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동천(冬天) – 661화


“아윽!”

“응? 버틸 수 있겠어요?”

속도를 조금 빠르게 했던 동천은 제갈연의 신음소리를 듣고 신법을 멈춘 뒤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제갈연은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면서도 힘겹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후우! 방심한 틈에 굴곡진 부분을 밟았더니 갑자기 다리가 쑥 빠져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호호,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가 봐도 무리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다소 난감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인 동천은

‘그냥 하루 더 치료하고 나설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여기까지 나와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명백한 시간낭비였다.

그게 안 되면 이 근처에서 숨는 방법도 고려해 볼만했지만 정작 제갈연이 그것을 원치 않았다.

거기다 동천도 굳이 계속 쉬는 것을 권하고픈 생각이 없었고 말이다.

“휴우, 천만 다행이네요. 전 또 상처가 벌어진 줄 알고 이 근처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나 어쩌나 했거든요. 하하, 그럼 잠시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걷기로 할까요?”

그러자 눈에 띄게 밝아진 제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동 공자님께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허장성세를 부리긴 했지만 그 이면으로는 다시 달리는 게 가능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후훗, 아무리 봐도 동 공자님은 배려가 너무 깊으신 것 같아!’

훈훈한 생각을 해서인지 가슴이 절로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지자 덩달아 아픔도 슬그머니 물러갔다.

조용히 거니는 밤길은 상대방의 존재감을 부각시켜주었고 서늘한 공기는 그녀의 땀을 식혀주었다.

그 서늘함이 약간 과해서 소름이 돋긴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만큼 동천과 함께 걷는 이 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문득,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붉힌 그녀가 동천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매를 우물거렸다. 무언가 말은 하고 싶은데 창피해서 망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에그! 아예 날을 새라, 날을 새.’

눈치가 빤한 동천이 제갈연의 시선을 못 느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착하고 예의 바른 자신이 먼저 물꼬를 터주기로 했다.

“흐음,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인데요? 그렇죠?”

마치 과자를 훔쳐먹다 들킨 아이 마냥 화들짝 놀란 제갈연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 말문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요. 오늘 늦은 아침에 제가 울 때 동 공자님께서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셨는데……, 그게 그러니까요. 저, 정말로 그 말씀에 책임을 지실 수 있으신가요?”

눈을 휘둥그렇게 뜬 동천은 얘가 왜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나 했다.

자신이 마지못해 해주었던 말로 밑도 끝도 없이 책임을 질 수 있냐고 묻는 것은 잠자리의 양 날개를 다 떼어낸 뒤에 날아보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까 아침에 왜 그렇게 울었던 겁니까? 그때 전 영문도 모르고 당황해서 혼이 났었는데 말이죠?”

동천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제갈연은 당황했다.

“예? 그, 그건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정말로 잘못을 하셨는데, 그랬는데……. 흑흑흑!”

‘너 왜 우니? 너만 흑흑 하고 싶냐? 나도 흑흑 하고 싶다, 이것아!’

눈치하면 자신을 따라올 인간이 없다고 자부하는 동천이었던 만큼 그녀의 말과 행동이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흐느끼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자고 있을 때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었다는 이야기 밖에 성립되지 않는데, 바로 그 무언가를 대놓고 캐물어 보자니 상당히 난감해졌다.

그녀가 속 시원히 말해주었으면 소원이 없겠지만 사실대로 말해 줄 그녀였다면 애당초 이런 상황으로까지 스스로를 몰아가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후우! 제갈 소저의 말을 믿어요. 알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진정하시고요, 제가 뭔지는 모르지만 책임을 질 수 있는 문제라면 책임을 질게요. 사나이 동천! 하하, 의(義)와 예(禮)를 알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관해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책임을 지는! 알고 보면 꽤 괜찮은 녀석이거든요. 에에…, 제가 너무 얼굴에 금칠을 했나요?”

자신의 책임감 문제를 확실히 거론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환기시키자 제대로 먹혀들었던지 눈을 크게 뜬 제갈연이 흘리던 눈물을 멈추었다.

