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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684화


“에구, 더럽게도 많네.”

기실 동천은 소연보다 적들을 먼저 봤지만 그때는 좀 멀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인데 막상 가까이 다가서자 뒤로 끊임없이 이어진 긴 행렬의 적들을 발견하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바로 이어서

‘지들이 많아봤자 오합지졸이지 뭐.’

라고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때 아군의 무리에서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암흑마교의 혼천부 집법당주 혁필상이라 하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 뵙고 싶소!”

그가 먼저 신분을 밝히며 나서자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던 정파의 사람들 중 한 명이 유유히 내려서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부진 눈매에 풍성한 턱수염을 지닌 오십 줄에 다다른 얼굴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10년 정도는 윗줄의 나이를 먹은 자였다.

어쨌든 그 사내는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인은 무림맹의 비영대(飛影隊) 대주인 군소후(君小吼)라고 하외다. 용건을 말하시오.”

군소후라면 무림맹 내에서 첩보를 담당하고 주도하는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권각술과 소도(小刀)에 능한 자로서 철혈쌍비(鐵血雙飛)라는 외호에서 알 수 있듯 비도술의 달인으로 정평이 난 사나이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쌍비라는 외호가 두 자루의 소도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들 소곤거리기도 했는데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 비영대주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소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오늘 본교와 혈사교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대충 짐작은 하셨겠지만 천마동에 관하여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요.”

혁필상이 부드럽게 말하자 군소후는 미세하게 눈매를 가늘게 모은 뒤 별다른 반응 없이 대꾸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허허,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귀맹을 비롯하여 세상 사람들 모두가 천마동은 마교의 소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외다.”

군소후는 딱 잘라 말했다.

“이미 천년도 넘게 지난 일이오. 권리를 주장하기엔 그 세월이 너무도 많이 흘렀소.”

“허어! 세상에 그런 억지가 다 있을까! 그렇다면 천년이 넘게 흘렀다 하여 선조(先祖)가 자신의 선조가 아닌 것으로 되는 것이며 조상의 무덤을 도굴꾼들이 파내 간다 한들 그저 손만 빨고 지켜봐야만 한다는 말씀이외까?”

처음으로 군소후의 얼굴에 못 마뜩한 표정이 일렁였다.

“억지가 지나치시구려. 무림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귀교가 천년도 지난 유물을 가지고 소유권을 주장하려고 하다니…….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기존의 마교를 뛰쳐나와 독립된 다른 마교를 세운 암흑마교 또한 천마대제의 뜻을 반(反)했던 것이나 다름없음이니, 이제와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겠소?”

“한때 자식이 울분을 삼키지 못하여 발생한 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법이오.”

“허면,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정통마교의 휘하로 들어가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이쪽에서도 심각하게 고려를 해보겠소이다.”

만만치 않은 반격에 혁필상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암흑마교의 대다수 인물들은 군소후의 발언에 분노를 금치 못했지만 같은 계통(?)에서 일하는 혁필상으로서는 이렇듯 민감한 문제를 대놓고 소리치는 상대의 기세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던 것이다.

그는 허허롭게 웃으면서도 짐짓 곤란한 신색을 띄웠다.

“허허! 이렇듯 서로 팽팽하기만 하니 실로 난감한 문제로구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는 것은 자멸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음, 우리가 여기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겨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떻겠소? 본교는 귀맹에서만 허락한다면 서로 한발자국씩 양보를 할 용의가 있소이다.”

군소후는 날카롭게 눈빛을 빛냈다.

“그 말씀은 혈사교도 뜻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도 무리가 없겠소?”

혁필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본의 아니게 이 혁모가 혈사교까지 대표하여 나선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앞으로 이루어질 논의 중 큰 변수가 없는 한 대부분 뜻을 같이 하기로 합의를 보았소이다.”

“하하, 그분의 말씀대로 입니다.”

혁필상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혈사교 측에서 한 청년이 걸어나오며 호탕하게 웃었다.

군소후는 그 청년의 뒤를 조용히 둘러싼 고수들과 호위를 목적으로 한 정교한 자리 배치를 단숨에 살피고는 대충 상대의 신분을 눈치챘지만 짐짓 모른 척 상대의 신분을 물어보았다.

