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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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1화


……할슈타일 공은 말한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당신의 원수다. 그것은 당신을 억제하고 억누르며 억압한다. 당신의 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말은 겨울 가지에 피어나는 설화와도 같 다. 순백의 아름다움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숨긴다. 그것은 시체에 더하는 치장이며 수의에 놓아진 자수, 관에 던져진 꽃송이와 같은 것. 말은 당신을 끝없이 쫓아다닌다. 그러자 지혜로운 핸드레이크는 말한 다. ‘역시 설명은 실례를 보면서 듣는 것이 이해하기 쉽군요.’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4권 7쪽.


1

“지독한 밤이군.”

콰광! 제레인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네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베개를 꽉 부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방 안에서 베개를 껴안은 채 거실로 튀어나와서는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네리아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샌스은! 어떻게 좀 해봐아!”

샌슨은 황당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폭풍우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샌슨은 이 엄청난 폭풍우 속에서도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닦고 있었다. 게다가 간혹 기품 있는 손놀림으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기까지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작자 의 신경은 얼마나 굵은지 상상도 안 되는걸.

신경 굵은 사람이라면 두 명 더 있다.

이루릴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창밖을 무슨 정물화 감상하듯 평온한 얼굴로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선 제레인트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창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이 폭풍우를 자연이 베푸는 참으로 희한하고도 볼 만한 어떤 잔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감탄한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 었다. 참, 대단해.

칼마저도 이 해양성 폭풍에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우리 바이서스에서 폭풍이라는 것은 그저 사나운 바람이다. 그런데 여기 일스에서의 폭풍이라는 것 은 바람이 아니라 무슨 무기를 휘두르는 느낌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람은 사물을 때려부술 것 같았다. 지금 칼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천 둥소리와 낙뢰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굉장한 폭풍의 소리에 모두들 잠이 들지 못하고 전부 거실에 모여 있었다.

꽈르르릉! 번쩍!

“꺄아아아악!”

“켁! 케엑. 이거 못놔!”

네리아는 죽을 힘을 다해 샌슨의 목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거의 착란 상태에서 엉엉거리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전 싸구려 도둑이에요. 엉엉. 주로 통행세만 받았고 담 위로 날갯짓은 좋아하지도 않아요. 꺄악! 예. 했어요. 하지만 열 번도 안 돼요! 꺄악 꺄악! 아니에요. 사실 열두어 번쯤…………… 잘못했다구요! 제발 좀 그만해요! 아악!”

“네가 좀 그만해! 이건 그냥 바람이라구!”

그냥 바람? 말이 좋다. 난 바닥에 주저앉아서 샌슨의 흉내를 내어보려고 숫돌을 꺼내어 바스타드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천둥이 칠 때마다 숫돌을 내 손톱에 대고 갈 아버렸다. 난 한숨을 쉬고는 숫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리아. 벼락을 무서워해요?”

네리아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샌슨은 그녀를 떼어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네리아가 아무리 날씬하고 가벼운 체구라 해도 지금 그녀는 필사적으 로 매달려 있었고 그렇게 매달린 채 발작적으로 엉엉거리는 사람을 떼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온 세상이 허옇게 바뀌는 순간, 네리아는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사납게 몸부림치며 샌슨에게 엉겨들었고 샌슨은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쿠당!

“윽…………, 머리 깨졌겠다.”

샌슨은 누운 채 투덜거렸고 샌슨 덕분에 직접 바닥에 부딪히지 않은 네리아는 죽어라고 샌슨의 목을 감고 늘어졌다. 레니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고 큭큭거렸다. 난 레니에게 말했다.

“레니. 넌 무섭지 않아?”

“난 항구에서 자랐는걸. 내 방 창문을 통해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배를 본 적도 있어.”

“배가 침몰한다구? 어, 어떻게?”

레니는 손을 들어 바람에 비틀거리며 항해하는 배처럼 어지럽게 움직였다.

“바람이 심할 때…………, 풋내기 조타수가 접안 시설에 배를 들이받는 거지. 이렇게 말이야.”

