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들어가는 생명
– 창랑(蒼狼)의 늑대들
“헉헉, 이쯤이면 괜찮겠지?”
“헉헉, 네,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용휘와 공손절휘는 동해도의 관문에서 한참 떨어진 공터까지 나오고 나서야 근처에 널려 있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가? 휴우, 겨우 빠져나왔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모용휘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다 누구 탓일까요?”
덕분에 덩달아 고생을 한 공손절휘가 옷을 털며 투덜거렸다. 공손절휘의 표정은 어쩐지 지옥을 뚫고 나온 사람처럼 창백하고 피로에 절어 있었다.
“그게 모두 나 때문이라는 건가?”
“당연하죠. 다들 선배님한테 몰려온 것 아닙니까.”
“그, 그런가?”
약간 긴가민가하는 모용휘를 향해 공손절휘는 쐐기를 박았다.
“물론이지요, 모용 선배님.”
동해왕 감자군의 독문무공인 화화려려신공은 확실히 기괴하고 변칙적이면서도 위력적인 무공이었다. 다행히 모용휘는 그동안 염도와 빙검을 통해 배웠던 공부 (工夫)를 응용해 만든 ‘건곤일원합으로 승리를 쟁취했으나, 그 섬을 빠져나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여인 ‘떼’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둘러싸긴 했지만 그녀들의 목표는 모용휘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 ‘떼들이 모용휘에게 달려든 것은 피범벅이 된 ‘감자조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초절정 미남에다가 덤으로 강하고 절도있고, 더 나아가 가문까지 빵빵한 모용휘의 멋진 모습에 뿅 가버린 여인들이 모용휘를 한 번이라도 만져 보려 고 달려든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만지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원하는 이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역시 흑도의 여자들이라서 그런가…… 천무학관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극적이라 깜짝 놀랐네.”
“정표를 달라며 옷을 뜯어갈 때는 정말…….”
공손절휘가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무공을 몸에 익힌 여인들이 그들의 옷자락과 장신구를 뜯어갈 때는, 마치 천 개의 손이 그들을 덮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 킬 정도였다.
“난 옷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까지 뜯길 뻔했네.”
모용휘의 머리카락이나 옷고름 하나라도 쟁취해 가려는 그녀들은 먹이를 노리는 늑대 떼처럼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다. 두 눈이 불이 들어온 듯한, 어찌 보면 츄르 륵 침까지 흘리고 있는 듯한 그 무자비한 탐욕에는 모용휘도 순간 등골에서 오한이 달리고, 모골이 송연해지고,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피로 물든 붉은 옷을 갈아입고 가라며, 어디서 났는지 실로 수상스럽기 짝이 없는 수십 벌의 백의를 사방에서 내미는 여인들도 있었다. 모용휘는 결벽증임 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 옷을 받아 들 수가 없었다. 그 옷들을 내미는 여인들의 눈에서 광기에 가까운 이상한 열기를 느꼈던 것이다.
급기야 장내는 한순간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꺄아아악, 오빠!’, ‘모용 대가아아아아!’라는 비명 소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 낀 모용휘와 공손절휘는 그동안 익힌 모든 무공을 이용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두 사람의 무공 실력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아직까지 그들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동해도 안에 갇혀 있어야 했으리라.
모용휘와 동행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생사의 경계를 넘어야 했던 공손절휘 역시 한순간에 자신이 여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 찌 된 일인지 수치심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는 알아버린 것이다, 여성들의 무서움을 봐서는 안 될 여인들의 일면을.
“무서웠죠, 모용 선배님?”
“무서웠지, 정말로. 어떤 면에선 감자군과의 대결보다도 힘들었다네.”
덤인 공손절휘도 그 정도의 공포를 경험했는데 당사자인 모용휘는 어땠겠는가. 저 강한 모용휘 역시 무서움을 느꼈다는 데서 공손절휘는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자신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런 고민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 자네, 상처는 괜찮나?”
공손절의 왼쪽 눈 밑에 난 자상(刺傷)을 보며 모용휘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설마 목관 안에 그런 암기 장치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주의가 부족했던 점, 미안하게 생각하네.”
모용휘가 사과하자 공손절휘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실수지요. 조심성없이 성급하게 목관을 열어젖힌 건 바로 저였으니까요. 이걸로 제 얼굴도 조금 더 남자다운 얼굴이 되었겠죠.”
왼쪽 눈 밑에 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공손절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만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모용휘가 달려들어 날아오는 암기들의 세례를 검막으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공손절휘는 이렇게 땅을 밟고 서 있기는커녕 땅 밑 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별일없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점이 가장 걱정될 뿐이었다. 그러나 경고해 주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친구들의 운과 실력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이런 건 나의 미(美)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그들을 목관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던 동해왕자군은 극구 부인했다. 모용휘가 보기에도 그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음, 그런데 말일세?”
“예? 뭡니까, 모용 선배님?”
의아한 표정으로 공손절휘가 반문했다.
“훗.”
공손절휘의 대답에 모용휘는 갑자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왜, 왜 웃으시는 겁니까? 뜬금없이?”
모용휘가 웃지 않아야 될 부분에서 웃자 공손절휘는 갑자기 당황했다.
“아니, 자네가 꼬박꼬박 모용 선배님’이라 부르니 신기해서.”
“아, 아니, 그건……”
화ᅳ악!
그 순간 공손절휘의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항상 적을 노려보듯, 그를 씹어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공손절휘가 동해도를 나온 이후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했다. 게다가 말투 또한 겉보기만 존대지 항상 날 이 서 있는 말투였는데 지금은 그런 날카로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를 향해 쭈뼛쭈뼛 세우고 있던 가시를 모두 제거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 그, 그야, 내가 누굴 선배님라 부르든 혀, 형님이라 부르든, 뭐, 뭐라 부르든 자, 자유 아닙니까?”
공손절휘는 급당황한 얼굴로 시뻘게진 채 언청이처럼 말을 더듬었다. 당황하는 것을 보니 공손절휘 자신도 그 사실에 대해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 다.
동해왕감자군과 모용휘의 싸움을 보고 느낀 게 있는지 어느새 꼬박꼬박 ‘모용 선배님’이라 칭하게 된 공손절였지만, 그걸 직접 지적당하자 갑자기 없던 쥐구멍 에라도 뚫고 들어가고플 정도로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이 쫓는 존재와 자신의 격차를 그만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은, 그런 어린애 같은 자존심 역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일단 그렇다고 해두세.”
그러나 모용휘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귀엽지만 철이 덜 든 동생을 보는 듯한, 그야말로 형의 미소였다.
