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68화
1568화. 산책은 이런 날에 가는 거란다. (3)
벌컥.
문이 격하게 열리자 고요하게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던 법정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방장!”
그러나 연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엔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급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이가 공동 장문인 종리형이 아닌, 팽엽이었기 때문이다.
“가주?”
팽가주가 이리 경박하게 굴 만한 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리 다급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그만한 일이 벌어졌다는 의미일 터였다.
“무슨 일이오이까?”
대답은 팽엽이 아닌, 함께 들어선 종리형의 입에서 나왔다.
“바, 방장! 사패련이 움직였습니다!”
법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패군이 움직였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장가계(张家界)를 벗어나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순간 법정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무릇 한 문파의 수장은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하지만 지금 들어온 사안은 모두에게 체면을 내려놓게끔 하기에 충분했다.
“어디로! 어디로 북상하고 있소이까?”
“정북(正北)쪽입니다! 말 그대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북쪽?’
법정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사패련이 있던 장가계에서 정북으로 북상하면 우로는 호북을, 좌로는 섬서를 노릴 수 있다.
아니, 이대로 놈들이 호북을 넘어선다면…… 하남마저 저들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게 되리라.
까득.
법정의 손에 들린 염주가 거칠게 마찰했다.
“패군의 위치는 확인이 되었소? 그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일이거늘!”
“그, 그게…….”
종리형이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도 자신이 아는 게 사실인지 확신을 못 하는 표정이었다.
“현재 패군은 사패련의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선두?”
“그렇습니다, 방장.”
법정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기망(欺罔)이 아니오이까?”
“그건 아닌 걸로 보입니다. 선두의 장일소가 개방의 정보원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의 독문무공을 사용하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합니다.”
법정은 염주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 콱 움켜쥐었다.
정파의 무학과 달리 사파의 무학은 워낙에 중구난방이고, 따라서 그 근원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해, 특정인의 독문무학을 흉내 내는 것도 쉽지 않다는 의미다.
심지어 다른 이도 아니고 장일소다. 그의 무학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사실이로군.”
“예, 방장. 이번만은 사패련이 진심으로 승부를 겨룰 생각으로 보입니다.”
팽엽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법정이 진중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예?”
“상대는 그 장일소외다. 그 뻔한 움직임에 노림수가 없을 리 없소. 애초에 그의 머릿속엔 정당히 승부를 겨룬다는 생각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오.”
“그럼…… 이 또한 함정이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합니다.”
법정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종리형은 뜨뜻미지근한 얼굴로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건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다. 저 장일소가 굳이 선두에 서서 제 모습을 내보일 필요가 무어 있단 말인가?
그가 모습을 적당히 감추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머리가 한층 더 복잡해졌을 것을.
“하면……?”
“예. 당연히 우릴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것이외다.”
팽엽이 탄식하였다.
“함정이라……. 생각하니 뻔한 것을. 죄송합니다, 방장. 제가 흥분하여 그만.”
나직이 헛기침한 종리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낫겠군요.”
“아닙니다.”
“……예?”
“가야지요.”
법정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하고, 또한 확신에 차 있었다.
종리형은 화들짝 놀라 법정을 응시했고, 팽엽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가, 간다니요? 저들이 함정을 판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예. 제가 그리 말했습니다.”
“그런데…… 간다니요?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겠단 말씀이십니까?”
법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방장…….”
어처구니없어진 종리형이 되물으려는데, 순간 법정의 온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오기로 한 지원은 지금 어찌 되었습니까?”
순간 그 기세에 위압된 종리형은 흠칫 질문을 삼키며 대답했다.
“고, 곤륜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모용세가가 인근까지 온 상황입니다. 그리고 각 문의 속가들도 지금 집결 중입니다.”
“아미타불.”
법정의 눈이 서늘했다.
“종남은?”
“서안도 노출이 되어 있으니, 우선은 서안을 지키겠다고…….”
“그렇겠지요.”
냉소한 법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과 무당은 본디 소림과 함께 구파일방의 핵심이 되어 주어야 하는 문파다.
하지만 그들은 제 의무를 내버리고 봉문이라는 도피를 택했다. 그 봉문이 풀렸다 한들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적의 전력은 고작해야 만인방과 흑귀보. 그들을 상대하는 데 종남이나 무당까지 필요치는 않다. 와 봐야 공을 나눠 먹을 뿐이다.
