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혼독비(碎魂毒比)
ᅳ나백천, 독검(劍)을 받다
영업 준비 중!
“여긴가?”
닫힌 주루의 정문 위에 걸린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년인 한 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벽녘에 배에서 내려, 안개 속으로 섞여들었던 바로 그 검은 수염의 중년인이었 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간판에는 검은 글씨로 ‘흑상루(黑霜樓)’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번화한 마을의 대로(大路) 한복판에 위치한 멀쩡하고 번듯하 게 생긴 주루였다. 아직 준비 중이라고 걸려 있는 탓에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인은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열하나.’
오감의 감각을 확장해 주위를 탐색하자 여기저기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주루라면 있을 리 없는 기척, 전문적으로 훈련 을 받은 자들이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자신의 기세를 죽이는 그런 기척이었다. 경계의 기미는 여실했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쉽군. 차라리 살기를 내비치면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을…….”
중년인은 차라리 이 자리가 자신을 잡기 위한 함정이길 바랐다. 그 편이 습격해 오는 적들을 정당방위로 몰살시킬 수 있고, 터무니없는 일을 더 이상 맡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 그를 함정을 빠뜨려 죽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포진이었다. 그럴 작정이었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많은 인원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모를 정도로 ‘그놈’이 어리석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놈은 아주 제대로 미쳤지만, 불행하게도 어리석지는 않았다.
“손님, 팻말 안 보셨습니까? 아직 영업 전입니다. 나가주시지요.”
계산대에 서 있던 점소이 하나가 인상을 숨김없이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제대로 글러먹어 있었다.
“이 주루는 손님을 맞는 태도가 형편없군. 그래서 어디 장사를 하겠나?”
손님을 끌고 와야 할 점소이가 도리어 쫓아내다니, 그것도 이렇게나 불친절하게!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건 손님이 상관할 바가 아니니 나가주시지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중년인의 입에 고소가 떠올랐다.
“내가 바로 자네들이 기다리는 손님이라네. 그러니 가서 루주(樓主)라는 놈을 불러와.”
그 말에 점원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럴 리가 없소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은 나이가 백 살은…….?
그러나 점원의 말은 중간에 뚝 하고 멈추었다. 중년인의 품에서 나온 한 통의 서찰을 본 탓이었다.
“이제 믿겠나? 아니면 내 검으로 증명을 더 해야겠나?”
못 믿겠으면 검술 실력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대가는 그의 목숨이었다.
“더, 더 증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제야 흑염의 중년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이곳의 루주라는 놈을 불러오겠나? 아니, 불러올 필요도 없겠군.”
점원이 등지고 있는 벽 쪽을 노려보며 중년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수풀에 머리만 처박는다고 꿩 꼬리가 숨겨지겠나? 숨어 있으나 숨어 있지 않으나 똑같으니 그만 나오는 게 어떤가?”
그 말에 점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런, 이런. 설마 백 세가 넘은 정천맹주 나백천 대협께서 설마 이렇게 팔팔하게 젊으실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저희들이 가진 용모파기랑 격차가 심해서 좀 당황 했습니다.”
벽 뒤에서 비단옷을 걸친 뚱뚱한 사내 하나가 걸어나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게 그 복면까지도 비싼 고급 비단으로 만 들어져 있었다.
“그냥 인피면구를 착용한 것뿐일세. 사람의 눈과 귀가 있는데 정천맹주씩이나 되는 자가 흑천맹의 거점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도 문제이지 않겠나?”
그것은 양측에 맺은 협정 서른 가지 정도를 한꺼번에 위반하는 짓이었다.
원래 사람이 많은 곳에는 첩자가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이곳부터는 이제 흑천맹의 앞마당, 곳곳에 그들의 눈과 귀가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왜냐면 정천맹도 마찬 가지였으니까.
“인피면구라…… 그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군요.”
비만 복면의 뚱보사내는 매우 미심쩍다는 시선이었지만 나백천은 깨끗이 무시했다.
