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79화
1579화. 어디 가져가 보렴. (4)
무려 수천이 모여 있다.
그 공간이 넓다고 해도 소란이 없을 리 없다. 아니, 오히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들이 모인 곳이라면 응당 드높은 함성이 터져 나갈 듯 들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노을 지는 이 땅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비상식적으로 짙고 무거운 침묵뿐이다.
그리고 그 고요를 만들어 낸 건 양측의 선두에 선 두 사람. 이 시대를 지배하는 두 거인이었다.
법정.
천년 소림의 방장이자 지난 수십 년간 구파일방을 이끌어 온 정도(正道)의 거목.
천하제일인을 정하는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어떤 이도 당대의 천하제일인을 논함에 있어 감히 법정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일소.
만인방의 방주이자, 사패련의 련주. 사분오열되어 있던 사파를 순식간에 규합하여 요원하게만 보였던 사파일통(邪派一統)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 낸 희대의 걸물.
그에 대한 평이야 사람마다 다르고,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이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가 당대의 사파제일인이라는 사실만큼은 천하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의 수장이자, 천하를 움직이는 두 축. 그 두 거인이 황량한 평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것이다.
둘의 대립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은 이곳에 모인 이들을 절로 숨죽이게 했다.
“……아미타불.”
법정이 작게 불호를 외었다.
‘장일소.’
더없이 먼 거리이나, 그의 눈에는 손에 잡힐 듯이 선명히 보였다. 이질적일 만큼 화려한 장일소의 모습이.
곧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갈 전투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짙은 권태가 어려 있다.
사람의 본질을 보려 하는 법정의 눈에 장일소의 복색 같은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장일소라는 인간만을 주목할 뿐이다. 수두룩한 이들을 보고 평해 온 법정조차도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장일소 그 자체를.
법정은 새삼 깨달았다.
강렬함이 지나쳐 수십 년은 서로 싸워 온 듯 익숙한 장일소이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여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는 걸 말이다.
묵직한 법정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대지를 내달렸다.
“패군. 얼마나 더 많은 죄를 지으려 하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일소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대의 욕심으로 인해 천하가 비탄에 잠겼소.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피가 비처럼 땅을 적셨소. 그것으로도 부족하시오?”
웃기만 할 뿐, 장일소는 딱히 이렇다 할 말 없이 법정을 보았다. 눈빛에 적의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내 그대에게 권하겠소. 그대가 이미 지은 죄는 씻을 길이 없으나, 더 큰 죄를 짓지 않을 방법은 분명 있소이다. 그 모든 욕심이 그저 공(空)임을 깨닫고 이만 자중하시길 바라외다. 그렇다면 적어도 더 큰 업(嶪)을 쌓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오.”
“바, 방장!”
종리형이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자가 지은 죄가…….”
“아미타불.”
하지만 무거운 불호 소리가 울리자 종리형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렇게 반발을 누른 법정은 종리형을 상대하는 대신 장일소를 향해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일갈했다.
“손에 무언가를 쥘 수 있다 믿는 것은 필부의 착각에 불과하오. 결국 사람이란 태어날 때처럼 빈손으로 죽는 법. 그 손에 남을 것은 명예도, 재물도 아닌 태산처럼 쌓아 올린 만생(萬生)의 업(嶪)임을 어찌 모른단 말이오?”
법정이 자연스레 반장을 취했다.
“그대가 이만 족함을 알고 죄를 씻어 가려 한다면, 소림은 기꺼이 이를 도울 것이오. 불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소이다. 그게 설령 만고의 죄인이라 해도 말이외다.”
무겁고 진중한 눈빛이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법정의 말은 모두를 일순 당황케 하긴 했으나, 어쨌든 그 안에 진정성이 어려 있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법정은 불법을 따르는 데 평생을 바친 고승이다. 이런 순간까지 제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노승의 고아한 말에 돌아온 건 커다란 비웃음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핫!”
내내 말이 없던 장일소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른 거목처럼 고아한 법정과 달리, 배를 잡고 웃어 대는 장일소의 모습은 경박하기 짝이 없었다. 한 세력의 수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모습이다.
“이런, 이런.”
한참을 웃어젖힌 장일소는 길게 다듬은 손톱으로 눈가를 훔쳤다. 얼마나 웃어 댔는지 눈물마저 찔끔 배어나 있었다.
“미안하네,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설법(說法)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말이야. 그러니 이건 꼭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곱게 휜 장일소의 눈이 법정에게로 향했다.
