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는 자
—그리고 막는 자
“어때? 내 말이 맞지? 맞지?”
‘칭찬해줘, 칭찬해 줘!’, 하는 어조로 노학이 연신 물어댔다.
“아아, 확실히 그렇군.”
확실히 노학이 알아온 길은 다른 곳보다 훨씬 적들의 감시가 약했다. 그런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남궁상에게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 그렇지?”
“아아, 그래.”
점점 더 남궁상의 대답은 건성이 되어갔다.
“그지? 그지?”
“잘했네, 노학. 역시 자네의 솜씨는 확실하군.”
그러자 노학은 오른손으로 엄지를 치켜올리며 활짝 웃었다.
“이 정도야 기본이지, 기본!”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생색을 내는 것 같지만, 그런 부분을 지적하면 큰일 난다는 것쯤은 남궁상도 알고 있었다. 노학 덕분에 일행은 비교적 쉽 사리 항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몇몇 마천각의 무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정찰병 같은 것이었기에 몇 수 만에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남궁상이 뭐라고 지시를 내릴 틈도 없이 동료들은 스스로 알아서 움직였다. 그가 무슨 지시를 내릴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여기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주작단원들이 함께한 지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그동안 대사형의 살인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주작단은 한 명의 결원이나 오점도 없이 성장 해 갔다. 이제 주작단은 그들에게 있어 단순한 동급생이나 동료를 넘어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인연은 가족조차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 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은 확실히 강해져 있었다.
“이대로면 무리 없겠어!’
남궁상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더 나아가, 이대로 가면 주작단은 분명 천무학관 최고의 정예가 되리라고 남궁상은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 열여섯 명은 최고가 된다!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우리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대사형의 지옥훈련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뿐이다. 확실히 그들이 보아온 지옥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을 인정하는 게 왠지 분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이 틀리고, 대사형 비류연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그들이 보아왔던, 그리고 당해왔던 지옥은 지금 이 ‘지독한 현실(現實)’을 뚫고 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현실을 뚫고 나가기 위해 지옥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얄궂은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항구가 점차 가까워오고 있었다.
어느새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 일직선으로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길 끝에는 그들을 이 섬 밖으로 내보내 줄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를 빼앗아 이 섬을 떠날 준비를 갖춰놓고 대사형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그의 일은 끝이었 다.
그런데 그 길 한가운데 갑자기 붉은 이물질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의 사내, 온몸에 붉은 옷을 두른 남자였다.
그는 대로의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혼자서 그들을 막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십 명이 넘는 인원이 달려오고 있는데도 그자는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은 단 한 명.’
남궁상의 마음속에 솟구쳐 오른 자신감은 아직도 그의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적은 한 사람뿐이야. 정면 돌파하세!”
패기가 넘쳐나는 낭랑한 목소리였다. “오우!”
보조를 맞춰 달려가고 있던 당삼이 외쳤다. 그 목소리 역시 남궁상과 다르지 않게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다. 적은 단 한 명.
두려워할 일은 아무 데도 없었다.
없어야 정상이었다.
결집된 수(數)는 곧 힘[力]이 아닌가.
하지만 당삼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장소가 어딘지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은 강호(江湖), 혹은 무림(武林)이라 불리는 세계.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이 세계의 법(法)은 강자존(强者存), 이세계의 칙(則)은 약자멸(弱者滅).
수의 절대성이 보장되지 않는 세계.
한 사람의 절정고수가 백의 군세, 아니, 천의 군세를 대적(大敵)할 수 있는 세계.
일기당천(-騎當千), 만부부당(萬夫不當)이 실제로 통용되는 곳.
그곳이 바로 무림, 자신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자들이 사는 세계.
그중에는 한계를 넘어, 신(神)이나 악마(惡魔)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붉은 옷의 남자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남궁상의 본능에 경종이 울렸다.
‘왜지? 왜지? 왜지?”
마음속 밑바닥으로 불쾌한 불안감이 달린다. 수천 마리의 지네가 기어가는 듯한 불안감, 불안이란 이름의 지네가 그의 심장을 갈아먹고 있었다. 저 붉은 옷의 사내 가 이 지네의 주인이었다. 수적인 우세도, 그동안 쌓아왔던 노력도 저자 앞에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네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더 늘어나 심장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사지백해로 뻗어가고 있었다.
이변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자만심으로까지 발전한 자신감이 그들의 본능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집어삼키며 남궁상이 외쳤다.
