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693화
천마동으로…… 3.
“흐음! 거두어 달라 라……. 그렇단 말인지?”
정만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약소전주님!”
동천은 돌연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넬 뭘 믿고?”
“예? 그, 그게, 크흑! 소인은 그때의 일을 뼛속 깊이 뉘우치고 있사옵니다! 한번만! 단 한번만 믿어주신다면 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약소전주님을 모시겠사오니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음, 그으래? 뼛속 깊이 증오하는 게 아니라 뉘우친다고?”
뜨끔한 정만은 계속 고개를 조아렸다.
“네, 넷!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어가 소인의 충심을 그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대답에 동천은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오, 그것 참 볼만하겠군. 말 나온 김에 진짜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볼 텐가?”
“아니 그게…….”
정만이 바로 꼬리를 내리자 동천은 피식 웃은 뒤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아무리 충심이 강한 자라 해도 그런 억지성 명령에는 납득을 할 수 없겠지. 좋아, 이리 가까이 오게나.”
동천의 명령에 무릎으로 기어 다가가자 정만의 머리에 손이 올려졌다.
잠시 후 그 손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밀려들었고 갑자기 속이 메스꺼우며 구토가 일어났다.
“웁! 우웁!”
동천은 헛구역질을 하는 정만에게 작은 옥병을 건네주며 말했다.
“받게. 내 자네를 믿고 싶지만 아무래도 전력이 있는지라 자네의 몸에 자그마한 조치를 취해두었네. 한 달에 한번 그 안에 든 해독약을 먹는다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걸세.”
“헉? 그, 그렇다면 소인의 몸에 금제를 가하신 겁니까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구역질까지 잊어버린 정만은 부릅뜬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동천은 느긋하게 대답해주었다.
“하하, 금제는 무슨! 그저 기일 내에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살이 살짝 썩고 뼈가 조금 흐물흐물 해지는 정도라네. 뭐 죽는다면 죽고 안 죽는다면 안 죽겠지.”
‘개자식! 으으, 우째 이런 일이…….’
얼굴이 하얗게 탈색 된 정만은 무릎을 꿇은 상태라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저 굽어만 살펴주십시오!”
울며 애걸복걸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악 다물며 자신을 쳐다보자 동천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긴, 자신에게 개겼던 놈이었으니 이 정도도 되지 않는다면 자칫 실망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동천은 씨익 웃고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듣자하니 교내에서 자네의 직책이 서신원(書信員)이었다면서?”
“예에, 높으신 분들은 개인적으로 연락원이 있어서 그분들 까지는 아니오나 향주 이하에서 가끔 당주급까지의 서찰을 원하는 분께 보내드리는 직책을 맞고 있사옵니다.”
“좋아, 좋아. 그럼 그 안의 내용물을 읽을 수는 있는가?”
“어림도 없사옵니다. 밀봉이 되어 있고 또 내용을 살펴 봤다가는 소유 서찰을 인계하신 분의 직급 여하에 따라 소인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천은 문득 기분이 상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그러면 별로 소용이 없는데?”
기겁을 한 정만은 바로 대답했다.
“그, 그러나 마음만 먹는다면 대충 전달될 내용을 알 수 있고 향주급까지는 밀봉 상태가 허술하기 때문에 가끔씩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예예!”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는 표정으로 정만을 내려다 본 동천은 친절하게 말했다.
“그랬구먼. 자네가 할 일은 별 것 아닐세. 본교로 돌아가면 평소대로 생활을 하면서 한 달에 한번씩 그간에 훑어보았던 서찰의 내용들을 종합 기재하여 이 몸에게 전달만 해주면 되는 것일세. 하하, 정말 쉽고 간단하지 않은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금제를 당한 상황이어서 자신은 부처님의 손바닥에 놓여진 손오공이었던 것이다.
“아하하, 듣고 보니 정말 쉽고 간단합니다. 그런데 전달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짝짝짝!
가볍게 박수를 친 동천은 흐뭇함이 가득한 얼굴로 정만에게 말했다.
