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713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연이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묻자 장노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허허, 아니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을 따름이다.”
도연은 장노삼이 어릴 때부터 주군을 돌봐주었던 사람인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집안 내력까지 알고 있는 듯한 태도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주군은 천애의 고아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껏 긴장을 한 도연은 결코 쉽게 넘겨들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방금 주군의 집안 분들을 언급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주군의 진실한 신분과 그분의 혈육들을…….”
“그만 하자꾸나. 이 문제는 적어도 네 위치에서 관여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그러니까…… 음, 그래. 차후에 천아가 좀 더 성장하게 되면 그때가 되서야 다 밝혀줄 생각이다. 그러니 며칠 안으로 천아가 돌아오거든 행여라도 말실수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너도 알다시피 아직까지는 천아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장노삼의 당부는 평소처럼 조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말을 이어갈수록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와 종래에는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중압감으로 주위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무형의 기운이 막사 안의 모든 공간을 선점하여 압축시키는 듯한 위압감이었는데, 그 정도가 심해져 소연까지 영향을 받자 호연화가 새하얀 털들을 곧추 세우며 날카롭게 울어댔다.
“캬아아!”
순간 터질 듯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일소되었다. 호연화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장노삼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른 것이다.
“음, 필요 이상으로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로구나. 그나저나 그 고양이가 말로만 듣던 그 설산묘화(雪山猫花)더냐?”
장노삼이 재빨리 화제를 바꾸자 도연은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다 꾹 입을 다물었고, 소연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앉아 있던 호연화를 양손으로 안아 가슴께로 내렸다. 그러자 졸지에 주목을 받게 된 호연화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눈을 깜박일 따름이었다.
“노부가 영물을 보는 눈은 낮지만 이런 노부가 보기에도 전신에 희미한 영기가 흐르는 듯 하니 실로 쉬이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로구나.”
소연은 이제까지 호연화를 봐오면서 영기는커녕 손톱만큼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지만(방귀 뀌는 것은 보았다) 상대가 그것을 느꼈다고 하자 긴가민가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호연화를 칭찬하는 것이자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워낙에 뛰어난 아이라서 그래요. 지능도 뛰어나서 말도 잘 듣고요.”
“허허, 그렇더냐. 아차!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아직까지도 서로들 인사도 못 나누었구나. 노부는 장노삼이라고 한다. 천아가 어렸을 적부터 소소한 것들을 챙겨주었던 사이이지.”
장노삼의 갑작스러운 자기 소개였지만 소연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호연화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 소녀의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녀는 주인님의 시녀인 소연이라고 합니다. 설혹,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더라도 잘 지도해주시고 이끌어주시 기 바랍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대처가 좋았다고 여겼는지 소연은 살풋이 미소를 띄우며 양 볼을 은은하게 붉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든 장노삼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올해로 나이가 몇이더냐?”
“여, 열 여덟입니다.”
여자의 직감이었던 듯 소연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장노삼은 소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저 혼자 중얼거렸다.
“열 여덟이라. 우리 천아와는 2살 차이로구나.”
“예, 예에…….”
“음, 그래. 2살 차이라.”
장노삼이 쉬이 시선을 거두지 않자 아예 자라목이 되어 버린 소연은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아, 아무래도 저분께서는 나와 주인님을 엮어주시려는 것 같구나. 그렇다는 것은 내가 이럴 것이 아니라 좀 더 여성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서 점수를 따야 할텐데, 자꾸만 긴장을 해서 몸을 사리니 이를 어쩌지?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으앙, 난 몰라∼.’
모르긴 뭘 모른단 말인가. 이제라도 잘 하면 되는 거지.
“실례하외다.”
바로 그때 분위기를 전환시키게 하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괜히 화들짝 놀란 소연은 밖으로 나가 상대를 확인하곤 인사를 한 후에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사정화의 호위대 중 한 사람인 사내가 막사 안의 도연을 보며 얘기했다.
“자네가 도연인가?”