“멈춰어어어어어, 당삼!”
무언가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공포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 한 발짝도 다가가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심장이 얼음이 언 것처럼 싸늘했다. 얼어 붙은 심장이 땅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 멈춰어어어어!”
남궁상은 급히 그 자리에 멈춰 서며, 앞으로 달려가는 당삼을 말렸다. 하지만 그의 귀에 남궁상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이 자신감 넘치는 청년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여기서 그동안 연마해 왔던 내 실력을 보여주고, 이번에야말로 혜 매(妹)가 날 오빠로 인정하도록 만들어주겠어!’
적이라고 해봤자 고작 한 명.
한 명, 한 명, 한 명.
지금 당장 없애지 않으면……!
이미 당삼의 몸은 머리로 제지하려 해도 듣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당삼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자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이자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본인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것은 공포.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짜는 듯한 공포.
지금까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공포가 그의 심신을 엄습했다.
당삼 역시 그 붉은 옷의 사내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있었다.
“멈춰, 이 바보야!”
“커헉!”
눈이 충혈된 채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당삼의 뒷덜미를 붙잡아서 강제로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당문혜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콜록콜록.”
당삼이 기침으로 항의했다.
“생각없이 달려드는 버릇 좀 고치랬잖아!”
남궁상의 외침을 들은 당문혜가 의아함을 느끼고 미친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달려가는 당삼을 붙잡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천무학관의 사절단들은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줄 사람이 없었다.
사내는 그저 태연했다.
붉은 옷의 사내는 스무 명이 넘는 신진 고수들이 일제히 기세를 합쳐서 달려오고 있는데도 그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이자에게 관계없는 말인 것처럼. 그는 두려움을 느끼는 자가 아니라 두려움을 뿌리는 자였다.
그 옛날 맹세했던 것이다. 더 이상 남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지 않겠다고.
나는 두려움을 흩뿌리는 자가 되겠다고.
더 이상 자신을 무시하는 자가 없도록, 공포의 대상이 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씨익.
사내의 입가를 타고 느릿하게 미소가 달렸다. 미소는 그의 입꼬리 한쪽을 살짝 끌어올리며 끝났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미소?
아니, 그것은 무간지옥의 한가운데서나 지을 수 있는 잔인한 악마의 미소였다.
차라라락!
그가 오른 소매를 한 번 흔들자, 검은 심연 같은 흑색의 철편으로 만들어진 무시무시한 철갑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은 비늘을 모아 만든 듯 매우 흉포 한 모습이었다.
악마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지옥의 울림 같은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서 물어뜯어라!”
푸확!
남궁상의 눈앞에서 피보라가 낙화하는 꽃잎처럼 피어올랐다.
“…..”
남궁상은 자신이 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무시무시한 마수의 손아귀에 붉은 심장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약동하고 있는 그 심장의 주인은 바로 천야진의 심장이었 다. 붉은 심장을 움켜쥔 피에 젖은 강철 손아귀가 악마의 손처럼 보였다.
군웅팔가회의 인물 중 도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다고 평가받던 천야진이다. 그런 그가 반항다운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심장을 잡아 뽑혔다. 저자와의 거리는 수장이 넘는데 어떻게 그의 손이 여기까지 닿을 수 있단 말인가?
꽈악!
검은 강철의 손아귀가 심장을 움켜쥐자 새빨간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며 땅을 적셨다.
남궁상도 진령도, 청흔도 백무영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마치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의 볼에 튄 피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핏방울에 닿은 피부가 화상을 입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군웅팔가회에 소속된 무사 중 몇이 노호를 터뜨리며 붉은 옷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애애애애! 돌아와아아아아!”
남궁상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분노와 공포에 눈이 먼 관도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푸화아아아악!
아직 젊지만 검강까지도 쓸 수 있는 기재들이었다. 천무학관을 대표하는 자랑스런 관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붉은 옷의 사내가 강철로 된 오른팔을 채찍처럼 휘두르자 모두들 허리가 끊어져 나간 채 두 동강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피와 내장이 주르륵 바닥에 쏟아졌다.
채찍처럼 길게 늘어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강철의 손.
피바람을 부르는 악마의 손.
그제야 그들은 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서천…멸겁…”
남궁상은 입술을 세차게 떨며 그 이름을 내뱉었다.
진령과 청흔과 백무영, 세 사람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지금까지 별로 두려움을 느껴보지 않았던 그들의 눈에 공포와 두려움이 차올랐다.
