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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운차이는 눈을 떴다. 그러자 곧 헬브라이드는 덜컥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으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쿠다당. 운차이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헬브라이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Ahn choudarii. Nanysanchee ama Rekijarklapi………… Pecaii!”
헬브라이드는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와 누운 자세의 중간쯤 되는 자세를 자연스럽게 유지하며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운차이는 롱소드를 팍 들어올려 헬브라이드의 가슴을 겨냥했다. 헬브라이드는 마치 검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Ahn choudarii!”
“으아아아아아!”
헬브라이드는 땅을 박박 긁으며 뒤로 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날개가 있으면서 날아오를 생각도 못하고 있다. 운차이는 즉각 앞으로 뛰며 사납게 롱소드를 휘둘렀다. 은제 롱소드에서 번뜩이는 살벌한 검광에 암흑의 신부는 가중된 공포를 느꼈다. 운차이는 맞추기 위해 휘두른다기보다는 겁주기 위해 휘둘렀지만 이미 겁에 질린 헬 브라이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뒤로 기어가다가 곧 쓰러졌고 그대로 몸을 굴려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구르느라 뽑혀나온 깃털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졌 다. 스카일램은 입을 딱 벌렸다.
오크들은 갑자기 일어난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헬브라이드는 오크들의 대군이 앞을 막아서자 그제야 날개를 펼쳐 비틀거리며 날아올랐다. 몇 번이나 제대로 못 떠오르고 위태위태하게 날개를 퍼덕이던 헬브라이드는 간신히 오크 무리와 충돌하지 않고 날아올라 곧 하늘 저편 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오크들은 멍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헬브라이드를 바라보다가 새로운 공포를 느끼며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옆으로 적당히 늘어뜨린 자세였다. 게 다가 조금 비스듬하게 서서는 삐딱한 눈길로 오크들을 쏘아보았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스카일램에게서 숨소리 같이 낮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록크로스 해변의………….”
흐음. 스카일램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유명한 모험을 이야기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록크로스 해변에서 300여 마리의 오크들과 대치하던 루트에리노 대왕은, 사실 등 뒤에 핸드레이크라는 엄청난 지원 세력을 갖춘 상태였지. 지금 운차이는 혼자서 100마리의 오크들과 대치하고 있다.
발이 움직이고.
운차이는 스르르 걸어갔다. 적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는 그냥 그렇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무서운 시선은 오크들을 물러서게 하고 있었다. 오크들은 달아나버리는 헬브라이드의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지금 헬브라이드를 달아나게 만든 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있다.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취에엑! 괴, 괴물 눈알이다!”
오크들은 당황하며 물러났다. 호위 대원들의 탄성 소리가 높았다. 오크들은 떨리는 글레이브를 내밀어 운차이를 겨냥하긴 했지만 앞으로 걸어나올 생각은 못하고 있 었다. 그중 한 오크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취에에엣! 한 놈이다! 덤벼라!”
그러나 오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오크가 외쳤다.
“안 돼, 안 돼! 췻취치익! 괴물 초장이는 아직 나오지도, 취익, 않았다! 췻취!”
그러자 곧 오크들은 외경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으로(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언덕 위의 나를 쳐다보았다. 난 되도록 험악하게 보이기 위해 콧김을 푸릉거리 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목이 부러져라 뻣뻣하게 뒤로 젖혀 오크들을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내 모습을 보더니 곧 입을 틀어막고 뒤로 달려가 버렸지만 다른 호위 대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활을 잔뜩 당겼다. 빠아아아.
언덕 위에서 겨냥된 20여 개의 활보다는 나 때문에 더 겁먹었다면 내 자존심에 도움이 되겠지. 오크의 속마음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크들은 괴물 초장이 와 괴물 눈알이라는 심리적인 공포와, 그리고 스무 개의 활이라는 현실적인 두려움 때문에 달려들지 않았다. 그놈들은 서서히,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운차이가 고함을 질렀다.
“Peca!”
오크들은 괴성을 지르며 용맹스럽게 뒤로 돌아 달려갔다.
“취이이익!”
스카일램 트리키 호위 대장은 자신이 호송하는 죄수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현해야 했다. 혼자서 눈짓만으로 100마리의 오크를 달아나게 만든 죄수니까. 그런 이상 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스카일램은 품위를 잃지 않고 정중히 운차이에게 감사했다. 멋진 군인이야.
