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습격 사건
-시름에 잠긴 미녀
시름에 잠긴 채 창가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달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달은 저 공허한 텅 빈 하늘에 홀로 떠 있으니 외로울까, 아니면 해가 있기 때문에 덜 외로울까? 하지만 해와 달은 거의 서로를 만나는 일이 없다. 있다 해도 아주 잠 깐만 함께 서로를 마주 보며 떠 있을 뿐이다. 그때도 달은 해의 광휘 때문에 그 존재가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지고 만다. 그런데도 달은 훨씬 덜 슬플까? 서로가 있다 는 것을 그 짧은 시간에나마 확인할 수 있으니 훨씬 덜 외로울 것 같았다.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자신의 쓸쓸함을 알아주는 이가 적어도 하나는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겐 비류연이 있고, 지금은 연비가 있었다. 그전에 자신을 알아줬던 이는 바로 손윗사자 독고령이었다.
“령 언니…….”
강호란도에서 영령을 만난 그 사건 이후 나예린의 머릿속엔 온통 그 문제뿐이었다. 투기제 일도 이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근심 고민에 빠진 그녀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그녀가 우수에 잠기자 마치 아름다운 백옥상에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 쓸쓸함을 자아냈다.
나예린은 혼란스러웠다. 왜 영령은 자신을 부정하고 있을까? 왜 나를 못 알아볼까? 가슴이 답답하고 근심이 첩첩이 쌓이니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으나 그 무 게를 덜 길이 없었다. 연비는 시름에 잠긴 나예린을 어떻게든 달래주고 위로해 주고 싶어했지만, 결국 이 문제는 근본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근원적인 말소가 어려운 고민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연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속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단순히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을 받을 수가 있었다. 혼자 근심을 안는다는 것은 태산을 짊어지 는 것처럼 무겁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근심을 거들어준다는 것은 태산의 반을 들어준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여전히 고통스럽다 해도 그 도움이 적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랬던 연비도 지금은 일이 있어 잠깐 자리를 비운 터였다. 정말로 혼자 남게 되자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외로움?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아니, 더욱더 외로워지고 고독해지길 바랐었다. 사람과 떨어져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외딴 섬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상처 입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착각이었다. 그건 도망이었다. 그것이 도망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 류연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타인과 함께하는 기쁨, 소통하는 기쁨을 알려주었다.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있다는 것, 가까워질수록 깊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여기에 없다. 하지만 멀 리 있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 감각의 모순은 어째서 생기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연비 때문인 것 같았다. 연비가 있었기에 그녀는 비류연의 빈자리에 대해 잠시 나마 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녀의 감각 안으로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려왔다.
빠르고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연비가 돌아왔나?”
어둡던 나예린의 안색이 순간 환하게 빛났다. 발걸음의 크기나 보폭으로 미루어볼 때 여성이 분명했다. 이렇게 당당하고 씩씩하게 걷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평소 답지 않은 것은 뭔가 화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소리로 미루어보아 이 발걸음의 당사자는 지금 무척 화나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벌컥!
문이 열렸다. 기쁜 얼굴로 돌아보던 나예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분명 그리운 얼굴은 그리운 얼굴이었다. 보고 싶던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 을 얼굴은 아니었다.
“엄마 왔다!”
사정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미부인이 외쳤다. 나예린이 너무 놀라 외쳤다.
“어, 어머니?!”
그런데 놀람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 뒤를 따라 헐레벌떡 달려들어 오는 사람 때문에 나예린은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아, 아버님?”
부인, 같이 갑시다, 라고 외치며 들어오는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인 무림맹주 나백천이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두 분이 여기에……?”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채 서둘러 인사를 하며 나예린이 물었다. 그러나 예청은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나예린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 뒤에 선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머니의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보던 광경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은 없지만, 시시각각 궁금증이 쌓이고 있는 나예린으로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예청이 그제야 나예린을 똑바로 바 라보았다. 엄격한 시선을 한 예청의 미간엔 푸르스름한 분노가 서려 있어 의아함을 자아냈다.
“그 아인 어디 있느냐?”
예청이 물었다.
“어머니, 그 아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소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나예린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널 꼬신 그 아이 말이다.”
화가 섞인 목소리로 예청이 내뱉듯 말했다.
“꼬시다니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나예린으로서는 예청의 분노가 생경하기만 했다.
“벌써 감싸주려 하다니! 그런 아일 감싸줄 필요 없다. 연비라는 아이 말이다! 널 투기제로 몰아넣은, 그 나쁜 년 말이다!”
마침내 예청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꼬시다니요? 연비는 그런 적 없습니다.”
나예린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꼬신 게 아니라고?”
번뜩이는 눈으로 예청이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딸을 깊이 사랑하긴 하지만 딸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부친에 비해선 훨씬 더 엄격한 모친이었다. 부친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이 메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예, 어머니! 그건 어머니가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연비는 절 속인 적이 없습니다. 꼬신 적도 없고요. 제가 자진해서 연비를 돕겠다고 했어요.”