“서, 선배님이라는 건 그냥 호칭일 뿐입니다. 당신을 제 형님으로 인정했다는 건 겨, 결코 아닙니다. 그, 그러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투 역시 훨씬 공손해져 있는 공손절휘였다. 이미 그는 입으로는 백번천번 아니라고 부정해도 마음으로부터 승복하고 있었다.
“형님이라 불러도 난 별 상관은 없네만?”
공손절휘는 엄청나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우우우우우우우우!
그때, 어디선가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소리의 근원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늑대 소리?”
모용휘와 공손절휘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이런 섬 한가운데서 웬?”
공손절휘의 의문은 매우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깊은 산속도 아니고 동정호 한가운데 떠 있는 섬에서 좀 전의 여자 늑대 떼 말고 다른 늑대 떼가 출몰할 리가 없었다.
아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
그러나 그의 생각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여러 차례 늑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용휘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면, 그것은 뭔가 이변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뭔가 불길하군. 가보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모용휘가 말했다.
“네, 선배님. 앞장서시죠.”
모용휘와 공손절휘는 급히 경공을 펼쳤다. 그들의 몸이 울음소리가 울린 곳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
또! 또!
검을 들고 달려가는 현운의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가 지나간 자리 위에 붉은 자취를 남긴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굶주린 늑대의 울음소리와 쩔그렁거리는 쇳소리.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강철 가시를 세우고 있는 늑대들이 현운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 기 위해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수는 족히 수십 마리에 달했다.
“이런 섬 한가운데 웬 늑대 무리람! 안 그래요, 현운?”
분하다는 듯 씨근거리는 남궁산산의 투덜거림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투덜거림이라도, 아니, 차라리 욕이라도 좋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한마디라도 들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지금 산산은 피투성이가 된 채 그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목관에 장치된 폭발로 인해 부상을 입은 후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피 역시 현운의 피가 아니라 남궁산산의 피였 다.
‘그때 좀 더 주의를 했더라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목관을 열었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위험해요, 현운! 이 바보!’
남궁산산의 외침, 그 뒤로 이어진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 온몸을 때리는 강력한 폭풍 속에 사방으로 비산(飛散)하는 파편, 그리고 바닥에 흥건히 흐르는 붉은 피. 목관의 함정을 눈치채고 남궁산산이 달려와 그의 몸을 감싸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산의 희생으로 살아난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그는 지금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반드시 산산을 살릴 거요,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렇게 큰 소리를 치고 달려나왔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파편만 뽑아내고 출혈 정도만 간신히 막은 응급처치, 그런 상태에서 등에 들쳐 업은 채 천으로 칭칭 묶어놓은 상태였다. 양손을 쓰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쾌적한 상태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처지로, 지금 남궁산산의 생명의 향(香)은 시시각각으로 그 뿌리를 향해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는 지금 이곳에서 고작 늑대 무리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다. 이 철갑늑대들이 두르고 있는 가시 철갑은 의외로 단단해서 단순한 검격으로는 치명상을 입힐 수 가 없었다. 산산을 업고 있어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었다. 저 철갑을 뚫고 늑대들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검기(劍氣)를, 완전 두 동강을 내려면 검강 정도는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운은 검강을 쓰는 것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다.
“물론 검강을 쓰면 이놈들을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은…….?
단전(丹田)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듯 내공을 끌어다 쓰면 반드시 그만큼 고갈되게 마련이었다. 특히 검강은 기의 소모 가 극심하다. 절제없이 검강을 써서 이 늑대들을 정리해 버리고 나면 그다음이 문제였다.
이 늑대들은 단순한 사냥개에 불과했다. 사냥감을 주인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오며 지치게 만드는 사냥개. 아니, ‘사냥랑’이라 불러야 더 정확할까?’
이 늑대들을 부 리는 자들이 현운의 진짜 적이었다.
게다가 야성의 감이 살아 있는지, 검기라도 쓰려 하면 늑대들은 잽싸게 몸을 뒤로 빼며 피했다.
“이놈들, 내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러나…….?”
“하압!”
현운의 기합 소리와 함께 눈부신 검기가 앞으로 내달렸다. 태청검법으로 앞길을 뚫은 그는 무당파의 신법인 제운종을 최대한으로 전개해 늑대들의 포위를 뚫고 달 려나갔다. 그동안 대사형 비류연에게 굴림 당하고 또 당하면서 쌓였던 끈질김이 지금 이 순간 발휘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쓰러졌다가는 대사형한테 무슨 욕을 들어 먹을지 몰랐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을 수야 없지.”
현운은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며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몸이 조금 더 빨라진 느낌이었다.
“좋아. 이대로면 저 늑대들을 따돌릴 수 있겠는걸!’
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신호인 듯, 쫓아오던 늑대들의 눈이 갑자기 새빨갛게 변하더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현운 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이런!”
갑작스런 늑대들의 움직임에 당황하면서도, 현운은 침착하게 검기를 일으켜 반격을 가했다.
촤아아아아아!
늑대의 몸에서 뜨거운 피가 분출되어 나왔다. 놀랍게도 철갑늑대는 아가리가 찢어지든 몸뚱이가 갈라지든 아랑곳하지 않고 이빨로 현운의 검을 물어뜯었다. 방금 전처럼 본능적인 위협에 몸을 사리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럴 수가!’
늑대들의 갑작스런 변화에 현운은 당황했다. 거대한 늑대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어 검을 물어뜯으니 움직임이 봉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입에 칼날을 문 늑대 는 칼이 목덜미까지 베고 들어가는 와중에도 검신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 멀뚱히 있다가는 결국 철갑늑대들에게 물어뜯길 판이었다.
‘할 수 없지!’
슈카카카칵!
현운은 힘을 끌어올려 철갑째로 늑대를 가르고 검의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늑대들은 그 한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흉포하게 현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마리는 어찌어찌 처리했지만 여러 마리가 단숨에 덤벼드니 아무리 현운이라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우웅!
현운의 검이 더욱 강력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내력 소모가 심하더라도 지금은 눈앞의 위기를 일소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였다.
태청검법(淸劍法) 비기
태청강기시
청천우
현운의 청송고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강의 빛이 강기의 화살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가며 철갑늑대들을 꿰뚫었다. 늑대들이 두르고 있던 단단한 철갑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늑대들의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헉헉헉! 끝났나?”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바라보며 현운이 중얼거렸다. 먼지가 걷히자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늑대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남해왕과의 싸움 이후 몸이 덜 회복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소모하다 보니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일단 가장 저돌적인 공세를 어찌어찌 피해낸 듯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성급한 생 각이었다.
캬오오오오오!
