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남궁상!
ᅳ쫓는 자와 쫓기는 자
그들은 쫓기고 있었다.
성도 무한(武漢)의 남문을 부수고 통과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금방 꼬리가 따라붙고 말았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장홍이 중간중간에 설치한 알림 방울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동료들이 있는 곳까지 계속해서 꼬리를 달고 가는 우행을 범했을지도 몰랐다.
“역시 장 아저씨라니까. 괜히 겉늙어 보이는 게 아니었어!”
장홍, 모용휘, 남궁상과 함께 달리고 있던 비류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찬사를 보냈다.
“류연. 비록 장 형이 실제로도 겉…… 음, 그렇게 보이긴 하나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네.”
마찬가지로 발을 늦추지 않은 채, 모용휘가 장홍을 생각해서 한마디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장홍의 얼굴은 보기 좋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그러니깐 겉늙어 보이긴 한다는 거잖아!
“왜? 가슴은 밝히지만 다른 능력도 있다는 좋은 뜻이었는데?”
“좋긴 뭐가 좋나? 류연, 자넨 입 다물고 그저 달리기나 하는 게 세상을 위하는 길일세!”
듣다 못한 장홍이 버럭 소리쳤다.
“자자, 진정하세요. 장 형의 노련함이 이런 때는 정말 도움이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남궁 선배님?”
모용휘가 장홍을 다독거리며 나섰다. 자기 고민거리가 한 아름인데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게 모용휘의 대단한 점이었다.
“물론. 도망가는 도중에도 가느다란 강사를 이용해 알림용 방울을 설치할 생각을 다 하다니. 나 같으면 도망치는 일에 정신이 팔려 그런 방법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을 거야.”
“쯧쯧. 네가 그렇게 ‘난 그런 걸 생각 못하는데’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녀석이니까 늘 다들 너를 밥인 줄 알고 한 숟갈씩 떠먹으려 드는 거란다, 궁상아.”
비류연의 독설이 밥그릇에 뛰어든 숟가락인 양 남궁상의 가슴에 푹 박혔다.
달리던 중에 순간 넘어질 뻔한 남궁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장홍이 새삼 진지해진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뒤쫓아오는 놈들에게서 전문가의 냄새가 나. 아무래도 흑견의 부하들인 흑견대가 틀림없는 것 같네.”
전문가가 아니라면 장홍이 애초에 추적자들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을 터였다.
“흑견? 그게 누군데?”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비류연이 심드렁하게 반문했다.
“그새 까먹었는가? 좀 전에 자기 손으로 묵사발 낸 사람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는 게 어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장홍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비류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반박했다.
“자기 손에 묵사발 나지 않는 사람을 기억해야지, 묵사발 난 사람을 뭣 하러 기억해? 그런 건 기억력의 낭비라고.”
참 명쾌한 논리였다.
“그래도 왕년에 강남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던 전설적인 신포(神捕)라 불리던 사람일세. 그리고 지금은 흑천맹 십대고수인 흑천십비 중 하나지. 충분히 기억 할 가치가 있다네. 관(官)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어떤 이유로 흑도에 투신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때 신포라 불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추종술과 포박술이 뛰어나다는 것 아니겠나?”
장홍의 진지한 설명에 비류연은 빙글빙글 웃으며 반문했다.
“그 깜장 멍멍이 아저씨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런데 그런 과거사 하나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다니. 업무 태만 아니에요, 장 아저씨?”
“누, 누가 말인가! 난 받는 녹봉만큼은 확실히 일하고 있네! 자네가 수당도 안 나오는 무보수 임무를 뛰는 내 마음을 아나, 알아? 낮도 밤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냔 말일세!”
울분에 찬 목소리로 펄쩍 뛰며 장홍이 소리쳤다.
“그걸 내가 알아서 뭐 하게요? 억울하면 상사나 찾아서 녹봉 협상이라도 하시던가요.”
비류연의 사전에 ‘따스한 위로’라는 말이 적힌 부분은 찢겨져 나간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하아, 바로 그 상사가 지금 행방불명 아닌가!”
장홍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물론 여기서의 상사란, 맹주인 나백천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걸 따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상사가 있는 곳을 찾아야겠네요.”
그 말에 장홍이 옳다구나 손뼉을 쳤다.
“듣고 보니 그렇군. 야근 수당을 안 올려주면 파업이라도 해야겠네. 자네는 뭘 요구할 생각인가? 설마 나 소저와의 혼인 허락?” 장홍은 눈을 슬쩍 가늘게 뜨고는 비류연을 흘끔 보며 떠보듯 물었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면 자네 대답의 진실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네.”
모용휘도 남궁상도, 비류연의 말에 못 믿겠다는 듯 힐끔 불신에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어라, 정말인데? 예린의 아버지를 구하는 일인데 내가 조건을 걸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 친구?”
“음…… 그렇다 치지.”
어딘가 불신의 기운이 풍겨 나오는 목소리로 모용휘가 애써 답했다.
“봐요, 휘도 절 믿는다잖아요. 내 눈을 보세요. 이게 거짓말하는 눈으로 보이나요?”
“안 보여, 자네 눈.”
앞머리에 가려져 있는 눈이 보일 리 만무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보여요.”
“아, 그러십니까?”
심드렁한 어조로 장홍이 대꾸했다. 비류연에겐 앞머리를 치워줄 의사는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뭐, 양심이 있으면 나중에 알아서 해주시겠지만요.”
결국은 태연한 얼굴로,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툭 내던지는 비류연이었다.
한편, 장홍과 모용휘의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던 남궁상은 전혀 태연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 참 태평하네, 태평해.’
모용휘야 달리고 있을 뿐이니 그렇다 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저런 농담 따먹기 같은 얘기들이 술술 나오나? 무거운 마음으로 부지런히 발을 놀리 고 있던 남궁상으로서는 그저 놀랍고 신기하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마음의 지주나 다름없는 염도, 빙검 두 노사를 잃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여인에게,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일을 누군가에게 곧이곧 대로 얘기했다가는 당장 ‘미친놈!’이란 소리부터 들을 판국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을 제압한 여인이 바로 흑천맹주 갈중천의 친 어머니이자, 그 위대하고 강대한 무신마 갈중혁의 첫째 부인인 동시에 신마가의 여주인이라 는 무시무시한 신분의 구천현녀 ‘무화’, 그 본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을 허비해야 하리라.
전력의 오 할이 떨어져 나간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오 할이란 수치도 피해 산출을 최소로 줄였을 때 그 정도인 것이지, 남궁상의 심적인 계산 결과로는 피해 수치가 칠 할이 넘었다.
“대사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전력으로 칠 수는 없잖아요. 어흑흑. 최악이야! 최악이라고요! 이보다 더 나빠질 수가 없어요! 어떻게 더 나빠져요?!?