“왜?”
“그냥 제가 그러고 싶었으니까요.”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예!”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어!”
예청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외쳤다.
“안 되겠구나. 너랑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어미는 그 아이랑 직접 이야기해야겠구나. 그 아인 지금 어디 있느냐?”
“볼일이 있다고 잠시 나갔습니다.”
나예린은 그렇게 대답하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연비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기를. 어머니의 괄괄하고 칼 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두 사람이 부딪치 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여기엔 부친 나백천도 함께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할 때는 조금 진정하고 차근차근히 흥분하지 말고 말 을 들어봅시다, 우리 예린이도 사정이 있었겠지요, 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부친이지만, 당사자인 연비를 만나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연비에게는 모친 이상으로 불같은 분노를 토해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의 부친 나백천이었다. 모친에게는 백전백패지만 실질적인 무공 수위는 역시 부친 쪽이 높았다. 그러 니 그의 분노를 산다는 것은 연비의 신상에 그다지 이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끝없이 꼬이는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복도 먼 곳으로부터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제발 연비가 아니라 이곳 객잔 에서 일하는 시녀의 발자국 소리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헛된 기대는 빨리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번 발자국 소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연비의 평소 발자 국 소리였다. 그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예린의 가슴은 더욱더 작게 오그라들었다. 나중에는 숨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연비, 제발 오지 말아요. 돌아가요. 이곳은 위험해요!’
하지만 남의 마음은 들을 수 있어도 자신의 마음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예린은 오늘따라 이 반쪽짜리 능력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혹 시 범인이 도망갈까 봐 그 기척이 느껴질 때부터 예청과 나백천은 어느 틈엔가 말을 멈추고 살기를 끊은 채 기척을 감추고 서로를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 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상대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럴 때는 정말 부부가 일심동체라도 되는 듯 손발이 척척 맞았다.
“제발… 제발..”
끼이이이익!
그러나 나예린의 기대는 헛되게도 객잔의 방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바로..
연비는 어찌 된 일인지 평소의 활기차던 그녀와 전혀 다르게 안색이 어두웠다. 게다가 약간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강호란도에 처음 내렸을 때 이후 로 저렇게 당황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처음 보는 손님 두 사람 때문은 아닌 것 같아 더욱더 의문이었다.
“오호라! 네가 바로 우리 아이를 꼬신 년이냐?”
단숨에 용의자를 알아본 예청이 힐문했다.
“글쎄요?”
그렇지 않아도 사부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당해서 기분이 나빠져 있던 연비가 예청의 무례한 질문을 듣고 삐딱하게 대답했다.
“무슨 대답이 그러느냐. 확실히 대답해라!”
이도 저도 아닌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예청은 무엇이든 딱 부러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내 같은 성격이었다. 딸 문제에 있어서 항상 우유부단한 나백천 역시 그때 마다 예청의 빗발치는 비난에 몸을 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 뵙는 것 같은데 누구시죠? 질문할 땐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군지부터 밝히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역시 걸고넘어질 건 확실히 걸고넘어지는 연비였다. 신분을 밝히라고 하니까 왠지 더 밝히기 싫어진 예청이 사나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밝히기 싫다면 어쩔 테냐?”
“그럼 대답 듣기는 영영 틀린 것 같네요.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나예린은 연비의 말 한마디마다 가슴을 졸이며 몸을 움찔거렸다. 모친의 분노가 얼마만큼 거대한지, 한 번 터지면 부친까지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녀 로서는 점점 더 분노 수치가 높아져만 가는 모친과 그것을 종용하고 있는 듯한 연비를 보며 위태위태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힘으로 듣겠다면 어쩌겠느냐?”
착 가라앉은 듯한 차갑고 조용한 목소리로 예청이 물었다.
“핏, 가능하시겠어요?”
피식 웃으며 연비가 대답했다.
“안 돼요, 연비! 위험해요!’
연비의 도발을 본 나예린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모친인 예청의 씩씩거리던 거친 숨은 어느덧 차분해져 있었고, 분노의 불길로 이글거리던 두 눈도 차가운 얼음 호수처럼 고요하게 식어 있었다. 이 상태가 정말 위험한 상태였다. 그녀의 모친은 뜨겁게 분노하기보단 항상 차갑게 분노했다.
스르릉!
옥구슬이 은 쟁반 위를 굴러가는 맑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예청의 도가 뽑혔다. 가느다란 도신을 지닌 푸르스름한 한광을 뿌리는 그 도는 마치 밤하늘에 걸 린 삭월을 떼어 붙인 것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있었다.
‘빙월(氷月)!’
