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위험
-요동치는 운명의 물줄기
쿡!
“으… 응.”
쿡!
쿡! 쿡!
응!”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영령은 몇 번의 부질없는 반항 끝에 눈을 반개했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찌르고 있었다.
“으… 응? 또 무슨 일이냐, 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며 영령이 중얼거렸다.
“깨어나셨군요, 언니.”
수마(睡魔)에 빠져든 그녀의 볼을 찌른 것은 같은 방에 묵고 있는 나예린의 하얀 손가락이었다.
“역시 언니한테 이 방법이 최고로 잘 듣네요.”
나예린이 그녀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지었다.
“너……!”
화를 내려던 영령은 볼에 손을 댄 채 잠시 멍해졌다.
‘왜 깨어나지 못했지??
비록 그녀가 잠이 깊게 드는 편이라 해도,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는 무인으로서 타인의 접근을 이렇게까지 함부로 허용할 만큼 감각이 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볼을 손가락으로 네 번이나 찔리고 나서야 겨우 눈을 뜨다니…….
“내가 이렇게나 무방비했던가?”
방금 자신의 볼을 찌른 게 손가락이 아니라 단검이었으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 즉시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
그런 황당한 상황인데도 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난 어째서 또 반말을…..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기가 무색하게 또다시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무언가 반문하려던 영령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나예린이 현재 눈처럼 하얀 백의 무복으로 몸을 감싸고, 품에는 냉기를 흘리는 백검을 든 완전무장의 상태로 서 있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탓이다.
“준비하세요, 언니.”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영령은 일언반구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벗어두었던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몸이 그녀의 의사에 반해서 저 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었다.
“다 됐다…… 요.”
존댓말을 쓰려고 하니 지독히도 어색했다. 그 어색한 말투에 나예린이 풋 하고 웃었다.
“어색해할 필요 없이 그냥 평소에 쓰시던 말투로 쓰시면 되어요, 사자(師姉).”
자신이 느낀 지독한 어색함에 대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영령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나예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요?”
나예린은 대답 대신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영령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다른 사람들을 깨우도록 해요.”
“어딜 가는 게냐, 린?”
그러나 그때 이미 나예린의 하얀 옷자락은 문밖으로 사라진 이후였다. 영령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또 이런 말투……”
나예린과 오래 지내면 지낼수록 자신의 말투가 이상해지는 것에 깊은 의혹을 품으며 영령은 나예린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현재 그녀들의 객실이 있는 위치는 오층 영령이 밖으로 나왔을 때, 나예린은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진령이 류은경과 함께 자고 있던 방이었다.
“대사자, 이 야심한 밤에 여긴 왜…….?
나예린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하라는 표시를 보냈다.
나예린이 진령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진령의 두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제가 한 말, 모두 기억하셨나요?”
확인하는 듯한 나예린의 말에 진령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모두들 조용히 움직여야 해요.”
나직한 나예린의 음성은 밤의 어둠 속에서 무척이나 신비하게 들렸다. 그녀 혼자 빛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이니 남자들이 어떻겠는가.
“그럼 부탁해요.”
그 말을 끝으로 나예린은 그 방을 나왔다.
그녀는 즉시 계단을 내려가 이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그녀의 행동은 물이 흐르는 듯 막힘이 없었다.
***
쪼르륵.
염도가 비워진 술잔에 술을 따르며 투덜거렸다.
“정말 최악이군. 하고많은 상대 중에 하필이면 이 얼음땡이가 술 상대라니.”
“동감일세. 술이란 자고로 우의를 돈독히 하고 풍류를 즐기고자 마시는 건데,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홧김에 불평불만밖에 쏟아낼 줄 모르는 불덩어리가 술 상대라 니.”
빙검 역시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조용히 그 말에 동의했다.
성격도 머리색도 확연히 다른 이 둘은 마시는 술의 종류도 달랐다.
염도는 먹으면 불을 뿜을 것 같은 독하디독한 화열주를, 빙검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맑은 빙월주를 마시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 앞에 놓인 술병도 술잔도 달랐 다.