남궁상이 거의 심신 혼란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뒷배, 염도와 빙검이 사라진 것이다. 발을 디디고 있던 대지가 쩍 하고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는 번천지복의 대긴급 사태였다.
‘아는 괜찮을까? 괜찮겠지? 괜찮아야 되는데? 으아아아, 안 괜찮으면 어쩌지??
무엇보다 심려되는 것은 진령의 안부였다.
‘잡혀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장 형의 말대로 비밀 통로로 도망친 거겠지? 설마 그자들에게 잡힌 건 아니겠지? 무슨 험한 일이라도 있으면 큰일인데!’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려 신 용산객잔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대사형한테 미리 경고를 듣지 않았으면 벌써 저질렀을 일이다.
“가고 싶으면 돌아가 봐라. 하지만 그럼 너는 죽고, 진령이만 평생 과부로 지내게 될걸? 왜냐고? 령이는 거기 없을 테니까. 왜냐고? 거기엔 비밀 통로가 있으니까. 그 비밀 통로가 어디로 이어져 있냐고? 그야 나도 모르지. 그런데도 가고 싶어? 그럼 가도 돼, 난 안 말릴 테니까.”
그런 말까지 들은지라 차마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더욱더 조급해질 뿐이었다.
‘크아아아악! 미치겠네! 미치겠어! 내 심장은 대사형만큼 털이 숭숭 나 있지 않다고요. 내 심장은 종이처럼 연약하다고요. 대사형, 딴 얘기 좀 그만 하고 뭐든 희망 적인 말 좀 해보세요. 대사형! 어흑흑!’
그렇게 남궁상이 좌절에 불안과 공포를 더해가며 심신 상실로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루룰룰루, 룰루룰루, 룰루룰루룰루루….
이게 뭐지? 남궁상은 하마터면 경공 도중에 발이 엇갈려 땅에 성대하게 넘어질 뻔했다.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뭣 빠지게 달리는 자신의 고막을 때리는 이 콧노래는 대체 어디서 흘러나와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산더미 같은 걱정으로 미치기 일보 직전 인 지금, 실로 즐겁다는 듯 흥얼거리는 이 콧노래의 출처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당장 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놈의 멱살을 부여잡고 코에다가 한 방 갈겨주리라. “뭐냐, 그 주먹은? 나 치려고?”
그러나 남궁상은 꽉 쥐었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웃었다.
불행하게도 콧노래의 출처는 다름 아닌 그들 주작단의 대사형이자, 한때는 운수대통 격타금이라 불렸고, 지금은 아주 잘 아는 사람들 일부에게서 ‘신풍협(神風 俠)’이라 불리는 비류연이었던 것이다. 역시 저 인간이 신풍협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아하하하,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긴장 때문에 손끝에 피가 잘 안 통해서 손가락 운동을 좀 하려고 했지요. 이렇게 말입니다, 이렇게.”
남궁상은 필사적으로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래? 난 또 그 주먹으로 내 코라도 치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뭐냐.”
그 말과 함께 비류연이 가볍게 발을 내디디자, 단단하던 땅이 발밑에서 으저적, 섬뜩한 소리를 내며 푹 파였다. 장홍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는지 가볍게 휘파람 을 불곤 계속해서 달려갔으나, 남궁상은 하마터면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을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스스로의 생각을 자백하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에이, 제가 어찌 감히 그런 하극상을 하겠습니까? 기분 탓입니다, 기분 탓!”
“그래? 그럼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지금은 시간도 별로 없고 말이야. 바쁘니깐.”
그럼 시간이 많으면? 어쩌려고 그랬던 것일까? 이상하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아올라 남궁상은 더 이상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근데 너 지금 무슨 절세(絶世)의 신공(神功)이라도 연마하냐?”
“예? 신공이요? 안 연마하는데요?”
요즘처럼 절세신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하고 바라던 때가 없었다. 하지만 있어야 배울 것 아닌가?
“아, 그래? 난 또 하도 표정이 무겁기에, 세상에 떠도는 백팔번뇌를 얼굴에 모아 가장 궁상맞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만드는 초절정(絶頂) 대궁상신공(大窮狀神 功)이라도 익히는 줄 알았지.”
그제야 남궁상은 대사형이 자신을 놀렸다는 것을 알고는 발끈했다.
“지금이 저나 놀릴 때입니까! 전 이렇게나 진령이 걱정인데, 대사형은 나 소저가 걱정도 안 되십니까?”
폭발한 나머지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대사형에게 소리칠 생각을 하다니, 그만큼 지금 남궁상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뭐? 너 미쳤냐? 걱정 안 될 리가 없잖아?”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비류연의 대답에 남궁상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콧노래까지 부르시고? 누가 보면 쫓기는 걸 좋아하는 특이 취향이라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목숨은 일단 아끼고 봐야 하기에 차마 변태라는 말은 쓰지 못했다.
“응? 그게 무슨 바보 같은 헛소리야? 쫓기는 게 좋다니, 궁상이 너 변태냐?”
참으로 이상한 놈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비류연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남궁상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뼈, 변태라뇨? 전 콧노래 같은 것도 안 불렀다고요!”
이상한 것은 어딜 봐도 대사형 쪽 아닌가!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오히려 자신이 변태인 것처럼 몰리니 남궁상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쪽은 안 쓰고 참았는데 그런 말을 서슴없이 쓰다니! 이미 정신적인 한계 상태에 빠져 있던 남궁상은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호오, 펄쩍 뛰는 걸 보니 수상쩍은데?”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남궁상은 그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분위기 좀 읽으세요, 분위기 좀!”
남궁상의 버럭 소리에 비류연이 모용휘와 장홍을 흘낏 보았다.
“음..다들 심각하네, 제법.”
“뭐, 뭡니까, 그 무미건조한 감상은? 알면서도 그러신 겁니까? 그러니까 주위로부터 자꾸만 배척당하는 거 아닙니까!”
“어라, 내가 언제 배척당했나? 금시초문인데?”
열과 성을 다해 비류연을 왕따시켰던 모든 왕따인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문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안 당한 줄 아셨습니까? 대사형, 소위 왕따라고요. 공인 왕따!”
“난 멍청이들이 뭘 하든 별로 관심없어서 말이지.”
“관심없다니요? 대사형을 왕따시키고 있는데도 말입니까?”
“그건 걔네들 생각이고. 그런 인생의 패배자들한테 신경을 쓴다고 떡이 나오냐, 돈이 생기냐?”
“그, 그래도 보통은 저절로 신경 쓰인다고요! 지금만 해도 그렇지, 이 분위기에서 어디 콧노래 부를……!”
딱!
