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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729화


우웅우우웅!

순간 겉으로는 들리지 않고 밀착된 하단전을 통해서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진동음이 느껴졌다. 동천은 운석이 담긴 부분에서 미열(微熱)이 발생한다고 느낀 동시에 내공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감지했다.

“큭?”

기묘한 무력감이 동천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서둘러 원래의 궤도에 오르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운석이 빨아들인 내공이 전부가 아닌 역심무극결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이때 역심무극결만을 빨아들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 동천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확신 속에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키기 시작했고, 마침내 억겁과도 같았던 찰나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에야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한 몸에 2개의 내공이 존재하면 영약이 몸에 들어왔을 시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조금이라도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려고 움직일 것은 자명할 터. 몸을 회복시키는데 역심무극결은 필요가 없으므로 자신이 막아주는 동안 일단 급한 불부터 끄라는 이야기였어! 하하, 역시 이 몸의 생각대로야!’

철이 들고나서부터였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철이 드는 것이 아닌(동천은 인간적으로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다), 매사에 일을 벌여도 좀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이고자 노력하는 그런 종류의 성숙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어렸을 적에는 운석으로 인해 단환이라던가 기타 여러 가지들이 꼬이게 되어 원망을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몸에 차고 다녔던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이로운 결과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커나가며 좀더 깊은 사고의 폭이(안 좋은 쪽으로) 생기자 그것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쪽이라고 운석이 자신에게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창 내공의 운용이 필요한 이 때에 접촉이 이루어지는 순간 자신의 내공이 일정량 흡수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허리띠를 단전 위에 올려놓도록 명령한 것이었고, 이렇게 기분 좋은 결과가 드러나자 그는 내심 흡족해 했다. 아울러 그는 화정이에게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화정아. 이 몸의 옆에 아까 소홍이 누님이 놓고 간 물건 보이지?”

벽에 달린 횃불을 콕콕 찌르며 혼자서도 잘 놀고 있던 화정이는 동천이 부르자 쪼르르 다가와 눈을 반짝였다.

“응, 보여. 속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데 내가 마실까?”

“그걸 왜! 에구구구……. 크으, 그걸 왜 니가 마셔! 너 잘 들어. 니가 그거 마시면 너 죽고 나 사는 거니까, 그거 절대로 마시지 말고 마개를 따서 내 입에다 넣어 줘. 빨리!”

다 낫기만 하면 아주 반쯤 패 주리라고 다짐한 동천은 심호흡을 하며 화정이가 공청석유를 입에 넣어주길 기다렸다. 다행히 그녀는 예전의 경우처럼 홀라당 먹는 짓은 하지 않았고 청아한 향기가 온 석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자 냄새만 조금 맡더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동천의 입 속에 쪼르륵 부어 주었다.

꿀꺽!

‘으메, 달콤한 것! 캬아∼, 이것이 바로 달콤한 인생이로구나.’

영약을 마신다는 생각에 너무도 좋아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동천은 맛을 음미하기 위해 쩝쩝거리면서도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야, 계속 털어 봐. 그거 한 방울이라도 미천한 것들은 죽고 못 사는 천고의 영약이라구.”

자기가 그 미천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 중얼거린 동천은 얼굴과 턱이 아파서 입을 크게 벌리지 못하자 대신에 혀를 살짝 내밀어 뱀처럼 날름거렸다.

그의 요구대로 자그마한 옥병을 거꾸로 세우고 탈탈 털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단 한 방울이라도 나오길 기대하며 혀를 날름거리는 동천의 모습은 실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노력한 보람은 있는지 기어코 한 방울이 떨어지자 그것까지 마저 섭취한 동천은 본격적으로 운기에 들어갔다.

‘일단 금이 간 뼈들을 원상태로 돌려놓아야 겠지?’

가장 목표를 정하기 손쉬우면서도 중요한 부위인 뼈부터 회복하기 시작한 그는 몸 속으로 들어온 공청석유를 흡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내공이 늘어나 기쁜 것은 둘째치고, 역심무극결과의 내공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져 합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늦어지는 것을 의미했기에 꾹 참기로 했다.

게다가 조그만 충격에도 벌벌 떠는 이때에 확실하게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다가 몸을 움직여야할 상황이라도 오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처럼 흡수를 포기하고 전신의 사지백해(四肢百骸)로 공청석유의 기운을 흘려보내기 시작한 동천은 금이 간 뼈들 사이사이를 어루만지며 쩍쩍 갈라진 부분에 충만한 생명력들을 주입시켰다.

