사는 인간인지라 발설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다행이 냉소천은 위조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딱히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 알겠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은밀히 착수에 들어가도록.”

“존명!”

“좋아. 더 보고할 것이 남아 있나?”

마지막 보고를 앞두고 자못 안색을 굳힌 신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주님. 특이하게도 마교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교가?”

덩달아 인상을 찌푸린 냉소천은 신휘가 그렇다고 대답해주자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비록, 마도계에서 거의 독보적인 위세를 자랑하는 암흑마교였지만 그 모태인 마교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미지에 대한 공포와 넘볼 수 없는 경외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환마교 또한 마찬가지일 터인데, 그런 것이 싫었던 냉소천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기 싫었던지 노골적으로 마교에게 적대감을 뿜어냈다.

“이런 쳐죽일 놈들! 밥그릇 싸움은 천해서 싫다는 것인가?”

불같이 대노한 냉소천이 격분하기 시작하자 난감해진 신휘는 교주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교주님, 어찌 그따위 옛 명성에 목을 매는 것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입니까. 그럴 가치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본교는 마교들 중에 명실상부한 큰형님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만 화를 푸시고 너그러이 그들을 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게 된 냉소천은 멋쩍게 웃으며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은 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험험! 본좌가 너무 흥분했군. 자네 말대로 마교 따위야 별것 아니니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혹시라도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네. 최대한 이목을 집중하여 살펴보길 바라네. 아, 그리고. 부교주 파에게는 천마지가의 위조배포 건을 철저히 비밀로 일관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것이라면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이번에 동원 된 수색대 중에서 북쪽 줄기를 담당한 자들이 거의 부교주 쪽이고, 남쪽 줄기는 우리측의 요인들이 대다수이니 이번 대치상황을 기회로 불순한 찌꺼기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계획에 있습니다.”

그러자 냉소천이 히죽 웃었다.

“호오? 물론 가장 큰 대어는 혈각주겠지?”

신휘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려야지요.”

“하하, 그런가? 그렇다면 명을 내리겠네. 이번에 가장 큰 대어를 낚고 싶은데 말이지, 그게 바로 혈각주이면 좋겠군.”

“존명! 신, 최선을 다해서 교주님의 바람에 충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을 마친 신휘는 하얗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확신이 섰을 때에만 보여주는 암살자 특유의 살인미소였다.

“하하하! 이거 정말 기대가 되는군. 하하하하!”

그렇게 대전 안은 냉소천의 웃음으로 한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