그 아름답고 고혹적이며 마력적인 도신을 보며 나예린은 경탄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도다. 마치 사람의 영혼까지 매혹시킬 정도로 은은한 광채를 뿌리는 그 도는 어찌 보면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이 휘어진 하얀 도신에서 차가운 한광을 뿌리는 도가 바로 예청에게 빙월선자란 명호를 안겨준 언월도, ‘빙월’이었다. 이 도 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도기로 그녀는 이십여 년 전 마천각에서 여중제일의 자리에 올랐었다. 그녀가 약관의 나이에 세웠던 최연소 교관 기록은 아직도 깨어지 지 않고 있었다.
파라라락!
마치 나비가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가늘고 날카로운 곡면이 살기를 뿜은 채 달을 흩뿌렸다. 변화무쌍하게 무리 지어 어지럽게 나타난 삭월의 그림자가 연비 의 전신을 휩쓸고 들어갔다.
갑작스런 기습에 연비는 얼른 왼손으로 현천은린을 들어 날아오는 달 그림자를 막아냈다.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운 예기가 실린 도기였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위험 할 수 있다고 판단한 연비는 현천은린을 비스듬하게 휘두르며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일부러 회피했다. 현천은린의 피부는 묵린혈망의 가죽을 특수 가공하여 만 든 특제라 무척 질기고 단단해 웬만한 보검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만 이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검기에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예 린은 연비의 이런 움직임을 보고 어색함을 느꼈다.
‘왜 평소보다 반응이 느리지? 게다가 왜 왼손만?”
나예린이 알기로 연비는 왼손잡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평소의 연비라면 훨씬 더 움직임이 부드러울 터였다. 자세히 연비의 움직임을 살펴본 나예린은 그제야 어색 해 보이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비의 오른팔이 거의 통나무처럼 몸에 붙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나예린 정도의 안력이 아니 었으면 이런 미세한 차는 금세 놓치고 말았을 터였지만, 그녀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꽤 하는구나?”
언월의 춤을 멈추지 않은 채 말하는 예청의 얼굴에는 미미한 놀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무리 전력이 아니라지만 자신의 도기를 이토록 안정적으로 막아낼 줄 은 꿈에도 짐작치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야말로요.”
대답이야 그렇게 담담하게 받았지만 연비는 속으로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이 아줌마의 움직임이 너무 좋았다. 어찌 보면 흑룡왕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 다. 어떻게든 간신히 막고는 있는데 아무리 봐도 전력은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문제없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도대체 이 정도 도기를 보유한 인물이 누군지 자꾸 만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저기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아저씨도 무척 눈에 익은 아저씨였다.
“갑자기 당신이 누군지 궁금해지는군요.”
“이제 와서 말이냐?”
빙월을 연신 휘둘러 연비의 사방을 압박하며 예청이 외쳤다.
연비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이 기술을 막으면 알려주마!”
그렇게 외치는 예청의 빙월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예린은 그것이 모친의 성명절기인 기술의 기수식임을 알아차렸다.
빙월십이도(氷月十二刀). 절기(絶技).
빙월난무(氷月亂舞).
기술이 발동된 순간 온 방 안이 얇고 날카로운 달 그림자로 뒤덮였다. 반은 달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그 언월의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일반적으로 빛나는 것이 실초이고 그림자가 허초였으나 개중에는 허실이 뒤섞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우와! 갑작스럽게 이런 걸 쓰면 어떻게 해요, 방도 비좁은데!”
깜짝 놀라면서도 자기 할 일을 잊지 않은 연비는 우산을 활짝 펴 급작스럽게 회전시키면서 자신의 사방을 감쌌다.
현천은린(玄燐).
회천(天).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우산의 벽에 가로막힌 달 그림자가 이리저리 사방으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한 번 돌기 시작한 현천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 내 달이 지자 검은 하늘도 회전을 멈추었다.
“그걸 막다니 놀랍구나!”
솔직한 심정으로 감탄했다. 이 초식을 상처 하나 없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어요. 그걸 막는다고 이쪽도 엄청 무리했거든요. 하마터면 피부에 상처 날 뻔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연비의 안색은 정말로 창백해 보였다. 기술을 쓴 왼팔도 왼팔이지만 내공이 전신을 폭발적으로 달려나가는 바람에 잠잠히 눌려놓았던 오른팔이 격 발되고 만 것이다. 그 때문에 의식을 집중해 오른팔을 눌러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솔직히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은 위험했다.
“여기서 멈출까요? 더 싸우면 위험할 것 같은데?”
솔직한 심정으로 연비가 대답했다.
“네가 말이냐, 내가 말이냐?”
예청이 물었다.
“그거야 물론 당신이죠.”
이번에도 연비는 솔직히 대답했다.
“호오? 간이 부었구나.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자신감도 싫진 않아! 특히 여자애가 그러면 말이야!”
호승심이 남달리 강한 예청이 그 말을 듣고 물러설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방금 전 초식은 막았으니 약속은 지키셔야죠.”