천겁혈신 위천무를 보위했던 네 명의 시종 사천멸겁 중의 일좌.
서천멸겁.
그가 지닌 마병구 ‘서풍광란’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광기 어린 혈풍을 부른다는 마병 중의 마병이며, 지난 백 년간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공포의 전설 중 하나였다.
백 년 전의 공포. 이야기로만 들었던, 이제 다시 되살아날 일이 없어 옛날얘기라고 치부했던 공포가 형체를 갖춘 채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서 동료들의 심장이 뽑히고 허리가 동강 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남궁상, 노학, 당삼, 당문혜, 진령, 류은경, 여섯 사람은 이제까지 이렇게 지독한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전설 중 하나와 직접 싸워야 했다.
그것은 촉망받는 후기지수로서 탄탄대로를 달려왔던 그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싸움이었다.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위험하겠어.”
남궁상이 말했다.
“나도 남궁 대장의 의견에 동감.”
당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분하지만 탈출만을 생각하세.”
저 붉은 옷의 남자는 단지 그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의 무자비한 공격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배까지의 길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 관건이겠군.”
노학이 미간을 찌푸렸다. 적은 단 하나지만,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최악의 공포를 낳는 전설 중 하나와 맞닥뜨리고 있었다.
“우리 여섯 명이라면 어떻게든 저자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을 걸세. 그 틈에 사절단을 옮기세.” 혼자라면 불가능해도 주작단의 동료들이 있어준다면 시간 벌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군요. 전 찬성이에요.”
진령이 말했다.
“저도 남궁 상공의 의견에 찬성이에요.”
류은경이 말했다.
“그럼 결정된 거네.”
당문혜가 약간 근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에게서는 위험의 냄새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얄궂게도 저자를 뚫고 배까지 가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모두들 방심하지 말게. 우리들이 가진 모든 기량을 끌어내 부딪쳐야 할 상대야.”
“여기서 살아난다면 우리 또한 전설의 일부가 되겠지.”
당삼의 얼굴이 굳은 의지로 가득 차올랐다. 좀 전에 느꼈던 공포를 그는 부인하고 있었다.
‘나 당삼은 겁쟁이가 아니야!’
그는 그것을 이제부터 증명할 생각이었다.
먼저 노학이 타구봉을 들고 달려들었다. 개방의 독문신법인 취팔선보를 극성으로 전개하며, 개방에는 장법과 권법도 있었지만, 지금 저자의 서풍광란을 상대하는 데는 타구봉이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가 먼저 전위를 맡은 것은, 개방의 보법이 상대와 맞상대하기보단 교란시키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원래 개방은 거지 집단이다 보니, 그들의 무공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피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쓸데없이 열 내고 싸워봤자 배만 고파진다는 것이 개방의 지론이었다.
노학은 대사형의 꿀밤과 삼복구타권법의 마수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해 왔다. 그러려면 보법을 극성까지 연마할 필요가 있었 다. 때문에 대사형에게 얻어맞을 때를 대비해서 보법을 열심히 연마해 놨었다.
언제 또 대사형과 술래잡기를 하게 될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개 맞듯이 맞는 것은 이제 그만 사양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의 공부열에 불을 붙였다.
지금 노학의 몸에서 그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취팔선보는 신형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적을 교란시킨다. 취팔선보는 그 모습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이 걷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좌로 기울어지는가 싶으면 우로 기울어지고, 우로 몸이 쏠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좌로 가 있었다.
급격한 갈지자의 움직임.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어느새 반대쪽으로 쓰러져 간다. 급격한 움직임을 반복하며 노학은 서천의 주위를 빙글빙 글 돌았다.
서천에게서는 딱히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학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체없이 타구봉을 꺼내 서천을 향해 찔러갔다.
타구봉법(打狗棒法)
최후일식(最式)
천하무구(天下無狗)
처음부터 개방 절기 타구봉법의 최강 초식이었다. 서천을 상대로 약하게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공격을 신호로 친구들이 차례대로 서천에게 연환공격을 펼칠 예정이었다.
청죽으로 된 타구봉의 봉영이 천지를 뒤덮는다. 과연 하늘과 땅의 개를 싹 쓸어버린다는 이름다운 위용이었다.
“가소롭구나.”