어느새 혼전 중에 뒤로 몰래 접근한 것으로 보이는 철갑늑대 한 마리가 현운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이빨이 금세라도 남궁산산을 잔인하게 물어뜯을 것처럼 번뜩였다.
“안 돼!”
현운은 서둘러 남궁산산을 뒤로 돌리고는 늑대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현운의 검이 철갑늑대의 몸통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또 한 마리의 늑대가 현운을 향해 도약했다. 무너지는 늑대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마지막 놈이었다.
이번에는 검을 빼낼 여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육장(肉掌) 하나로 상대하기에는 기력이 부족했다.
‘산산만은!’
현운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남궁산산을 자기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위로 철갑늑대의 잔인한 이빨이 내리찍혔다.
‘이제 끝인가!’
바로 그때였다.
“은하성성(銀河星星)!”
슈각!
허공을 가르며 백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한줄기 유성 같은 검기가 철갑늑대의 몸을 양분하고 지나갔다.
“괜찮으십니까, 현운 선배님?”
절체절명의 순간에 현운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휘 군! 자네가 어떻게 여길? 게다가 그 옷은 어찌 된 일인가?”
나타난 이는 바로 칠절신검 모용휘였다. 항상 즐겨 입던 먼저 하나 묻지 않은 백의 대신, 붉게 물든 장삼을 걸치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달려오자마자 현운이 막 철갑늑대한테 당하려는 것을 보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검기를 뿌렸던 것이다.
“저도 왔습니다, 선배님.”
헐레벌떡 모용휘의 꽁무니를 따라왔던 공손절휘가 나서며 한마디 했다.
“아, 그래, 고맙네. 에…… 공손 군.”
“절휘입니다, 공손.절.휘!”
이름을 잊은 게 분명했기에 발끈한 공손절의 외침이었지만, 이는 곧 모용휘가 놀라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헉! 이게 대체……!”
모용휘의 시선을 따라간 공손절휘 또한 마찬가지로 숨을 삼켜야 했다. 피로에 찌든 현운의 등에 업힌 남궁산산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다.
남궁산산의 얼굴은 보기에도 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푸르게 변해 있는 게, 마치 생명이 모두 빠져나간 밀랍 인형처럼 보였다. 현운의 어두운 얼굴에 자조 섞인 미 소가 어렸다.
“내 실수일세. 목관 안의 기관을 파악하지 못한 내 실수.”
시간이 없었기에 현운은 남해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짤막하게 얘기해 주었다.
***
“산산, 정신 차리시오, 산산!”
자신을 감싸려다 부상당한 산산을 끌어안고 현운이 외쳤다. 그러나 남궁산산의 눈꺼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붉고 뜨거운 액체만이 산산을 끌어안은 현 운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뿐이었다. 폭발의 폭풍을 그대로 맞은 탓에 산산의 등은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날카롭게 부서진 파편들이 날아와 박혀서 목불인 견의 참상이었다.
“산산, 산산!”
목청이 터져라 다시 불러보지만,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여자, 이제 살리기 힘들겠군.”
울부짖는 현운과 정신을 잃은 남궁산산을 번갈아 보더니 남해왕 전혼이 차갑게 말했다. 순간, 산산을 안은 채 몸을 일으킨 현운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와 전혼 의 미간을 겨누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남해왕의 전신을 꿰뚫었다.
“산산은 죽지 않소. 내가 반드시 구해내 보이겠소.”
이미 현운의 풍인참(風刃斬)에 오른팔이 너덜해질 정도로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상대가 될 수 없었으나, 전혼의 반응은 여전히 냉정했다.
“어떻게 말인가? 나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이제 그 여자의 목숨을 팔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돌려 말하긴 했지만 전혼에겐 남궁산산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반드시 살릴 거요. 죽고 싶지 않다면 의원이 있는 곳을 말하시오. 이곳 마천각에도 의원은 있을 것 아니오? 천무학관의 허주운 의원처럼 신의(神醫)나 명의(名醫) 라 불리는 인간이!”
현운은 무척이나 절박했다.
“신의나 명의는 없지만 ‘괴의(怪醫)’나 ‘사의(邪醫)’라면 있긴 있지.”
무공을 겨루는 일이 잦은 곳에선 아무래도 부상이나 상처 발생이 속출하게 마련이라, 마천각 역시 일반적인 병증 치료보다는 비상식적으로 ‘외과’ 수술이 발달되 어 있었다. 개중에는 무림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반 상식을 뒤엎는 의술을 지니고, 그 손으로 생명을 매만지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괴의’, 혹은 ‘사 의’라 불렸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인술이 아니라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적인 욕심을 위해, 돈을 위해 의술을 펼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들은 적이 있소. 그 손으로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놀며, 그 침으로 사람의 생사를 가른다는, 강호의 의료계에서는 추방당했지만 그 솜씨만은 천무학관의 신의(神 醫) 허주운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고 말이오. 이름이 분명 불락팔척인가 구척인가 했던 걸로 기억하오만, 그 사람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무엇이 우스운지 남해왕 전혼은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자네 제정신인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나? 감히 ‘생사무허가(生死無許可)’에게 생명을 구해달라고 하겠다니. 그 무시무시한 죽 음의 사번대 대장님께?”
설마 그 기이한 의원이 마천십삼대 사번대 대장일 줄은 몰랐지만, 현운은 의아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왜 저리 웃는단 말인가?
“뭐가 잘못됐소?”
현운이 쏘아붙이듯 물었다.
“잘못됐냐고? 암, 크게 잘못됐고말고. 뭐, 좋네. 진 빚도 있고 하니 이번만큼은 특별히 공짜로 가르쳐 주지. 사번대 대장 생사무허가 불락구척, 왜 그분이 생사무허 가라 불리는 줄 아나?”
“모르오.”
현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별호가 강호 의료계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나? 그렇다면 큰 착각일세. 염라대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그 침과 수술용 소도(小刀)로 사람의 생사 를 가른다 해서 붙여진 별호지. 우리 마천각의 무사들은 그분의 부대를 ‘사(死)’번대라 부른다네. 그곳은 그야말로 광의(狂醫)들의 집단이야. 이 마천각 사람들 중에 그곳에서 치료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언제 자기 몸에 칼이 대질지, 이상한 혈도에 침 하나가 찔릴지 모르니까 말이야.”
괜히 손가락 베인 상처 가지고도 염라전 구경 갈 수 있다는 말이 도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솜씨는 흑도 최고라 들었소.”
전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솜씨 하나는 최고지. 아무나 염라대왕의 허가도 안 받고 생사를 가르겠나?”
그건 전혼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실력 이전에 성격이 문제였다.