레니는 그렇게 말하며 움직이던 손을 다른 손에 부딪혔다. 그러곤 가라앉는 배처럼 손을 뒤집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 아무리 항구라고 해도 이렇게 심한 바람이 불 때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가라앉는걸.”

“그, 그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응? 아무 일 없어. 항구 근처니까 모두들 구출되지.”

“이렇게 날씨가 사나운데 구출이 돼?”

레니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바이서스는 초원의 나라지. 그래. 후치도 헤엄은 칠 줄 모르겠구나?”

“어, 헤엄? 글쎄. 개울에서 개헤엄치는 것 외에는…………… 그러고 보니 난 바다에 던져두면 꼼짝없이 죽겠군. 레니는 헤엄 잘 쳐?”

레니는 눈이 동그래져서 날 바라보았다.

“어머? 수영은 남자들만 하는 거야.”

어라? 수영이 왜 남자들만, 남자들만…………. 윽. 그렇군. 옷 입고 헤엄치지는 않지. 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미안. 잘 몰라서 그런 거야.”

“응. 대신 바이서스 사람들은 말을 잘 타겠지?”

말…………, 으윽. 괴로웠던 말타기 훈련이 생각나는구나. 난 대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일행들은 모두들 말을 잘 타지. 난 바스타드를 매끈하게 닦 아서 검집에 꽂아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얼마나 심한지 볼까? 내일 아침엔 출발해야 되는데………….”

오늘 느닷없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우리의 출발이 지연되고 말았다. 아침 나절, 스카일램 트리키 대장의 성화 속에 출발 채비를 마친 우리들을 향해 마차 속의 운차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은 못 가. 지독한 폭풍우가 올 거야.”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스카일램 트리키는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날씨를 어떻게 짐작한다는 것이냐?”

그때 내가 말했다.

“잠깐만요. 운차이? 전에도 비가 올 것을 맞췄지요?”

사람들은 날 바라보았다. 난 세들레스 마을에서 운차이가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하자 곧 비가 내린 사실을 이야기했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이펀은 메마른 사막이다. 그래서 자이펀의 모든 동물들은 비에 민감하지.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자이펀 남자들은 모두 능숙한 뱃사람이나 다름없다. 바다의 날씨에 대해서라면 갑옷을 걸치고 마차 안에 갇힌 사람에게 으스대는 누구보다는 내가 더 정확할걸.”

갑옷을 걸치고 마차 안에 갇힌 사람에게 으스대던 스카일램 트리키는 불같이 노하게 되었다. 그때 나우르첸 성의 사람들도 폭풍우가 칠 것이라는 말을 전해 주지 않 았다면 스카일램은 아마도 운차이를 끄집어내어 치도곤을 안길 기세였다.

스카일램은 ‘고국에 대한 위험 신호를 가지고 불타는 충성심으로 달려갈 자신을 그까짓 바람이 가로막을쏘냐.’ 하는 태도로 출발을 고집했다. 그리고 그 같은 고집에 대한 적절한 대처 방안이 없던 우리들은 모두 ‘좀 고생하면 되겠지.’ 하는 태도로 출발에 동의했다. 하지만 성 밖으로 얼마 나오지도 않아서 우리는 그 폭풍우라는 분 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 일스의 땅에 불어닥치는 폭풍우는 내가 알고 있던 폭풍우와는 이름만 같고 성질은 전혀 다른 분이었다. 바다는 뒤집힐 것처럼 몸부림쳤고 실키안 레이크는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마차가 넘어질 뻔하고 짐이 모두 바람에 날려갈 뻔한 소동 속에서 악다구니를 쓰다가 우리는 간신히 성으로 되돌아왔고 운차 이는 싸늘하게 웃었으며 스카일램은 운차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일어서자 레니도 따라 일어섰다. 방 저쪽에서는 아직도 샌슨과 네리아가 엉겨 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선 칼이 초연하게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다. 난 이루릴의 옆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내가 다가서자 조용히 말했다.