“요즘은 역용술도 기술이 많이 발달했지. 자네 견문이 짧은 걸 어쩌겠나?”
아무리 봐도 사십대로 보이는 검은 머리에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검은 수염. 하지만 이 사내의 정체는 바로 정천맹주 나백천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니네만?”
언제까지 송사리만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명령을 전달하겠소.”
비단복면인의 말투가 변했다. 나백천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했다. 겨우 천쪼가리 한 장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용기가 넘쳐흐르다 못해 분출하는 모양이었다. 겨우 저런 부실한 익명성에 취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다니.
“호오, 명령이라? 자넨 지금 누구한테 대고 그딴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혹시 알고나 있나?”
나백천은 일부러 느긋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자 익명의 복면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론 알고 있소. 정천맹주 나백천한테 아니오?”
그의 태도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일말의 조심성도 없었다. 지까짓 게 감히 날 어쩌겠어, 인질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복면을 벗겨볼 필요도 없이 뻔히 보였다.
나백천은 피식 웃었다.
“아니, 자네는 전혀 모르고 있군. 그 머리엔 꿩 대가리 정도의 지혜밖에 들어 있지 않은 듯하네.”
“그게 무슨……”
비단복면뚱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백천의 몸이 질풍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에 복면사내의 목을 움켜쥔 다음 거칠게 벽에 밀어붙였다. 거의 벽에다 내동댕이칠 듯한 기세였다.
“커헉!”
고통을 참지 못하고 복면사내의 입에서 신음성이 피와 함께 터져 나왔다. 순간 복면뚱보의 호위로 보이는 열하나의 살기가 요동쳤다.
“갈(喝)! 모두 움직이지 마라!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나백천의 일갈이 터지자 막 움직임을 취하려던 열한 가닥의 살기가 모두 멈추었다. 단 한 사람이 내뿜는 기세에 열한 명이 동시에 제압당한 것이다. 지금 나백천에 게 고상한 무림맹주로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새 그는 사나운 맹수로 변해 있었다.
“자, 이제 좀 자각이 되나? 자신이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지?”
부릅뜬 두 눈이 무시무시한 광채를 발한다. 그 두 눈동자는 분노에 의해 불타고 있어, 맹수조차도 단숨에 제압할 듯한 기세가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지간한 내 력이 없는 이상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절정의 검객이 뿜어내는 그 안광은 칼날과도 같이 상대의 정신을 제압한다.
“그, 그렇소.”
꾸우우욱!
목울대를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아니, 자네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다시 잘 생각해 보게. 좀 더 잘. 아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담담하지만 심신을 짓누르는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은근하지만 웅혼한 내력마저 실려 있어서 사자의 포효를 들은 듯 머릿속이 울릴 지경이었다. 복면뚱보는 고통 을 참지 못하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제야 나백천은 손아귀의 힘을 조금 뺐다.
“좋아, 이제야 겨우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듯하군. 자, 이제 이야기를 들어볼까? 네 주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 딸을 어디에다 감금해 두고 있는지.”
“저…… 전 모릅니다.”
우뚝!
“끄아아아아아아악!”
복면뚱보의 입에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백천이 그의 손가락 하나를 비틀어서 부러뜨렸던 것이다. 그러나 비명이 주루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그 가 주위에 펼친 기의 막이 소리가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대답해 주길 바라네. 우선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분근착골(分筋錯骨)’까지는 쓰고 싶지 않으니 말 일세.”
“네 녀석의 근육을 토막토막 끊고, 몸 안의 뼈를 뒤섞어놓겠다’를 네 글자로 줄여놓은 말에 복면뚱보는 사색이 되고 말았다. 평소에 항상 약한 자만 괴롭히다가 우 연찮게 강한 자를 마주하고 보니 잠시 적응이 늦어졌던 게 화근이었다. 아니, 미리 익혀두었던 그림 속의 얼굴과 영생김새가 다른 바람에 잠시, 아주 잠시간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잊었던 탓이다.