“산산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소.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오.”
그 말에 전혼은 피식 하고 웃었다.
“스스로 죽으러 간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지. 알려주지. 암, 알려주고말고. 죽음으로 가는 길에 노잣돈이나 남겨놓으라고 공짜로 알려주면 좋겠지만 타의 모범이 돼야 할 대장이 그럴 수는 없군. 얼마를 지불할 텐가?”
그러자 현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금은 이미 지불했소.”
“뭘로 말인가?”
“바로 당신 목숨이오!”
승부에서 이긴 시점에서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으니 당신은 나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뜻이었다. 전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이런! 무당파의 꽉 막힌 도사님도 조금은 거래를 할 줄 알게 되었군. 내가 졌네. 가르쳐 주지.”
거래는 철저한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혼은 조금의 숨기는 기색도 없이 사번대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이 마천각은 세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네. 가장 밖에 있는 벽이 자네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본 자색 대나무로 만든 자죽벽이고, 그다음은 돌을 쌓아 만든 마 천 외벽(外壁), 마지막이 마천 내벽(內壁)일세. 마천 내벽은 ‘마천루’를 둘러싼 최후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지. 사번대는 의료 시설이다 보니 비교적 깊숙한 곳, 마천 내벽 바로 바깥에 위치해 있네. 그러니 그곳으로 가려면 이 섬의 동쪽과 북쪽에 있는 마천 외벽의 출입문 중 하나를 통과하면 되지. 물론 가는 길이 쾌적하고 평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
이야기를 듣는 내내 현운의 안색은 어두웠으나, 그는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들어 전혼을 쳐다보았다.
“상세한 정보 고맙소.”
기대하지 않았던 감사 인사에 전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내 목숨 값에 비하면 싼 거지. 이것도 다 부상당한 여인을 데리고 그곳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야.”
“물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자, 그럼 가보게. 여기서 꾸물대고 있어봤자 될 일도 안 될 테니.”
그리고 전혼은, 지금은 비상사태니까 아마 외벽의 문지기가 강력한 자로 바뀌어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설혹 저승사자가 지키고 있다 해도 현운은 물
러날 생각이 없었다.
“기필코 도착할 것이오. 그리고…… 반드시 산산을 살릴 거요,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
“그럼 그 사번대 대장인 그…… 불락구척이란 자에게 데려가지 않으면 가망이 없단 말입니까?”
모용휘의 반문에 현운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곳에서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지금은 우선 거기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해도 빠듯했다.
모용휘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들이 길을 뚫겠습니다.”
눈앞에서 동문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은 이 바른 생활 청년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앞장서겠습니다, 선배님.”
모용휘를 따라 공손절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들이 도와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네.”
아직 새파란 애송이인 공손절휘는 그렇다 치고, 예전부터 천재의 손자는 천재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온 칠절신검 모용휘라면 이보다 더 듬직한 조력자는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쇄애애애애액!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네 사람이 모여 있는 장소를 그대로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대지에 길고 거대한 자상을 남기며, 그 초승달 의 검기는 대지를 가르다가 근처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사선으로 두 동강 낸 다음에야 겨우 질주를 멈추었다.
“누구냐?”
챙, 검을 뽑아 든 공손절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어느새 현운과 모용휘도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진공인(眞空刃)?”
모용휘가 방금 전 자신들을 위협했던 초승달이 남긴 자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공기를 부르르 진동시키는 창랑후가 세 사람의 고막을 세차게 울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지는 포효에 귀를 막아야 했다. 그때, 주위에 있던 한 건물 위에서 거대한 푸른 신형 하나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진공인을 알아보다니, 제법 보는 눈이 있군!”
낯선 목소리에 푸른 신형을 주시한 공손절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저, 저게 뭐야!”
왜 저딴 게 이런 곳에? 그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마리의 푸른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그러나 그냥 단순한 늑대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 푸른 늑대는 적어도 보통 늑대의 세 배는 되는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큰 놈이었다.
“소개하지. 내 젖먹이 친구인 ‘창랑아(蒼狼牙)’라고 하지. 인사들 해. 자네들을 지옥에 보내줄 친구니까 말이야.”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늑대 위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렸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늑대 창랑아의 털처럼 푸른빛을 띤 삼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양손에는 철갑 비 슷한 것을 끼고 있었는데, 각각 세 개의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거대한 칼날이 팔꿈치를 향해 접혀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찢어발기기 위한 거대한 발톱처럼.
그는 왼쪽 어깨에 늑대의 두상이 튀어나오도록 푸른 늑대 가죽을 통째로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묘하게도 위화감이 없어서, 마치 늑대 머리가 또 하나의 머리처 럼 보였다. 이상해 보이는 건 도리어 그의 손에 들린 낡고 두꺼운 책으로, 무공 비급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넌 누구냐!”
공손절휘가 외쳤다. 그 외침에 늑대 가죽을 걸치고 있던 사내는 약간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허, 이런! 요즘 꼬마들은 정말이지 버르장머리가 없군.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말해야지. 뭐, 하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봐주지. 오랜만에 손에 넣은 소중한 실험 재료니까 말이야.”
“실험? 저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현운이 중얼거렸지만, 일행 중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바로 마천십삼대 창랑대의 대장, 푸른 늑대 ‘창랑(蒼狼)’이다. 너희들을 지옥으로 보내줄 늑대들의 왕(王)이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염라대왕을 만나면 누 가 너희들을 그곳에 보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지, 창랑아야?”
크르르르르르.
거대한 푸른 늑대가 그르릉거리며 대답했다.
‘저자가 바로 이 늑대들의 대장…….?
이들은 마천각의 학생 출신이 아닌 진짜 대장급과 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같은 대장이라도 박력이 달랐다.
“아참, 자네들을 잡기 전에 한마디 해두고 싶은 말이 있네. 잘 들어주길 바라네.”
“그게 뭡니까?”
모용휘가 대표로 반문했다.
“뭐, 별건 아니고, 순순히 항복하지 마.”
“예?”
그게 대체 무슨 농담인가? 순순히 항복하지 말라니? 여기서는 ‘너희들은 포위됐다. 순순히 항복해!’라고 말하는 게 보통이었다.
“말 그대로야. 최대한 할 수 있는 저항을 모두 다 해주게. 오랜만에 굴러들어 온 실전 기회를 아깝게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지.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전을 부탁하겠네.”
쉽게 말해 항복은 받아들여 줄 수 없으니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다가 죽으라는 뜻이었다.
“자네들 진법(陣法) 좋아하나?”
거대한 늑대 ‘창랑아’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창랑이 뜬금없이 물었다. 압도적인 우위를 확신하는지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하고 여유가 넘쳤다.