일스 공국으로 출발하는 사절을 맡겠다는 칼의 말에 닐시언 전하는 크게 기뻐했다. 아마 그는 칼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칼은 자신이 델하 파의 항구에 들러 붉은 머리의 소녀를 만나보기 위해 그 임무를 수락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성은에 어긋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신임장 수여, 임명장 수여, 아샤스에 대한 감사와 축원의 기도, 빵빠방 빵빠방, 좀 시끄러워지고, 제법 요란해지고, 꽤 번쩍거리고, 그리고 우리는 약간 우중충한 날 씨에 바이서스 임펠을 출발할 수 있었다.
인원은 간단했다. 칼의 말, 아니 펠레일의 말에 의하면 바이서스로서는 12월까지 루펠만 해안을 차지하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일스 공국과의 회담은 최대한 빨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로서도 급하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품위나 예의는 잠시 접어두고 최대한 빠른 진행을 위해 단순하게 구성했다. 칼은 설명했다.
“원래 국가 사절에는 상인, 학자,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음악가, 미술가, 작가 등 온갖 종류의 예술적 소양을 덧붙일 수 있는 사람들이 따라다닌다네. 그것은 사절의 품위를 높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두 나라간의 문화 교류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지. 하지만 지금은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그렇게는 못한다네.”
먼저 스카일램 트리키 자작이 20명의 호위 대원들과 함께 우리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바이서스 사절인 칼, 그리고 샌슨과 나, 이루릴, 네리아가 함께 가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패밀리어의 죽음으로 심한 충격을 받아 요양해야 했으므로 우리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엑셀핸드는 그런 아프나이델을 간호하기 위해 남았다. 칼 은 길시언에게 함께 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길시언은 자신의 말에 충실했다. 자신에겐 위험이 따라다니므로 수도를 벗어나서까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말. 그래서 우린 길시언과 아쉽게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일스 공국에 가서 증언하기 위해 자이펀의 간첩인 운차이가 우리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운차이는 호송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스카일램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들은 동행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저녁 식사 시간에 샌슨과 운차이가 서로 건배를 나누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스카일램 씨가 이빨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올 정도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어 차마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진 못했지만, 샌슨은 그 대신 술잔을 들고 호송 마차로 걸어가 마차 안에 있는 운차이에게 잔을 건네주고 철창 사이로 건배함으로써 스카일램을 괴롭히고 있었다.
“죄수에게…………, 주류를 지급할 수는 없습니다.”
스카일램은 그렇게 말했지만 샌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취한 사람이 어떻게 달아나요.”
스카일램은 분통이 터질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샌슨, 네리아, 이루릴에게는 공식 직함이 없다. 일괄적으로 수행원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스카일램은 샌슨에 대해 자신의 위치를 정 확히 정할 수 없어서 분통 터지는 모양이다. 스카일램도 엄밀히는 수행 무관이지만, 샌슨도 하는 행동으로 보면 수행 무관이다(우헤헤. 나도 그렇지 않나?). 그러나 스카 일램은 공식적인 호위대의 대장이며, 따라서 그에게 샌슨은 받들어 호위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 ‘군인’ 스카일램은 이런 불명확한 관계가 그렇게 유쾌하 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확실한 상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호위 대원들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물론 불쌍한 스카일램 씨는 사병들 노는 곳에 상관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확 인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우거지상을 하고는 우리들이 몰려 있는 횃불가에 앉아 있었다.
이루릴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이의 얼굴이 검붉다.
탁탁 튀는 불티들이 잠깐의 자유와 극도의 열정을 허공에 그리고 있다. 불티의 탄생, 비약, 정열, 소진. 저것도 하나의 생애라면, 저 불티는 우리 인간을 너무 느려터 지고 답답한 놈들이라고 생각하겠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멍청한 생각을 한 대가로 차를 조금 흘렸다.
“턱받이가 필요하니?”
네리아의 톡 튀는 듯한 말. 허헛. 네리아는 손수건을 꺼내어 내 턱을 닦아주기까지 한다. 왠지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지는데, 취사병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칼은 스카일램에게 대화에 참여 기회를 선사했다.
“트리키 공. 일스 공국에는 가보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좋은 곳인가요?”
“예. 바닷바람 닿는 곳 어디라도 해원의 신비가 어리지 않은 땅 없겠지만 일스 공국은 유난히도 그 신비로움에의 발디딤이 깊은 땅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대답에 칼은 잠깐 짓눌려 버렸다. 허, 허허허. 저 군인 아저씨가 왜 저러시나? 그러나 나는 곧 그가 어디서 읽은 글을 외운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런 감동도 없이 말하고 있는 표정을 보니 알겠군.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트리키 공의 감상은 어떠시오?”
“예?”
“트리키 공께서는 그곳에서 무엇이 마음에 드시오?”
“제가………….., 말씀이십니까?”