확실히 공청석유의 힘은 놀라워서 닿는 생명력의 손길 하나 하나마다 급속도로 아물어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갈라진 부분이 완벽하게 접합이 되어 정상을 되찾았다. 이는 공청석유 하나 만의 효과가 아닌 귀의흡수신공이라는 절학과 맞물려 영약의 성분을 수배나 빠르게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을 노력한 그는 신체의 모든 뼈가 완전하게 접합이 되자 다음으로 제 기능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혈맥들을 되살리는데 주력했다.

터지고 손상된 부분이 온몸 전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기에 처음엔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도 신기할 정도였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는 생각에 착안하여 하단전에서부터 차근차근히 복구를 하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

부드럽게 모든 것을 포용하며 단전을 주위로 공청석유의 기운이 원을 그리자 생명력은 더욱 충만해졌고 더디지만 확실하게 고치려고 했던지 동천은 원래의 성격답지 않게 절대로 무리를 하지 않았다.

“아? 아직도 운기요상을 하고 있었구나.”

체감상으로 2시진 이상을 다른 곳에서 보냈기에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살피러 왔던 강소홍은 동천이 진지하게 눈을 감은 채 운공 삼매경에 빠져있자 보기 드문 모습이 신기했던지 가만히 그를 눈여겨보았다.

혼자 운기요상을 시도하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라 찾아왔던 그녀는 다행히 동천의 운공이 순조로워 보이자 적잖이 안도할 수 있었다.

“와아, 소홍이 왔어? 동천은 깨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니까 우리 뭐 좀 먹자. 헤헤, 만들어줄 거지?”

석실의 각진 모서리에서 의미 없이 쭈그리고 앉아있기 놀이를 하던 화정이는 든든한 말상대가 나타나자 반갑게 맞이하며 먹을 걸 요구했다. 대외적으로는 말상대가 나타나 기쁜 것이었지만 사실은 물주(?)가 나타나 기뻤던 것이다.

때마침 강소홍 또한 필요 이상으로 활발한 그녀를 이곳에 놔두었다간 행여나 동천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로 했고 말이다.

“그래 그러자.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깨어난 이후로 먹은 것이 없었네? 좋아. 화정아 우리 물고기 잡아서 저녁을 준비하기로 할까?”

일단 먹는다는 소리이자 화정이는 열렬한 추종자처럼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응응! 진짜? 헤헤, 그럼 제일 큰 물고기가 내 꺼야?”

누가 욕심 많은 주인의 강시 아니랄까봐 이런 것까지도 꼭 닮아 보이자 그녀는 절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이지. 화정이는 제일 큰 거 먹고, 이따가 제일 기분 좋게 자면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화정이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그러엄! 내가 제일루 자신 있어 하는 게 잘 먹고 잘 자는 거야. 헤헤헤.”

“호호, 그래. 너만 믿을게.”

동천은 감지력으로 물고기가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던 반면, 그런 능력이 없었던 강소홍은 본문의 비급을 찾았음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냉혹한 현실로 돌아와 식량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잘 밀봉된 상자들 중 하나에서 족히 수천 알은 되어 보이는 벽곡단들을 찾아냈지만 그녀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범 삼아 냉큼 집어먹어 볼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물론, 그녀가 조금(?) 상한 것을 먹는다고 큰 탈이 날 리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심리는 모두 같았으므로 절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후일을 기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 딴에는 미련이 남아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잘게 부숴 보이고 했으나 벽곡단과는 인연이 없는지 시금털털한 요상한 냄새는 바로 손을 놓게끔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여, 서둘러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 힘들게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동공의 지하호수였고, 그녀는 기감을 발달시켜 한참을 찾아본 후에야 겨우 물고기가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정아, 잠시 이 횃불 좀 들고 있을래?”

물고기를 잡아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화정이는 재빨리 횃불을 받아주었다.

“응, 알았어. 대신에 큰 거 많이많이 잡아줘야 한다?”

“호호, 걱정하지마.”

품속에서 하얀 약병을 꺼낸 그녀는 가루를 조금 덜어내어 호수의 가장자리에 뿌렸다. 그러자 잠시 후 가장자리가 아닌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몇몇의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내밀고 둥둥 떠오르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나마 횃불로 비추어 봤기에 찾아낸 것이지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잡아놓고도 지나칠 뻔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어설프나마 일위도강(一葦渡江)을 흉내내며 두어 번 수면 위를 찍던 그녀는 한 마리를 잡아챈 후 돌아오는 과정에서 결국 물 속에 몸이 잠기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냥 수영으로 모든 물고기들을 건져내 돌아왔다.