“진법 말입니까?”
모용휘가 주위를 살피며 말을 받았다.
“그래, 진법 말이야. 설마 안 배우진 않았겠지?”
“좋아하는 편입니다.”
“호오? 점수가 몇 급이었나?”
“천(天) 급이었습니다.”
“휘이이이~ 그것참 대단하군.”
천무학관의 수업 과정 중에 진법은 다 대 일의 상황에서 어떻게 운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공부였기에 필수과목이었다. 그러나 천문, 지리, 음양오행, 육갑(六甲), 그 리고 무엇보다 머리가 지끈지끈한 산학(算學:수학)이 들어가 있어서 천관도들이 가장 기피하는 과목이었고, 가장 많은 낙제자를 배출해 내는 최악, 최강의 과목으 로 이름 높았다.
모두들 무공에는 재능이 있다 보니 ‘다인합격진법(多人合擊陣法)’처럼 함께 진을 이뤄 공격하는 등의 실기는 어찌어찌 통과한다 해도, 머리를 써서 진법을 파훼하 거나 미완성인 진법을 역산해 완성시키는 것엔 대부분 전멸을 면치 못했다. 천관도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장 많이 재강의를 듣는 과목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그런 과목에서 보란 듯이 최상위인 ‘천(天)’ 급을 받았으니 모용휘가 괜히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진법이랑 이 야성적인 사내랑 무슨 상관이란 말 인가?
“이래봬도 나도 진법을 아주 좋아한다네. 또한 진법을 잘 아는 학생을 난 좋아하지.”
이 머리 아픈 진법을 탐구하는 것은 주로 두뇌에 자신이 있다는 제갈세가나 사마세가의 후손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들 먹물깨나 먹은 학식있는 문사풍의 자들이 었다. 그러나 이자는……
그러자 창랑의 모용휘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씨익 하고 웃었다.
“왜? 나 같은 야만인은 진법같이 머리 아픈 건 좋아하면 안 되나?”
뜨끔, 모용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람을 겉보기만으로 판단한다고 인정하는 꼴이었던 것이다.
“진법은 심오해. 그리고 아름답지. 그 안에 자연의 법칙을 담고 있거든.”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괜히 천문, 지리, 수리가 그 안에 반영되는 게 아닌 것이다. 저자가 그런 진법의 오의에 대해 깨치고 있다니, 모용휘는 창랑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암, 아름답고말고. 다수의 조직이 힘을 합쳐 소수를 짓밟는 아주 아름다운 수법이지. 개인은 절대로 조직을 이길 수 없다는 소중한 약육강식의 교훈이 그 안엔 담 겨 있다네.”
모용휘는 하마터면 다리를 삐끗할 뻔했다. 아무래도 그와 창랑의 생각 사이에는 지대한 격차가 있는 듯했다.
“싫어도 알게 된단 말이지. 진법을 무시했다가 크게 당하고 나면 말이야. 그래서 난 결심했네. 반드시 그 진법을 깨주겠다고. 내가 만든 진법으로 말이지.”
그가 말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세는 더욱 삼엄해져 갔다.
“자네들, 이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진법이 뭐라 생각하나?”
“그거야 물론 소림의 백팔나한진…..”
그러다가 모용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창랑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당했던 진법이 바로 그 백팔나한진이지. 내가 깨부숴 버려야 할 진법도 바로 그 백팔나한진이고. 그래서 난 자네들에게 감사하고 있네. 이 따분한 마천 각까지 몸소 와주었으니 말이야. 자네들은 그걸 위한 희생물이 되어줘야겠네, 백팔나한진 파훼를 위한 산제물이.”
그제야 모용휘는 저 창랑의 정체, 숨겨진 과거를 눈치챌 수 있었다.
“당신은 바로…… 마랑객!”
씨익, 그 말에 긍정이라도 하듯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퍼져 나갔다.
딱!
그 순간 창랑이 손가락을 튕기더니, 입으로부터 기나긴 창랑후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울음에 화답하듯 사방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공진되듯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얘들아! 창랑멸아진을 발동하라!”
***
구 년 전, 거대한 푸른 털의 늑대와 함께 어느 날 갑자기 하남(河南)에 나타난 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악마 같은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자라고 해서 ‘마랑객(魔 狼客)’이라 불렀다. 그에게 붙은 또 다른 별칭은 ‘일야파일문(一夜破一門)’. 하룻밤에 한 문파씩 거꾸러뜨린다는 뜻이었다. 그는 일종의 문파 파괴범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던 그는, 오만하게도 소림사가 둥지를 틀고 있는 하남을 택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문파씩, 일주일간 일곱 문파를 봉문시켜 나갔다.
그가 막무가내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문파의 존망이 걸린 일인만큼 각 문파의 제자들이 결사적으로 덤볐기에 사상자는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너뜨린 일곱 문파는, 기이하게도 모두가 소림 출신의 속가제자들이 세웠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제야 강호 사람은 경악했다. 사실 마랑객의 목표 는 이런 조무래기 문파들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호의 태산북두로 이름 높은 소림사(少林寺)가 목표였던 것이다.
소림은 우선 십팔나한을 보냈다. 흉적 한 명을 잡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십팔나한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열여덟 명이 동시에 펼치는 십팔나한진. 소수의 인원으로도 신속하게 펼칠 수 있기에, 지금까지 소림을 받쳐 온 가 장 강력한 힘 중 하나였다. 나한(羅漢) 한 사람의 힘은 절정고수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열여덟 명의 나한이 모이면 절정고수 급 정도로는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 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선 최절정고수라면?
마랑객은 그 해답을 내놓았다.
“하하하하하하하! 소림 나한진도 별거 아니군. 열여덟 가지고는 턱도 없겠어. 가서 좀 더 많이 불러오는 게 어떨까, 응?”
삼십대가 될까 말까 한 방랑무사 한 사람에게 십팔나한진이 깨졌다는 소식에 소림은 물론이고 강호 전체가 술렁거렸다. 마랑객이란 이름은 단숨에 강호 전체로 퍼 져 나갔다. 이대로라면 소림의 명망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소림은 마침내 수십 년 만에 백팔나한진을 발동할 것을 허가했다. 그리고 하남 성의 한 평야에서 백팔나한진과 한 사람의 무사가 격돌했다.
소림의 진짜 힘,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정신적 지주라는 명패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바로 백팔나한진이었다. 제아무리 마랑객이라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몰아쳐 오는 백팔나한진의 공세를 견딜 수는 없었다. 그는 저항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승패가 완전히 갈리고 전의를 상실한 것 같자 소림승들은 그를 포박하려 했다. 그가 하남에서 저지른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진이 멈추었다.