비웃음이 역력하다. 법정을 비웃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비웃으며, 법정이 믿으며 따르는 불도마저도 비웃고 있다.
“그렇지 않니?”
장일소의 눈빛은 법정 너머의 모두를 훑었다.
이제 구파일방이라 부르기에는 어색해졌지만, 어쨌든 여전히 그 이름 아래 중원을 수호하는 이들을.
“강남이 내 발아래 떨어졌을 때도.”
장일소의 시선을 느낀 이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사천이 내 아이들의 손에 불탔을 때도.”
으득.
누군가가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는 제집 같은 강북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때도 구경이나 하던 놈들이…… 자비와 불도를 논한다라…….”
담담한 목소리지만, 정말이지 신랄한 비꼼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무식하긴 한 모양이지? 내가 아는 불법과 너희가 논하는 불법이 다른 걸 보니 말이야.”
“패군.”
“글쎄, 부처는 어찌 생각할까? 입으로만 불법과 자비를 논하는 너희보다는 당장 강북에서 사람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머저리들을 좀 더 기꺼워하지 않을까? 응?”
천우맹을 말함이다.
장일소는 알고 있다. 지금 그들이, 법정이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을 말이 무엇인지. 지금 그들이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법계의 시선이 법정의 등을 타고 그의 손에 가 닿았다.
법정의 등은 평소처럼 덤덤했지만, 긴 염주를 쥔 손은 힘이 잔뜩 들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로 뒤에 선 법계만이 볼 수 있는 그 미세한 떨림이 지금 법정의 내심을 짐작하게 했다.
“아미타불.”
하지만 그 내심이야 어떻건, 흘러나온 불호는 그저 경건했다.
“분명 우리는 부족하오. 하지만 그 모든 원인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대에게 있소이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멈추겠다면 지금이오.”
“지금이라.”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찔렀다. 작지만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족함을 알고 이만 멈추라……. 내가 그러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보내 주기라도 할 건가?”
장일소의 새빨간 입술이 뒤틀렸다.
“아니. 아니겠지. 그렇게는 못 하겠지. 그럼 어쩔 테지? 친절히 모셔가서 사지 근맥을 끊고 지하 뇌옥에 처박아 두려고? 죽는 날까지 반들거리는 땡중 놈들이 읊어 대는 지긋지긋한 불경이나 들으며 곰팡내 나는 뇌옥에서 썩어 가라고?”
“패군.”
“쿡쿡쿡쿡.”
장일소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소림 놈들은 자비롭다더니 이거야 원. 지옥의 마귀들도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겠군, 차라리 사파가 자비롭지. 우리는 깔끔하게 죽여 주기라도 하잖니?”
“그대가 지은 죄를 갚을 방법은 그것뿐이오.”
“하하핫.”
장일소가 짧게 웃었다.
이윽고 흰 얼굴에 시퍼런 귀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 비위가 약한 이는 아닐진대 말이야. 더는 구역질이 나서 들어 줄 수가 없군.”
그 일변한 기세에 순간 법정도 숨을 멈추었다.
“참회라……. 궁금하지 않나?”
시릴 정도로 차디찬 눈빛이 노승을 꿰뚫는다.
“이곳에서 가장 내가 참회하지 않길 원하는 이가 누구인지. 이 전쟁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이가 누구인지. 불도라는 알량한 가면 뒤에 숨어서 그 누구보다 제 욕망을 맹렬히 좇는 이가 누구인지 말이다.”
“장일소!”
법정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참아 왔다……. 그것참 좋은 변명이지. 그럴싸하고 대단해 보여.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야 한단다.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 인내를 뭐라 일컫는지 아니?”
장일소의 눈이 법정, 그리고 그 뒤에 선 이들을 매섭게 뚫었다.
“회피.”
고작 그 두 글자가 법정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이상하잖아. 대가는 너희가 치르지 않았는데, 왜 너희가 인내한 게 되는 거지? 너희는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그런데 이제 와 마치 숭고한 결정이라도 내린 양 내 앞에 서서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지. 누가 알아봐 주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그 요설(妖說)을!”
“역겹고…….”
법정에게 닿은 장일소의 눈빛에는, 흡사 벌레를 바라보는 듯 혐오가 스며 있었다. 법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런 시선을 맞받았다.
“추악해.”
장일소가 웃었다. 눈에 실린 경멸은 여전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딱히 너를, 너희를 싫어하지는 않는단다. 사람이란 애초에 역겹고 추악한 거 아니겠니?”