“귀하는?”

강한 듯 보이나 한없이 부드러운 눈매를 살짝 구부린 미청년은 깜빡했다는 얼굴로 가볍게 읍(揖)을 하며 자신을 간략히 소개했다.

“혈사교의 장소량(張少亮)이라고 합니다. 과분하게나마 소교주의 권한을 지니고 이곳에서의 일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군소후는 마주 읍을 하며 대답했다.

“아, 근자에 소문이 자자한 혈신룡(血神龍) 장 소교주이셨구려. 만나게 되어 영광이외다. 허면, 귀교의 뜻도 암흑마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외까?”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군소후의 태도에 장소량의 측근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장소량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대꾸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제와 어느 한쪽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바, 서로의 뜻을 모아 공동으로 입구의 발굴에 힘을 쏟아 부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측의 바람입니다.”

“음! 좋소. 이 일은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가 없기에 확답을 해줄 수는 없으나 잠시만 기다려 준다면 좋은 쪽으로 결론을 짓고 돌아오겠소.”

“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장소량의 긍정적인 대답에 서둘러 돌아간 군소후는 약 2각 여가 지날 즈음,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장소량과 혁필상에게 당도했다.

“생각보다 의견일치가 잘 되었소이다. 본맹에서는 암흑마교와 혈사교 측의 협상자 분들을 만나 뵙고자할 용의가 있으니 가능한 소수의 인원으로 따라와 주시길 바라외다.”

호랑이 굴로 들어오라는 소리이자 혁필상이 은근한 어투로 물어보았다.

“너무 일방적인 장소에서 협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구려. 허허, 서로가 안도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좋을 것 같은데 비영대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소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행여, 협상이 틀어진다 해도 절대 아무런 조치가 없을 것을 본인의 직함과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본맹 뿐만이 아니라 오련을 위시한 이곳에 모인 모든 정도문파들의 명예를 걸고 그러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외다.”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겉으로 드러난 대답만 생각하면 되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강호의 물을 먹은 자라면 무림맹이 오련과도 손을 잡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말인즉, 너희가 연합을 했다한들 우리도 절대 밀리지 않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행여나 협상 시에 으름장 놓을 생각말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경고 아닌 경고였던 것이다.

사실 암흑마교나 혈사교로서는 굳이 군소후가 그 말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애초에 무림맹과 오련과의 연합을 생각하고 찾아왔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하신다면 야 이쪽에서도 큰 불만은 없소이다. 본교에서는 본 당주를 비롯한 몇몇 수행원들만을 이끌고 가겠소.”

혁필상이 대답하자 알겠다는 듯 눈짓을 보인 군소후가 시선을 옮겨 장소량을 직시했다.

네 쪽에서도 어서 결론을 내려달라는 무언의 목소리였다.

그에 장소량은 대답했다.

“본교에서는 저와 수족 같은 호위대 셋을 동행시키겠습니다.”

군소후는 묵직하게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말씀해주시오.”

“하하, 준비랄 것도 있겠습니까? 이미 대기들을 하고 있는 상태인데.”

급하게 움직일 것 없지 않겠느냐는 군소후의 대답에 장소량이 의외로 빠른 협상을 원했다.

그러고 보면 일견 느긋한 듯 보였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자면 그도 아직은 혈기가 넘쳐흐르는 보통 청년들과 다를 바 없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내심 그렇게 생각한 혁필상은 사소한 일에 혈사교와 틀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냉큼 의견을 같이 했다.

“허허, 우리 쪽 또한 장 소교주께서 차비를 다 갖추셨다면 이의가 없소이다.”

그렇다는데 군소후가 뭐라고 하겠는가.

“좋소. 그럼 천천히 따라들…….”

“그 협상에 우리도 끼여들면 안 되겠는가?”

군소후가 말하는 와중에 일단의 무리들이 갑작스레 장내로 들어섰다.

언뜻 보기에 50명이 넘을 것 같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소수인 만큼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도를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에 중인들은 아무리 상대가 고수들이라고는 하나 무례하게 끼여든 자들을 죽일 듯이 바라보며 진한 살기를 터트렸다.

이렇게 무례하게 등장한 것은 암흑마교나 혈사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스르릉! 챙!