“무슨 약속? 아, 그 약속 말이냐? 이 초식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정체를 가르쳐 주겠다던?”
쉐애애애액!
사정없이 베어 들어오는 차가운 초승달의 검격을 왼손에 든 현천은린으로 막아내며 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 미부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냐? 그렇다면 가르쳐 주마.”
한 호흡 잠깐 쉰 다음 예청이 말을 이었다.
“난 저 아이의 엄마다!”
연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진짜예요, 린?”
분명 뛰어난 미모이긴 하지만 모녀지간이라고 하기엔 성격이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 연비는 린에게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희 어머니 맞으세요. 미안해요, 연비.”
나예린의 확인까지 받자 의심할 여지는 더 이상 없었다.
“이거 곤란하게 됐네? 이런 모습으로 만날 예정은 없었는데…….’
만날 때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으로, 진짜 나의 모습으로 만나리라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꼬였는지, 운명이 꼬였는지 연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나예린의 엄마와 만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통성명도 하기 전에 검부터 휘두르다니…….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곤란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린의 어머니께서 이런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시죠?”
“누가 우리 아이를 속였는지 알아보러 왔다!”
“속인 적 없는데요?”
연비가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꼬시지 않았다면 우리 예린이가 어떻게 그런 대회에 참가하게 됐을까?”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저도 잘 모르는걸?”
문답 도중에도 예청은 여전히 허공중에 어지러이 달의 그림자를 그려내며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럼 누구한테 물으란 말이냐?”
“그야 물론 본인한테 물어야죠.”
당연한 것을 왜 굳이 물어보느냐는 투로 연비가 대답했다. 예청이 황당해하자 친절하게 보충 설명도 잊지 않았다. 나예린의 엄마인 만큼 더욱 친절하게 대하려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물론 그 의도가 곡해없이 제대로 먹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답을 가지고 있는 건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딸한테 물어보세요. 그 답은 린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연비가 술술 대답했다. 위축되는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무림맹주의 이름을 들었을 때도 꿈쩍하지 않던 연비가 무림맹주 부인이란 직함에 꿈쩍할 일은 없었다. 하 지만 예린의 아빠라는 말에는 꿈쩍하지 않았는데 예린의 엄마라는 말에는 조금쯤 꿈쩍한 연비이기도 했다. 나중에 찾아갈 때를 대비하려고 무의식중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럴 경우 보통 아빠 쪽을 경계해야 했다. 원래 남자의 적은 남자고 여자의 적은 여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 계속 공격하시면 저 곤란하거든요.”
여전히 공격이 멈추질 않자 연비가 완곡하게 말했다. 물론 방어는 잊지 않았다.
“곤란하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예청이 대꾸했다.
“아니, 저, 정말로 곤란해질 수 있어요, 어머님!”
연비의 얼굴은 정말로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예린은 의아함을 느꼈다.
“뭐가 곤란해질 수 있는데? 그리고 누가 네 어머님이란 말이냐?!”
예청이 발끈하며 대답했다.
“어멋, 그럼 ‘저 같은’ 아들은 어떠세요?”
“그건 내가 인정 못해!”
지금까지 잠자코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나백천이 빽, 소리쳤다. 그딴 건 인정 못해, 라는 기운이 그의 배후에서 뭉게뭉게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날 놀리는 거냐?”
쉑쉑!
자신이 놀림받았다고 생각한 예청의 검이 더욱 빨라지고 사나워졌다.
“어멋, 농담 아니었는데. 그리고 진짜로 곤란하다고요.”
연비가 참지 못하고 하소연을 터뜨렸다.
“아까부터 곤란곤란 하는데, 도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것이냐?”
연비는 다시금 자신의 목과 어깨를 향해 날아오는 두 개의 달 그림자를 피하며 말했다.
“아, 이대로 잘못하면 당신을 상처 입힐 수 있거든요. 예린의 엄마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그 말을 들은 예청은 기가 막혔다.
“네까짓 어린 계집이 나를 상처 입힌다고? 나 빙월선자 예청을?”
연비는 숨 가쁘게 날아오는 삼검을 차례로 막은 다음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지금 절 제어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수 있거든요? 때문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요. 그러니 어서 그만둬 주세요. 사실 이제 한계거든요.”
공격을 받고 방어를 하게 되자 억눌러 뒀던 기가 활성화되면서 구속이 풀린 오른팔로 맹렬히 흘러들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너무 이른데?”
아직 제어하지 못할 때는 아니었다. 한데 너무 진행이 빨랐다. 이대론 정말 위험했다. 미친 듯이 날뛰려고 하는 팔을 억누르는 연비의 심정은 장마철에 물 불어난 둑을 맨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둑이 터진 다음은 연비도 자신할 수 없었다.
“난 믿지 못하겠구나. 정말 할 수 있다면 해보거라!”