순간 알밤이 날아왔다.
둘 다 앞을 보고 달려가는데 어떻게 이마 한가운데를 때린 건지 도대체 수법을 알 수가 없었다.
“너, 안 그래도 밥인 주제에 그렇게 쓸데없이 주변 눈치나 보면서 살다간 누군가한테 호구 잡혀서 평생 단물만 쪽쪽 빨린다?”
너무나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인 지적에 남궁상은 심장이 후벼 파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라 했니?”
싱긋 웃으며 비류연이 상냥한 어조로 반문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손사래를 치는 남궁상의 안구에 뿌옇게 습기가 차올랐다.
“피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다가온다면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 만일 따라 잡히면 그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되지. 뭣 하러 그전에 쓸데없이 우울하게 힘 빼고 있냐?”
“정말 그럴까요?”
이,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힘을 축적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쓰겠다는 대사형의 말도 나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분명 그런 게 이상적인 행 동’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누구나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 상황을 아직 지배하에 두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자신감과 그걸 뒷받침해 줄 만한 실력과 경험이 있어야 할까??
하지만 역시 속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난 예린을 믿어.”
남궁상은 그 기습적인 한마디에 폭주하는 사고를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웃고 있는 비류연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뭘 그렇게 새총 맞은 참새 같은 눈으로 쳐다보냐?”
“상대는 괴물처럼 강한 사람들이라고요.”
“예린도 충분히 강해졌어. 그 아줌마들이 떼로 덤비지 않는 이상 죽거나 하지는 않아, 절대로!”
“그러다가 혹시라도 진령이나 나 소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실 건데요?”
“글쎄, 어떻게 할 것 같아?”
씨익, 비류연의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남궁상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져서 숨이 멎을 뻔했다.
“그, 글쎄요?”
남궁상은 어쩐지 저 싱글거리는 미소 뒤에 나올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쯧쯧. 똥 마려운 듯한 얼굴 하기는. 왜, 내가 그 놈들 다 죽인다고 하기라도 할까 봐?”
“그, 그게…….?”
정곡을 찔리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비류연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죽일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지. 그치?”
비류연의 입가에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는데도, 남궁상은 자기도 모르게 아랫니와 윗니를 딱딱 부딪쳤다. 차가운 얼음 같은 냉기가 그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하늘이시여! 제발 이 세상을 위해 그런 날이 오지 않게 해주소서! 이 인간은 한다면 하는 인간입니다!”
그때, 모용휘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다 좋은데 그전에, 따라붙은 이 꼬리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나, 류연?”
계속 이렇게 달리기만 해봤자 꼬리를 끊을 수는 없었다. 이쪽의 체력이 깎여 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장 아저씨, 꼬리가 몇 개인데요?”
“적어도 두 개 이상, 세 개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할걸세.”
적어도 두 개 조 이상을 움직이는 게 추적의 기본이기에 그리 추측한 것이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질문을 한 쪽은 장홍이었는데, 비류연이 쳐다본 것은 남궁상 쪽이었다. 남궁상의 심장이 자동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요?”
뭐라고 말도 안 했는데 조건반사처럼 남궁상의 목소리는 벌써 떨리고 있었다.
“궁상아, 추적대를 따돌리는 획기적인 방법이 있는데 가르쳐 줄까?”
그 말에 남궁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정말로?”
“그럼, 있고말고.”
“뭐, 뭔데요?”
비류연이 내놓은 해결책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웃어! 그러면 돼.”
씨익,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
이게 무슨 신종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순간 어이가 없어진 남궁상은 한참을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물론 상당히 획기적인 방법이긴 했다. 그게 획기적으로 돌아이 같은 짓이라 문제지만.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차마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남궁상이 소심하게 반문했다.
“없어, 왜?”
“그, 그야 말도 안 되니깐 그렇죠. 웃는다고 추적대를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건 단순한 ‘현실 도피’일 뿐이라고요.”
이 인간이 상식이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그건 남궁 선배님 말이 맞는 것 같네, 류연. 너무 엉뚱한 일일세. 무모하기도 하고.”
모용휘가 남궁상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나도 동감일세. 이런 야밤에 추격대까지 따라붙은 상황에서 웃으라니, 제정신으론 못할 짓이지. 해서도 안 되고. 그런 건 자살 행위야.”
쫓는 일에도, 쫓기는 일에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장홍도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넷 중에 셋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보통 이러면 자기 의견을 포기하는 게 정상이었으나, 비류연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다수결이 아니었다.
“좋아, 그럼 증명해 주면 되잖아? 웃는 게 진짜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것도 끝내주는 효과가!”
결국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자네 대체 뭘 할 생각인가?”
모용휘가 비류연을 향해 미심쩍은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우리 둔감 결벽증 왕자님도 이제 눈치가 많이 늘었네? 두 사람이 조금만 도와주면 돼.”
“나도 말인가?”
장홍이 떨떠름한 얼굴로 반문했다. 꽤나 하기 싫은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자 비류연이 장홍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소곤거렸다. 장홍은 눈이 점차 동그래졌다.
“’그거’라면 물론 있긴 있는데…… 진짜 할 생각인가?”
대답도 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비류연의 얼굴을 본 장홍은 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군.”
장홍의 승낙을 받은 비류연은 이번엔 남궁상 쪽을 쳐다보았다. 모용휘는 이미 승낙한 상태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자, 웃어봐.”
“제, 제가요?”
끄덕끄덕.
“지금? 여기서요?”
끄덕끄덕.
“궁상아, 네가 꼭 먼저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뺄거 없어.”
그런 말은 한 적 없다, 절대로.
그러나 싱긋 웃는 비류연의 목소리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자, 이제 웃어도 돼. 크게. 어때, 우는 것보단 낫겠지?”
미묘하게 끝 부분에 힘을 주어 말하는 비류연의 목소리에, 그간 긴장감과 짜증이 너무 높아져 잠시 제자리를 이탈했던 남궁상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 곤 자신이 방금 전 대사형에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하…… 하…….”
남궁상이 우는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 있어 제대로 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내키지가 않는데 웃음이 쉽게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어쩌 겠는가? 대사형이 까라면 까야지.
“하하…… 하…….”
남궁상은 좀 더 노력해 보았지만, 안면 근육이 마비되어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더 크게 얼굴을 활짝 펴고. 진심으로 웃으라고. 이렇게 말이야.”
웃으면서 다가온 비류연이 남궁상의 양쪽 볼을 잡더니 찰떡처럼 양쪽 위로 주욱 잡아당겼다.
“아야야야얏! 우과우과우과.”
남궁상이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에이, 누가 웃으랬지 울랬냐. 다시 한 번 입 모양 좀 잡아줄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자, 잘…… 못…… 했샤요…….”