“커컥. 저, 정말 모릅니다. 저, 저 같은 말단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 제게 주어진 며, 명령은 지시 사항을 당신께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흥, 그리고 내가 그 지시를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감시하는 역할이겠지.”
“….닙니다.”
“뭐라고?”
나백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아닙니다. 전 감시역이 아닙니다.”
“그 말은 믿기 어려운데? 날 우롱하려는 건가?”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 감시역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무사히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지 안 하는지, 그 지시를 당신께서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멀리서 감 시하고 있을 겁니다.”
“만일 자네가 무사하지 않다면?”
복면뚱보의 눈동자가 공포로 인해 심하게 흔들렸다.
“다, 당신께서 지시 사항을 어겼다고 위쪽에 당장 보고할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되지?”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 정말입니다.”
나백천이 다시 한 번 내공을 불어넣어 뼈와 근육을 비틀자 그는 다시 한 번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자네가 맡은 역할은 뭐지?”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리며 사내가 말했다.
“지시 사항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지시 사항?”
“네, 제 역할은 매, 맹주님의 검을 잠시 맡는 것입니다.”
그제야 목을 조르는 힘이 약해져 복면뚱보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내 검 ‘백뢰(白雷)’를? 왜?”
나백천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깊은 골이 패었다.
“그, 그건.. 그 검으로 일을 시행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대신 이것을 쓰시면 됩니다.”
복면뚱보는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천 뭉치 하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천을 풀자 시커멓게 생긴 단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 기분 나쁘게 생긴 검이었 다. 살짝 검을 뽑아보자 검신이 뭔가에 물든 듯 검게 물들어 있었다. 투박하고 불길한 빛이었다.
“이건 뭔가?”
“쇄혼독비(碎魂毒比)’라는 녀석이죠. 보시다시피 독검입니다.”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건…….?”
“지금 내 실력으로는 흑천맹주를 상대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를 묻고 있는 걸세.”
복면뚱보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무, 물론 그건 아닙니다. 그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것이 제가 받은 명령입니다. 우선 받으시지요.”
“…..”
나백천은 잠시 망설였다. 저것은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의와 악의를 담아 완성된 무기였다. 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살인 무기였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 다.
“받으십시오. 그래야 따님이 무사할 수 있습니다.”
“내 딸 이야기를 감히 입에 담지 마라!”
나백천이 추상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 무서운 기세에 찔끔한 복면뚱보가 급히 입을 닫았다. 말 한마디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던 것이다.
“…..”
나백천은 고민했다. 이것을 받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추악한 흉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랑스런 딸에게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뚱보를 제압하는 것은 간단하다. 매복해 있는 열한 명도 무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이자만 제압해서 일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는 상당히 용의주도했다. 그리고 그, 나백천이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행동할 지도. 그래서 어떻게 주의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 악마 놈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했다.
“일천 이놈!”
그 상대의 악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져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천각으로 달려가 그곳을 발칵 뒤집어놓고 싶었다. 그러 나 그의 행동은 현재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역시, 지금은 그 녀석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그 녀석, 비류연이 제시간에 딸을 구출해 내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그 증오스러운 녀석의 지시를 계속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나백천은 거칠게 쇄혼독비를 받아 들었다.
“자, 그럼 제게 그 하얀 검을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나백천은 무인의 생명과도 같은 애검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검을 풀어 앞으로 내밀었다. 복면뚱보는 좀 전에 혼이 난 덕분인 지 공손하게 검을 받아 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엿 바꿔 먹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이 뚱보 놈은 혼쭐이 덜 난 모양이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아니면 분근착골이 뭔지 궁금한 건가?”
나백천이 다시금 손을 쓰려 하자 복면뚱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일을 끝마치고 다시 이곳 흑상루로 돌아오시면 돌려 드리겠습니다.”
나백천은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담보를 잡히고 말았다.