오기가 생긴 예청은 검법의 기세를 늦추기는커녕 더욱더 증가시켰다. 그러자 차가운 달 그림자가 냉기를 품고서 북풍한설처럼 연비를 조각내기 위해 날아들었다. 봉인이 풀려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 연비는 왼손 하나로 힘겹게 날아오는 빙월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막기만 할 뿐 공격으로 이어가진 못했다. 그러기엔 여력이 부 족했다. 현재 연비는 오른팔의 폭주를 막기 위해 대부분의 힘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어 힘을 원활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몹쓸 사부!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오른손의 묵룡환이 풀렸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냥 두면 엄청난 파괴력을 일회성으로 얻는 대신 영원히 오른팔을 못쓰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미친 짓을 하다니… 역시 사부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까진 좋은데 겸사해서 제자를 잡으려 드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현재 연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엎질러진 물이 홍수가 되어 범람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왜 아까부터 계속 왼손만 쓰고 있지? 좌수검이라고 하기엔 움직임이 어색한데?”
역시 예청은 눈이 날카로워 미세한 차이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연비의 움직임이 어딘가 매끄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곤 물은 것이었다.
“아, 원래는 왼손잡이였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게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에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군요.”
고소를 머금으며 연비가 대답했다. 두 사람의 공방은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럼 왜 오른손을 안 쓰느냐? 다쳤느냐?”
연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걸 쓰면 다치시거든요.”
연비가 순순히 대답했다.
“누가 다친단 말이냐?”
“물론 당신이죠.”
“웃기는 소리! 그런 헛소린 인정할 수 없다!”
분개한 예청이 외쳤다. 물론 저렇게 되리라 상상했는데 그대로였다.
“냉큼 오른손을 써라! 제 실력도 아닌 애를 잡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은 그녀의 드높고 고고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좀 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오른손은 쓸 수 없다고요. 큰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정말 다치신다고요.”
그 말 안엔 진심이 담겨 있어 더욱더 기분이 언짢아진 예청은 공격을 중단하고 우뚝 멈춰 섰다. 연비도 자연스레 거리를 유지하며 멈추었다.
“정말로 오른손을 쓸 생각이 없느냐?”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예청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없습니다.”
연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마음이 바뀔 것 같지 않자 예청은 이내 결심했다.
“좋다! 계속 쓸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강제로라도 쓰게 만들어주마!”
찰칵!
예청이 빙월을 몸 한가운데 세운 다음 왼손을 손잡이에 가져다 대고 살짝 조작하자 쇠 부딪치는 마찰음과 함께 하나였던 조각이 스르륵 갈라지면 두 개의 달로 변 했다.
분리되는 달. 하나의 달은 두 개의 언월이 되었다. 나뉘어진 두 개의 언월을 양손에 든 채 양쪽으로 교차했다. 두 개의 달이 예청의 주위를 감싸 안았다. 교차한 양 손이 정적 속에 빠져들었다.
양손에 각각 하나씩 초승달 조각을 교차해 든 채 최강 절기의 기수식을 취하며 쌍월의 주인은 마지막으로 차갑게 경고했다.
“죽기 싫으면 그 오른손의 실력을 내 보이는 게 좋을 것이다.”
경고를 발하는 예청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런, 진심이신가 보네.’
연비가 보기에 이번 것은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다.
“하아, 정말 안 되는데.”
걱정스럽게 한숨을 쉰 다음 연비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나오시면 할 말이 없죠. 후회하시면 안 돼요. 아아, 다치게 하기 싫은데.
그러나 연비는 끝끝내 검은 우산을 오른손으로 옮겨 잡지 않았다. 대신 전신을 긴장시키며 공격에 대비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볼 생각이었다. 스윽!
춤을 추듯 예청의 발이 스르륵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부드러운 허리가 앞쪽으로 쑤욱 내리꽂히듯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재빠른 변화
에 당황하지 않고 연비는 지면을 박차며 몸을 뒤로 뺐다. 예청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락!
선풍처럼 몸을 돌리며 왼쪽의 초승달을 그어 올렸다. 그 뒤로 오른쪽의 초승달이 따라 들어왔다. 척추를 축으로 몸을 사선으로 회전시키며 연속적으로 도를 베어 올린 것이다. 예리한 면도날 같은 공격이 자신의 얼굴을 휩쓸고 들어오자 연비는 재빨리 현천은린으로 이격을 막아냈다.
챙그랑! 챙챙챙챙!
달과 현천은린이 부딪치는 순간 초승달이 깨어지면서 그 조각으로부터 수십 개의 달 그림자가 어지러이 날리었다.
빙월십이도(氷月十二刀).
최종오의(義).
쌍월야.
두 개의 달이 예청의 손아귀 안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달무리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 연비의 몸을 쇄도해 들어갔다. 도의 수발이 자유자재한 경지 에 이르렀는지 이런 복잡한 초식을 전개하면서도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춤추는 초승달의 그림자 속에서 연비는 낭패 섞인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주위를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이 초승달 조각들이 언제 이빨을 내밀고 자신을 물어뜯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위된 마당에 어디 따로 빠져나 갈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이번에야말로 정말 궁지에 몰렸는지도…….?