“이렇게 얼음땡이랑 술을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군.”
염도가 손에 든 커다란 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네 술버릇이 워낙 안 좋아야지. 맨 처음 마셨을 때, 금방 게워냈던 게 잊히질 않는군.”
“그 옛날 일을 잘도 기억하는구만.”
염도의 투덜거림에 빙검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잊겠나? 게워낸 데가 바로 내 머리 위였는데. 내 생애 최악의 경험 중 서열 십위 안에 들어 있는 일이지.”
빙검의 말에 염도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흥, 기억 안 나네.”
“만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변명이로군. 난 똑똑히 기억한다네. 술 잘 마실 듯 큰소리 탕탕 치던 빨간 머리 소년이 설마 그렇게 약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흥, 그땐 자네가 비정상적으로 술이 셌던 것뿐이야.”
“아, 그때 자네가 겨우 두 잔, 아니, 한 잔 반밖에 안 마셨다고 내가 얘기해 줬었던가?”
그때의 일을 아직도 빙검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도 잊어먹는 것 없이. 그는 무언가를 쉽게 잊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
한참을 술잔을 바라보던 염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지?”
빙검의 손이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 들이켰다.
“몰랐나? 우린 원래 이랬다네.”
“아, 그렇지 참. 깜빡했군.”
그러다가 잠시 후 다시 염도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네 녀석이 정말 재수없다는걸?”
“다행이군. 피차 마찬가지니.”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견원지간(間)으로 싸워온 것도 벌써 이십 년. 비류연이란 존재가 엉뚱하게 끼어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얽히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 질기고 질긴 악연은 너무 심하게 얽히고설켜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이놈과는 맞지 않아!’
둘이 속으로 같은 결론을 내리던 그때.
“무슨 일이냐? 야심한 밤에.”
염도가 계단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곳에 나예린이 영령과 함께 서 있었다.
“감이 이상합니다.”
염도와 빙검은 나예린의 진지한 말에 일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나예린의 말이었다. 그 말을 단순한 잠꼬대로 치부하기엔 위험도 가 너무 높았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예린의 경고에 염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경고해 준 건 고맙지만, 이미 늦었다.”
멀리서부터 객잔 전체를 포위한 채 다가오고 있는 다수의 살기가 나예린에게도 감지되었던 것이다.
“좀 더 빨리 알아챘으면 좋았을 것을, 죄송합니다.”
빙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미리 눈치채고 이렇게 내려왔다는 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인의 발달된 감각을 뛰어넘는 무언가 다른 힘이었다.
“쳇, 상당한 수로군.”
염도의 투덜거림에 빙검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수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아이들을 깨워라, 그리고 오늘 우릴 안내해 주었던 담 총관도.”
빙검의 명에 나예린이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미 깨어 있습니다.”
“뭐라고?”
“전 싸울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걸 알려 드리러 온 겁니다.”
조용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없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준비가 끝났다고?”
그때 이층으로 사내 한 명이 올라왔다. 그들을 숨겨준 신용산객잔의 총관 담환이었다.
“자네, 벌써 깨어나 있었나?”
게다가 그는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일행분인 아가씨 한 분이 절 막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신지…….”
그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누가 자넬 깨웠단 말인가?”
그는 검지를 들어 계단 쪽을 가리켰다. 때마침 진령이 무장을 한 채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구출대 모두가 여장을 꾸리고 무장을 한 채 줄줄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허허, 이거 참 귀신 곡할 노릇이군.”
염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령이 네가 모두를 깨웠느냐?”
빙검의 질문에 진령의 얼굴이 빨개졌다.
“전…… 그저 나 소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총 노사님.”
“예린이가 말이냐?”
“네, 나 소저가 조금 전에 절 깨우더니, 조용히 남자들을 모두 깨운 다음 무장을 하라고 해서.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어보지는 않았느냐?”
“그러고 보니……’라며 진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빙검이 다시 한 번 나예린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예린이 너는 어떻게 담 총관이 이 거점’의 실질적인 책임자라는 걸 알고 있었느냐?”