“제대로 보관하는 게 좋을 걸세. 먼지 하나, 손때 하나라도 묻었다가는 자네의 목은 없을 테니까 말일세.”
“무, 물론입니다.”
지극히 공손해진 태도로 복면뚱보가 대답했다.
“언제까지 하면 되나?”
“내일까지입니다.”
여유를 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감시하고 있겠지?”
“흑천맹 안으로 들어가셨다 해도 저희들은 여전히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부디 방심하지 않으시길.”
정중하게 말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나백천은 저 뚱보 놈에게 다시 한 번 본때를 보여줄까 하다가 참았다. 저런 조무래기한테 화풀이를 해봤자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저건 그저 일종의 사람 형상을 한 서찰에 불과했다. 일방적으로 보내진 서찰에다 대고 화풀이를 해봤자 소용없 는 일이다.
“내일까지 난 뭘 하면 되지?”
“걱정 마십시오. 사(四)호실에 방을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이곳 흑상루에서 머물라는 얘기였다.
“이런 불길한 곳에서는 조금이라도 머물러 있고 싶지 않군.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아서 말이지. 잘 곳 정도는 내가 알아서 찾겠네.”
“안 됩니다.”
“다른 누군가와 접촉하는지 알아보겠다는 심보로군.”
“알고 계시니 말씀드리기도 편하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아직 딸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이상, 아무리 대단한 정천맹주라 할지라도 말단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호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나백천은 감시의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린아…….”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좀 전의 살기등등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아버지일 뿐이었 다.
‘그리고 내일.
그는 저울 위에 올려진 자신의 딸과 무림맹주의 의무, 그리고 한 사람의 존엄과 생명과 강호 전체의 안정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대의멸친(大義滅親)…..”
지난 백 년간, 지금 이 순간처럼 그 말이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과연 나는 대를 위해 멸친할 수 있을 것인가? 딸아이, 린아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 있을까?”
그 최후의 순간이 올 때, 마지막 시간이 모두 타버리고 재만 남았을 때 과연 자신은 어떤 결단을 내릴까?
나백천 본인도 자신이 그 최후의 최후까지 갔을 때 무슨 결정을 내릴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을 그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부탁한다, 이 녀석아!”
아직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영원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손발이 모두 묶인 지금, 기대할 것은 비류연이란 녀석의 활약뿐이었다. “그렇다고 노부가 인정한 건 결코 아냐! 착각하면 곤란해! 암, 곤란하고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그런 놈한테 줄 수는 없었다. 사실 그 상대가 어떤 놈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바로 나백천의 의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감히 대무림맹주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당당하게 밝히며 자신의 속을 벅벅 긁어놓았던 그 ‘근성’과 ‘배짱’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못 미덥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른 수가 없었다, 다른 수가.
***
“웁! 쿨럭!”
붉은 피가 청석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렇게 조심을 기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단 말인가?
“류연! 괜찮나?”
비류연이 각혈하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된 효룡이 외쳤다.
챙챙!
순간 두 개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쌍검이 락비오의 목에 닿았다.
“이 비겁한 놈! 감히 독(毒)을 먹이다니!”
그러나 락비오는 의기양양해하기보다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 누가 독을 먹였다는 거냐? 난 그런 비겁한 짓 하지 않는다! 너도 방금 내가 그 단약과 똑같은 걸 먹는 걸 보지 않았느냐? 봐라, 난 이렇게 멀쩡하지 않나?” 그는 극력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효룡이 보기에는 별로 신빙성이 없었다.
“해독제를 미리 먹었는지 알게 뭐냐!”
아니, 효룡은 분명 그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약을 삼키자마자 저 튼튼한 비류연이 각혈을 할 리가 없었다.
“어서 해독제를 내놔라!”
당장에라도 락비오를 두 동강 낼 기세로 효룡이 외쳤다. 순간적으로 뿜어 나오는 그 기파(氣波)에 락비오는 깜짝 놀랐다.
‘한 방에 떨어져 나가기에 별 볼일 없는 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기세를 내뿜다니!’