그때 한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 포위망 바깥에 있던 늑대 창랑아가 진이 멈춤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고, 그 의외의 기습에 당황한 승려들 몇몇 때문 에 진법에 미세한 구멍이 발생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랑객은 간신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 길로 마랑객은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그 후 지금까지 그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마 그 마랑객이 마천각에서 흑도의 영재들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는 내 젖형제 덕분에 살았지. 그러나 내가 비참하게 졌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
그는 창랑아의 푸른 갈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때 이미 그는 꼬리를 말고 도망간 늑대, 아니, 개에 불과했다. 그 당시 입은 자존심의 상처는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깊은 흉터로 남아 있었다. 결 코 지워지지 않는 흉터. 백팔나한진을 스스로 파훼하기 전까지 이 욱신거리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난 생각했지. 왜 졌을까? 하고 생각한다는 건 나한테 그다지 익숙한 일이 아니었어. 하지만 하는 수밖에 없었지. 난 패배했으니까. 그 이유를 모 르면 계속 패배할 테니까.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지.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
창랑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런 건 덧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늑대가 가장 강할 때, 그것은 바로 ‘무리’를 이룬 때라는 것을.”
모용휘 일행은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창랑은 일행을 하나씩 훑어보며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들 그거 아나, 늑대의 무리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생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생물은 먹이를 잡아먹을 때까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지.”
철컹철컹!
양손에 접혀 있던 세 개의 칼날이 펼쳐졌다. 그것은 거대하고 날카로운 은빛 손톱처럼 보였다.
키이이이이이이잉!
양손의 은빛 칼날이 서로 마찰하며 푸른 불꽃을 튕긴다.
저것이 바로 과거 악명 높았던 마랑객의 독문무기였던 푸른 늑대의 이빨, ‘창랑은아조(蒼狼銀牙爪)’였다.
“푸른 늑대의 이빨을 본 자 중에 살아남은 자는 없지! 각오해라!”
“그건 하얀 늑대 아니었습니까?”
그 말은 과거 명성이 자자했던 전설적인 고수 ‘하얀 늑대’가 즐겨 쓰던 말이었던 것이다.
“시끄럽다! 이제 하양의 시대는 갔어. 시대는 파랑이야!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무리를 선도하는 우두머리 늑대 같은 울음소리가 창랑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늑대들아!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다!”
어느새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늑대들이 낭아조(狼爪)를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개진(開陣)!”
마침내 창랑대 오십사 명에 의한 창랑멸아진이 발동된 것이다.
슈칵! 슈칵! 슈칵!
날카로운 낭아조들이 모용휘 일행에게 회오리처럼 몰아쳐 들어왔다. 이들은 광포한 늑대들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리곤 곧바로 다른 대 원들이 그 자리를 교대해 공격해 들어왔다. 끈질길 정도로 연속적인 공격에 일행은 막는 데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큰 기술을 쓸 틈이 전혀 없었다. 조금만 더 운 신의 폭을 넓히려 하면 그 순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하군요.”
한참을 창랑대 인간늑대들의 파상공세에 시달린 모용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가 말인가?”
“좀 전부터 계속 ‘생문(生門)’을 찾았습니다만…… 어디에서도 그런 걸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럴 수가! 그렇게까지 오묘하고 심오한 진법이란 말인가? 저 진법이?”
생문이라는 것은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진을 움직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워둬야 하는 공간을 말한다. 때문에 뛰어난 진법일수록 생문의 위치를 수시로 바꾸어 쉽게 찾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악하는 현운의 말에 모용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진법에는 어떤 법칙도 없습니다. 천문, 지리, 음양오행, 수리, 어느 것에도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즉…… 무대포 진법?!”
경악했던 현운이 눈을 부릅뜨며 반문했다.
“네, 그런 거죠.”
한마디로 지극히 무식한 진법이란 뜻이었다. 아까부터 정신이 없던 공손절휘는 한층 더 어이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저 사람, 아까는 진법 공부 엄청 열심히 한 것처럼 말하더니……. 들고 있는 두꺼운 책도 그럼 진법에 관한 게 아닌 겁니까?”
“글쎄. 최소한 들고 있는 책의 무게가 그 사람의 지력을 나타낼 수는 없지.”
모용휘는 사람은 겉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구나’ 하고 한순간이라도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공손절휘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그럼 뚫고 나가기도 쉽겠군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모용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그런가?”
자랑은 아니지만 현운도 진법의 이해’는 점수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임에도 모용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지금 그의 제일순위는 산 산의 안위였고, 그걸 위해서라면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법칙이 없다는 것은, 규칙을 깬다고 해도 이 진법이 무너지진 않는다는 뜻이죠. 깨야 할 규칙조차 없다는 게 바로 문제입니다.”
현운은 모용휘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들었다.
“자네 말은 그러니까…… 무식한 진법을 깨려면 우리도 무식한 방법을 써야만 한다는 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선배님. 힘으로 깰 수밖에 없습니다.”
속았다!
창랑은 자신이 무슨 진법의 대가라도 된 듯 말했지만, 이 창랑멸아진은 그저 떼거리 공격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떼거리로 소수를 치다 보면, 실 제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기에 자연히 손과 발이 얽히게 마련이다. 다인합격술에 진법을 적용시키는 것도 그런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떻게! 오십사 명이나 되는 인원이 동시에 움직이는데도 서로 얽히지 않다니…….?”
계속되는 파상 공세를 막아내면서 모용휘는 신음했다. 규칙이 없다면 혼란이 찾아와야 당연한 일. 그런데도 이 일사불란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크하하하하하하! 궁금한가? 궁금한 모양이군. 좋아, 그렇다면 가르쳐 주지.”
진법을 주관하고 있던 창랑이 홍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만든 진법을 자랑하고 싶은 듯했다.
“이것이 바로 조직의 힘이다. 늑대의 무리는 그것으로 하나의 생명체! 개인이라는 것은 조직을 위한 단순한 구성물에 불과해. 정신이 일치된 조직만이 지금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자, 물어뜯어라! 물어뜯어! 계속해서 물어뜯어라! 늑대 무리의 강함을 보여줘라!”
창랑이 흥에 겨워 외칠 때마다 공세는 점점 더 거세졌다. 그가 단언한 대로 창랑대는 마치 거대한 한 마리의 늑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 늑대는 자신들이 지치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악한 아가리의 송곳니를 번뜩이며. 그러나 현운은 알고 있었다. 만일 여기 대사형이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지를
“당신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저희 대사형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뭐라고 말이냐?”