스카일램은 곧 명상하는 얼굴이 되어 고민에 잠겼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각자 커피, 와인, 차 등을 마시면서 기다렸다. 저쪽에선 샌슨과 마차 안의 운차이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지 샌슨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핫하! 사방의 몬스터들이 다 도망가 버리겠다. 따라서 우린 안전해. 네리아가 머리카락을 꼬다 못해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엉켜버릴 정도가 되었을 때 스 카일램은 말했다.
“어부가 마음에 들더군요.”
칼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부? 물고기를 낚는 어부를 말합니까?”
“예. 가장 거대한 적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싸움 자체를 잊어버리고 싸움을 싸움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그 과묵한 사람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가요. 흠. 어부라. 농부 역시 거대한 적과 싸우지 않습니까?”
“대지는 늙어죽은 농부 이외에는 농부를 삼키지 않습니다.”
의외로 재치 있는 스카일램의 대답에 칼은 밝은 표정이 되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하하하.”
스카일램도 무조건 군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그런 사람이군. 샌슨을 봐. 저게 경비 대장이냐? 괴물딱지지. 날 보라고. 나는…………… 에…… 참 할말 없군.
“푸핫하하! 괴물 눈알!”
마차에 삐딱하게 기대어서서 마차 안의 운차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샌슨이 다시 크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싱긋 웃어버렸다. 칼은 모포를 꺼내어 둘러쓰고 는 책을 꺼내었다. 이루릴은 곧 윌로위스프를 불러내어 칼에게 보내었다.
“아, 이런 감사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보시면 눈에 해로워요.”
이루릴은 낮에 입은 상처 때문에 어깨에 붕대를 감고 팔은 고정시켜 둔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 없는 듯하면서도 푸근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벼랑 에 매달려 있거나 드래곤의 입 속에 들어간 채 있어도 무표정에 가까운 약한 미소를 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인생은 어떤 것일까? 수백 년의 이야기………… 아니, 그녀는 120살이 좀 넘었다지. 120년의 추억은 어떤 것일까.
17년짜리 추억을 가진 나로선 물어봐야 이해를 못하겠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나는 약간 멍청한 어조로 불쑥 이루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루릴은 델하파에서 뭘 했죠?”
이루릴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질문했나?
“아, 실례가 된다면 죄송하고요.”
“아뇨. 실례랄 것은 없습니다만. 전 어떤 사람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흔적이라고요?”
“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 난 신경 끄고 자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새벽엔 또다시 죽을 고생을 해야 할 테니까 빨리 자두는 것이 좋겠다. 아아, 피곤해. 모포 속에 드러누워 있자니 잠시 후에 샌슨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칼은 샌슨을 불러들였다.
“여보게, 퍼시발 군.”
“예?”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을 일러줌세. 잘 듣고 기억하게나.”
“아, 예.”
그리고 칼은 뭐라고 말했지만 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으으. 새벽이 오는 것이 두렵다.
“다리 그 따위로 놀릴 거야?”
“얼씨구, 엉덩이가 춤을 춘다. 흐늘흐늘해 가지고. 눈 똑바로 못 떠?”
이건 너무해! 왜 인간이 오거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꾸지람을 들어야 하냐고! 호위 대원들은 얼빠진 얼굴로 샌슨의 시범을 보았다가 곧 나에게 참으로 불쌍하다는 식 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샌슨에게 호승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 안개 자욱한 11월의 숲속이었다. 낙엽을 밟을 때마다 부스러지는 서리의 소리가 뽀드득뽀드득 들려온다. 네리아는 추위를 잔뜩 타는 고양이처럼 모포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보고 있었으며 이루릴은 언제나처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책을 읽으며 기주 중이었다. 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취사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사병이 뭐 볼 게 있냐고? 사실 칼은 취사병 옆의 위치가 가장 따스하다는 이유를 높이 사고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겠지만, 여기 와서 샌슨 좀 말려줘요, 칼!
“이거 뭐야! 몇 번 말했어? 완전히 감으란 말이야!”
“낮다! 높다! 틀려, 더 가볍게! 아냐, 더 힘껏!”
난 결국 몸서리를 치며 고함지르고 말았다.
“으으아! 제발 좀 쉬운 걸로 가르쳐줘! 난 인간이란 말이야!”
난 인간이다. 따라서 저 오거처럼 저런 짓은 못한다. 아니, 어떻게 똑같은 힘으로 상하 좌우 여덟 번을 찌르고 베고 후리냐? OPG만 있었어도 어떻게 하겠지만 지금 으로선 못한단 말이다.