사실 동천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잘못이라면 기껏해야 잠결에 옆에서 껴안았다거나 무의식적으로 몸을 더듬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일을 빌미로 그녀가 책임져 달라고 한다면 동천은 되려 환영이었다.

알다시피 미녀를 마다할 동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책임지기엔 거쳐야할 난관들이 실로 만만치가 않았다.

먼저 그녀는 백도의 여식이었고 자신은 마도에 속한 자였다.

그들은 주위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며 사랑과 믿음이라는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신분의 벽을 허물어야만 했다.

또한 동천이 생각하기에 그의 정실은 무조건 천하제일의 미녀여야 했다.

분명 제갈연이 아름답긴 했지만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큼의 미모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첩으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소리인데, 신분의 벽을 극복하고 맺어진 사랑의 결실이라고 하기엔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니 실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동천은 그것을 뛰어넘어서 벌써 두 번 째 첩은 누구로 맞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는 소연이 좋을라나? 신분이 쳐지긴 하지만 그만큼 뒷바라지를 해주었는데 그 정도 보상도 없으면 구석에서 질질 짤지도 모르니까 두 번째 첩은 소연으로 확정! 그리고 세 번 째 첩은……. 잉? 그러고 보니까 만독문의 소홍이도 신분이 만만치 않아서 첫 번째 첩 자리를 빼앗기면 바가지를 엄청 긁어댈 텐데? 그리고 다른…, 커헉? 정화도 있었잖아? 끄응! 하지만 정화는 지가 스스로 좋다고 이 몸에게 매달리지 않는 한 주종관계이기 때문에 힘든데? 또 대외적으로 주인이었던 여자를 부인으로 받아들이면서 첩의 자리를 준다는 것도 그렇고 말이지……. 아악! 제기랄! 너무 완벽한 것도 때로는 독이 될 수 있었다니!’

동천의 망상구현화(妄想具現化)가 극치로 치달리고 있을 때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제갈연은 동 공자님의 말씀을 쉽게 믿을 수 없었던지 확인 차 급히 물어보았다.

“아! 제 말을 믿어 주신다고요? 그, 그리고 책임도요?”

그녀는 자신이 상대방이었어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섣불리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해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자신의 말을 믿어주고 책임까지 져준다는 동천의 모습에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아까 와는 반대로 너무 기뻐서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참았다.

너무 자주 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실속 없는 여자로 비추어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동천은 이쯤에서 확답을 내려주고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네, 책임을 지겠습니다. 설마하니 제갈 소저께서 제게 악감정을 가지시고 말도 안 되는 일로 책임을 져달라는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깜짝 놀란 제갈연은 행여나 동 공자가 그렇게 생각하실 까봐 급히 손사래를 쳐가며 부인해댔다.

“악감정이라뇨! 그,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요? 그리고……, 그리고요.”

갑자기 양 볼을 사르르 붉힌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을 꺼냈다.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겨둘게요.”

“…….”

순간 동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도 들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매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밤이라는 은밀함이 그것을 가능케 했는지도 몰랐다. 처음 당해보는 상황이어서 쉽게 마음이 동했던 것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흐미! 얘 정말 이러다가 진짜로 자기 인생 책임져 달라고 덤비는 거 아냐? 물론 이 몸이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내 쪽의 신분을 밝혀야하고, 그렇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다간 본교 대 오련의 전쟁으로 불씨가 퍼질 수도 있을 텐데?’

아까 전의 망상에서도 거론했었지만 그때는 장난 반 대리만족 반으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진담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 같은 내용일지라도 천지차이로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둬야만 했다.

사실상 한 문파에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할 것은 대외적인 압박도 아니고 대내적인 분란도 아닌, 바로 적대 세력에게 주어질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개인, 혹은 문파간의 살인에는 명분이 중요했고, 그 규모가 커질수록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명분으로 인한 당위성이었다.

