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5화 – 봉황을 묶은 금제(禁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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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5화 – 봉황을 묶은 금제(禁制)

봉황을 묶은 금제(禁制)

—나예린, 직시(直視)하다

비류연과 그의 동료들이 싸우고 있을 때, 나예린도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날개를 묶고 있는 금제를 깨뜨리기 위해, 자기 몸 안에 박힌 말뚝을 뽑아내고 자유를 손에 넣기 위해 그녀 역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 나예린은 고요의 세계에 홀로 존재해 있었다. 그 세계에는 빛도 소리도 감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전한 몰아(沒我)의 경지.

모든 것을 잊고 고요의 세계, 정(靜)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 세계는 수십 년은 고려한 고수라 할지라도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지 금 세계와 접촉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 그것은 세계 그 자체였다. 혹은 도(道)라고 불리기도 하고 혹자는 그것을 신(神)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대근원이라고 부르기도 하 고 세상의 받치는 두 개의 기둥, 태극(太極)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 따윈 그것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세계와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나예 린이라는 존재는 점점 더 옅어졌다.

인간의 영혼을 촛불이라 한다면, ‘그것’은 중천(中天)에 타오르는 태양(太陽)과도 같았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간 영혼은 밀랍처럼 녹아내리고 만다. 그것 앞에 자 기 자신이란 것은 의미가 없기에. 그것은 하나, 모두이자 하나, 하나이자 모두, 그 앞에서 분별이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 몸을 던지는 것은, 즉 나예 린이라는 존재, 아니, 개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즉, 비류연과의 관계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왜냐하면 나예린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다는 것은, 그녀가 지니고 있던 인연 역시 끊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인연, 그리고 인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이었다.

용안(龍)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방해 자신의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던 나예린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영혼이 거대한 무언가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더 이상 끌려 들어가다가는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잊은 몰아의 상태에서 하나씩 하나씩 자신을, 나예린이라는 존재를 되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뼈가 생겨나고, 근육이 생겨나고, 그 위를 피부가 덮는다. 가느다란 팔과 쭉뻗은 긴 다리, 물이 흐르는 듯 매끄럽고 유연한 허리와 봉긋한 가슴, 그리고 기다린 머리 카락과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붉은 입술, 오뚝한 코,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 아름다운 처녀이다.

“아름답다. 이 여인은 누구지?”

그리고 떠올렸다.

“아, 이 여인은 나지?”

그리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내가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이었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는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내왔어야 했다.

그런데 아름답다고 생각하다니, 부럽다고 생각하다니?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한 걸음 떨어진 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미묘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부정해 왔던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잊었던 사람이 기억났다.

‘류연.

그가 지금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데 어떤 의문도 그녀는 품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이름은 나예린……. 검각의 주인인 검후의 제자이자 무림맹주 나백천의 딸, 그리고 한 사람의…….?

마침내 잊었던 이름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녀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사지백해로 퍼져 나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는 물론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그녀의 의지로 가득 차올랐다.

이윽고 그녀의 몸 전체가 완전한 제어하에 들어왔다.

먼지 하나에서부터 자신을 재구성한 나예린은 알 수 있었다.

그냥 알게 되었다.

자신의 몸 안 곳곳에 박혀 있는 이질적인 서른여섯 개의 이물질의 존재를.

육육쇄봉익금침폐맥대법(六六鎖鳳翼金針閉脈大法)!

또 다른 별칭은 쇄봉금인(鎖鳳禁印)!

머리카락보다 가는 서른여섯 개의 금침을 육체 깊숙이 박아 넣어 기의 흐름을 완전히 봉쇄하는 대법으로, 한 번 시술되면 두 번 다시 풀 수 없다는 궁극의 금제 수 법.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녀의 날개에 박힌 보이지 않는 말뚝의 이름.

그것들은 애초에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데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기에. 아무리 그 금침들이 작고 몸속에 들어가면 감쪽같다 해도 이제는 찾아낼 수 있었다. 아무리 그것들이 작다 해도 먼지 한 톨[塵] 보다 작지는 않을 터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진다는 홀황의 경지.

비류연과의 옛날 어떤 일 때문에 한 번 들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우주 전체의 일 할은커녕 억분의 일 할조차 되지 못하는 이 세계를 받치는 구십구 할 구구구구 구구구……리의 뒷받침이 있다는 것을. 그 거대한 세계에 비하며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금침은 태산보다도

더 거대한 것이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금침이 말뚝처럼 지금 그녀의 요혈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 수는 정확히 서른여섯.