“자네는 정말 뛰어난 정보원이 될 소질을 타고 났군! 모름지기 정보원이란 그래야 하는 것일세. 남이 자네를 이 몸의 정보원으로 알고 있다면 들어오는 정보 중에 거짓이 섞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설정이라네. 누가 보더라도 자네가 이 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인식을 시켜주어야 하지. 음, 가능한 증오한다는 설정이 활동을 하기엔 더욱 이롭겠지? 이리 귀를 가까이…….”
동천의 부름에 긴장을 한 정만이 귀를 가져다 대자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 동천이 뒤로 물러났다.
“이런 씨팔! 야! 땀 냄새나잖아, 이 개새……. 험험! 그냥 전음으로 말해주겠네.”
“예, 예에.”
이미 성질 더러운 거 다 아는 처지에 안 그런 척 잡아떼는 동천이었다.
어쨌든 그는 전음으로 긴 시간을 할애했고 정만의 안색은 때론 파래지고 때론 노래졌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럼 자네만 믿겠네! 자네의 신분은 발굴이 끝나는 즉시 되살아날 것이니, 그렇게 알고 힘들겠지만 하던 일까지는 마저 끝을 내주게나.”
다 포기한 정만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 일들일랑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헌데, 해독약이 다 떨어졌을 때 만약이라도 약소전주께서 아니 계신다면 소인은 어찌해야 합니까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질문에 동천은 기분 좋게 피식거렸다.
“아, 그것 말인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이 몸이 부재중일 시에는 이 몸의 시비인 소연에게 해독약을 건네주고 갈 터이니 그녀에게 받도록 하게나. 그리고 자네에게 준 해독약이 12알이니 딱 1년 치일세. 자네가 일만 열심히 한다면 매달마다 애태울 필요 없이 다시 1년 치를 건네줄 터이니 열심히 해보시게나.”
“예! 꼭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어허, 목소리가 크네. 이제 자네는 밖으로 나가면 이를 갈면서 이 몸을 증오를 해야하는데, 만일 이 소리를 누군가가 듣게 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여 의심을 살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정만은 재빨리 굽실거렸다.
“소, 소인의 실책이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나가서 친한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 몸을 증오하고 있음을 인식시켜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런 건 안 시켜도 자동으로 할거라고 씨부렁거린 정만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최대한 조아렸다.
“예, 약소전주님. 그럼 소인은 이만.”
행여나 발소리가 날까 조심조심하며 정만이 나가자 나름대로 무게를 잡고 있던 동천은 곧 본래의 신색으로 되돌아갔다.
“푸하하하! 역시, 이 몸의 지략은 하늘에 닿았다니까?”
동천이 철부지 망나니도 아니고 아무리 괘씸하다 하나, 사람 하나를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킬 정도로 잔인하진 않았다.
동천과 엮이어 그도 모르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상대의 불행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뻔히 눈뜨고 보는 상황에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던 것이다.
“프흐흐, 이제 두 번째 쫄다구를 만들었으니 세 번째도 조만간 구해봐야겠구나. 뭐 이 몸의 능력이라면 순식간에 수백 명의 정보원들을 심어둘 수도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신중하게 진행하는 것이 제일이지 않겠어?”
일전에 자신의 소유가 된 주루로 박심을 보내게 되자 동천은 믿고 부릴만한 수족들의 존재를 새삼 절실하게 느꼈다.
앞으로 손댈 곳이 하나 둘이 아닌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도연과 소연 외에는 영 충성심이 없는 인간들뿐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도연은 도(刀)를 얻기 위해 제갈세가로 보낸 상태였고, 소연은 자신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정보 수집과 연락 체계 등으로 써먹기엔 무리가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동천의 잔머리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약점 잡고 충성을 강요하기였는데, 이게 의외로 잘 먹혔다.
애초에 정만이 그런 의도로 누명을 쓰고 생고생을 하다가 동천의 손아귀에 걸려든 셈이었으니까.
“음, 이제 당장에 처리해야 하는 안건 항광의 문제인데……. 에이! 몰라몰라! 그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나중에 생각해, 나중에!”
괜히 저 혼자 열 받아서 씩씩거린 동천은 불편했지만 죽립을 쓰고 바깥으로 나가 발굴현장을 감찰했다.