이 명분 없는 싸움은 한순간의 이득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장기간 놓고 보았을 때 틈을 보인 그 순간, 명분 하에 뭉쳐진 적들에 의해 짓밟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또한 그렇게 당하게 되면 어디에다 하소연할 곳도 없어지게 된다.

당할 짓을 해서 당하게 된 것이니, 도와주려는 입장에서도 같은 부류로 매도되어 멸문을 당할까싶어 나서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무리 거대 문파에 속한 인재(동천)라 할지라도 문파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안 좋은 일을(적대 세력의 제갈연과 혼인을 무리하게 추진) 벌이게 되면, 힘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무림의 생리상 이 명분만큼 치고 들어오기 딱 좋은 구실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외부의 적들에게만 통용되라는 법도 없었고 말이다.

‘에이! 설마 그렇기야 할라구. 정 안되면 포기하는 척하고 있다가 한 2, 3년 후에 보쌈으로 데려와서 소연이, 화정이, 소홍이. 그리고 정화까지 합쳐서 산 속에서 오순도순 애새끼들 수십은 낳고……. 가만, 이 몸이 바람기가 있었나?’

잠깐 생각해봤지만 이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천의 관점에서 바람둥이란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다 나의 애인이며 숨겨둔 첩이다!’

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었고, 그에 반해서 자신은 고작(?) 4명에서 5명의 여인들에게만 사랑을 나누어주고자 노력하는 열혈남아였으니 결단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런 동천의 생각을 제갈연이 들었더라면 충격을 받고 쓰러졌을 것이 분명하리라.

“아하하! 괜히 쑥스러워지네요. 이제 다시 빨리 움직이기로 할까요?”

원래는 무슨 말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알다시피 말할 기회를 놓쳐서 잠시 서먹해진 분위기였다.

동천이 일부러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자 정신을 차린 제갈연도 그에 부흥해주었다.

“예, 그렇게 해요. 이러다가 날 새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어요. 호호호!”

그렇게 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들은 간혹 쉬면서 걷다가 달리기를 반복하며 꽤 많은 거리를 주파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의문의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동천의 기민한 반응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한 자리에서 노숙을 하거나 경계를 하는 자들이라면 빙 둘러서 빠져나갔고, 어느 목적이건 간에 빠르게 다가오는 자들이라면 근처 수풀로 숨어들거나 최악의 경우엔 은형포단을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기척을 죽였다.

아무래도 동천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제갈연일지라도 은형포단의 쓰임새를 자주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정말 위급할 때가 아니면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이것은 일견, 너무 매정하게 보일지도 몰랐지만 이해를 해주어야 했다.

그녀와 동천은 깊게 맺어진 사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엄연히 그들은 서로 적이었다.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동천은 되도록 은형포단의 존재가 그녀의 기억에서 머물지 않게끔 노력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예곡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그녀도 쉬게 할 겸 동천이 일부러 말을 걸어주었다. 물론 신법을 멈추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기쁜 기색으로 따라 멈춘 제갈연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쓸어 내리며 깊은 심호흡 후에 말했다.

“아직 넘어야 할 능선이 두 곳쯤 남았는데 이 속도라면 아마 사흘은 걸릴 거예요.”

그녀는 동천이 듣기 좋게 최대한 쉬는 것을 자제하며 움직였을 때 걸리는 시간을 말해주었다. 현실대로라면 닷새는 걸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동천의 입장에서는 사흘도 엄청난 시간낭비였다.

하마터면 그는

‘뭐야? 지금 장난쳐?’

라고 소리칠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안 되겠군. 상처 회복에는 운동이 제일이라서 이것저것 배려해주었던 건데 아무래도 작전을 바꾸어야겠다.’

운동을 시킨 것치고는 너무 혹사시킨 것이 아닌가 싶지만, 여하튼 동천은 제갈연을 향해 생글거리는 미소로 물어보았다.

“연 소저. 안아드리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업어드리는 게 좋습니까?”

“예? 예에―?”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가 뒤늦게 무슨 소리인지 깨닫고 그녀가 화들짝 놀라자 동천은 오해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해명해주었다.