하나만 박혔더라면 별문제가 없을 그 금침들은 서로서로 연동하여 거대한 주박을 만들어낸다. 그 저주스러운 주박이 그녀의 내공을 흐트러뜨리고, 그녀의 육체를 속박하고 있었다.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을 속박하는 주박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겨우 발견한 그것들을 어떻게 빼내는가 하는 것.

이제 겨우 보이게 되었지만, 아직 그것들은 손이 닿지 않은 그녀의 살 속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었다.

지금 해야 해. 당장!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기다리다가는 오히려 기력만 무의미하게 더 소모할 뿐이었다.

일단 볼 수만 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되는 법이었다.

그의 손은 그 금침에 닿기에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충분히 금침에 닿아 있었다.

지금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완전 제어 상태였다.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충만감.

그녀는 바로 금침의 주위에 있는 근육들에 명령을 내린다.

처음에는 왼쪽 팔목에 박혀 있는 금침부터 시작했다.

의지를 움직이자 즉각 그녀의 몸이 움직인다. 근육들이 금침을 움켜잡고, 조금씩 조금씩 그것들을 위로 밀어 올린다. 서서히 서서히 위로 올라온 금침이 마침내 그 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툭 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우선 하나!’

자신감을 얻은 나예린은 자신의 의지를 전신으로 보낸다.

자신의 몸 안에 박혀 있는 나머지 서른다섯 개의 금침을 빼내라고.

그녀의 의지에 따라 그녀의 몸 곳곳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 안에 박혀 있는 이물질을 몰아내듯, 박혀 있는 금침 서른다섯 개를 동시에 밀어낸다. 그러자 곧 금침들이 그녀의 몸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녀의 몸과 그 녀의 의지가 그것들을 거부하고 구축(驅逐)하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뽑혀 나오는 모양새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침을 잡아 뽑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서른세 개의 금침이 뽑혀 나왔다.

남은 것은 두 개.

하나는 머리 꼭대기의 백회혈, 나머지 하나는 바로 단전에 박혀 있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미쳐 버리거나 폐인이 될 수 있는 최중요 혈(穴)이다.

그러나 나예린은 망설이지 않는다.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다. 두려움도 품지 않는다.

완전한 자신감을 가지고 그녀는 명령한다.

—내 몸에서 썩 꺼져라!

라고.

그녀의 명령을 들을 두 개의 금침이 그녀의 몸 밖으로 천천히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한다. 끝까지 저항을 거듭하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거나 흐트러뜨리는 것은 불 가능했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마침내 그녀의 몸에서 양 날개를 구속하고 있는 가장 중심에 있던 말뚝이 뽑혀져 나왔다. 엄청난 의지력과 기력을 동시에 소모한 탓인지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흥건 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피로보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봉황은 하늘로 비상(飛翔)하기 위한 두 날개를 되찾았던 것이다.

***

“음…… 여기가 어디야?”

창고(倉庫)라고 적혀 있는 현판을 올려다보며 은발의 남자는 중얼거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해를 못해 미칠 지경인 쪽은 이 은발 남자가 아니라 그의 부관인 장소옥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장소옥이 말했다.

“어디긴 어딥니까, 일번대 식량 창고죠. 현판 옆에 달려 있는 표식을 보니 간부급만 이용하는 특별 식량 창고인 모양입니다.”

“어, 우린 왜 없지? 우린 창고가 하나뿐이잖아? 차별이네.”

저쪽이 더 좋은 걸 먹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울컥한 모양이었다. 어떤 일에도 꿈쩍하지 않고 항상 지나친 평정을 유지할 것 같은 무명이었으나, 먹을 것에는 그런 그도 집착하는 모양이었다.

“그거야 일번대에는 총대장님이 계시잖아요.”

…..이런 부당한 차별은 참을 수 없지. 우리도 나중에 하나 달라 그래야겠어.”

역시나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지금 식량 창고가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대장님,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아!”

그제야 장소옥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심정으로 하늘을 한 번 바라보며 뻐근해진 뒷목을 주물렀다.

“대장님, 또 길을 잃으신 거예요?”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뭐야? 그 길치를 보는 듯한 눈은? 미리 말해두지만, 난 절대 길치가 아니야. 오해하면 곤란하지. 부대장이라면 좀 더 대장을 믿어야 하는 법.”

“그 말 딱 백 번째인 것 같네요, 대장님.”

저 말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으나 무명은 극구 부인했다. 그것은 자신의 인격과 지성을 모독하는 우주적인 모함이라도 된다는 듯이.