정확한 입구를 몰라 벽을 뚫고 땅을 파는 중이어서 언뜻 보면 주위가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흙과 돌 부스러기가 쌓이면 바로 수레를 이용하여 다른 곳에다 옮기기 때문에 진척상황을 살피는 데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잠시 살펴보며 감독관 하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동천은 시간을 때우다가 본진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을 먹던 동천은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회의장으로 달려갔다.
“모두 앉으세요.”
사정화는 미리 와있던 상태였지만 일부러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모두들 준비가 되자 안으로 들어와 회의를 시작했다.
그녀의 명령으로 모두 앉자 혼천부의 집법당주 혁필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급히 모이라고 하신 이유는 바깥에서 모여드는 군웅들을 막는데 한계가 왔다는 각 파의 소식을 접하고 이틀 전부터 발굴에 12시진을 전부 활용한다는 안건을 채택한 바, 드디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으음!”
“호오, 드디어!”
여러 사람들이 짤막하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목소리로 표현했다.
개중에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어서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심 없었다는 모습들은 아니었다.
“조용.”
사정화가 술렁이는 분위기를 일식 시킨 후 혁필상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금 회의를 진행시켰다.
“현재 각 파에서는 우리처럼 회의가 한창 이루어지는 중일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입구가 열리고 들어갈 인원 20명을 차출하기로 하고 이차적으로 다시 20명을 뽑기로 했습니다. 나머지는 입구를 지키며 타 무림인들의 출입을 엄중히 막기로 했습니다.”
냉현이 가만히 듣다가 말했다.
“당문이 천마지가가 2장, 멀리 남해에서 온 남해군도(南海群島)에서 1장, 흑마궁(黑魔宮)에서 1장. 그리고 개인적으로 척마신군(斥魔神君)이 1장, 백의무검(白衣無劍)이 1장을 들고 와 참여를 했으니……. 사람 수로 따지자면 한번에 최소한 182명이 들어가는 셈이로군.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과연 군웅들의 침입을 어느 정도까지 막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로군.”
무림맹, 오련, 암흑마교, 만독문, 환마교, 혈사교를 위시하여 후발주자로 들어온 당문, 남해군도, 흑마궁과 척마신군, 백의무검의 인원을 모두 합치자면 182명이 분명했다.
여기에 척마신군과 백의무검의 경우에는 최대 4명까지의 동행을 허락해주었다.
세력을 등에 업고 왔다면 모를까, 개인적으로 온 자에게 20명까지 허용한다면 성격과 성향이 제각각인 무림인들로 인하여 분란의 소지가 충분했기에 미리 차단을 했었던 것이다.
“그 문제로 각파의 수뇌부들이 모여 조율을 하겠지만 예상 시간으로는 하루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천마도해를 빌미로 자격조건을 갖추었다지만 천마지가를 소유한 문파들이 아니었다면 이곳을 찾지 조차 못했을 터이니 명분은 우리 쪽에 있기 때문에 하루라면 충분히 내세울 만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군웅들이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소?”
혈각주 초무강이 묻자 혁필상이 대답해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압니다. 고수들에게 하루의 시간은 천마동 내부를 몇 번이나 돌아도 될 정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함정들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천마도해의 표식대로라면 하루가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되려, 군웅들의 입장에서는 누군가 이미 파괴하고 지나간 자리를 건너는 것이기에 무모한 희생을 막고 재빨리 뒤쫓아올 수도 있으니 마냥 불리한 것만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하루는 너무 적은 것이 아니오?”
“물론, 제가 말씀드린 사항은 일반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쪽이나 타 문파들에서 기관지학에 정통한 분을 초빙한다면 하루라는 시간은 남아돌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호오! 그렇군. 흐흐흐!”
말인즉, 군웅들에게는 앞서 혁필상이 말해준 함정을 예로 들며 하루라는 시간이 결코 넘치는 시간이 아니라고 말해준 뒤, 먼저 들어간 자들은 기관지학의 고수를 동반하여 시간을 대폭 단축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일종의 말장난인 셈이었지만 속고 속이는 인생사에서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속는 인간이 멍청한 것이었다.
달리 항의할 건더기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