“우와, 많다! 그런데 소홍. 아까 뿌린 게 뭐야?”

강소홍은 물고기의 꼬리를 한가득 쥐었던 손에서 비린내가 나자 눈살을 가득 찌푸리다가 화정이의 물음에 얼굴을 펴고 대답해주었다.

“마비산이라는 거야. 인체에는 해가 없지만 일시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의 일종으로서 하독(下毒)의 기초에나 사용하는 물질이지. 원래는 독을 뿌려서 물고기를 잡을까 했는데, 나는 괜찮지만 너와 동천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효력이 약하고 몸에 무해하며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는 독을 찾다 보니 이걸 사용하게 된 거야. 이해하겠어?”

화정이에겐 너무 어려운 설명이 아니었나 싶었는지 그녀가 친절하게 되물어 보았다. 하지만 화정이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응, 그러니까 나 먹으라고 뿌렸다는 거지?”

어째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대답이었지만 강소홍은 마냥 틀린 말도 아닌지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지 그녀가 잘못 생각한 부분을 지적하자면, 독을 뿌린다고 해서 동천과 화정이가 먹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라는 것이었다.

인면지주의 정화를 흡수한 화정이나 독공을 익히고 있는 동천이나 써서 못 먹겠다고 할지는 몰라도 먹어서 중독될 일은 결단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거 그냥 먹는 거야? 우웅, 그럼 맛 별로 인데…….”

화정이는 맛은 또 따져 가지고 은근히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가볍게 웃어준 그녀는 말했다.

“호호, 물론 아니지. 생선을 어떻게 날로 먹겠니? 잠시만 기다려. 태울 만한 것을 가져올 테니까. 아참, 횃불을 들고 가려고 하는데 어두워도 참을 수 있지?”

물어볼 가치도 없는 사안이었다. 매일 맛있게만 만들어준다면 평생이라도 어둡게 살 자신이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응, 화정이는 잘 참을 수 있으니까 빨리 갔다와.”

잠시 떨어진다고 미아가 되는 장소도 아니어서 부담이 없었던 강소홍은 서둘러 보물창고를 지나 위층 통로로 올라갔다. 이때 보물창고의 불들은 모두 꺼져있는 상태였는데 이유인즉슨, 횃불의 지속시간은 정해져있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은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불이 필요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낭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머지 통로들도 전부 끄거나 최소한 1개만 살려놓은 실정이었다. 여하튼 그녀는 오른쪽 통로에 구비된 상자들 중 소용가치가 없는 뚜껑 하나를 집어들고 화정이에게 되돌아왔다.

“화정아,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대신에 맛있게 구워줄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퍽퍽! 쩌적!

수도(手刀)로 상자의 뚜껑을 조각조각 내어 불을 붙이자 처음엔 잘 안 붙는 것 같았던 나무 조각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리를 잡고 앉아 지니고 있던 비수를 꺼내 꼬챙이 대신으로 사용한 강소홍은 연신 꼴깍거리는 화정이의 성화 아닌 성화에 못 이겨 제일 처음에 구워진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자,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

“응, 얌냠. 더 줘.”

“뭐?”

무의식적으로 반문한 강소홍은 받자마자 생선뼈를 보여주는 화정이의 무식한 먹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무슨 곡예사의 묘기도 아니고 옥수수 알갱이 훑듯 좌우로 입을 한번 쓱싹하자 발라진 살들이 전부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그녀는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지만 어째 8마리나 잡은 생선들이 모자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자신은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가정했을 시.

“쩝쩝. 냠냠. 쪽쪽? 아, 잘 먹었다! 소홍, 고마워. 헤헤.”

“그, 그래. 많이 먹어서 배부르고 좋겠다.”

결국 불길한 예감대로 8마리가 몽땅 화정이의 뱃속으로 사라져 그녀가 속으로 물고기를 더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화정이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만족한 듯 배를 두들겼다.

문득, 그 장면을 본 강소홍은 만족감에 물든 화정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빼어난 미모가 새삼 아깝게 여겨졌고 단순한 그녀의 행동이 한없이 서글퍼 보였다.

그녀가 판단한 본래의 그녀는 순수하고 소극적이었지만 복수와 원한이 쌓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집념이 강해 보였는데, 다시 강시로 돌아오자 모든 것을 잊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 어찌 처연하고 불쌍해 보이지 않을까.

“화정이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고 좋아?”

순간적으로 분위기에 휩쓸린 강소홍은 괜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는 법.