“응? 뭐가? 뭘 잘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
““대…… 샤…… 영…… 잇… 슐… 찌죠… 져… 요…….”
“걱정 마, 사람 입이 어디 그렇게 쉽게 찢어지겠냐.”
남궁상의 볼을 늘어진 찰떡처럼 이리저리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비류연은 여전히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대사형의 뒤끝이 최강인 걸 잘 알면서……. 아욱!’
별다른 즉각적인 반응이 없기에, 좀 전까지 그만 무의식중에 수위를 높였던 게 화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남궁상은 자신의 조신치 못한 주둥아리를 한 대 후려 패주고 싶었다.
“이거 몇 달은 갈지도…… 어흑. 나 여기서 빠져나가도 무사할 수나 있는 거야?”
찔끔, 얼얼한 볼의 통증을 느끼며 눈물이 삐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핫하하하하하!”
겨우 집게의 마수에서 벗어난 남궁상은 몇 번의 재시도 끝에야 겨우 웃음 비슷한 것을 자아낼 수 있게 되었다.
“더, 더, 더 크게! 힘차게! 발랄하게! 다시 한 번 연습시켜 줄까?”
양손 엄지와 검지를 집게 모양으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에라잇, 될 대로 되라!’
남궁상은 이판사판의 마음이 되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똑같다고 느껴져서일까.
“후하하하하하하하하!”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멈춘 남궁상의 입에서 홍소가 터져 나왔다. 웃음에는 전염력이 있는지, 그 웃음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남궁상도 웃고, 장홍도 웃고, 한참 심각하게 인상을 찡그리던 모용휘도 웃었다. 마지막으로 비류연이 웃었다.
밤하늘이 떠나갈 듯.
그렇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
“아니, 저것들이 깡그리 미쳤나?”
무한 남문에서부터 비류연 일행을 뒤쫓고 있던 추격 전문 부대 흑견대의 총대장 ‘최강노졸(最强老卒) 흑견(犬)’은 저만치 앞쪽에서 숲 전체를 울리는 웃음소리 에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육합전성(六合轉聲) 수법이 가미된 탓에 정확한 위치를 판단하기 힘든 그런 웃음도 아니고,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도망치는 걸 깔보는 건가, 아니면 쫓아가는 우리들을 깔보는 건가? 혹은 쫓긴다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홱 돌아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냄새가 변했다.
그에게는 하늘이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천부적인 ‘후각이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에 노련한 경험이 더해지자, 쫓기는 사냥감의 상태를 이제는 냄새만으로도 파 악할 수 있었다.
긴박감을 가질 때 사람이 흘리는 특유의 체취는 평상시보다 좀 더 시큼한 법이다. 그런데 좀 전까지는 확실히 풍겨오던 긴장의 냄새가 별안간 끊어졌다. 대신 좀 더 상큼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종류의 인간들을 추적해 보았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떤 어둠도 그림자도 긴장도 긴박감도 없이, 맑고 높고 큰 그 웃음소리가 얄궂게도 그의 마음에 한 점의 의혹을 싹 틔우게 했다.
‘설마 함정인가??
한번 틔워진 싹은 점점 더 자라나기만 할 뿐, 좀처럼 시들려 들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의혹이 점점 더 커져가는 만큼 그의 발걸음도 점점 늦어졌다. 그의 추적 인생 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뜻밖의 사태였다. 명확한 확신이 서지 않다 보니 그의 발걸음은 자연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장이 늦어지면 뒤에 따르는 사람 도 자연 늦어지게 마련이다.
‘설마, 함정이기야 하겠어? 어차피 저쪽은 네 명밖에 없잖은가? 함정을 파기엔 수가 너무 적어.’
흑견은 서서히 줄어들던 추적 속도를 다시 높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엉킨 실타래처럼 아주 복잡했다.
“아, 젠장, 일이 왜 자꾸 꼬이는 거지? 이게 아닌데, 이게.’
이렇게 대놓고 하는 추격이 아니라 좀 더 은밀히 진행되는 추격이 그가 맡은 본연의 임무였다.
그런데 완전히 예정이 뒤틀리고 말았다.
으이그, 최와와! 그 덜렁이 놈만 아니었어도! 부부대장씩이나 된다는 놈이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해?”
알람 방울을 설치한 놈은 분명 뭔가 뒤쪽 세계의 경험이 있는 놈이 분명했다. 쫓는 입장이다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틈을 놈들이 역으로 찌른 것이다. 흑견은 돌아가서 정신 교육을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탓인지, 어느새 부하 녀석들의 군기가 상당히 빠져 있었다. ‘기초부터 다시 단련시켜 주마! 깨갱 소리도 안 나올 정도로! 특히 최와와! 이 입만 산 머저리 같은 놈! 넌 이미 죽은 거다, 이 자식!’
***
“난 죽었다. 이제 끝장이야!’
오한과 한기에 벌벌 떨며 최와와는 추격을 계속했다. 하지만 불안감에 가득 찬 채 식은땀에 절어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누가 쫓는 자고 누가 쫓기는 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쌓아왔는데…….”
간신히 흑견대 부부대장까지 올라 이제 부대장 백구만 제치면 위풍당당한 2인자가 될 수 있는 이 순간에, 은밀하게 추격 중이던 추격물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리 다니! 기분 같아서는 실수한 발목을 잘라내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 실수를 만회해야 해.’
최와와는 자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조의 안위를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그 자신 이외의 상황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는 좁쌀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상할 정도로 큰 그림자가 발밑에 드리워져도, 그 그림자가 하나둘씩 부하들을 소리 소문 없이 집어삼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중얼거리고 있던 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을 때까지 말이다.
“안녕하세요.”
눈까지 가리는 저 앞머리, 추적 대상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뭐가 좋아 저리 웃고 있단 말인가? 일단 생포해 놓고 볼 일이었다.
“얘들…… 아?”
그러나 뒤를 돌아본 최와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없었다, 아무도.
십인 일조로 움직이던 그의 조원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쯧쯧, 이렇게 둔한 놈이 어떻게 추종(追從) 전문 부대에 들어갔는지.”
장홍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퍽!
그리고 최와와는 모용휘의 손놀림 한 번에 정신을 잃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류연?”
모용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발 살인멸구 같은 짓만은 시키지 않기를 내심 바라면서.
“벗겨.”
“뭐, 벗으라고?”
뜨악한 목소리로 모용휘가 반문했다.
“벗기라고.”
비류연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바른생활 친구도 지금 정신이 확실히 딴 데 가 있긴 가 있는 모양이었다.
“장 아저씨랑 궁상, 너도 도와.”
비류연도 세 사람과 함께 재빨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는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했다.