자신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이자 도연은 앞으로 나가 대답해주었다.
“네, 맞습니다.”
도연의 나지막한 대답에 그를 한번 훑어 본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명이시네. 자네는 뒤의 분과 함께 나를 따라오도록 하게.”
“저 혼자가 아니라 저분까지도 말입니까?”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틀림없네.”
잘못 전달된 사항이 아니라고 하자 도연은 장노삼을 돌아보았다. 도연으로서는 사정화의 부름에 아무 불만이 없었지만 장노삼은 암흑마교의 사람이 아니었고, 성향 또한 정파에 가까웠기 때문에 자칫 명령조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심히 불쾌해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장노삼은 응당 거쳐야 할 관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로서도 조금 의외였던 부분은 자신을 부른 사람이 다름 아닌 이곳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에 있었다. 그저 당주나 그와 비슷한 자에게 신분을 검증 받을 줄 알았던 장노삼으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아가씨가 천아의 주군이자 암흑마교의 부교주 딸인 것은 알겠는데 어째서 나까지 부르는 게지? 난 그저 도연을 따라온 일개 노인이거나 일정 수준의 실력을 감춘 고수로만 비추어졌을 터인데?’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해졌고 쉽게 생각하자면 더없이 쉽게 풀리는 고민거리였다. 장노삼은 두말할 것 없이 쉬운 쪽을 택했다.
“허허, 나 같은 늙은이를 함께 불러준다니 영광일 따름이구먼. 자, 같이 가보도록 하자꾸나.”
“예, 어르신.”
불쾌한 표정이 아니라서 내심 안도한 도연은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장노삼과 함께 걸어갔다. 그런데 무난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뒤 간단한 몸수색을 하는 와중에 하얀 보자기에 쌓인 물건을 놓고 뜻하지 않게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잠시 맡아두겠다는 사내와 절대 불가하다는 장노삼의 의견이 팽팽하여 절로 분위기가 살벌해진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둘의 신경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냥 들여보내라는 사정화의 명령이 떨어지자 작은 소란은 그렇게 일단락 되었다.
“끄응, 안으로 들어가시거든 행동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말이오. 노부도 그런 눈치는 충분히 있으니 염려 놓으시구려. 허허!”
결과적으로 하얀 보자기를 간수하게 되어 일종의 승리자가 된 장노삼은 아이도 아니면서 은근히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던 상대는 대번에 뭐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떠나간 배를 붙잡기란 요원한 것이었다. 그렇게 당당한(?) 보무로 안으로 들어간 장노삼은 무엇을 보았는지 나직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유인즉, 정면으로 보이는 탁자에 앉아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정화의 자태에 그도 모르게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던 것이다.
‘허어! 도연이 언젠가 스쳐지나가며 말하길, 본교의 사 아가씨는 천하제일의 미녀일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동감은 하되 완전히 동감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의 미녀는 오직 먼저 간 자신의 딸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누가 들었다면 장노삼을 팔불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모름지기 모든 아비들의 눈에는 자신의 딸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었다. 물론,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비들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켈켈, 그저 사내놈들이란 늙은 것들이나 어린놈들이나 다 똑같구나. 늙은 촌로야, 그만 침 흘리고 아가씨께 다가오너라.”
상대의 실력이라면 자신의 숨은 기도를 눈치 챘음이 분명한데도 자신을 상당히 무시하자 장노삼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예의 없는 자에게는 딱히 대접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것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허허, 듣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시라 이 늙은이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사정화는 정원의 빈정거림을 전혀 개의치 않고 받아내는 장노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지 차갑게 정제 된 기도를 슬며시 풀었다.
“괜찮아. 이리와 앉아. 도연 너도.”
반말로 자리를 권해주는 사정화의 대답에 장노삼은 참 사가지가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신분이 지고하다지만 아비가 애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 모양인 것인지 그저 혀만 찰 것만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동천을 그따위로 방치해 둔 장노삼도 만만치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