평소 같았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정체를 숨긴 데다 오른손의 묵룡환까지 제거당한 연비는 미친 황소처럼 날뛰는 힘을 억누르느라 평소 힘의 반의반 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달의 나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연비, 저건 정말로 위험해요! 그만 항복해요!”
가공할 위험을 감지한 나예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순 없죠.”
연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폭풍 전의 고요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이리라.
촤라라라락!
마침내 쌍월이 펼치는 최후의 군무가 시작되었다.
쌍월야(月夜).
최종변환(最終變幻).
십이야十二夜).
멈춰 있던 달의 조각이 강풍에 휩쓸려 떨어지는 꽃잎처럼 일제히 연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비는 당황스러웠다. 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네 개의 묵룡환 중 하나가 풀려 있는 상태에서 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 자신이 힘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 출수해서 린의 엄마에게 상처라도 입히게 되면 큰일이었다.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 후에 자신의 오른팔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야기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 점 더 예청의 공세가 무자비해지고 검세가 면면부절히 이어지니 막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적당히 하다가 끝내겠거니 했는데 나예린의 엄마는 딸과는 다르게 호승심과 승부욕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하나의 달이 두 개로 갈라지는 순간 연비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적당히, 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그리고 그때 어두운 밤 속에서 두 개의 달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백 개로 갈라진 달의 조각이 밤하늘로 날아올라 연비의 주위를 감쌌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오른손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위험하다고, 그만 항복하라는 나예린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연비는 멈출 수 없었다. 항복할 수는 없었다. 용서를 구할 것도 없었 다. 미안해해도 예린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해도 예린에게 고마워할 일이었다. 예린의 엄마로서 존중해 줄 수는 있지만, 엄마가 예린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절 대로 항복할 수 없었다.
‘제발 죽진 마세요, 장모님!’
연비는 마침내 오른손으로 현천은린을 들었다.
빙월십이도의 최후 절초인 쌍월야의 위력은 대단했다. 특히 그 최종 변환이라 할 수 있는 십이야는 오감을 현혹시킬 정도로 현란했다. 열두 줄기로 갈라진 달의 조 각들이 질풍처럼 사납게 연비의 전신을 향해 쇄도해 왔다.
현천은린을 오른손으로 고쳐 잡은 연비가 외쳤다.
“조심하세요. 정말 잘못되면 책임 못 져요!”
그렇게 경고해 주는 게 연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두근!
연비의 오른손이 맥동 쳤다. 억지로 막아놓았던 힘이 바깥을 향해 뛰쳐나가려 날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연비의 얼굴이 순간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오싹!
그 모습을 본 나백천은 순간 이유없이 등골이 오싹해졌다. 연비의 호박색 눈동자가 황금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쾅!
그 순간 연비의 몸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현천은린(玄天燐).
오의(奧義).
현천포월(月).
파바바바바바바바밧!
연비의 오른손이 흐릿하게 사라지며 그곳으로부터 검은 번개가 수백 줄기 유성처럼 사방으로 쏘아졌다. 검은 밤은 희미한 달빛들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열두 줄기로 나뉘어진 달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소멸되고 빛나던 그 길은 어둠보다 더 깊게 덧칠되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번개로 오로지 파괴밖에 모르는 듯했다. 그것은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이 그저 순수한 힘으로 주변을 파괴해 나갔다.
“이, 이럴 수가!”
자신의 최강 초식을 무력화시키며 날아오는 검은 뇌광을 예청은 그저 넋이 나간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보았다.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 대로라면 검은 뇌광은 사정없이 예청의 전신을 휩쓸어 버리고 말 터였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예청이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위험하오, 여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낀 나백천이 다급하게 검을 뽑아 들고 검초를 전개했다.
쉐에에에엑!
진천뢰벽검이라는 별호답게 섬전처럼 빠른 검초가 측면에서 검은 뇌광을 뒤덮었다.
팅팅팅팅팅!
그러나 놀랍게도 약한 측면을 찌르고 들어갔는데도 오히려 파훼된 것은 나백천의 검기였다.
“이, 이럴 수가!”
나백천이 당황하고 있을 때 나예린이 예청과 검은 뇌광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대로 두면 어머니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안 돼, 린!”
퍼뜩 정신을 차린 연비는 어떻게든 검은 뇌광을 제어해 보려 했다. 오른팔을 통해 단전의 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그 오른팔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통제에서 벗어나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 힘은 가장 소중한 사람의 엄마를 상처 입히려 하더니 이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상처 입히려고 날뛰고 있었다.
“그렇겐 못해!”
퍽!
연비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 부위의 혈도를 세게 때리며 있는 힘껏 쏘아지는 힘의 방향을 비틀었다.