“류연, 자넨 왜 품속부터 뒤지는 건가? 그것도 차례차례.”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긴 뭐가 아닌가? 아까부터 무사들 품에서 자네 품으로 뭔가가 옮겨가는데?”
“다 나중에 도움이 될 게 없나 살펴보려는 거죠.”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손놀림을 쉬지 않는다.
“돈 되는 물품 찾는 건 아니고?”
비류연은 더 이상 그런 수준 낮은 말에는 응답하지 않겠다는 듯 장홍의 말을 싹 무시했다.
“빨리 벗겨요, 시간없으니.”
열 명의 흑견 대원들은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누워서 대지의 기운을 흠뻑 빨아들일 수 있는 자연 상태가 되었다.
손이 썩을지도 모르니 최후의 속곳은 건드리지 말자던 모용휘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되었고, 그 일은 나중에 모용휘가 술을 산다는 조건으로 장홍과 남궁상이 해치 웠다.
최와와를 비롯한 아홉 명의 흑견대 제삼대 대원들은 이미 반쯤 의식이 돌아와 있었지만, 마혈을 짚여서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상태였다. 정신을 차릴 때 느꼈을 그들의 황망함과 정신적인 충격에 애도를 표하며, 모용휘는 눈을 버릴까 두려워 시선을 돌렸다.
“약간의 주저함이 일을 망치는 거야.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 하는 법이라고.”
피도 눈물도 없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비류연이었다.
“어쩌겠나? 이대로 두면 얼어 죽을 텐데? 그렇다고 옷을 돌려줄 수는 없고.”
장홍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흑천맹 쪽에 인명 피해가 나는 사태는 최대한 자제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묻어버리죠, 뭐.”
“생매장하자는 뜻인가?”
그 발상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장홍이 반문했다. 비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네…… 정말 좋은 생각이군!”
이 아저씨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시선을 모용휘와 남궁상이 보냈지만, 장홍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훗, 내가 좀 천재죠.”
진실만을 말하는 자신이 너무나 두렵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나 한술 더 뜨는 비류연이었다.
“우웁, 우우우, 우웁!”
“뭐라는 거예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잡종들아, 당장 이거 풀지 못해, 산 사람을 생매장하려 하다니, 그러고도 네 놈이 사람이냐, 라는군.”
마치 책을 읽는 듯한 어조로 장홍이 말했다.
와작!
그 순간, 최와와의 머리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돌덩이 하나가 비류연이 찍어 내린 발에 밟혀 가루가 되었다.
“이런. 옆에 있는 머리통을 밟으려 했는데, 실수로 돌을 밟고 말았네.”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비류연이 혼잣말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당신의 개가 되겠습니다, 왈왈, 이라는군.”
또다시 고저없는 목소리로 장홍이 최와와의 소리없는 말을 읽어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류연이 말했다.
“묻어.”
흑견대 대원들은 곧 목만 밖에 내놓은 채로 땅에 묻혔다. 멀리서 보면 갑자기 숲속에 수박 밭이 생겨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 다음으로 넘어가죠.”
***
하나가 사라졌다.
둘이 사라졌다.
셋이 사라졌다.
그리고 넷이 사라졌다.
“누구냐!”
제이 추적조를 이끌고 있던 부대장 백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도를 뽑으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오호, 이번엔 반응이 좀 있군.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거나 하진 않아.”
“어, 어디냐?”
그 순간 그가 딛고 서 있던 숲의 그림자가 출렁이더니, 검은 그림자가 뻗어 나오며 백구의 도를 쥔 손을 감쌌다.
신(神)의 숨박꼭질
카미카쿠시의 술[神隱/術]
카게쿠이
개명(改名)
신은술(神術영식
“이, 이건?”
그다음 순간, 그림자가 일제히 솟구쳐 오르며 백구의 전신을 뱀처럼 휘감고는 꽉 조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머리가 길고 검은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누구냐?”
“그건 알 거 없고.”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청년이 싱긋 웃었다.
퍽!
그리고 캄캄한 암흑이 백구를 덮쳤다.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온 백구는 최와와의 최후처럼 땅 위에 목만 내놓은 채 파묻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웁…… 우웁.’
아혈이 제압되어 있는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모두가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뿐만 아니라 제이조의 나머지 아홉 부하들 모두 그와 똑같이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내가 당한 그 기술은 뭐지? 그림자를 조종하다니……. 중원 무림의 기술이 아니었어. 설마 해외(海外)의 기술인가…….’
분노보다도 솔직히 감탄이 먼저 앞섰다. 그들 같은 전문가를 이렇게 기척없이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그런 그림자 기술은 은신잠 행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 그림자 기술을 쓴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백의청년 둘은 딱 보기에도 도련님 체질이라서 그런 기술은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저 검은 옷의 청년, 혹은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 내, 그 둘 중 하나였다.
그때, 빛바랜 무복을 입고 있던 아저씨가 입을 열더니 옆에 있는 청년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자네, 점혈은 확실히 해줬겠지?”
“걱정 말아요. 확실히 해뒀으니까 앞으로 열두 시진은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자네 점혈 실력은 별로잖나?”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발끈했는지 검은 옷의 청년이 퉁명스레 답했다.
“왜 이래요? 나도 점혈 잘해요. 다만 남들처럼 쫀쫀하게 손가락으로 콕콕 찍는 대신 화끈하게 주먹을 써서 그렇죠.”
“그건 이미 점혈의 영역이 아니잖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구타라고 부른다네.”
혀를 차며 말하는 무복사내의 말을 흘려 넘기며, 검은 옷의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기절했으니 됐잖아요.”
“자넨 아혈을 짚으라고 하면 주먹으로 아구창을 날릴 사람일세.”
그렇게 핀잔을 주는데도 달리 부정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적어도 조용해지긴 하잖아요?”
뭐 저딴 놈이 다 있을까. 백구는 저런 놈하고는 평생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는 최악의 형태로 이미 저런 인간과 마주쳐 있는 듯했다. ‘그래도 부대장 급쯤 되면 해혈법 몇 가지는 숙지하고 있지.’
저 겉늙은 사내의 말마따나, 검은 옷 청년의 점혈이 불안하다면 해혈이 수월할 수도 있었다.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잠시 후.
“됐다.”
백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점혈이 풀린 것이다. 굳어 있던 혀가 풀리기 시작하는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좋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 흑견대 부대장 백구, 비록 오늘 이 목숨이 다한다 해도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리라. 난 그 불성실한 노폐물 대장님이랑은 달라!’
백구는 입술을 오므린 다음, 내공을 모아 힘껏 바람을 불어냈다.
피이이이이이이익!
맑은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깜짝 놀란 장홍이 급히 몸을 돌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백구는 그의 느린 대처를 비웃기라도 하듯 곧장 소리쳤 다.