“저분 참 무모하시네요.”

난 창밖을 내다보았고 곧 한숨을 쉬었다. 제레인트 역시 창밖을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온몸으로 세계에 맞서는 전사군.”

스카일램이 컴컴한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거친 폭풍우를 묵묵히 참고 견디며 시선을 먼곳에 보내고 있었다. 온 몸이 축 젖었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뜨거운 심장이 향하는 저 서편, 그의 고국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의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빗방울과 뒤섞여 흐르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된 다.

호위 대원들이 그를 안으로 끌어들이려 애쓰는 모양이었지만 스카일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 고국으로 달려가려는 자신을 가로막는 폭풍우에 대해 무언의 저 주를 퍼붓고 있는 모양이다.

“저건 무모하다기보다는, 글쎄요. 폭풍우에 대해 항거하는 거지요.”

“항거……? 저렇게 서 있는다고 해서 폭풍이 잠들지는 않아요.”

“예. 물론이죠. 그저 기분이나마 항거하는 기분을 내는 거죠.”

“왜 그런 쓸모없는 행동을?”

“사실 사람이 하는 짓에 쓸모 있는 행동이 몇 개나 될까요. 그저 그중 몇 가지에 자신이 생각해서 적당한 쓸모를 붙이는 거죠.”

이루릴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저 자이펀의 사람들이 그런 무서운 무기를 만든 것에도 쓸모가 있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그럴 거예요.”

이루릴은 어두운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와 레니는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와 이루릴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흠. 난 이미 이런 대 화에 익숙해. 난 다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저건 좀 심하군요. 나가서 뭐라고 좀 말해야겠군요.”

난 몸을 돌려서 방을 나왔다. 제레인트가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성 안의 복도를 걸으며 제레인트는 말했다.

“이봐, 후치. 왜 엘프에게 그렇게 말했지?”

“왜? 사실을 말하는 데 왜라는 게 무슨 필요가 있어요?”

제레인트는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인간은 불안한 것. 유피넬도 헬카네스도 모두 따를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지.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가 그런 이 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어려운 이야기는 머리 아파요. 지금은 우리의 관심사를 스카일램 대장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좁히고 싶네요?”

제레인트는 싱긋 웃으며 내 말에 찬성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정문으로 나섰다.

휘우우우웅!

문을 열자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뒤로 쓰러질 뻔했다.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면서 몸은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우와, 이거, 저기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의문인걸. 하하하!”

제레인트는 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는걸?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는 숨쉴 사이 없이 바뀌었고 그래서 제레인트와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갔 다. 스카일램은 저쪽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봐요! 스카일램 대장!”

이 험악한 빗발과 바람 속에서라도 내 고함소리는 충분히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스카일램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제레인트가 외쳤다.

“보시오, 트리키 공!”

그러자 스카일램은 몸을 돌렸다. 그는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고는 마치 세수하듯이 얼굴을 주욱 훑어내렸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보더니 당황해서 말했다.

“제레인트,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그러는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제레인트는 지독한 바람에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펑퍼짐한 로브는 비에 젖어서 그를 몹시 거추장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스카일램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제게 신경 쓰시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나 이거 참, 신경 안 쓰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말하시죠!”

스카일램은 다시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강풍이 몰아치는 실키안 레이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마도 바이서스 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안타깝습니다.”

“예?”

스카일램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꽉 쥐어 하얗게 변한 그의 주먹은 마치 단련된 강철처럼 빗방울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너무도,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고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제가 이렇게 머나먼 땅에 발이 묶이다니. 게다가 제게는 고국에 알려야 될 위급한 보고가 있는데. 그런데 여 기서 움직일 수 없다니. 비통합니다!”

스카일램은 감동적으로 말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아니, 그의 의도야 어쨌든 분명히 감동적으로 들으며 숙연한 기분을 느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미친 바람 때 문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비틀거리다 보니 감동에 앞서 먼저 짜증부터 치밀어 오른다. 젠장.

“비 맞으셔서 몸 상하면, 가시는 길이 더 어려워질 거예요!”