샌슨은 나에게 OPG가 없어진 지금, 제미니를 시집도 못 간 과부로 만들 수는 없느니 어쩌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아침마다 내 귀를 붙잡아 끌고는 훈련을 시 킨다. 차라리 고향에서 터너에게 배울 때가 나았지, 이건 죽어도 못하겠다. 그러나 샌슨은 나의 모든 항변의 말들을 하등의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계속 날 닦달중이다.
“연결 3번, 연속 동작 다시 해봐!”
좋아, 하지!한다고! 먼저 어깨 위에서 발검 준비, 앞으로 뛰며 치고, 오른쪽으로 베고, 왼쪽으로 베고, 오른쪽으로 베고, 왼쪽으로 베고, 위로 올렸다가, 다시 뛰며 치 고, 발을 빼며 검을 어깨 위로 올려 상단 막기, 그 자세에서, 그 자세에서, 그 자세에서…………….
딱! 어이구, 젠장.
“반대로 돌며 뒤로 베기!”
바우우웅! 샌슨의 시범. 저게 칼에서 나는 소리냐? 마차 안의 운차이가 싱긋 웃고 있다. 하지만 호위 대원들은 넋나간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나는 악에 받쳐 서 검을 휘둘렀다. 으잉? 왜 내 검이 더 큰데 소리가 전혀 안 나는 거야?
몇 번을 더 반복한 끝에 간신히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샌슨은 아주 담담한 얼굴로 엄청난 말을 했다.
“100번이라고!”
“그럼. 100번 실시다.”
“오늘은 여행 안 할 거야?”
“물론 하지. 너도 우리 따라오려면 빨리 백 번 하는 것이 좋을 텐데? 못하면 놔두고 간다.”
“50번! 절대로, 무슨 일과 어떤 일이 동시에 일어나도!”
샌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온갖 야비한 수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50번으로 타협이 되었다. 난 이 차가운 겨울 아침에 땀을 질질 흘리며 그 얼어죽을 연 결 동작을 해야 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던 스카일램은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더니 곧 날 구경하는 호위 대원들에게 할 일이 그렇게 없냐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래 서 호위 대원들도 일제히 창술 훈련에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나와 20명의 호위 대원들은 그야말로 한마음 한뜻으로 샌슨에게 증오의 시선을 보내며 서로간의 진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먹여줄까?”
“그래주면 정말 고맙죠.”
그러자 네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스프를 떠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난 그것을 받아먹으며 슬픔이 가슴을 저미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아버지의 창술 수련이 생각나는 군요. 흑흑흑. 팔다리가 아파서 스푼도 못 들겠다. 네리아는 친절하게도 빵까지 찢어서 입에 넣어……………주다가 내가 씹으려는 순간 확 빼내었다. 윽. 장난감이 되었다. 비참해라. 네리아는 깔깔거리며 계속 날 가지고 놀았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그 모습을 보았다.
“네리아. 후치에게 빵을 줄 의도가 없다면 왜 그런 의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죠?”
네리아는 두말없이 내 입에 빵을 던져넣었다. 왁왁.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 우리는 이스트 그레이드를 거대하게 감싸고 있는 붉은 산맥으로 향했다. 붉은 산맥을 넘어서면 곧 산맥과 바다 사이에 끼여 있는 일스 공국이 나타난다고 한다.
칼은 일스 공국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산맥과 바다 사이의 협소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는 일스 공국은, 그래서인지 전략적으로 병탄 필요성이 적은 지형이며 그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공국이 성립될 수 있 었다. 다행히도 일스 국민들은 바이서스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자이펀어나 헤게모니아어 역시 별로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다 한다.
“바이서스어를 사용해요?”
“그렇다네, 네드발 군. 사실 성직자들과 마법사들이 그토록 오가며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단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이상 대륙 전체에서 같은 말을 쓰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네. 흐음. 자네 방언이라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방언이요?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같은 말인데 지방에 따라 조금 다른 말을 말하지.”
“같은 말인데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어떤 곳에서는 어머니를 ‘오마니’라고, 팔을 ‘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이해가 되겠지.”
“예? 바보 아니에요? 왜 그렇게 말한다는 거죠?”
“그거야 사람들이 서로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로 오래 살게 되면 그런 것이 생긴다네. 자네도 한번 생각해 보게. 어떤 지역과 다른 지역이 바다나 산으로 가로막혀 오가지 못한다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말이네. 그런다고 말이 달라지나요? 부모에게 자식이 그대로 말을 배우는데?”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진다네. 조금씩의 차이가 생기면서 많은 세월이 지나면 커다란 차이가 생겨난다네.”
“하지만…………, 우리나라엔 그런 것 없잖아요?”