아무도 떠드는 자들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의견은 하나로 통일 된 상태였다.

명령만 내려진다면 바로 공격에 들어갈 예정인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소후가 상대의 신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으음! 환마교의 총사께서도 이번 일에 동참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웅성웅성!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다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되려 이런 소리들이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윗선에서 조용히 하라 이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어 군소후와 혁필상. 그리고 장소량은 환마교의 총사인 음황뇌량(陰黃腦梁) 관덕청(關德聽)을 주시했고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네. 염치 불구하고 청하는 것이니 한자리 넓혀 주는 것이 어떠한가.”

올해로 112세의 나이가 된 거마(巨魔) 관덕청의 요구는 누구도 무시 못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교주가 아닌 그가 곧 환마교라고 떠들어댈 정도로 그가 환마교에 공헌한 열정과 노력은 실로 대단했다.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한 일이라면 일단 결정이 내려졌을 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추진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명성과 권력이 뒤따라옴은 당연지사였고 지극히 뛰어난 머리로 성공할 계책만을 가늠한 뒤 전면에 나서서 기량을 뽐내는 영악함도 골고루 갖춘 위인이었다.

더군다나 선대의 교주 때부터 내리 3연참(?)의 위력을 과시하며 교주를 받들어 모셨으니 어느 누가 그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한가지 콕 집어서 그의 오점을 들추어내라면 이번 대(代)의 소교주를 끝끝내 살려내지 못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의 대답에 혁필상이 나서며 대답했다.

“암흑마교의 혼천부 집법당주 혁필상이라고 합니다. 후배가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가 동의를 구하자 관덕청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 하시게.”

“예, 먼저 저희들로서는 노선배님과 환마교의 갑작스런 출현에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형제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쁨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하여, 당연히 뜻을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아쉽게도 지금의 이 협상은 정파와 같이 주관하는 것으로서 천마지가의 소유 여부에 따라 서로가 한 목적이 될 수도, 또는 다른 목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주저리주저리 반기는 듯한 말을 늘어놓긴 했으나, 바보가 아닌 이상 천마지가를 지니고 있어야 그나마 한자리라도 던져 주겠다는 뜻임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혁필상의 말투가 지극히 정중했고 딱히 비꼬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환마교 측에서는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는 자가 없었다.

뒤늦게 비집고 끼여든 만큼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으흠. 천마지가라? 그것만 있으면 협상 의자를 하나 마련해 줄 수가 있다는 겐가?”

혁필상에게 대꾸하는 것 같으면서도 눈앞의 3명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여운이 느껴졌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어서 노련하게 빛나고 있는 관덕청의 눈동자는 3명의 신형을 모두 담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위상과 체면상 일일이 동의를 구할 수는 없었기에 상대 모두에게 무언의 동의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우리 쪽에서도 어떠한 결론이 내려질지 알 수 없으나, 큰 이변이 없는 한 같은 자리에 서 실수 있을 겁니다.”

혁필상, 장소량, 군소후 순으로 대답이 이어지자 관덕청이 나직이 미소했다.

“서로들 넓은 마음으로 포용을 해주어 감사하게 생각하네. 허허, 마침 노부에게 2장의 천마지가가 있으니 공동 협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먼!”

역시 그냥 오지 않았던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소수의 인원으로 어느 한곳에 틀어 박혀 있다가 때가 된 듯 하자 바로 튀어나온 관덕청의 음흉스러움을 욕하거나 비웃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일단 천마지가를 소유하여 입구에 들어설 자격이 충분한 상태였고, 그간에 천마동을 찾기 위한 노력의 증거를 제시해달라고 한다면 거짓증거야 얼마든지 날조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어느 하나 대놓고 그를 비난하진 못했다.

“늙은이가 제법인데? 듣기로는 아들내미 잃은 슬픔에 당대 교주가 천마동의 일에 시큰둥하여 소수만 투입되었다고 하던데 달랑 천마지가 2장으로 이렇게 잘 써먹고 말야. 음! 총사라더니 대가리 굴리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주어야겠군. 물론, 이 몸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지만 말이지.”

잘 지켜보던 동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가 인정하든 말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러는 동천을 보는 게 어디 한두 번이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하자.

“약소전주님, 아가씨께서 부르십니다.”