스카일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건지. 원 참. 발디딤이 정말 좋은 모양이군.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빗방울을 걷어내며 난 다 시 고함을 질렀다.

“스카일램 대장, 지금 근무 태만이라는 것, 몰라요!”

스카일램은 의아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고 제레인트는 결국 내 팔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레인트보다야 강단이 좋으니까. 난 제레인트를 부축하며 외쳤다. “대장은 전하로부터, 호위 임무를 부여받았잖아요! 호위 임무를 팽개쳐두고, 이렇게 폭풍 가운데 서 있으면, 그게 근무 태만이지요!”

스카일램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의 얼굴로 흐르는 빗물이 그의 표정을 더욱 어떤 무생물 같은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외쳤다.

“벌써 밤이에요! 폭풍우가 그쳐도, 지금은 출발 못해요! 내일 아침에 출발할 준비도 해야지요!”

그는 말했다.

“알았다. 들어가자.”

크하! 해냈다. 스카일램은 제레인트를 부축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 들어서자 호위 대원들이 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겨우 네리아를 뿌리치고는 원래의 자세로 돌아와 있는 샌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네리아는 괴성 을 지르며 샌슨 대신 레니에게 달려들었고 레니는 쓰러진 채 파닥거리며 이것 좀 놓으라고 비명을 질렀다. 칼은 여전히 책장을 넘기며 초연한 척하고 있었다. 천둥이 칠 때마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조금씩 움찔거렸지만.

제레인트와 나는 아쉽게도 인간들 중에서는 온전한 대화의 상대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루릴에게 다가갔다. 이루릴은 우리를 보더니 생긋 웃었다.

“어떻게 들어오게 한 거죠?”

“잘 설득했지요.”

“설득……? 아, 예. 조화를 이뤄가는 인간의 특기 말이지요?”

“윽. 예. 그거요.”

엘프는 서로 설득하고 할 일도 없겠지? 모두들 조화로울 테니까.

“레니야, 레니야! 나 좀 막아줘, 저거 좀 멈춰줘요, 칼 아저씨! 책만 보지 말고 저거 좀 멈춰달라구……………, 꺄아아! 으아아앙! 잘못했어요오오! 으아! 내가 아냐, 내가 아

냐! 나보다 나쁜 놈도 많아요오오!”

뒤통수를 되게 쥐어박아서 기절시키자는 샌슨을 말린 다음, 이루릴은 한숨을 쉬고 샌드맨을 불러내어 네리아를 잠들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네리아는 잠든 채로 이 를 박박 갈면서 간혹 잠꼬대로 비명을 질러대었고 우리는 넌덜머리를 내며 그녀를 방 안에 집어던짐으로써 모든 사태를 종결시켰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기분은 더욱 이상해졌다.

지독한 바람소리와 천둥 소리, 그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번쩍거리는 번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을 흔들어대었고 번개의 섬광, 밤의 암흑, 천둥의 단속음, 바람의 지속음, 어쨌든 총체적인 소리와 색채의 불협화음에 귀가 먹어버리고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시트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이 얇 은 시트는 세계의 횡포로부터 날 보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지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뭔지 모를 불안감에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침대 속은 마치 빨래더미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눅눅하고 거북했다. 성벽을 때리는 바람과 빗소리는 마치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무슨 소리지?”

샌슨의 목소리다. 나와 샌슨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난 시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바로 그때 번개가 쳤고 순간적으로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는 샌슨의 모습이 보 였다.

“무슨 소리긴. 밖엔 소리가 너무 많아.”

“조용히 해봐! 잠깐…….”

샌슨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왜 이러지? 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천둥소리와 빗소리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집중한다 고 될 일인가.

“아무런 소리도…… 이거!”

나와 샌슨은 동시에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갑옷을 걸칠 사이도 없이 각자 검만 들고 뛰어나왔다. 분명히 비명소리였다. 그것도 여자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엄청 난 바람이 우리를 뒤로 밀어붙였다. 샌슨은 벽을 짚으며 외쳤다.