“바로 그걸 말하고 싶었다네. 마법사들은 엄청나게 떨어진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마법사들이나 성직자들 은 대개 학문적으로나 뭐로나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우리나라엔 방언이 없다네. 하지만 마법이 발달되기 전에는 그런 방언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네.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기만 읽어보아도 그런 방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아주 괴상한 말이군. 방언이라니. 허헛, 참.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해가 안 되네. 그렇다면 방언이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흠. 혹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사실 몇 번에 걸쳐 마법사들이나 성직자들은 대륙 공용어를 만들어내자고 한 적도 있지. 우리들이야 외국까지 돌아다닐 일은 없지만 그들은 얼마든지 서로 말을 전 달할 수 있으니 만큼, 공용어를 만들면 편할 테니까.”
“오, 괜찮겠네요? 그런데?”
칼은 이루릴을 흘깃 보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학문적 요구는 정치적 장벽을 넘기 힘들다는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지.”
“예?”
“인류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성직자들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외국인과 다른 말을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네. 그래야 민족애를 느낄 수 있다는 거지.”
“헤에? 그건 좀 이해가 가네요. 흠흠. 그런데 왜 일스 공국에서는?”
“그 사람들은 3국 어디와도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니까.”
지금의 일스 공국의 일스 대공은 바이서스와 자이펀, 헤게모니아 3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기는 하지만 조공은 그렇게 대단한 양이 아니다. 3국 모두가 일스 공국에 대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일스 공국은 공물에 대해 조금 푸념을 한다든지 3국의 상인들에게 간혹 무거운 관세를 매긴다든지 하는 정도의 자 존심을 세우고 있다. 아, 물론 3국 중 어디라도 단독으로 얼마든지 일스 공국을 점령할 수 있으므로 일스 공국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울 정도로, 그러나 상대의 자존심은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다.
“라고요?”
“그래.”
“저, 그렇다면 일스 공국은 그렇게 가치도 없는 땅인데 뭘 먹고 사는데요?”
“삼각 무역이라네, 네드발 군. 3국에서 각각 흔한 상품을 사들여 부족한 곳에 파는 거지. 그들이 3개 국어를 모두 잘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네. 특히 요즘은 헤게모니 아와 자이펀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남기겠지. 우리와 자이펀이 전쟁중이므로 헤게모니아의 상인들은 우리나라를 통과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일스 공국을 경유할 것 같네.”
“흠. 그런가요. 어? 잠깐. 그렇다면 자이펀의 상인들도 일스 공국에서 만날 수 있겠네요?”
“물론 그렇다네. 혹시나 일스 공국에서 자이펀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조심하세나. 우리나라가 아닌 만큼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하네.”
“흐음. 예. 알겠어요.”
나와 칼은 말 위에서 기분좋게 흔들리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옆에서 걷고 있던 네리아가 칼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요.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데요?”
네리아가 몸을 지나치게 기울여서 칼은 크게 놀랐다.
“아! 위, 위험하오!”
“괜찮아요, 칼 아저씨도. 걱정 말아요. 그런데 얼마나 남았어요?”
“아. 내일 아침엔 도착할 수 있을 거요.”
“헤? 이루릴은 왔다갔다 하는데 열흘 넘게 걸렸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사흘 만에 도착하는 건가요? 우리는 말에 타고 와서 빠른 건가?”
“아, 내일 아침엔 일스 공국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델하파의 항구까지 가려면 또 시일이 걸릴 거요.”
“음. 그럼 대충 시간이 맞네. 와. 그럼 이루릴은 말 타고 달린 것과 똑같은 속도로 왔다갔다한 건가?”
그 말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이루릴이 생긋 웃었다.
“숲을 달렸으니까요.”
“훌륭해요.”
그때 마차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따라오던 샌슨이 말했다.
“이봐, 괴물 눈알!”
운차이는 왁왁거리며 대꾸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썩 편하다는 입장인 모양이다. 비록 감금 마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차니까 앉을 수도, 누워 있을 수도 있다. 샌 슨과 발목을 묶여서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며, 그래서 마차 안에서 운차이의 느긋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왜 불러?”
“그 기술 나도 가르쳐줄래?”
마차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운차이가 창살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창틀에 팔을 올려놓고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겁주는 눈빛 말이야. 살기라고?”
운차이는 냉랭하게 웃었다.
“너처럼 둔한 녀석은 안 돼.”
“뭐야!”
샌슨은 눈을 부라렸지만, 곧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누구에게 눈싸움을 거는 거야.
마차는 달그닥달그닥. 말은 타박타박. 이스트 그레이드는 우리 발 아래로 쉼없이 흘러가고, 우리는 붉은 산맥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