“아가씨고 지랄이고……. 뭐? 누가 부르셔?”

앞쪽에만 집중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란 동천이 되묻자 사정화의 호위대 중 1명이었던 사내가 다시금 들려주었다.

“아가씨께서 조속히 오시라는 분부십니다.”

그러자 동천은 언뜻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상황에서 장내의 이야기에 집중할 시간도 모자를 텐데 그것을 마다하고 자신을 불렀으니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무언가 꺼림직 하면서도 순순히 사정화를 찾아갔다.

그녀는 호위대들 속에서 오연히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가씨, 부르셨다고요?”

“그래. 긴 말 하지 않겠으니 잘 들어.”

그렇지 않아도 잘 들어줄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궁금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동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 경청(傾聽)할게요.”

사정화는 붉은 꽃잎으로 물들인 듯한 매력적인 입술을 살포시 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집법당주의 일행에 참가해. 그냥 따라가서 묵묵히 듣고만 오면 되니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예에? 제가요?”

화들짝 놀란 동천이 묻자 목소리가 컸던 듯 사정화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바로 표정을 지운 뒤 그녀가 대답했다.

“동천, 내가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하지?”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찔끔한 동천은 그럴 수도 있는 거 가지고 부탁하는 년이 되레 성질은 낸다고 내심 투덜거렸다.

“아, 아니 그게요.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아하하! 아참, 그런데 말씀하신 임무를 수행하자면 제가 아닌 다른 분들이 더 낫지 않나요? 저는 이런 일에 무지하여 많은 것을 놓칠 수도 있는데.”

동천이 불리한 상황에서 냉큼 화제를 돌리자 사정화도 별말 않고 물음에 응해주었다.

“그나마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로구나. 사실 너에게 큰 기대를 하는 게 아냐. 네 말대로 이런 일에 능력 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그들 또한 너와 함께 갈 예정이고. 너는 그저 훗날에 대비하여 안목을 기른다고 생각하면 돼.”

비록, 자기가 자신을 낮췄다고는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까지 인정해버리면 기분이 나쁜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한 동천은 듣고 보니 자신을 생각해주는 소리이자 대범하게 정화의 잘못(?)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아아, 그랬구나. 그런 깊으신 뜻인지도 모르고. 하하,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맡아야죠. 맡겨만 주세요!”

사정화는 긴장이 풀어진 동천에게 짐짓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놀러 가는 심정으로 갔다 오라는 소리는 아니야. 같이 간 다른 자들과의 보고와 비교해 볼 테니까 집중해서 듣고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정리해서 들려줘야 해. 알았어?”

‘음, 알아듣긴 했는데 잘 하면 한 대 치겠다?’

때리면 맞아야할 관계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마음 속에서 만큼은 동천이 상전이었다.

“예, 아가씨. 마침 저쪽 상황도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서둘러 합류해서 다녀오도록 할게요.”

“좋아. 서둘러 가봐.”

“켈켈! 잘 다녀오시게, 약소전주. 괜히 듣다가 졸아서 나중에 아가씨께 큰 코 다치지 말고.”

웬일로 가만히 있나 싶었던 정원이 동천을 살살 약올렸다.

생각 같아서는 정원의 용두괴장을 빼앗아서 주둥이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고 보는 눈들이 많아서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하여간 늙은 것들은 기어코 오래 살아서 밥만 축내는 존재라니까? 참나, 그 인간들 먹일 음식을 이 몸에게 바쳤어봐? 열두 번도 넘게 세상이 안락해지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겠다! 젠장!”

사정화에게서 멀어졌다고 바로 기가 살아서 혼자 투덜거린 동천은 일단 소연에게 돌아와 간략한 상황을 설명해준 뒤, 보고를 듣고 자신을 기다리는 중인 혁필상의 일행에 합류했다.

“하하, 좀 늦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혁필상은 상대가 상대인 만큼 질책은 삼갔다.

“허허, 아니외다. 시간은 잘 맞추신 것이니 어서 움직입시다.”

그냥 보기엔 동천에게 대답한 듯 보였지만 기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다른 세력들에게까지 포괄적으로 해준 대답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군소후가 그들의 선두에 서서 반 협곡의 안쪽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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