“쓰레기는 모아봤자 쓰레기 더미밖에 더 되겠어?”라고.”
그 말에 모용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무리를 이룰 필요가 있다는 건 뭐 인정해. 혼자 살 수는 없잖아? 귀찮기도 하고. 하지만 다수의 멍청함에 내 정신까지 오염되고 싶지는 않아. 인간은 멍청한 놈이 끼어 있는 집단에 속하게 되면 똑 같이 멍청해지는 습성이 있거든. 대다수가 돌빡처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지. 평생 꼭두각시 춤밖에 출 줄 모르는 껍데기가 되어버리는 거라고.”
비류연은 주위의 멍청함을 참는 것은 정신건강에 심히 안 좋다고 믿는 부류였다. 그리고 그의 사제들이 그 속에 섞여 같이 꼭두각시 춤을 추는 것을 보느니, 차라 리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는 쪽을 택할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창랑의 기분을 심히 상하게 했던 모양이다.
현운의 말에, 지금까지 여유로웠던 창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흐흐흐, 그럼 그 단합된 쓰레기들의 힘을 보여주지. 조직의 무서움을.”
점점 지쳐가는 세 사람을 지켜보는 창랑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자, 몰이도 슬슬 끝났겠다, 얘들아! 두 번째 이빨을 꺼내들어라!”
인간늑대들이 자신의 왼손에 차고 있던 낭아조를 일제히 뽑아 들었다.
촤라라라락!
그러자 기다란 쇠사슬이 딸려 나왔다.
붕붕붕붕!
쇠사슬을 빙글빙글 돌리자 바람을 헤집는 소리와 함께 낭아조가 회전했다.
창랑멸아진蒼狼滅牙陳)
제이파(第二波)
낭아잔쇄(狼殘碎)
매섭게 회전하던 낭아조가 일제히 현운들을 향해 쏟아졌다. 하늘에서 쇠그물이 떨어져 내려 일제히 그들을 덮치는 기분이었다. 현운과 모용휘, 공손절휘는 날아오
는 쇠사슬을 향해 검을 휘둘러 쳐냈으나, 쇠사슬은 뱀처럼 검을 휘감으며 공격해 들어왔다.
세 사람은 급히 검을 거두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창랑대도 낭아조를 회수하나 싶더니, 채 회수되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교대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운은 초조해졌다. 안 그래도 불리한데 쇠사슬 때문에 공격 간합도 훨씬 넓어져서, 이대로는 지쳐서 제풀에 쓰러지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산산도 구할 수 없게 된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이보게, 휘 군.”
“예, 선배님.”
“내가 자네가 움직일 공간을 만들겠네. 그 틈에 반격하게. 내공이 고갈되기 전에 반격의 실마리를 잡아야 하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선배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지금 두 사람이 분담하고 있는 적의 공격을 단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혼자가 아닙니다.”
“아참, 자네가 있었지. 미안하군.”
그러고 보니 공손절휘도 같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둘 다 걱정 붙들어 매게. 괜히 삼 년 동안 알까기 당해가며 시달린 게 아니니까 말이야.”
“알까기?”
되묻는 모용휘의 질문을 끊으며 현운이 전음으로 말했다.
“할 건가, 말 건가?”
“물론 하겠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산산의 목숨이 위험했다. 모험을 하더라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오는군. 준비하게.”
현운은 검세를 방어세에서 공격세로 전환했다. 그리고는 기를 끌어모았다.
“기회는 단 한 번!’
모용휘는 생각했다. 완전히 포위된 상태라 자잘한 기술로는 활로를 뚫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은하류 개벽검 오의 정도는 되지 않으면….. 하지만 그 기술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비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직 완전히 그의 것으로 삼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지.’
모용휘는 서둘러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라락!
다시 한 번 사방에서 사슬 달린 낭아조가 일제히 모용휘를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들었다.
“그렇겐 안 되지!”
현운이 모용휘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으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르르르륵!
현운의 검이 다중의 원을 그리며 사방에서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벽을 쌓았다. 그러자 도약해 오던 낭아조가 비틀리며 타점이 빗겨 나가기 시작했다. “어어어?”
창랑대의 공격조는 상대와 아무런 접촉이 없는데도 낭아조가 빗나가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무당(武) 태극혜검(太極慧劍)
팔성(오의奧義)
풍우만곡(風雨彎曲)
풍인벽(風刃壁)
즈즈즈즈즈즈즈즈.
무당 극의인 태극혜검의 오의가 현운의 몸에서 발휘되자, 네 사람을 향해 날아오던 공격이 사방으로 휘어졌다. 현운의 검끝에서 보이지 않게 소용돌이치는 검경을 타고 빗겨나간 것이다. 십수 명을 향해 동시에 절정의 화경을 펼치는 듯했다.
이는 남해왕 전혼과의 싸움에서 강기전 수십 개의 궤도를 한순간에 비틀어 버린 것과 비슷한 방법이었다. 전혼에게 썼던 풍인참이 방어력을 공격으로 전환시켜 적 을 치는 기술이라면, 풍인벽은 방어를 더욱더 강력하게 굳히는 기술이었다. 더욱 강해지면 이화접목의 묘리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현운은 이 제 막 이 오의를 깨우친 터라 거기까지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초식은 방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묘용을 가지고 있었다.
“호오, 재미있는 수법을 쓰는군. 무당파에 그런 초식이 있었나?”
창랑은 현운의 초식에 살짝 호기심이 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백열하는 검강이 모용휘의 검끝에 집속하더니 ‘우우우웅!’ 날카 로운 검명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은하류銀河流) 개벽검(開闢劍)
오의(
은하성진(銀河星振)
모용휘의 검끝에서 무수한 별빛이 부채꼴 모양으로 쏘아져 나갔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진에 구멍이 뚫렸다.
“됐다! 저쪽에 길이 뚫렸습니다!”
공손절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느새 주변에서 날아든 창랑대원에 의해 뚫려 있던 구멍이 메워졌다. 마치 하나의 괴생물처럼 자신의 상처를 동 시에 수복하는 모습이었다.
“창랑멸아진의 제이파를 막아냈군. 축하하네. 설마 구멍까지 뚫을 줄이야… 하지만 그 정도 역량으론 이 진법을 뚫을 수 없다네. 일개 개인의 힘만으로 뻥 뚫릴 만 큼 허약한 진법이 아니란 말이지. 아직은 좀 더 어울려 줘야겠어. 그래야 진법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할 것 아닌가?”
“좀 더 분발하라 이 말씀입니까?”