“뭐야, 이건! 베란다의 문이 열렸잖아?”

거실 안의 집기와 테이블, 의자 등이 마구 쓰러져 뒹굴고 날리고 있었다. 난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베란다로 달려갔다. 그때 샌슨이 다시 외쳤다.

“레니!”

난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레니의 방문이 열려 있었고 그 방문은 지금 거세게 여닫히고 있었다. 샌슨은 레니의 방문으로 달려가서 안을 들여다보더니 곧 외쳤다. “없어졌어!”

그렇다면 누군가 베란다로 침입? 난 베란다 문을 닫는 대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지만 쏟아지는 비와 암흑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번 개가 치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난 아래에서 말을 달려가는 한 사나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허리에 끼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도. 마치 폭풍 속을 뚫고 어린 소녀를 납치해 가는 화렌차의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붉은 머리가 번개 빛에 이상하게 빛났다. 레니였다.

“마당이다! 침입자다!”

난 고함을 지르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샌슨도 악을 쓰며 달려나왔다. 하지만 내 고함소리는 폭풍우의 소리에 다 묻혀버리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샌슨과 난 계 속해서 악을 지르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어!”

“젠장, 이 날씨에 얼마나 달려갈 수 있는지 보자! 후치, 마구간으로!”

문을 발로 걷어차 열면서 뛰어나왔다. 사나운 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게다가 하루종일 쏟아진 비 때문에 성의 마당엔 엄청난 양의 빗물이 고여 있었다. 해안 절 벽에 서 있는 성에 이토록 빗물이 고이다니. 우리는 철벅거리며 미끄러져 뒹굴고 하면서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폭풍에 대비하여 잠겨 있는 마구간 문을 보더니 샌슨 은 두말하지 않고 롱소드로 후려쳤다. 콰광. 그리고 나 역시 옆에서 바스타드로 후려쳤다.

조금 뒤 문은 부서졌고 우리는 마구간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장을 찾을 겨를도 없이 맨몸으로 말 위에 올랐다. 우리는 둘 다 갑옷도 없이 검 하나씩만 든 채 안장도 없는 말을 달려나왔다. 그리고 비바람은 미친 것처럼 몰아쳤다.

성의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샌슨은 욕설을 뱉었다. 나우르첸의 병사들이 빗속에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빗줄기를 타고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침입자에게 당한 정문 경비병인 모양이다. 이런 칠흑 같은 밤에는 정문 경비병들도 어쩔 수 없었겠지. 샌슨은 악을 쓰며 정문을 돌파했다. 난 안장도 없는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로 제미니를 꽉 감싸며 달려나왔다.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

“잠깐! 기다려, 헉헉, 번개가 칠 때·

콰르릉! 쾅쾅!

“저기다!”

멀리서 달려가는 말의 뒷모습이 망막에 확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곧 죽어라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들은 겁에 질렸는지 콧김을 푸르릉거렸지만 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반항함으로써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윽고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온통 물이라서 철벅거리는 소리는 잘 들렸다. 우리는 이 제 소리를 들으며 정확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날아와서 온몸을 때리는 빗줄기는 몽둥이 같다. 그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세찬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머리카락은 통째로 뽑혀나가는 것 같고 헐렁한 셔 츠는 젖은 채로 마구 철벅거린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아파온다. 속눈썹마저 눈을 찔러대고 있었다.

납치자는 나우르첸의 시내를 달려가고 있었다. 젠장! 이 도시의 지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우리는 말들이 미끄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동시에 우리가 말 위에 서 미끄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사라졌다. 우리는 멈춰 서고 말았다.

“후우, 후우. 뭐야? 소리가 안 들려?”

“잠깐……, 후우. 여기 있다.”

“응?”

샌슨은 극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쏴아아아! 빗소리 사이에서 샌슨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놈도 멈추었다. 여기 어딘가에 있다.”