객잔의 총관 자리는 그저 겉으로 내세우는 가짜 얼굴에 불과했다.
“그냥 감이었습니다.”
나예린의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빙검은 웃지 않았다.
곧 움직여야 할 일이 있을 테니 준비하라고…….”
“너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 모양이구나. 이것도 ‘감’이더냐?”
나예린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이번 것은 ‘확신’입니다.”
마천각에 납치되었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금제에서 풀려난 이후, 나예린이 지닌 용안의 힘은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예전에는 개인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던 것을, 이제는 조금 더 큰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조직의 운명이, 그 물줄기가 어느 정 도 손에 잡히는 듯했다.
묘한 확신이 강해졌다. 절대로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
아버지 나백천이 행방불명되었음에도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아직 이 하늘 아래 확실히 살아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다만 요 며칠 새 점점 불안이 커져 가는 것은, 나백천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점점 더 강해져 가고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나예린의 눈동자는 현현한 밤하늘처럼 심원했다. 마치 미래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빙검과 염도는 왠지 진짜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기이한 확신을 느꼈다.
‘정말 신비로운 눈빛이로구나.’
빙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두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냉기는 어느새 엷어져 있었고, 그 대신 훨씬 더 깊은 신비가 감돌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런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별을 읽는 무녀(巫女)처럼 신비로운 자태였다. 왠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영혼마저 속박할 것 같은 그런 힘의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만개(滿開)의 단계는 아닌 것 같지만…….’
이미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과연 그 꽃봉오리가 모두 벌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빙검 그 자신도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린 사부가 여자 보는 눈은 확실히 있군.”
덕분에 구출대는 돌발 상황에 대비할 여유와 도망칠 시간을 벌게 되었다.
“깨워서 미안하다, 다들.”
염도가 구출대원들을 한차례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적진이라 긴장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무사히 잠입했다고 생각하고 안심한 첫날에 적들에게 포위당한 신세가 되어 다들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술렁이는 동요를 염도는 놓치지 않았다.
“혹시 공짜로 방 빌린 김에 뭔가 해보려고 했던 이들에게는 ‘삼삼한 애도를 표한다.”
“그런 일 결코 없었습니다!”
괜히 용천명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런 일 없었어요.”
마하령도 괜히 머리 모양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일단 그런 걸로 해두자꾸나. 시간이 없으니까.”
염도가 두 사람을 슬쩍 일별하며 말했다. 용천명과 마하령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이제 저희들은 어떻게 하지요? 맞서 싸웁니까?”
용천명의 말에 빙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상이 비류연에게 강제로 끌려 나가 부재중인 지금 천관도의 중심은 임시적으로나마 자연스럽게 그로 기울어져 있 었다.
“아니다. 여기서 전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적의 앞마당에서 드잡이질을 벌이는 것은 매우 현명치 못한 선택이었다.
“담 총관, 비밀 통로를 써야겠네.”
그러자 총관 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점도 폐기해야겠군요. 무한의 거점 중 이곳만 무사해서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바로 오늘일 줄이야. 경비를 겸해 감시를 풀어놨었는데, 아무래도 이미 당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소식이 늦게 전해질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인원이 한꺼번에 피하기엔 통로가 좁고 복잡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건 걱정 말게, 우리가 시간을 벌 테니.”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 빙검은 염도를 쳐다보았다.
할거냐 말 거냐, 의향을 묻는 얼굴이었다.
“뭐 하러 쳐다봐? 어차피 할 거면서.”
“자네 의향을 물은 걸세, 존중하는 의미에서.”
염도에게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흥, 존중이 다 웃겨 돌아가시겠군. 자네 혼자만 잘난 척하게 둘 수는 없지. 나도 간다.”
“그럼 결정됐군.”
다시 빙검의 시선이 구출대의 면면을 향했다.
“너희들도 이제 알겠지만 이곳은 특별히 준비된 거점 중 하나다. 지하로 내려가면 비상 탈출구가 준비되어 있을 게다. 담 총관을 따라가라.”