대신에 그녀는 화정이의 지금 모습 또한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숙명인 것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지나쳐 묻어두고자 했다. 그런데 그때 화정이가 고개를 살짝 들더니 되려 반문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럼 소홍은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고 좋아?”

주춤한 강소홍은 놀란 눈으로 화정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해맑고 티 없는 눈동자가 자신의 시선을 투과하는 듯 느껴지자 강소홍은 먼저 눈을 피하며 한쪽 무릎을 세워 가만히 턱을 괴었다.

“글쎄? 어렸을 적엔 솔직히 집에서의 지긋지긋한 생활보다 나을 것 같아서 반항 없이 따라 나왔어. 두렵긴 했지만 적어도 그때의 생활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가장 뛰어난 근골로 뽑혀 호화스런 생활을 누렸어. 하지만 사람의 생활은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훗, 언젠가는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피(血)와 나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아. 하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이 그것 하나만으로 끊길 수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야. 익숙하지 않다면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고,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억지로 어울려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아? 네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웠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족스럽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의 생활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화정이 너는 어때?”

다시 원점의 질문으로 돌아온 상황이자 화정이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 증거로 위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왔다갔다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도 글쎄에에? 나는……, 우웅. 모르겠어.”

강소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왜?”

화정이는 말했다.

“소홍의 말을 들으니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쁜 것 같기도 하거든. 에헤, 좋은가? 라는 생각을 해도 이상한 느낌이 함께 해서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 마음 나도 몰라. 헤헤헤.”

듣는 상대가 동천이었다면 그냥 흘려들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강소홍은 그가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화정아. 혹시, 네가 알지 못하는 기억들이 순간순간 떠오르지 않니?”

생각을 요하는 질문이자 화정이는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내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는 누가 보면 공주병에 걸린 여자처럼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서너 번을 더 반복하던 그녀가 말했다.

“예전엔 가끔 그랬는데 요즘엔 안 그랬던 것 같아.”

“무슨 내용인지 기억은 하고?”

“아니, 어떠한 장면들이 떠올랐던 것은 기억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려고 하면 아무 기억도 안나. 근데, 꼭 기억해야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소홍도 그 어떠한 판단을 내려줄 수 없었다. 그녀 또한 강시를 제련하는 문파의 소문주였기 때문에 개입을 했건 하지 않았건, 강시화가 된 여인들의 삶을 유린한 자들 중 한 명이라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냐. 꼭 기억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가능한 기억하려고 노력은 해봐. 그래야 지능이 굳어지거나 퇴화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으니까.”

화정이는 싱긋 웃었다.

“헤헤, 소홍이가 꼭 소연이 같은 말을 하네? 소연도 가능한 생각하면서 지내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늘만큼 땅만큼 커서 그랬던 걸 거야. 나중에 소연을 만나면 고맙고 또 사랑한다고 전해 줘.”

“응! 그럴 게! 근데, 나 동천 보러가도 돼? 갑자기 보고 싶어졌어.”

그 문제라면 굳이 막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소홍 그녀가 함께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이야. 우리, 말 나온 김에 같이 갈까?”

“와아! 가자! 가자!”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소홍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하던 화정이는 문득 그녀의 질문이 새삼스레 다시 떠올랐다.

  • 화정이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고 좋아?

대답을 해주자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화정이었다. 그녀는 동천도 좋고 소연도 좋고, 이 순간 자신과 함께 있는 소홍이도 좋고, 다 좋고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기묘한 감정이 그녀의 뇌리를 파고 들어와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아울러 그녀를 슬프고 화나게 만들었으며, 처음 느껴보는 당혹감과 생소한 살기까지 어우러져 그녀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흥얼거리던 콧노래도 중지했고 그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없이 소홍의 뒤를 따랐다. 그때 다시금 소홍의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 화정이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고 좋아?

“…….”

그녀는 한참 후에야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쩌면, 이게 좋은 걸지도…….”

“응? 뭐라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강소홍이 뒤돌아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화정이는 언제 이상한 태도를 보였냐는 듯 특유의 백치미로 돌아와 태연하게 대꾸했다.

“뭐가?”

그런 화정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물어보고도 어색해진 강소홍은 신경이 예민해져서 환청을 들었던 것이라 단정하곤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냐, 무슨 소리가 들린 듯 해서. 화정아, 너 혹시 뭐라고 했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녀가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나 였다.

“아니, 기억에 없는데?”

“아! 그렇구나. 알았어. 어서 가기나 하자.”

“으응! 가자아! 다시! 가자아!”

화정이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통로의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그녀들은 그렇게 어둠을 뚫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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