서풍광란(西風 비전秘傳)오의(奧義)
유린조아(爪牙)
강철의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하늘과 땅을 뒤덮던 봉영이 일순간에 찢겨져 나갔다. 개방의 절기를 힘으로 찢어발긴 것이다.
노학의 손에 들려 있던 청죽으로 만든 타구봉이 그대로 ‘펑!’ 하고 터져 나갔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봉영을 모두 소멸시킨 서천의 마수는 어느새 노학의 오른손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어설픈 것. 네놈은 특별히 한 조각씩 떼어주마!”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노학의 오른팔이 뜯겨 나갔다. 그가 들고 있던 청죽봉과 그 봉으로 펼치고 있던 타구봉법과 함께.
“크아아아아아아아악!”
노학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팔이 뜯겨져 나간 어깻죽지로부터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노학!”
얼굴이 창백해진 남궁상이 다급한 목소리로 노학의 이름을 불렀다. 사내에게 접근하려던 일행들도 다급히 멈춰 섰다. 천지무구의 초식이 상상 이상으로 너무 빨 리 와해되어 공격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감히!”
주작단 동료가 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힌 당문혜가 서천을 향해 암기를 뿌렸다. 진령은 그사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번개처럼 달려가 노학을 잡아채 왔다. 마병이 늘어났던 길이만큼 서천과 노학과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훗! 이까짓 장난감쯤이야.”
그러나 서천이 팔을 한 번 휘두르자 돌풍이 일어나며 그를 향해 날아가던 암기들이 모두 흩어졌다. 개중에는 당문팔대암기도 뒤섞여 있었으나, 그 앞에서는 무력 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 돌풍은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또다시 암기를 뿌리려던 당문혜에게 그대로 날아들었다.
“꺄아아악!”
돌풍에 실린 무시무시한 경기에 휩쓸린 당문혜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당문혜가 당하는 것을 본 당삼은 자신이 자랑하는 당문 삼연성을 펼치며 서천에게 쇄도해 갔다. 이런 자에게 아낄 것은 아무도 없었다.
당삼의 몸에서 당문팔대암기 중 세 가지가 연속해서 폭사되었다.
귀하다고 암기를 아끼고 있을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시간차를 두고 발사되는 세 가지 암기가 비처럼 서천의 몸에 쏟아져 내렸다.
“가소롭다! 만천화우도 아닌 어린애 장난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서천이 코웃음을 치며 강철로 된 오른손을 내밀자, 다시 그곳을 중심으로 돌풍이 몰아치며 무시무시한 경력이 방패막처럼 날아오는 암기들을 모두 튕겨냈다.
“이 멍청이, 너무 가까워!”
자세를 바로잡은 당문혜는 비명을 지르며 당삼을 향해 도약했다.
활이 장거리 무기라면 암기는 중거리 무기라 할 수 있었다. 일단 발출 무기인 것이다. 즉,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함부로 상대와의 거 리를 좁히는 것은 자살행위 그 자체였다. 당삼은 이때 완전히 서천의 간합(間合) 안에 들어가 있었다.
“죽어라!”
촤라라라락!
서천의 우수, 마병 ‘서풍광란’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매서운 소리를 내며 당삼의 심장을 향해 쭉 뻗어 나왔다. 상대의 심장을 으깨는 공포의 ‘파심장’이었다. 당삼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날아오는 강철의 이빨을 보는 당삼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휘리리리리릭!
그때 무언가가 기다란 것이 세차게 날아와 당삼의 허리를 휘감았다.
바로 당문혜가 다급하게 뻗은 가죽 채찍이었다. 신법만으로는 제때 도착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시간을 거리로 메우기 위해 다급히 채찍을 휘둘렀던 것이다. 정확하게 당삼의 허리를 감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재빨리 채찍을 잡아당겼다.
당삼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날아오던 서풍광란은 목표를 달성치 못한 채 그의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다.
“큭, 덕분에 살았어, 문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당삼이 반색하며 당문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문혜…….”
쿵!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현실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을 빗맞춘 강철의 손톱은 그 대신 다른 이를 그 이빨의 제물로 삼았다.
“바보…….”
달싹거리는 당문혜의 입가로 주루룩,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서천의 손에서 뻗어 나온 무시무시한 악마의 손톱은 바로 당문혜의 오른쪽 가슴에 박혀 있었다.
푸화아아아아악!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가 비처럼 쏟아졌다.
후두둑!
붉은 피의 비가 망연자실해 있는 당삼의 두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당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