“대장님! 적사! 이대 전멸! 급!”
내공을 실은 외침이었기에, 이런 고요한 밤이면 충분히 흑견에게도 전달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어떻게 점혈을 풀었지?”
장홍이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백구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의 입가에선 임무 완수에 대한 진한 만족감이 깃든 미소만이 맴돌 뿐이었다.
이내 장홍은 체념한 듯 손을 떼어버렸다.
“하하하, 이제 곧 우리 흑견대의 정예가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네놈들에게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다. 하하하하하!”
실로 통쾌하다는 듯 백구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모두 땅에 묻히고 목만 밖으로 나와 있어도 백구는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해 낸 것이다. 하지만 겉늙어 보이는 사내는 그의 웃음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흥, 겨우 흑견대 잡졸들만으로 우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너무 무르군.”
“하하, 흑견 대장님이 계신데 무엇이 두렵겠느냐!”
“허허, 흑견 따위가 뭐가 대수라고. 그 검은 개는 이미 우리들의 손에 곤죽이 되지 않았느냐? 멍멍탕이 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장홍이 백구의 믿음을 비웃었다.
“하하하, 한 번 일부러 져줬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것 아니냐? 흑천십비란 칭호를 야바위로 따냈는 줄 아느냐? 주제들을 알아야지! 대장님이 진짜 실력을 내면 너 희들은 모두 끝장이다.”
잠시 표정이 굳어 있던 장홍이 비류연과 모용휘, 남궁상을 바라보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어땠나? 내 연기?”
비류연이 웃으며 엄지를 치켜올려 주었다.
“감쪽같던데요? 완전히 속여 넘겼네요.”
“…….”
모용휘, 남궁상도 입을 다문 채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주었다.
그 세 사람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묻혀 있던 백구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소, 속았다니?”
불길한 예감이 백구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 궁상, 휘. 이제 차음막을 걷어도 돼.”
백구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비류연이 지시했다. 그제야 모용휘와 남궁상은 진기를 이용해 펼쳤던 기의 장막을 거두었다.
“차음막이라고… 그럴 리가……. 그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기술인데…….?
어떻게 저렇듯 젊은 애송이들이 펼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지만, 그의 말에 대한 무시는 계속되었다.
“역시 그 아저씨, 일부러 져줬던 거군. 어쩐지 손맛이 평소랑 다르더라니.”
“허, 거참. 패는 데 손맛이 따로 있단 말인가?”
지속적인 무시에 장홍이 가세했다.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다 다르지. 그게 어떻게 같을 수 있어요? 모든 돼지들이 다 맛이 다르듯 손맛에도 다 개체 차가 있다고요. 아까는 왠지 뼛속까지 가서 닿는 게 아니라 거죽만 훑는 느낌이어서 찝찝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됐으니 개운해졌네요.”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봐, 날 무시하는 건가? 어이, 내가 누군지 아나? 흑견대의 부대장 백구가 바로 나야. 난 아직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백구는 정보 계통에 종사하는 전문가인 자신이 이렇듯 어린놈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류연 일행은 그의 말에 신경을 쓸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목표물, 검은 개만 남았네요.”
여기까지는 단지 예습에 불과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본편인 것이다.
“야! 이봐! 어이! 여보세요?”
퍽!
순간,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백구의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흑견은 지금까지 묻어버린 끄나풀들과는 질이 달랐다. 그자를 생포하려면 이 둘에게 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 * *
추적을 위해 편성한 삼 개 조 중 이 개 조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흑견은, 어떻게 하면 큰마님께서 오랜만에 내려주신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에 대 해 심각하고 심도 깊은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길잡이들이 경계하면 곤란한데. 이래서는 임무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겠는걸. 그래서는 아주 곤란한데. 일부러 놓아주는 것도 쉽진 않군.”
그의 원래 역할은 사실 그들에게 일부러 진 것처럼 하고 그들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요란한 추격전은 흑견이 원하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우뚝 멈출 수도, 또한 적당히 추격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저쪽의 의심을 살 것이기에 곤란했다. 게다가 이렇게 경공의 속도가 지나치게 올라간 상태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너무 많은 거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걱 정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아가씨들을 따라간 제이대 녀석들은 잘하고 있겠지? 이대 대장인 맹견(猛犬), 그 녀석이라면 잘할 게야. .잘하겠지??
맹견 그자는 흑견이 보기에도 성격이 정말 개 같은 녀석이라, 포위나 매복은 물론이고 그다음 순서인 집단 다구리 같은 일에는 이골이 나 있는 놈이었다.
“그 맹구 녀석이 아가씨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가끔 입을 함부로 놀려서 ‘맹구(猛口)’라 불린다는 점이었다.
‘맹구야, 제발 싼 입 좀 간수해라. 저렴한 입 잘못 놀렸다가는 네놈 목숨마저 저렴하게 바뀔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곱째 아가씨 성격도 보통이 아니시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여섯째 아가씨지. 그 괄괄한 말괄량이 일곱째 아가씨도 조용한 여섯째 아가씨한테는 꼼짝 못하니까 말이야. 이럴 때 천견(天犬) 그 녀석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아, 에잉. 불효막심한 놈!’
바로 그때였다.
“웬 놈이냐!”
촤악!
흑견이 검은 밧줄을 채찍처럼 휘두르자, 전방의 풀숲이 단숨에 반 토막 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는 부상을 당한 참혹한 몰골이었는데, 그의 왼쪽 가 슴에는 검은 개 모양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흑견 대, 대장님…….”
그 흑견대 대원은 절뚝절뚝 힘겹게 걸어오더니, 흑견 앞에서 긴장이 풀렸는지 풀썩 쓰러졌다.
“정신 차려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모두…… 당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사내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당하다니? 그놈들은 겨우 넷밖에 되지 않질 않느냐?”
다급한 목소리로 흑견이 물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정신이 팔렸다가…… 그만 기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고 있던……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저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네 명에게!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큰마님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이냐!”
흑견대 대원이 순간 움찔했다.
웃음소리는 함정이었고, 그동안 그들 중 일부가 되돌아와…… 방심
“이,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일부러 놓아줘서 고맙다. 하지만…… 쫓아와도 헛수고일 거다. 미안하다.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고 말입니다.” “그놈들이 감히 날 놀려!”
성질이 폭발한 흑견이 귀견후를 토해냈다.
“어,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에잇, 부끄럽고 치욕스러워 어떻게 그 일을 큰마님께 알린단 말이냐!”
흑견대 대원은 흑견이 터뜨리는 노성에 머뭇머뭇하면서도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건 오히려 큰마님을 능멸하는 일이…… 그 사실을 나중에 아시면 큰마님이 가만히 계실는지…….”