“장문인. 가용한 이들을 모두 집결시키십시오. 그리고 모용에게 서두르라 전하십시오.”
종리형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심이다.
지금 법정은 진심으로 사패련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뭐 하십니까? 당장!”
“예! 예, 방장!”
종리형은 당황한 마음을 미뤄 두고 황급히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법정이 팽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팽엽은 법정만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법정이 물었다.
“이상하십니까?”
“아니,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팽엽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껏 방장께서 항상 자중을 택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다만 이번 선택이 이전과 다른 연유가 무엇인지는 궁금합니다.”
법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해 주었다.
“패군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패군이 거기 있어서? 팽엽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법정이 부연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저는 적의 함정을 두려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판 함정을 어떻게든 피해 온 이유는 너무도 간단합니다. 굳이 그 함정으로 들어가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미타불.”
법정은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 불호를 외었다.
그리고 확실히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저 함정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더없이 확실한 것.
장일소의 목.
그 외에 다른 게 또 있을 리 있겠는가.
법정의 말이 맞다.
사패련이 어떤 함정을 준비했건, 어떤 기책을 준비했건, 장일소의 목만 취할 수 있다면 결국 이쪽의 승리다.
그리고 천하는 이 전쟁을 종결시킨 이가 다름 아닌 구파와 오대세가라고 기억할 것이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가주. 저 천우맹이 어설프게 끼어들어 모든 걸 망쳐 놓기 전에 말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팽엽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섰다. 그의 두 눈이 단단한 각오로 물들었다.
‘장일소.’
세상 모든 것은 결과가 정한다. 팽엽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장강참변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참아 왔던 굴욕과 손가락질. 그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결과로 말미암아 찬사와 경탄으로 바뀔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 한순간을 기다려 온 것이다.
‘반드시.’
그가 입술을 깨물며 각오를 다질 때였다. 법정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불러세웠다.
“한데, 가주님.”
팽엽이 호흡을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 방장.”
“천우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 합니까?”
팽엽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이…….”
* * *
쿠우웅!
지독한 압력에 남궁도위의 검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그러나 창천(蒼天)이라는 두 글자를 온전히 지탱해 온 이 검은 검신에 실리는 막대한 힘을 끝끝내 버텨 냈다.
타아앙!
다시 탄력 있게 펴진 검이 무겁디무거운 언월도를 힘겹게 튕겼다.
쇄애애애액!
하지만 허공으로 밀쳐졌던 언월도는 밀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더 빠른 속도와 힘으로 남궁도위의 검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폭음이 터지고, 남궁도위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의 두 발이 깊게 파인 고랑을 만들어 내고, 젖혀진 상체는 뒤로 부러질 듯 휘어졌다.
“쿨럭!”
가까스로 몸을 멈춰 세운 남궁도위가 밭은기침을 토하니 피가 튀었다. 그러나 이미 붉게 젖은 안면에 새로이 튄 피 정도야 자연스럽다. 보이지도 않는다.
“애송이 놈…….”
흑룡왕의 두 눈이 새파란 광망을 쏟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남궁도위를 으깨 놓을 듯한 눈빛과 달리, 그의 발은 더없이 신중하게 움직인다.
그 역시 확인한 것이다.
고작 개에 불과하다 여겼던 이가 가진 독기를. 그 독니가 제 목덜미에 박힐 수도 있음을 말이다.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신중하기를 각오한 순간부터, 둘 사이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드러났다.
남궁을 짊어질 자격이 충분하다는 찬사로도 채 다 메울 수 없는…… ‘세월’이라는 격차였다.
“흐으…….”
남궁도위가 속도를 줄이느라 땅에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한계다.
어쩌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검으로 흑룡왕을 잡겠다고 한 건.
흑룡왕은 남궁도위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던 사파의 수괴다. 아직 젊은 남궁도위에게는 너무도 까마득한 상대였다. 설령 한쪽 팔을 잃었다 해도 말이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으르렁대는 흑룡왕의 목소리가 남궁도위의 귀에 파고들었다.
“분노에 차면, 원한을 잊지 않으면, 명분을 가지고 있으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고작 온실 속의 도련님이!”
흑룡왕이 순간 거리를 좁히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휘이이이잉!
막대한 힘을 실어 언월도를 단숨에 휘두른다.
남궁도위도 이를 악물고 흑룡왕의 도를 제 검으로 후려쳤다.
콰가각!