“어허, 난 길치가 아니라니까? 다만 가끔 갑자기 기억이 잘 안 나서 길을 잃어버릴 뿐이라고.”

세상에는 하는 편보다 안 하는 편이 더 나은 변명들이 산처럼 많았다. 무명의 변명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건 치매라는 얘기잖습니까, 대장님. 더 나빠요. 다른 부대 사람들이 대장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어라, 잊어버렸네.”

장소옥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소리쳤다.

“치매대장이라고 부른다고요, 치매대장!”

“거참, 깜빡깜빡 이런저런 사실들을 잊어버린다고 치매라니, 너무하는군, 다들.”

하지만 자기 방에서 자기 검을 어디에다 두었는지도 모른다면 치매대장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장소옥 역시 거의 절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 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소옥이 먼저 앞장서는 거야. 그리고 내가 따라가면 되지. 어때?”

그건 소옥이 원하던 바였다. 더 이상 이 일대를 빙글빙글 도는 것은 사양이었다. 같은 길 또 가고 또 가는 것도 사양이었다.

“근데 어디로 가면 되죠, 대장님?”

“그거야 당연히 침입자가 있는 데로 가야지. 아까도 얘기했잖아?”

마치 건망증이 심한 것은 소옥 너라는 듯한 말에 기가 막혀 하는 장소옥에게, 무명은 하지 않아도 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나 목말라. 소옥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우선 물 좀 떠다 주라. ‘특별 식량’ 같은 건 안 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

‘해, 해볼까…….?

하지만 급속도로 의지가 약해진다.

좀 전까지 그렇게 확고하고 명확하던 의지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약해진다.

‘그런 걸 해도 정말 괜찮을까?”

역시 그런 걸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예린은 고민했다.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감옥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을 직시하게 된 지금의 나예린은 명확히 확신하고 있었다.

이거라면 분명 통할 거라고. 아니,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예전에 언제던가, 비류연과 얘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만일 나예린 자신이 큰 위험에 빠지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웃어요. 그럼 돼요.”

그 질문이 너무 쉽다는 듯,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예린이 웃으면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릴 거거든요. 그 빈틈을 타서 상대에게 역전의 한 방을 먹이면 돼요. 지금도 그렇지만 예린은 거의 웃지 않잖아요? 그런 만큼 예린의 미소는 더욱더 희소성이 있거든요. 해보면 알아요, 그때가 돼서. 뭐, 예린의 미소를 남한테 보여주는 게 정말 아깝긴 하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역시 망설이게 된다.

솔직히 말해 부끄럽다. 어디론가 숨어버릴 정도로 부끄럽다.

“안 하면 안 될까?”

자신이 그런 걸 한다는 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미(美)를 무기로 삼다니…….’

그동안 자신에게 대부분 안 좋은 일만 가져왔던 이 미를.

그녀가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삼겠다고 생각한 일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놀라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예린 본인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제어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거부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혹은 강박관념 때문에라도, 혹은 과거에 입었던 정신적 상처 때문에라도 그 일 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선택의 폭 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억제하고 있던 용안을 개방해 자신을 직시하게 된 나예린은 상당히 객관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지금까지는 자신에 불행만을 가져왔던 그것, 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는 위치에 놓였다. 한 발짝 떨어져 있기에 오히려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싫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예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이곳에서 그 악적이 오길 두려워하며 기다리고 싶냐고. 과거의 공포에 벌벌 떨며,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부여잡고 그저 흐느끼 고 싶으냐고.

‘그럴 수는 없잖아, 예린?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이 감옥 안에 갇혀서 그 괴물이 자신을 범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더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비류연을 위해서도, 또 아버지를 위해서도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수단을 쓰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 사실을 예전보다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로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되도록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른바 비상 상황. 찬밥 더운밥 가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가 과거로부터 한 발짝 더 멀어졌다는 뜻이기에.

자각을 통해 그녀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봉인한 채 절대로 쓰지 않았던 무기를.

바로 ‘미(美)’라 불리는 무기를.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움츠러들 수는 없었다. 내일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준 남자가 지금 밖에서 싸우고 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누구에게 듣지 않았어도 나예린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기뻤다. 용기가 솟 았다.

“나도 싸우겠어요, 류연. 나의 자유를 찾기 위해. 내 스스로의 힘으로.’

그러기 위해서라면 부끄러움도 무릅쓸 수 있었다. 부끄러움도. 아마도…….

항상 단정하고 백옥처럼 하얀 나예린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자신의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그리고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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