등골이 쭈뼛하는걸? 달려가던 것을 멈추자 비는 이제 우리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시내라서 그런지 바람은 조금 약했지만 번개와 천둥은 여전히 요란했다. 콰우 웅, 꾸르릉! 우리는 긴장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납치자는 아마도 추적자가 둘인 것을 깨달았으니 우리를 처치하고 도망갈 속셈일 것이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 리는 빗줄기에 숨이 막히려 하면서도 난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살려줘…….”

우리 눈앞의 사거리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레니!”

난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스카일램이었다.

그 역시 갑옷 하나 걸칠 새가 없었는지 평상복에 검 하나 든 채로 달려나와 있었고 우리들처럼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나와 샌슨이 놀란 얼굴로 말하기도 전에, 스카 일램은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이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일부러 비명을 지르게 한 거다. 달려가면 당한다.”

난 입을 꽉 다물었다. 샌슨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스카일램은 조용히 검을 뽑아들더니 말했다.

“내가 우회할 테니 조심해서 앞으로 걸어가라.”

그리고 스카일램은 옆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샌슨과 난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난 고함을 질렀다.

“레니! 어디 있어!”

・지마!”

“뭐! 어디야!”

“아…………, 오지… 오면 안…….”

그때였다. 채챙!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와 샌슨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철벅철벅. 발이 미끄러질 뻔했지만 우리는 간신히 사거리에 뛰어들 었다.

옆을 보니 스카일램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옆에는 다른 남자 하나가 레니를 붙잡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복면을 하고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없었 다. 나와 샌슨은 동시에 소리없이 달려들려고 했지만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가운데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레니를 붙잡고 있던 남자는 우리가 달려들자 곧장 레 니의 목에 검을 가져갔다. 레니는 하얗게 질리더니 그만 기절해 버렸다.

“오지 마!”

나와 샌슨의 발이 굳어버렸다. 스카일램과 싸우던 남자 역시 검을 거세게 휘둘러 물러났다. 스카일램은 재빨리 걸어와 우리와 함께 섰다. 쏴아아아! 비는 미친 것처 럼 쏟아지고 있었다.

레니의 목에 검을 겨눈 남자는 젖어버린 복면을 풀어던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넥슨 휴리첼의 얼굴이 나타났다.

“제기랄! 네놈이!”

나와 샌슨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검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눈앞이 하얗게 바뀌며 꽈광!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샌슨은 고함을 질렀다.

“여기까지 따라왔느냐!”

넥슨은 빙긋 웃으며 뒤로 물러났고 그가 물러나는 것에 맞추어 우리 세 명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넥슨은 레니의 목에 댄 롱소드에 눈길을 보내어 우리를 멈추게 했다. 그는 말했다.

“자네들이 왜 일스에 왔는지 궁금하더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지독한 바람에 실린 폭우는 온 세상을 파괴할 듯이 쏟아져내렸다. 넥슨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들이 그날 아침 이 계집애를 데리고 다니던 것도 꽤 이상하게 보였고. 사실 뻔한 이야기이지. 자네들이 데리고 다니는 붉은 머리의 소녀라……………. 간단한 이야기였지.”

얼굴에 달라붙는 빗방울 때문에 얼굴 가죽을 뜯어내고 싶은 느낌이 든다. 빌어먹을 녀석! 넥슨은 유유히 말했다.

“이 소녀가 할슈타일 가문의 후계자, 적통의 마지막 드래곤 라자일 테지. 맞는가?”

“왜 묻는 거냐!”

“이봐. 이러지들 말라구. 우리들이 그 동안 사귀어 왔던 세월의 길이가 짧긴 하지만, 그 짧은 세월 동안 참 많은 우의를 다져오지 않았나?”

우의?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기가 막혀 말을 못하는 사이에 스카일램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넥슨휴리첼! 감히 국가 전복을 꾀한 죄만도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너의 죄과를 씻을 길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그 소녀를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널 추적하 지 않겠다.”

“크하하하! 이 소녀를? 왜? 내가 미쳤어?”

스카일램은 넥슨을 날카롭게 쏘아보았고 넥슨은 껄껄거리며 말했다.