“맞아, 바로 그거지. 지금까지는 단순히 ‘힘빼기’의 단계에 불과했거든. 자, 얘들아! 지금부터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한다! 늑대의 어금니를 사냥감의 목줄에 박아 넣자!”
아우우우우우우우!
사방에서 일제히 늑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찰캉, 쇳소리와 함께 인간늑대들이 끼고 있는 낭조가 더욱 길어졌다.
“자, 어금니를 꽉 깨물게나, 제군들! 자네들의 육신이 토막 나지 않도록.”
그렇게 말하고는 신호를 외쳤다.
“창랑멸아진 제삼파! 진공의 진을 펼쳐라!”
창랑의 외침과 동시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사방의 낭아조가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창랑멸아진 제삼파
아랑파멸진狼破滅陳)
전개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늑대의 어금니가 공기를 찢어발겼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초승달 모양의 세날 검풍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촤아아아아아악!
세날 검풍에 닿은 나무와 풀과 대지가 그대로 찢겨져 나갔다. 모용휘는 사방에서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검풍의 무리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 설마! 진공인(眞空刃)?!”
진공인이란, 바람을 벨 정도로 쾌속하게 검을 휘둘러 허공중에 진공의 칼날을 만드는 것. 주로 원거리의 적을 베는 기술이었다. 보통은 칼날 하나에 초승달 모양으 로 진공인 하나가 생기는 게 상식인데, 이들의 낭아조는 한 손에 세 개의 칼날이 달려 있으니 한 번에 도합 여섯 개의 진공인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붙은 이름이 바로,
육섬
그것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여덟 명에 의해 사십팔 개의 진공 칼날로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창랑대는 포위망을 넓히며 진공인을 사방에서 쏘아댔다. 적에게 접근하지 않은 채 멀리서도 몰아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진법의 무서운 점이었다.
“하압!”
모용휘는 백광이 번뜩이는 검을 휘두르며 날아오는 진공의 칼날을 상쇄시켰다. 단순한 칼질로는 진공인을 막아낼 수 없었다. 칼날을 그대로 관통해 버리기 때문이 다. 같은 진공인만이 진공인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은하유성검법(銀河流星劍法)
유성검풍인流星劍風刃)
저들은 각자 여섯 개의 칼날로 진공인을 만들어냈지만, 모용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수십 번 휘둘러 날아오는 진공인을 차례차례 상쇄해 나갔다.
“과연 대단하군. 죽이기 아까울 정도야. 하지만 지금 숫자의 배가 되어도 막을 수 있을까?”
쉴 틈도 없이 이번에는 구십육 개의 진공 칼날이 사방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산이 위험해!’
현운이 속으로 외쳤다.
이 진공 칼날의 폭풍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 그들의 육신은 갈가리 찢겨 나가리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자신보다 산산의 안전을 더 먼저 떠올 린 현운은 볼 것도 없이 일갈하며 검을 휘둘렀다.
“어림없다!”
태극혜검(太極慧팔성(成)오의(奧義)
풍우만곡(風雨彎曲)
바람과 비를 휘게 만드는 이 힘이라면!
현운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화경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범위는 지금까지 펼쳤던 규모 중 최대였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속력.
“선배님, 저도 돕겠습니다!”
공손절휘가 현운의 옆구리에 장심을 가져다 댔다. 현운의 고갈된 내공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공손세가의 부흥을 위해 온갖 영약을 먹은 데다 가문의 원로들로부 터 내공의 일부까지 전수받은 터라 그의 내공은 생각 이상으로 출중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받았던 혜택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좋아, 해보세!”
주위의 풍우를 휘게 하는 힘이 가장 격렬해지면 어떻게 될까?
태극의 힘은 곧 원, 원은 회전.
원과 회전의 힘을 깨우치지 않은 자는 태극혜검의 이름을 들을 자격조차 없었다.
태극혜검(太極慧劍 팔성(八成) 오의(奧義)
풍우만곡(風雨彎曲)
제삼의(第三意)
질풍회회(風廻廻)
현운의 의지의 힘이 공기를 비틀고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 축은 그의 검.
처음엔 미미한 회전이었다. 하지만 회전하면 할수록 그 회전력은 더욱 강해지고 빨라졌다. 종국에 가서는 사방을 뒤덮는 돌풍이 되었다.
그 거대한 경력에 휘말린 창랑대가 당황한 순간, 진은 흐트러졌다. 불안정한 대기에선 진공인을 제대로 펼치기 힘들었다.
한순간 ‘육섬’이 멎었다.
그 순간을 모용휘는 놓치지 않았다. 현운이 오의를 펼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지금이다!”
흙먼지가 거둬진 그곳에선, 어느새 모용휘의 왼손 검결지 끝에 맺혀 응축된 검은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검은 그 구체를 꿰뚫을 듯 뒤로 향해 있었 다.
현운은 삼성무제 때의 결승전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무당의 천재라 불리는 청흔과 동수를 이루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은하류(銀河流) 개벽검(開闢劍) 오의(奧義)
은하멸멸(銀河滅滅)
유성우) 산막(傘幕)
모용휘는 검은 구체를 하늘 쪽으로 향하더니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천원을 돌파하여 검은 구체에 백열하는 검신을 찔러 넣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검강의 단편들이 원을 그리고 전방위로 쏟아져 내렸다. 오직 그들이 머물고 있는 주위만 우산을 씌운 듯 멀쩡했다. 그리고 그 우산을 벗어난 곳에 있는 늑대들에게 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좀 전에 뚫린 구멍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구멍이 뚫리며 창랑멸아진이 붕괴됐다.
“지금입니다, 선배님!”
진이 붕괴되자 활로가 뚫렸다. 산산을 업은 현운과 공손절휘는 재빨리 진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번쩍!
세 줄기의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세 사람을 엄습해 왔다. 지금까지 대원들이 펼쳤던 진공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 일격에 세 갈 래의 상처가 새겨진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이것은…… 단순한 진공인이 아니군요.”
발이 묶인 모용휘는 대지를 할퀴고 간 강격(强擊)에 전율했다.
“그래, 검강, 아니, 조강이라 해야 옳겠군.”
현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 위력을 지닌 조강을 한 번에 세 가닥이나 동시에 뿜어내다니,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역시 백팔 나한진을 단신으로 상대하고도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단한 실력이었어. 늑대는 강한 자를 인정하지. 하지만 지금처럼 힘을 소모해 버린 상태에서 자네들이 나 창랑을 이길 수 있을까?”
그의 양손에는 여섯 개의 늑대 이빨 ‘창랑은아조가 흉흉한 푸른 섬광을 내뿜고 있었다.
드디어 늑대들의 우두머리, 마랑객 창랑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