그 말에 흑견이 움찔했다.
“정 안 되면 큰마님이 아닌 다른 분께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흑견대 대원은 성실하게도 대안까지 제시해 주었다. 처참한 부상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 말 저 말을 참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경황이 없다보니 그 누구도 이상 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알았다. 여봐라, 즉시 셋째 아가씨께 전서구를 띄워라.”
흑견은 서둘러 명령을 내린 다음 다시 물었다.
“어떤 자였느냐? 어서 말하거라.”
다급한지 재차 답을 재촉하는 흑견이었다.
“이상한 기술을 쓰는 자였습니다. 중원에서는 본 적이 없는 기술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기술이었느냐?”
“그건…… 쿨럭! 쿨럭!”
지금까지 잘만 말하던 사내가 갑자기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격하게 기침을 터뜨리자 피가 튀었다.
“안 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얘기를 하고 죽거라!”
흑견의 말은 가차없었다.
“그건 이런…… 기술이었습니다, 욥.”
“뭐?”
부축을 받고 있던 사내의 소매가 갑자기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흑견의 양팔을 휘감아 봉쇄하려 들었다.
“이, 이건!”
급히 공력을 운용한 흑견은 휘감겨 드는 소매의 마수로부터 오른팔을 뽑아 올렸다. 무기를 쥘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뽑아 올린 우권을 그대로 앞으로 내질렀 다.
피육!
일격을 내지름과 동시에 그의 소매 안에 숨겨져 있던 뾰족한 철(鐵)이 사내의 이마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사내는 고개를 왼쪽으로 꺾어선 날아오는 철정을 교묘하게 피한 다음, 금나수를 펼쳐 흑견의 오른손목을 낚아채려 했다.
“어딜 감히!”
흑견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박룡삭 끝이 쥐어져 있었다. 철정을 쏜 것은 박룡삭을 잡기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룡삼십육식縛龍三十六式)
독비(獨臂)삼절초(三絶招)
제삼십삼초(第三十三招)
쌍룡양박(雙龍兩縛)
오른손에 들려 있던 흑오박룡삭이 빙글빙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사내와 흑견을 동시에 꽁꽁 묶었다.
“흐흐흐. 어떠냐, 요놈아! 이제 꼼짝도 못하겠지?”
밧줄이란 채찍처럼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지만, 포박술은 범인을 생포하는 기술에서 나온 만큼 근접 거리에서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단 두 손이 멀 쩡할 때 말이다.
섬세한 손기술을 요하는 묶기 기술에서 한 손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는데, 독비(獨臂) 삼절초는 말 그대로 한 팔, 독비(獨臂)만으로 근접 거리에서 적을 사로잡을 수 있는 흑견 비장의 기술이었다. 그중에서도 쌍룡양박은 적과 나를 동시에 묶는 동귀어진에 가까운 위험한 기술로, 상대의 양팔을 봉쇄하고 자신의 한 팔 은 최후의 일격을 위해 남겨놓는 것이 그 정수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잡아다가 네놈의 모든 걸 실토하게 만들어주마!”
활검(劍) 같은 거창한 기술과는 달리, 산 채로 사로잡아 화기애매한 고문을 가한 끝에 상대방이 가진 정보를 불게 하는 것이 박룡십삼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 다.
박룡삭에 묶인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귀하는 한 팔만으로 밧줄을 부릴 수 있는 모양이구려. 하지만 이 사람의 그림자는 두 팔이 없어도 가능하지요.”
“뭣이?”
순간, 사내의 발밑에 있는 그림자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신은술(神隱術
영사삭
그림자 묶기[縛의술
묵영포박(墨影捕縛)
파라라라락!촤라라라락!
다시 그림자가 솟구치며 흑견의 박룡삭을 든 오른손을 꽁꽁 어둠으로 감쌌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문 채, 양쪽 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흑견에게는
아직 부하들이 남아 있었다.
“야, 당장 이놈을 생포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맨 처음 보인 부하를 향해 흑견이 고함쳤다.
“야, 라니 너무하네요. 상대를 좀 더 존중해야 부하들이 따르는 법이라고요.”
“뭐, 뭐라고?”
이게 대체 어디서 울려 퍼지는 맑고 고운 개소리란 말인가? 흑견은 살기를 번뜩이며 눈을 부라렸지만, 그 부하는 오히려 혀를 차며 틀렸다는 듯 들고 있던 방망이 를 좌우를 흔들었다.
“쯧쯧, 고함치고 윽박지른다고 아랫사람들이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제 구식이에요, 구식.”
그제야 흑견은 눈치챘다. 뭔가 이상했다. 다른 대원 놈들은 어딜 가고 이놈 혼자만 내 뒤에 서 있는 거지? 아니, 저렇게 앞머리가 치렁치렁한 놈이 우리 부대에 있 었나?
“이 우라질 놈이! 네놈의 정체가 뭐냐?”
“이런이런, 자기 부하도 못 알아보다니 섭섭하네요. 이딴 걸 대장이라고, 흑.”
이, 이딴 것! 흑견의 얼굴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난 너 같은 놈, 수하로 둔 적 없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쯧쯧, 기억상실이네요. 긴급 치료가 요구됩니다.”
“자, 잠깐! 그 몽둥이로 대체 어쩔…..”
비기(秘)
무허가(無可기억회복비술(記憶回復秘術)
부―웅!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입가를 한쪽으로 치켜올리는 웃음, 그리고 치료라는 이름하에 그의 머리통을 내려친 속이 꽉 찬 몽둥이의 일격이었다. 뻑!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흑견의 의식이 어둠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천천히 기울어지며 어두워지는 시야 속으로 바닥에 쓰러진 부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는 완전히 기절했다.
“수고했어요, 아저씨.”
흑견대 옷을 입은 청년은 박룡삭이 풀려 나가 자유의 몸이 된 사내를 보며 말했다.
“후우.”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러자 상당히 겉늙어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첫 번째로 흑견 앞에 나타났던 사내, 그는 바로 장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단한 방망이로 흑견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친 청년은 당연히 비류연이었다.
변장에 일가견이 있는 장홍이 흑견대 대원 중 하나로 분장하고 흑견의 정신을 쏙 빼놓는 동안, 똑같이 흑견대 대원 옷으로 갈아입은 비류연, 남궁상, 모용휘가 흑 견의 부하들을 처리한 것이다.
“장형님, 다시 봤습니다. 그런 대단한 비술을 지금껏 숨기고 계셨다니, 소제는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남궁상이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이고,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선배.”
장홍이 이러지 말라며 허리를 굽힌 남궁상을 말렸다.
“아닙니다. 흑천십비의 한 명을 이렇게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제압하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대사형이 단순한 변태 아저씨가 아니라고 했을 때 믿지 않았었는데, 제가 성급했습니다.”