“자이펀이든 바이서스든, 아니 헤게모니아까지라도. 저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마저도 이루지 못한 대륙의 통일! 그것이 가능한데 내가 왜?” “무슨 말이냐!”

꽈광! 다시 번개가 쳤고 그 하얀 빛 속에서 넥슨의 얼굴은 괴이한 은색으로 빛났다.

“최강의 드래곤! 저 크라드메서, 바로 우리 가문의 드래곤이었던 크라드메서를 다시 획득하게 된다. 휴리첼의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난 악에 받쳐서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 드래곤 라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드래곤과 인간이 대화하는 거야! 크라드메서가 네 미친 계획 따위를 들어줄 리가 없어!”

넥슨은 싸늘하게 날 노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당연하지. 크라드메서는 선의 율법도, 악의 율법도 따르지 않는다. 오로지 조화만을 원할 뿐이지! 대륙을 하나로 만든다는 그 멍청한 계획을 따라줄 것 같아 앗!”

“드래곤은 기억한다.”

“뭐라구?”

넥슨은 클클거렸다. 그 충실한 마부 녀석이 말을 끌고 오더니 넥슨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넥슨은 사납게 뿌리치며 오히려 우리 쪽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는 이를 갈듯 이 말했다.

“드래곤은 기억한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불행한 종족이 몇 있지. 그중 하나가 드래곤이야. 드래곤은 절대로 망각의 축복을 향유하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크라드메서는 그의 드래곤 라자였던 카뮤 휴리첼의 죽음을 기억할 거라는 말이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 자식! 크라드메서를 충동질할 생각인가? 넥슨은 계속해서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복수를 원할걸?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물론 난 삼촌에 대한 복수, 별로 관심 없어. 하지만 나는 바이서스의 파멸을 원하고, 크라드메서도 그럴 거 야. 대화가 잘 통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

“마, 말 같지 않은 소리!”

“말이 안 될 거 같아? 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하하하!”

그때 마부는 다시 한번 넥슨의 팔을 잡아당겼다. 넥슨은 화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마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넥슨은 이를 악물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없군. 긴 이야기 나누지 못해서 말이야. 아, 그리고 자네들에게는 좋은 선물 한 가지 남겨두었네.”

“선물이라구?”

“내일 아침 해가 뜨면 흥미로운 일이 발생할 거야.”

샌슨은 멍한 얼굴이 되었지만 난 소스라치고 말았다.

“세이크럴라이즈!”

넥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이펀인들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줄 알더군. 이만 가보겠어. 따라오려고 들지 마.”

그리고 넥슨은 축 늘어져버린 레니를 가볍게 말 위에 올리더니 말에 올라탔다.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넥슨은 다시 한번 우리들을 바라보 며 웃고는 달려가 버렸다.

샌슨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젠장! 말로 달려!”

나와 스카일램은 황급히 샌슨의 뒤를 따랐다. 샌슨은 슈팅스타에 올라타자마자 외쳤다.

“후치! 일행을 끌고 와! 내 짐도 챙겨오고! 난 저놈들의 뒤를 따라가며 흔적을 남기겠다. 그리고 스카일램 씨, 당신은 나우르첸 영주에게 이 도시가 세이크럴라이즈 되었다고 말해요! 자세한 것은 칼이나 제레인트가 말해 줄 겁니다!”

샌슨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곧 달려가 버렸다. 저 멍청한! 맨몸에 검 한 자루 들고서 추적을 하겠다고? 저렇게 앞뒤 없는 작자가 다 있나. 그러나 내가 고함을 질렀을 때는 이미 샌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그가 사라져간 방향을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고는 곧 제미니에 올라타서 스카일램과 함께 성으로 달려갔다.

칼은 내 말을 듣자마자 곧 손으론 짐을 챙겨들면서 동시에 말을 했다.