“아아, 그런 뜻이 아니라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아서 제가 연 소저를 안고 가거나 등에 업어서 간다면 시간이 대폭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제야 깨닫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긴 했지만 부끄러운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세가 외간남자와 장시간 접촉을 하게끔 그녀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기는 게 나을까? 그럼 원 없이 동 공자님의 얼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동 공자님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면……. 아으으, 그럼 업힐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서로 안 보게 되어 심리적인 부담은 없지만 신체접촉이 과해서 너무 부끄러운데…….’

제갈연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는 가운데 기다리는 중인 동천은 하늘의 별을 300개 째 세고 있었다.

‘별 303개, 별 304개, 별 305개, 별……. 아 진짜! 별 거지같은 기다림도 다 있네! 저지랄 할 동안에 움직였으면 벌써 산 하나는 넘고도 남았을 텐데……! 에이, 쓰팔!’

민감한 사항이라서 그녀가 선택하도록 기다려준 것이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나섰다.

“이제 결정하셨나요?”

물어보나 마나 제갈연은 아직 이었지만 결정을 내리라고 물어본 것이었으므로 그녀에겐 별로 남은 시간이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마침내 힘든 결정을 내렸다.

“네에. 어, 업힐래요.”

동천은 잘 선택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요? 하하, 그럼 어서 업히세요. 아, 그리고 참! 이제부턴 바람처럼 달려가야 하니까 꼭 붙잡아야 하는 거 알죠?”

몰랐지만 그녀는 꼭 잡겠다고 답해주었다.

어차피 동천의 결단력에 이끌리는 상태인지라 하라는 데로만 따라주면 동천이나 그녀나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업히는 게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던지 머뭇거리던 그녀는 은근슬쩍 동천의 등에 몸을 기댔다.

뭉클!

‘우와, 생각 외로 가슴이 크네?’

순간적으로 동천은 뼈 없는 연체동물이 등에 달라붙은 줄 착각할 정도로 유연한 그녀의 신체적 특성에 솔직히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잠깐 움찔한 것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이것저것 떠벌려 봐야 가뜩이나 창피해 하는 그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 소저, 이제 빠르게 갈 테니까 손을 들어서 미리미리 가야할 장소를 지정해주셔야 하는데 하실 수 있겠죠?”

“네? 네, 그럼요.”

‘얘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얘 정말 제갈세가의 핏줄을 타고난 것 맞어? 혹시, 어머니 쪽 핏줄을 타고났는데 얘 어머니가 무력만 엄청나다거나 그런 거 아냐?’

동천은 내심 투덜거리며 신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귀의신법을 펼치자 순식간에 주위의 경물이 휙휙 거리며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 아앗, 거기가 아니라 좌측이에요. 저기요, 저기!”

“이쪽이요?”

“네, 그쪽이요. 어머! 지, 지나치셨어요. 뒤로 잠깐 돌아가셔서 저 샛길로 들어가야 산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생각 이상으로 너무 빠르셔서 제가 적응을 잘…….”

처음에는 똥개 훈련시키냐고 성질을 낼 뻔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너무 빨라서 방향을 가르쳐주는 게 늦을 정도라면 그만큼 자신의 화후가 뛰어나다는 말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되려 빙그레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연 소저가 가리키는 곳이라면 지옥일지라도 기쁘게 뛰어들어 줄 테니까 느긋하게 방향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모, 몰라요!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가시기나 해요!”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그녀는 행복한 눈흘김을 보내주었다.

그냥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그녀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이렇게 재치 있게 넘어가 주자 안심하고 방향제시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다치기 전의 속도에 맞췄다가 당황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나중에는 호흡이 척척 들어맞아 그야말로 눈부신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까지 달린 후 으슥한 곳에서 은신하기로 한 동천은 운기조식 후에 약 1시진 정도를 할애하여 그녀를 치료해주고 눈을 붙였다.

이번에는 괜히 잠결에 또 그녀를 건들일까 싶어서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나 뭐라나?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