이번엔 폭음이 아닌, 거슬리는 금속음이 울렸다. 날이 서로 맞닿는 순간 언월도를 회전시킨 흑룡왕이 창대로 남궁도위의 어깨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퍼어억!
쇄골이 부러지고, 살이 움푹 파인다.
남궁도위의 몸뚱이가 힘껏 걷어차인 공처럼 튕겨 나갔다.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주위의 소리가 물속에라도 있는 듯 아스라해진다. 검을 쥔 손에 자꾸만 힘이 풀린다.
콰아아아아!
그러나 연이어 끔찍한 파공음이 귀를 파고드는 순간, 남궁도위는 쉴 틈도 없이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콰아아앙!
그가 조금 전까지 나동그라졌던 땅은 낙석을 만난 눈밭처럼 터져 나가 버렸다.
“쿨럭!”
그 여파까진 피하지 못하고 또다시 나뒹군 남궁도위가 다시 한번 검붉은 피를 게워 냈다.
“도위야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남궁명이 절규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어리석은 놈.”
흑룡왕이 이를 갈아붙였다.
“명분, 의지, 분노. 이런 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 너만 특별하다 생각했느냐? 가문의 이름이 아니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나약한 놈이!”
땅에 처박힌 남궁도위의 입에서 힘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도 없이 만났지. 재능있는 자, 그 미래가 기대되는 자, 세상을 호령하리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자. 하지만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살아남은 이들이다.”
“…….”
“복수하고 싶다면 참아 냈어야지! 원한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놈은 바닥을 기다 죽는다. 그게 강호의 법칙이다!”
그극!
남궁도위의 검 끝이 땅에 콱 박힌다.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움켜쥔 남궁도위가 힘겹게 부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인가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꿈에서조차 증오스럽게 선명했던 흑룡왕의 모습이 이젠 흐릿하다.
하지만 절망하는 대신, 남궁도위는 힘을 잃은 제 발에 검을 박아 넣었다. 설령 죽는다고 하더라도 쓰러지지는 않겠다는 듯.
“……흑룡왕.”
“더 지껄일 말이 남았느냐?”
“그 말이…… 맞겠지.”
너무 부어서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든 눈을 뜨며 남궁도위가 말했다. 초점을 잃어서일까, 분명 흑룡왕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 눈은 묘하게 공허해 보였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너를 넘기에.”
“흥. 잘도 지껄이는군. 애송아, 똑똑히 알아 둬라. 네 그 멍청한 짓거리 때문에 너뿐만 아니라 남궁세가 모두가 이곳에서 죽는 것이다. 저승에서 네 아비를 만나거든 어디 한번 잘 변명해 보아라.”
남궁도위의 등이 들썩였다.
웃음을 지을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일그러졌음에도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우습지?”
“착각……하지 마라, 적세광.”
남궁도위가 억지로 입을 벌렸다.
“나는 멍청하지만…… 나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다.”
흑룡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저 비루해진 몸뚱이에,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꼴이 되어 버린 놈에게, 대체 뭐가 더 남아 있단 말인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곱게 죽여 달라고 목을 빼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면서.
“남궁의 허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처음부터 알았어. 아직…… 아직 내가 너를 이길 수…… 없다는 건.”
흑룡왕이 주먹을 콱 쥐었다.
더 이상 저 헛소리를 들어 줄 이유 따윈 없다. 정신이 반쯤 나간 놈의 넋두리를 다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남은 말은 저승에서 지껄여라.”
흑룡왕이 언월도를 쥔 손에 힘을 준 그때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래, 이미 배웠거든. 내가 혼자 이길 필요가 없다는 걸.”
“……뭐?”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남궁세가를 포위했던 수로채 세력의 일각이 허물어졌다.
“뭐?”
놀란 흑룡왕이 그곳을 향해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그곳엔 어느새 나타난 낯선……. 아니, 더없이 익숙한 이들이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흑룡왕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화……산파?”
“소가주!”
남궁도위의 처참한 몰골을 확인한 백천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는 불타는 두 눈으로 흑룡왕을 죽일 듯 노려보더니 이내 커다랗게 외쳤다.
“소가주를 도와라, 당장!”
“예!”
명을 받은 화산의 검수들이 남궁세가의 잔당들을 몰아치느라 진이 완전히 무너진 수로채를 향해 돌진했다.
“비켜라! 이 개자식들아!”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선두로 치고 나온 조걸이 광포한 매화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피로 물든 전장이 다시 한번 크게 뒤흔들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