콰과과과광!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검은 뇌광이 직격했다.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땅이 패이고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며 질풍이 불었다.
“꺄악!”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한 예청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연비의 희생적인 움직임 덕분에 공격 영향권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던 나예린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
“부인!”
뜻밖의 사태에 기겁한 나백천이 비조처럼 몸을 날려 예청의 몸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직 여력이 남아 있어 그 힘을 흘려 버리기 위해 계속 뒤로 뒷걸음쳤으나 다 해소하지 못하자 예청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구부려 그녀의 몸을 감싸 안으며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쾅!
예청을 안은 나백천의 등이 건물 벽에 부딪치자 사방으로 금이 가며 움푹 파였다. 바닥에도 두 줄기 자국이 밭고랑처럼 패어 있었다.
“괜찮소, 여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먼지와 돌멩이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백천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편을 바라보며 예청이 대답했다.
“당신이 받쳐 준 덕분에 전 괜찮아요. 당신은 어때요? 다치지 않았어요?”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어조에 다정한 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몸을 날려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줬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 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글썽거릴 것 같은 예청을 보며 나백천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걱정 마시오. 이래 봬도 명색이 무림맹주인 사람이오. 이 정도 타격으로 다치거나 하지는 않소.”
“그래도 나중에 꼭 신의의 진찰을 받아보세요. 당신은 무림을 어깨 위에 짊어진 분, 다치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돼요. 저를 위해서도요. 아시겠어요?”
염려가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백천은 절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에게서 이런 애정 어린 따스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기에 매 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뿌듯한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서 일어났다.
“아참, 예린이는 어떻게 됐어요?”
딸보다는 남편이 우선이었는지 그제야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딸 나예린의 신변 안전에 생각이 미친 예청이 외쳤다.
“아, 예린이라면 무사하니 걱정 마시오. 그 연비라는 아이가 힘의 방향을 틀면서 밀쳐냈기에 안전하오. 다만 그 여파가 당신에게 미쳐서 큰일 날 뻔했다오.” 나백천이 뒤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면 몸이 크게 상했을 게 분명했다.
“고마워요, 여보! 구해줘서!”
쪽!
예청이 나백천의 두 팔에 안긴 채 기습적으로 볼에다 입을 맞췄다. 순간 나백천의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확 하고 붉어지며 표정이 뜨거운 물에 풀린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음허허허허!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시오.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당신이 위험하다면 달려와야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늙은 몸뚱이쯤 이야 조금도 아끼지 않소이다.”
헤롱헤롱! 정신이 꽃밭을 노니는 나백천은 주책과 방정을 동시에 떨며 말했다.
“흥, 당신 몸 상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몸 간수 잘하라고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아참, 그 연비라는 아이는 어떻게 됐죠? 그 아인 대체 누굴까요? 그 어린 나 이에 그렇게 강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니…….”
“하지만 자주 쓸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소.”
그러면서 나백천은 진중한 얼굴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연비가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곁에서 나예 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비는 고통을 참고 있느라 그런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크윽!”
연비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었다.
“연비, 괜찮아요?”
나예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연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격심했다. 마치 온 팔의 근육이 줄기줄기 끊어지고 신경다발은 불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했다. 정신을 붙잡고 있기조차 힘든 그런 고통이었다. 어깨가 빠지고 뼈가 분리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위력이 굉장하면 뭐 하나. 한 번 쓰고 하마터면 영원히 팔을 못쓰게 될 뻔 했는데. 정말 팔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아직 오른팔이 붙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근맥이 끊어지면 영원히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동안 평상시에 묵룡환을 차고 수련했던 덕분에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릇보다 넘치는 물은 그 그릇을 깨뜨려 버리는 수가 있었다.
‘나의 그릇은 어떻지??”
연비는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라는 신호를 오른손에 보냈다. 천 개의 바늘로 마구 찌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연비는 의지를 놓지 않았다. 이마에 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움찔!
마침내 신호가 있었다. 검지손가락 끝이 살짝 움직인 것이다. 신경이 손상당하긴 했지만 무사하다는 이야기였다. 첫 성공에 힘입어 연비는 차례로 나머지 손가락 을 움직여 보았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모두 조금씩 움직였다.
“연비…….”
고통을 참으며 연비가 미소 지었다.
“다행히 멀쩡한 것 같아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거짓말!”
드러난 연비의 팔은 무척 창백하고 힘없어 보였다.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는 듯한 푸른 빛깔도 간간이 보였다. 그런데 그게 멀쩡할 리 없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하지만 당분간 우산은 왼손으로 써야겠네요.”
아무래도 오른팔엔 부목이라도 대놔야 될 성싶었다. 지금 이 오른팔에 필요한 것은 절대 안정이었다. 더 이상 혹사시켰다가는 그때야말로 영영 못쓰게 될 가능성 도 있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무릎 꿇고 있는 연비의 등을 덮었다. 연비는 고통을 감춘 채 그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을 한 예청이 나백천과 함께 서 있었다. 힘겹게 미소 지으며 연비가 말했다.