“노사님들께서는 어쩌시고요? 저희들과 함께 가시는 게 아닙니까?”
진령의 물음에 빙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우리까지 함께 가면 이 객잔은 금세 점령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밀 통로의 행방이 알려지는 것도 금방이지.”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아직 채 피지 못한 젊은 꽃들을 이곳에서 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말씀은 설마..”
나예린의 말에 빙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우리들이 시간을 끌겠다. 그 틈에 너희들은 도망가도록 해라.”
“두 분만으로는 위험합니다!”
항상 침착하던 나예린답지 않게 절박한 목소리였다.
“허허, 우리가 누군지 잊었느냐?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하지만.
대답하는 나예린의 안색이 그리 밝지 않았다.
“감이 좋지 않습니다.”
불길한 예언과도 같은 울림을 가진 나예린의 말에 염도와 빙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으나, 이내 곧 풀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기분 탓이니. 네 감이 모두 맞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느냐?”
“만일…… 두 분 노사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들은 누굴 믿고 의지해야 합니까?”
“걱정 말래도. 이런 일로 쉽게 사로잡히거나 하지 않는다. 너희들만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그러자 염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맞다. 이 정도 포위망이야 식은 죽 먹기지.”
발목 잡는 건 오히려 너희들이라는데 더 이상 강권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보중(保重)하십시오.”
나예린이 정중히 읍하며 배례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서 정중히 읍하며 외쳤다.
“보중하십시오!”
염도가 왠지 유쾌하다는 듯 홍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금방 다시 만날 테니! 만일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염도는 자신들이 그동안 가르쳐 왔던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 의지할 사람이 없어진다면……..”
염도가 진령 쪽을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알고 있겠지?”
진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너희들의 대사형이라면 네 녀석들을 죽게 하지는 않을 게다.”
그러나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하지만 되도록 그런 상황은 불러오지 않는 게 최선이다. 알겠느냐?”
“네, 물론 뼈저리게 잘 알고 있습니다, 염도 노사님.”
“그럼 됐다. 이제 떠나거라.”
담 총관을 따라 구출대의 대원들은 비밀 통로로 향했다.
영령도 나예린의 뒤를 따라 움직이려 하는데, 그녀를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영령이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그녀의 발길을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염도였다.
“제게 무슨 하교하실 일이라도…….”
영령은 어쩐지 이 염도라는 사람이 두려웠기 때문에,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지키거라.”
“네? 지키다니요? 뭐를요?”
그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에 영령은 어리둥절해졌다. 의문이 가득한 영령에게, 염도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나예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를 지켜라. 저 아이를 지키지 못하면 아마 평생 후회할 것이다. 내가 보증하지. 누구처럼 실수하지 마라. 영원히 그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수가 있다.”
염도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해서 감히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그녀는 여전히 몽환산장의 영령이었지, 검각의 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내 말,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생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 말이 영령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경험자의 충고니 새겨듣는 게 좋을 게다. 내 용건은 그걸로 끝이다.”
영령은 한 번 읍한 다음 도망치듯 급히 그의 앞을 떠났다. 그러나 방금 전의 말을 그녀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빙검을 돌아보며 염도가 말했다.
“가볼까?”
“그러지.”
“한바탕 화려하게 날뛰어보자고. 역시 숨는 건 내 취향에 안 맞아.”
“그건 자네가 지나치게 단순해서 그런 거라네.”
“뭐라고?! 말 다 했냐? 이 얼음땡이 자식아!”
염도가 일갈했다.
“아직 할 말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네. 하지만 그걸 다 하려면 몇 날 밤을 새야 하니 여기서 그만 하지.”
“역시 네 녀석은 정말 밥맛이야.”
“피차일반일세. 이제 화 다 냈으면 할 일을 하러 가야 하지 않겠나? 발목 잡지 말고.”
“네놈이야말로 찬물 끼얹지 말아줬음 좋겠군.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손가락으로 얼음과자나 만들어서 빨고 있으시지?”