금강반탄신공을 연마한 그의 몸을 단번에 두 동강 낼 듯한 예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목에 닿은 두 개의 칼날에서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한 한기가 전해져 왔다. 락비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압도당하고 있는 건가?”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때 당장에라도 해약을 내놓지 않으면 잘근잘근 동강 내주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는 효룡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그만둬, 룡룡.”
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자네, 괜찮은 건가?”
효룡의 그 말에 비류연이 씨익 하고 웃었다.
“보시다시피 별로 안 괜찮지.”
“잠깐만 기다리게. 내가 이자를 십이 등분해서라도 해약을 받아낼 테니!”
효룡이 있는 힘껏 쌍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일단 두 팔부터 잘라놓고 얘기를 시작할 셈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룡룡.”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왜?”
“그야 독이 아니니까.”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같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독이 아니라니? 효룡은 비류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독이 아니라고?”
“어, 그저 약효가 너무 좋을 뿐이야.”
“뭐어? 그게 무슨……!”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호법을 부탁해, 룡룡! 내 목숨은 비싸니까 간수 잘하고.”
그리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대로 운기행공에 들어간 것이다.
“이, 이봐! 이 친구야! 자네 미쳤나? 여긴 적진 한가운데라고!”
그러나 비류연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두 눈을 감은 채, 몰아(沒)의 상태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지만 참말로 시작해 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내가 미쳐!”
적진 한가운데서 팔자 좋게 가부좌 틀고 운기행공이라니, 제정신으로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무인이 가장 무방비해질 때가 언젠가? 바로 운기행공할 때가 아닌가.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 해도 운기행공 때만은 허점투성이가 되게 마련이다. 비록 서해왕 락비 오가 패배를 인정하긴 했으나, 언제 태도가 돌변해서 부하들에게 전원 돌격을 명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과연 자신은 그 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이제 비류연 의 목숨은 효룡에게 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촤악!
우검을 들어 올린 효룡이 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검풍과 함께 비류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이 장 크기의 원이 그려졌다. 마치 도구를 써서 그린 듯 놀랍도록 정교한 원이었다.
“이 금[線]은 바로 생사선(生死線)이다. 이 금을 넘는 자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붉은 검기로 일렁이는 쌍검을 좌우로 펼치며 효룡이 일갈했다.
“죽인다!”
“대장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부하 하나가 살금살금 다가와 락비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기회? 무슨 기회?”
대체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락비오가 반문했다.
“물론 공격할 기회지요.”
“공격? 무슨 공격?”
여전히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락비오가 반문했다. 이쯤 되자 부하 쪽이 더 기가 막혔다. 한 번 말하면 척 하고 알아들어야 할 것 아닌가. 이 대장은 정말로 뇌 대신 근육이 들어차 있는 게 아닐까? 십번대 대원은 심히 자신이 소속된 부대의 존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대장을 도와 대를 부흥시키려면 역시 자 신처럼 머리가 비상하고 세상 물정에 빠삭한 부하가 필요한 법이었다.
“아이 참, 답답하시긴. 그야 당연히 저놈들을 조져 버릴 기회 아니겠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단숨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피떡?”
락비오가 반문한다.
“예, 피떡 말입니다.”
“저 정말 똑똑하죠?”라는 얼굴로 락비오를 바라본 부하는 잠시 의문에 빠졌다.
어째서 대장님의 관자놀이에는 저렇게 푸른 힘줄이 불끈불끈 솟아나 있는 걸까? 어째서 표정이 저리도 싸늘할까?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금방 얻을 수 있 었다.
“멍청한 놈!”
빠악! 락비오의 주먹이 부하의 얼굴에 작렬했다. 대장의 철권을 얻어맞은 부하는 얼굴이 빈대떡이 된 채 단숨에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널브러졌다.
“이 몸이 그렇게 비겁한 놈으로 보이냐? 승부는 승부! 패배는 패배다! 내가 명령할 때까지 누구도 움직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