“것 보세요. 위험할 거라고 했잖아요.”
“확실히 위험하긴 했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본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구나.”
예청은 근 이십 년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를 다시 일깨워 준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분노를 산 나백천은 때때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힐 때도 그녀 는 언제나 강하고 당당했다. 그런 예청이 이번에는 검은 뇌광 앞에서 진실한 공포를 그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연비는 쓴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날의 검이란 것이냐?”
“방금 전 힘에 한에서만은 확실히 그렇죠. 그다지 쓰고 싶은 힘은 아니에요. 아니, 사실 쓰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 너는 무척 힘겨워 보인다. 좀 전에 믿지 못할 만한 힘을 낸 반동이라 생각해도 좋겠지. 나의 패배를 인정하겠다. 하지만 나의 남편은 아직 멀쩡하다. 이분에게 너를 제압하게 하고 예린이를 데리고 갈 수도 있다.”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눈동자로 조용히 연비를 주시하며 예청이 말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연비는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참 으며 몸을 일으켰다.
“부부 일심동체라는 건가요? 뭐, 확실히 지금 싸우면 불리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냥은 안 될 겁니다.”
연비는 굳은 의지가 담긴 눈으로 예청을 바라보았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이로구나!”
누가 감히 무림맹주 나백천과 그 부인인 빙월선자 예청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정도까지 몸을 혹사시킨 상태에서 말이다.
“그런 말, 종종 듣죠.”
“정말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냐?”
“포기요? 그건 제가 모르는 단어군요. 그게 무슨 뜻이죠?”
배울 생각도 없으면서 연비가 물었다.
“너같이 광오한 여자 아이를 싫어하진 않는다. 하지만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다.”
예청이 선언했다. 그때 나예린이 뛰어나와 양손을 활짝 벌리며 연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냐, 예린아?”
딸의 의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예청이 반문했다. 한 번도 부모에게 반항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이 부부는 나예린에게 있어 세상에 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엄마인 예청의 말에 불복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예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그만두세요!”
“이 엄마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뜻이냐?”
뜻밖의 반항에 화난 목소리로 예청이 외쳤다.
“…..”
나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무언의 대답이었다.
“예린아, 네가 설마…….”
결심을 굳힌 나예린이 말했다.
“이번만큼은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불효녀를 용서하세요. 전 연비와 함께 투기제에 나가겠습니다. 뭐라 하셔도 제 결심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나예린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어째서!”
예청의 격노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부모의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
“연비가 꼬신 게 아니에요. 투기제 일은 제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모든 걸 알고서 제가 제 의지로 납득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 의지를 관철시키겠어요.” “이 애미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그동안 너를 키워준 우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겠다는 것이냐?”
격해진 감정을 주체 못하며 예청이 힐문했다.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이제 그때의 울고만 있던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전 이제 성인입니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선택하겠어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저 아이 때문이냐? 저 아이가 너의 무엇이기에?”
연비를 가리키며 예청이 외쳤다.
“연비는 제 친구입니다! 가장 소중한!”
망설이지 않고 나예린이 대답했다.
“친구?”
“예, 친구입니다.”
뜻밖의 말을 들은 예청의 눈이 놀람으로 휘둥그레졌다. 딸아이의 입에서 소중한 친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그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신 뢰하는 언니인 독고령과 재롱을 받아주는 동생 이진설 이외에 친구라고 여기는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잠시 예청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의 절을 받으세요.”
갑자기 나예린이 예청과 나백천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두 분의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류연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스로 나는 새를 새장 안에 가두고 족쇄를 채우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부모밖에 없다고요. 그러나 어떤 부모를 가졌든 자식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는 둥지를 떠나 스스로 높은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을 보여주 는 것이라고요. 저에겐 두 분이 주신 날개가 있습니다. 두 분의 보호 속에서 크고 튼튼한 날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둥지를 떠나 제 날개로 날아가겠 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정녕 둥지를 떠나겠느냐? 자신의 길 앞에 놓인 가혹한 운명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는 것이냐?”
“자기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배웠습니다.”
“언젠가 날려 보낼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예청의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에 고통과 환희와 쓸쓸함이 가득해서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괴롭구나. 하지만 그것이 너의 길이라면 너의 길을 가야겠지. 너의 앞에 놓인 푸른 하늘을 부모의 욕심으로 어떻게 가릴 수 있겠느냐. 날아가거라, 딸아. 높이! 훨 훨! 우리의 손이 닿지 못했던 곳까지! 우리의 날개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고개 숙인 나예린의 등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눈에서 수정 방울 같은 눈물이 백옥 같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나예린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 한 사람 무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여자로서 홀로 서겠다는 독립 선언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녀는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