“자네로는 역부족이야, 나라면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자네야말로 좀 떨어져서 불이나 비추고 있는 게 어떻겠나? 어두우니까 그게 딱이겠군.”
이층에서 계단을 다 내려와 정문에 설 때까지도 이 둘의 말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흑천맹 순찰단 단주 쾌영도 손광은, 이렇게 포위를 당하고도 달랑 둘이서 티격태격 내려온 다음 자신들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염도와 빙검을 보고 어이가 없었 다.
“이런 씹어 먹어버릴 놈들이! 침입자 주제에 여유를 부려?!”
그 순간 손광은 울컥했고, 그래서 명령을 무시한 채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제히 공격하여 침입자를 포박해라! 죽여도 상관없다!”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 해도 이곳은 흑천맹의 앞마당, 그들 순찰단의 영역인 것이다.
함성 소리와 함께 순찰대원들의 제일진이 염도와 빙검을 향해 일제히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콰쾅!
고막을 찢는 듯한 엄청난 폭음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분출된 열기에 주변의 공기가 후끈해졌다.
“헤헹! 어딜 감히!”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염도가 코웃음을 쳤다. 방금 전 공기를 데운 열기는 그가 뿜어낸 도기였던 것이다.
상상 외로 강력한 저항에 손광의 얼굴이 대변했다.
“제이진 공격!”
즉시 순찰단의 제이진이 공격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빙검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투명할 정도로 푸른 검광이 번뜩이자 채재재챙, 이십여 개의 도검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흐헉!”
동시에 그들의 몸을 엄습한 한기에 순찰단 제이진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털썩 무릎을 꿇은 그들의 코앞에 자신들이 들고 있던 도검이 떨어져 내려와 묘비처럼 박혔다. 한 발짝만 더 움직였어도 그 도검은 그들의 백회혈을 꿰뚫었으리라.
“이, 이럴 수가! 단 두 놈에게 우리 자랑스런 순찰단의 정예가!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이 굴욕을 어떻게든 만회해야만 했다. 이대로는 다른 단주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쾌영만천!”
역부족이 분명해 보이는 부하들을 원호하기 위해 손광은 자신의 독문무공인 쾌영팔식 중 최강의 절초를 펼치며 염도와 빙검을 향해 짓쳐들어 갔다. 캉!
수십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날아가던 그의 도는, 붉은 화기(火氣)가 일렁이는 날카로운 도에 가로막혔다.
“죽이긴 누굴 죽여!”
어헝!
사자의 포효와 같은 소리와 함께 손광의 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진기를 가득 주입한 도가 사기그릇처럼 깨지자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보 이지 않는 암경(暗勁)이 그의 전신을 후려쳤다.
“크아아아악!”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 역시 삼장 밖으로 튕겨 나가 나동그라졌다.
“네놈이나 죽어라!”
훌쩍 뛰어 손광 앞에 착지한 염도가 불꽃으로 일렁이는 도를 내려치려 할 때였다.
“멈추세요!”
갑자기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염도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재빨리 손을 거둔 염도와 빙검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일단 발만 잡아두라고 했었는데, 손 단주께서 조금 서두르셨군요.”
그 말에는 은근한 질책이 서려 있었는데, 순찰단주 손광은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덕분에 포위망이 많이 엷어졌어요. 그렇지 않나요?”
어느새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신마팔선자의 셋째인 십지선녀 갈효혜였다.
그녀의 뒤엔 자매들 중 다섯이, 그리고 그 뒤엔 구천현녀 무화를 위시한 삼대낭랑이 지켜보듯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만났네요, 관표두님! 곽표두님! 두 분 모두 그 답답한 초립은 모두 벗어던진 모양이군요. 그 편이 당당하고 훨씬 보기 좋네요.”
활짝 웃는 갈효혜의 인사에 빙검이 인상을 굳히며 대꾸했다.
“이미 우리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구려?”