“트리키 공.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잘 들어요. 당신은 나우르첸 영주에게 이 도시의 중심부, 흙이 있는 곳에 묻힌 디바인 마크를 회수하라고 전하시오. 그 디바인 마크를 오늘밤 안에 회수하지 않으면 이 도시의 모든 것이 병에 걸려 죽어갈 것이며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하시오.”

스카일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칼은 쉼없이 말했다.

“그리고 나우르첸 성주를 돕든지, 아니면 오늘밤 내로 이 도시를 벗어나든지 당신 자의에 따라 결정하시오. 하지만 내 생각으론 지금 당장 벗어나는 것이 좋겠소. 당 신이 이 도시의 지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바에야 특별한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고, 게다가 이 무기는 자이펀에서 개발한 것으로 한시바삐 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까.”

“헬턴트 님은 어쩌실 겁니까?”

“전하께 믿음을 저버려 죄송하다고 전해 주시오. 사절의 임무는 실패였다고.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바이서스 임펠에 돌아갈 테니 죄를 묻겠다면 그때 물어달라고 전

하시오. 나는 사절의 지위를 버리고 지금부터 우리 일행과 함께 레니 양을 구출하기 위해 넥슨을 추적할 것이오.”

“레니 양을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의 승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꼭 그녀를 되찾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에 대해 잘 말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비록 임무는 실패했지만, 당신도 봐서 알듯이 바란 탄에서 그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성실히 답변했습니다. 전하 께 그를 잘 대해 달라고 부탁해 주시길 바랍니다.”

스카일램은 한참 동안 칼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은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침버 씨. 당신은 어쩌겠습니까? 당신은 바이서스로 가고 싶어했으니 트리키 공과 함께 행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제레인트는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 화내시겠습니까?”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테페리의 성직자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화낼 수는 없어요.”

그리고 칼은 이루릴과, 그녀에게 매달린 채로 벌벌 떨고 있는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재빨리 짐을 들어올리며 스카일램에게 다가 가 손을 내밀었다. 스카일램은 망연히 칼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해서 기뻤습니다.”

스카일램은 몇 번이나 뭐라고 말하려고 애쓰다가 포기해 버렸다. 그는 칼의 손을 놓더니 곧 경례를 붙였다.

“헬턴트 님을 호위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수고해 주시오.”

그리고 칼은 곧장 달려나왔다. 난 샌슨의 짐까지 둘러메고는 끙끙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고 이루릴은 네리아를 달래며 걸어오느라 힘들어했다.

밖으로 나와 마구간으로 달려가는 길은 몹시 힘들었다. 휘우우웅! 무시무시한 비바람은 도대체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힘들게 마구간까지 걸어가 말들을 꺼내었다. 네리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번개가 칠 때마다 성안으로 도로 달려 들어가려는 자세였고 그래서 이루릴은 그녀와 함께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랐다. 이루릴 은 네리아의 등 뒤에 앉은 채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래셔널 셀렉션 위에 타세요.”

“어, 전 말을 탈 줄 모릅니다만…”

“당신을 낙마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제레인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의 노새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래셔널 셀렉션 위에 올라탔다. 역시 저 엘프의 말은 얌전히 제레인트를 받아들였다. 칼은 곧장 출발 했다.

“이랴아, 하아!”

나와 칼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네리아와 이루릴이 탄 에보니 나이트호크와 제레인트를 태운 래셔널 셀렉션이 뒤따랐다. 거친 비바람과, 새벽이 가까워오면서 가장 어두워지는 암흑 속에서 난 간신히 샌슨과 헤어진 위치까지 일행을 인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샌슨이 마지막으로 달려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방향이라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나우르첸을 벗어나는 외곽으로의 방향이었고, 그래서 도시를 통째로 날려버릴 듯한 폭풍우 를 간신히 뚫고 나우르첸을 나선 우리는 바로 그때부터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칼은 사납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아내듯이 팔을 들 어올려 얼굴을 가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자네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데리고 있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쉬운 질문이군.

“갈색 산맥으로.”

칼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고, 그때마다 터져나오는 네리아의 구성진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수면 전체로 흐느끼고 있는 실키안 레이크 옆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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