장일소가 빙긋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그늘 한 점 없어 보이는 웃음이 얼굴 전체에 번져 간다.
“내가 더 쉬운 방법을 알려 줄까?”
장일소의 물음에 법정의 얼굴엔 얼핏 의문이 스쳤다. 장일소가 상냥하게 말했다.
“항복하렴.”
“장일소!”
“그럼 더는 피 흘릴 이가 없을 거란다. 나는 쓸데없는 피를 보는 데는 관심이 없거든. 약속하지. 너희가 내 앞에 조아리고 내 발을 핥는다면, 나는 누구도 죽이지 않고 그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어때? 그럼 희생 없는 평화가 완성된단다.”
법정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어렵지 않은 선택이지? 네가 정말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을 원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일까?”
요악한 눈빛을 보며, 법정은 뼈저리게 실감했다.
저기에 있다.
그 어떤 말도, 설득도 통하지 않는 완전한 악(惡). 악의를 뭉치고 빚어 만든 것 같은 이가 바로 저기에 있다.
저자를 어찌 사람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아니지, 그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알지, 네가 뭘 원하는지. 네가 원하는 건 바로…….”
장일소가 손톱으로 제 목을 천천히 가로 그었다.
“여기 있단다.”
그와 동시의 그의 새빨간 입술이 뒤틀렸다.
“네가 원하는 것. 네 목적을 이뤄 줄 것. 네 이름을 이 강호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 넣을 전리품이. 소림이라는 이름을 다시 강호의 하늘 위로 올리고, 네 그 알량한 법명을 소림의 역사에 다시 없을 이름으로 남겨 줄 것이 말이다.”
크지 않은 목소리가, 법정의 귓가에는 흡사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이제 장일소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다시 일말의 적의조차 없었다.
“가져가 보려무나.”
“…….”
“그 손에 피를 묻히고,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 땅이 온통 검붉게 물들도록 싸우고 또 싸워서 손에 넣어 보렴. 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걸 말이야.”
“아미타불.”
애초에 정해져 있던 결말이다.
두 거인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걸.
그들은 받아들이는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게 하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는 이가 지금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상대를 무너뜨려야 한다. 상대의 신념, 목표, 세력, 나아가 목숨까지도.
“결국 대화는 통하지 않는구려.”
“멀리도 돌아오는군. 뻔한 결말인데 말이지.”
장일소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노을이 그새 더 자욱해져 있었다. 이제 곧 세상에 쏟아질 피를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모두 들으시오!”
세상을 뒤흔들 대전(大戰)의 포문을, 법정이 열었다.
“더는 저 사특한 악적의 만행을 방조할 수 없소. 우리는 피를 보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오늘 이곳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저 악적을 벌하고 강호의 평화를 되찾을 것이오!”
사자후가 천신의 고함처럼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의 전신이 팽팽한 긴장으로 당겨졌다. 극도로 끌어 올린 내력이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아―미―타―불―!”
그 기세를 몰아 법정이 우레와 같은 불호를 내지르고 땅을 박찼다.
“방장을 따르라!”
“우오오오오오!”
지금껏 억눌러 온 모든 것을 일거에 터뜨린 구파일방의 군세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패련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태산 같은 규모의 드높은 해일이 밀려드는 듯했다. 이제껏 두려움을 모르고 싸워 온 사패련의 무인들도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하는 기세였다.
“흐음.”
그때, 귓가로 태평하기 이를 데 없는 장일소의 비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사패련의 무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다시금 상기했다.
장일소가 손끝으로 턱을 톡톡 치며 말했다.
“쓸데없이 요란스럽구나. 적당히 상대해 주렴. 이제 여기는 더 이상 저들이 날뛰던 세상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당연히 홍견(紅犬), 두려움을 모르는 장일소의 충견들이었다.
“련주를 지켜라아아아아!”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그들이 내달리자 만인방과 흑귀보의 무인들도 이를 악물고 뒤를 따랐다.
막아설 것 하나 없는 드넓은 평원이, 적의로 물들고 뒤틀리며 난파선처럼 요동친다.
서산 너머에 목이 매달린 태양 또한 밀려드는 어둠에 베인 것처럼 하늘 전체에 붉게 흩뿌려졌다.
정과 사.
구파와 사패련.
그리고 법정과 장일소.
천하의 향방을 가를 단 한 번의 대전. 그 막이 마침내 오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