갈효혜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 알고 있었죠. 왜 어머니께서 경황 중에 당신들 일행과 동행하자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세요?”
갈효혜의 입매에 그려진 웃음에 염도와 빙검은 오한이 들었다.“우릴 감시하기 위해서였구려.”
그때 갑자기 무화가 왜 행선지를 물었는지 이제야 깨달은 빙검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마 갈효혜가 전음성이라도 날린 모양이었다.
“맞아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절정고수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숨기지 못해요. 당신들 두 사람은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하더군요. 틀림없이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삶을 살아왔겠죠. 은신잠행에 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이상, 절정고수는 아무리 기세를 숨긴다 해도 그 걸음걸이 하나,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 혹은 분 위기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하답니다. 다만 어려운 건 눈치채고서도 못 챈 척하는 것이었죠. 이건 아마 모르시겠지만, 원수의 조력자를 앞에 두고 웃는다는 건 꽤 괴 로운 일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갈효혜의 얼굴로 점점 더 미소가 짙게 번져 나갔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뒤에 품고 있는 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웃음엔 칼이 담겨 있지 않았던 경우가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번뜩이는 예기를 숨기고 있었을 뿐. 그 섬뜩한 예기가 숨김없이 드러나 자 그 미소는 절정고수 두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박력이 있었다.
여인들이 겉으로 웃고 있다고 해서 속으로도 웃고 있다고 착각하다간 큰코다친다더니…….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 짝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두 분뿐이신가요?”
그러자 빙검이 대답했다.
“우리 학생들을 아직 재우고 있어서 말이오.”
“어머, 자상한 스승님이시네요.”
““자주 듣는 평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갈효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일어나 주시면 수고를 덜 것 같은데……. 더는 번거롭지 않았으면 하네요.”
한마디로 말해 순순히 잡혀달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저분이 계신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빙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빙검 노사님께서 번거로움을 자초하시는군요.”
겉으로 보이는 단호한 모습과 다르게 빙검과 염도의 마음은 초조했다. 지금 이 여인들이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무척이나 위험하다.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빙검이 당당히 말했다.
“피차 짊어진 게 있는 몸이라서 말이오. 번거롭게 해드려서 미안하오. 이 빨간 친구도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쓰러뜨리기는 쉽지 않을 거요.”
염도와 빙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무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만만하구나. 너희 둘이 그렇게나 대단해졌단 말이냐?”
구천현녀의 단 한마디에 염도와 빙검의 몸이 움찔했다.
“……..”
이 인분의 침묵.
두 사람은 얼굴은 굳힌 채 되도록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아…….”
지그시 눈을 감은 구천현녀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셋째가 너희 둘이라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었지. 너희 둘이 나의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런데 진짜로 너희였다니. 너희는 언제부터 본녀 앞 에서 그런 건방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단 말이냐?”
“…..”
“이십 년 전의 가르침은 벌써 잊은 게로구나.”
기억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되살아나자 두 사람은 몸을 굳혔다.
“그 끔찍한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빙검이 무겁게 가라앉은 말투로 말했다.
“못 잊지요, 절대로!”
내뱉듯 말하는 염도의 인상은 있는 대로 구겨졌다.
“그런데도 감히 내 앞을 가로막으려 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염도와 빙검이 진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담담하게 답하는 그녀의 전신에서 방출된 엄청난 살기에, 두 사람은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이 정도 위압감이라니…….?
단순한 살기만으로 그들 정도의 최절정고수가 이런 압박을 받다니…….
과거에 잊고 있었던 끔찍한 기억이 따끔거리며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지그시 감겼던 구천현녀의 눈이 번쩍 떠지며 형형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구천현녀의 출수에 대비하며 두 사람이 몸을 잔뜩 긴장시키는 순간.
“네째와 다섯째! 거기 있느냐?”
“네, 어머님! 여기 있습니다.”
뒤쪽 대열에서 동시에 한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나갈 것도 없겠지. 너희 쌍둥이들이 저 둘을 시험해 보거라!”
“네, 어머님!”
이번 대답 역시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