장홍의 숨겨진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남궁상이 그의 실력을 엿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
장홍은 뭔가 남궁상의 말끝에 담겨 있었던 미묘한 부분에 울컥할까 하다가, 바쁜 틈이니 흘려 넘기기로 하고 그저 한숨을 쉬며 비류연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보게, 류연 이 친구야. 자네 방법대로 했다가는 기억상실이 낫는 게 아니라, 있던 기억도 잃어버리기 십상이겠네.”
뒤통수에 따끈따끈하고 커다란 혹을 단 채 널브러져 있는 흑견을 자못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장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앞통수는 제대로 남겨놨잖아요?”
그의 말마따나 그렇게 맞은 것치고는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멀쩡했다.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군.”
어째서인지 한숨이 오 할, 진절머리가 삼 할쯤 섞인 감사를 건넨 다음, 장홍은 품속에서 얇고 네모난 서책 정도 크기의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부드 러운 회백색 반죽이 꽉 들어차 있었다.
“실례하겠소.”
장홍은 회반죽 상자를 흑견의 얼굴 위에 대고 쿡 찍었다. 회백색 반죽이 부드럽긴 부드러운지, 흑견의 얼굴이 마치 회반죽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푸욱 박혔다. “그건 뭡니까, 장형?”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남궁상이 물었다.
“별거 아니라네. 일종의 휴대용 가면 제작 놀이 도구 같은 걸세. 신경 쓰지 말게.”
“휴대용 가면 제작 놀이?”
열다섯을 센 다음 장홍은 다시 상자를 들어냈다. 그 안에는 흑견의 얼굴 모양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장홍은 꽤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는, 품속에서 자기병을 꺼내 그 틀 안에 붓고는 얇고 곱게 폈다.
“이제 끝났네. 남은 건 말리는 것뿐일세.”
장홍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때 모용휘가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흑견의 비중은 다른 둘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단 벗겨.”
“또 벗기는 건가?”
떨떠름한 표정이 된 모용휘에 비해 비류연의 대답은 단호했다.
“당연하지. 이번이 월척인데, 비늘 한 장이라도 남겨둘 순 없잖아?”
“땅도 옆에다 같이 팔까요, 대사형?”
남궁상이 확인하듯 묻는 질문에, 잠시 주위에 쓰러진 흑견대 대원들을 한차례 둘러본 다음 비류연이 말했다.
“아니, 어렵게 잡은 월척인데 벌써 방생할 수는 없지. 데려간다.”
“데려간다고? 우린 뿌리쳐야 하는 추적도 있고, 구출해야 하는 대상도 있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별 도움도 안 되는 인질이라니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 나?”
장홍이 반박했다.
흑견이 제아무리 흑천십비의 하나라 해도, 인질의 관점에서는 그리 유용하지 못했다. 흑천맹에는 십대고수가 열이나 있지만 백도의 맹주는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 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혹을 달고 다니다가는 발목 잡힌다고요.”
“알면 굳이 설명할 수고가 줄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장홍의 말에 비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데려가기로 하죠.”
.설명하는 수고는 줄었지만, 결론이 제멋대로면 의미가 없었다.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겠죠. 여차하면 몸값이라도 받아내죠, 뭐.”
“우린 구출대지 납치공갈대가 아닐세.”
“쯧쯧, 이 아저씨가 전쟁도 안 해 보셨나? 원래 전쟁 포로를 교환할 때는 비슷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에요. 사람 목숨이 없으면 돈으로 해야 하는 게 상식이 라고요, 상식. 왜냐고요? 고수를 다시 키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 오는 게 더 이득이거든요. 그게 절정고수라면 더 말할 것도 없죠.”
고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짜로 이루어지지도 않는 법이다. 시간과 비용을 잡아먹는 괴물이 바로 절세고수라는 인종이었다.
“하아, 할 수 없지. 그리하세.”
***
그러나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흑견을 데리고 경공을 전개해 한 이각 정도 이동했을 때, 갑자기 비류연이 멈춰 섰다.
“왜 그러나?”
“이곳이 좋겠어요. 묻고 가죠.”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이제야 딴소리하긴가?”
장홍이 혀를 차며 하는 말을 무시하며 비류연은 남궁상에게 말했다.
“세로 5척, 가로 2척 4촌, 깊이는 적당히 파라, 궁상아.”
“그건 관 크기 아닌가? 진짜 생매장이라도 할 셈인가?”
흑견은 눈을 부릅떴다. 의식은 명료하니 말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차라리 단칼에 죽여라, 이 씹어 먹어버릴 나쁜 놈아!
“임시로 보관해 놓는 건데 잃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임시? 보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지만, 일단 파기로 했다. 파는 역할은 남궁상과 장홍에게 돌아갔다. 궁상이야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만, 장홍은 땅 파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몸에 밴 비밀주의 때문에 내색은 안 하지만 따로 토둔계(土遁系) 공력(功力)을 익힌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 다 흙더미가 조용한 파도처럼 솟구칠 리가 없었다. 이것도 해외 유학의 성과일까.
“인간 굴착기가 따로 없네.”
금세관 하나를 묻기에 딱 좋은 구덩이 하나가 생겼다. 비류연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흑견을 그 안에다 뉘었다.
“자, 다들, 덮죠.”
한쪽에 쌓여 있던 흙무더기를 다시 구덩이 안에 쏟아 넣으며 비류연이 다른 사람들까지 동원했다.
“야, 이놈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쳐죽일 놈들아! 차라리 거기 있는 짱돌을 들어 내 머리통을 그냥 내려쳐라, 이 썩어 문드러질 놈들아!’
흑견은 안에서 바둥바둥 몸부림쳤지만, 마혈이 제압당해 있는 터라 한계가 있었다.
“아이 참, 다 큰 어른이 엄살은. 자요.”
비류연이 흑견의 입에 꽂아준 것은 속이 빈 가늘고 긴 대나무였다.
“그거 삼 단으로 접히는 좋은 물품인데.”
참으로 아깝다는 투로 장홍이 투덜거렸다.
“이제 됐죠? 눈 감아요. 눈에 흙 들어가니까.”
그렇게 매장은 완료되었다. 그 위로 튀어나온 것은 긴 세죽(細竹) 대롱뿐이었다.
“자, 이제 우리 볼일을 보러 가자고요.”
비류연이 힘차게 팔을 쭉 뻗으며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저런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은 어디서 샘솟는 건지. 졌다, 졌어.”
남궁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저런 대사형이 괜찮다고 했으니 진령도 괜찮겠지??
그나마 그것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령은 지금 별로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지금 자신들의 앞에 놓인 위험도 모른 채 어두운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