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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95화


1595화. 부처도 너를 버린 거란다. (5)

적호는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걸 느꼈다.

눈앞의 나타난 이를 처음 본 것임에도, 그 정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천하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말 한마디로 그를 굳게 할 만한 이가 많을 리는 없으니까.

저 검은 무복과 허리에 찬 검까지 보면 더 생각할 것도 없다.

“화산⋯⋯검협.”

신음 같은 목소리가 열린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적호는 이를 악물며 도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가능할까?아직 상대는 한 명뿐이다. 저자를 쓰러뜨리는 건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격으로 법정의 목을 날리는 시도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목숨을 건다면⋯⋯.

꾸욱.

하지만 적호는 끝끝내 도를 휘두르지 못했다.

그를 응시해 오는 눈을 마주한 순간 직감한 것이다. 이 도를 휘두르면 죽는다. 저 법정의 목에 닿지조차 못한 채로.

‘이게 화산검협⋯⋯. 아니, 매화검귀.’

단순히 그가 전해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다.

목숨을 건다고 해도 닿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으득.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굴욕감에, 그는 참지 못하고 이를 거칠게 악물었다.

그때, 화산검협의 등 뒤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들이 있었다. 그의 일행일 것이다.

여기서 더 머뭇댄다면 적호는 정말 살아서 빠져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터.

이게 자비인지, 아니면 그에게 검을 휘두르는 게 시간 낭비라고 여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저 화산검협이 이를 드러내지 않는 지금 벗어나야 한다.

적호는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다시 보지.”

그 짧은 마지막 한마디로 무의미한 자존심을 지킨 적호는 법정을 흘긋 노려보고 사라졌다.

청명은 그런 적호를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뒤늦게 청명을 따라잡은 혜연의 시선이 법정에게로 꽂혔다.

“방⋯⋯!”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망연히 법정을 보던 혜연이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비명처럼 외쳤다.

“자, 장로님!”

한눈에 보아도 위중해 보이는 법계를 향해 혜연이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상처투성이의 법계를 부둥켜안자 힘이 다 빠진 몸뚱이가 맥없이 딸려 올라왔다.

“장로님! 장로님, 정신 차리십시오! 장로님!”

목과 가슴에 새겨진 깊은 상흔에서는 너무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법계의 운명은 직감하고도 남았다.

혜연은 절규했다.

“장로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뒤늦게나마 법계의 단전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효과가 있었음일까?

잠시 후, 영 움직임이 없던 법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윽고, 눈이 느리게 떠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자신을 끌어안은 이를 간신히 보았다.

“혜⋯연⋯⋯?”

“자, 장로님! 접니다! 혜연입니다!”

혜연이 늘어진 법계의 손을 움켜잡았다. 눈물 젖은 얼굴을 멍하니 보던 법계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장⋯⋯은?”

“⋯⋯살아 계십니다, 장로님. 방장께서는⋯⋯.”

혜연은 목이 콱 눌리기라도 한 듯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법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혜연의 눈에는 그 미소가 너무도 편안하게만 보였다.

“다행⋯⋯.”

법계의 고개가 천천히 꺾였다.

혜연은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았다. 어깨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던 청명이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차마 앞을 볼 수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법정은 그 얼굴을 땅에 파묻은 채 움직임이 없었다.

청명은 그런 법정을 두고 말없이 발을 내디뎠다.

당연히 노기가 치솟고, 울분이 들끓지만 지금은 그걸 발산할 때가 아니다.

눈으로 봐야 한다. 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부터 세상이 감당해야 할 게 무엇인지.

저벅.

청명은 걸었다. 쓰러진 법정과, 오열하는 혜연, 그리고 영원히 침묵할 법계를 지나쳐서.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고, 이내 바람처럼 가속했다. 드높게 자라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나무들이 파스스 흔들렸다.

타앗!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영원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이제 곧 펼쳐질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만들어 낸 왜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피는 길지 않았고, 위압적으로 자라난 나무들을 지나치고 나니 이내 청명의 눈앞엔 드넓은 광야가 펼쳐졌다.

“⋯⋯.”

청명의 이가 입술을 파고들었다.

피에 젖은 대지와 그 위에 널린 죽음.

땅이 이토록 드넓으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안력을 돋워서 본 아주 먼 곳까지 빽빽하게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청명은 그 모든 걸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눈에 담았다.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시신, 부러진 병장기들, 이 먼 곳까지 풍겨 오는 형용 못 할 비린내.

그리고 이미 죽어서 가치를 잃은 이 시신들 위로 더 많은 살육을 갈구하는 이들이 흡사 까마귀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청명은 순간 구역감이 들었다. 어쩌면 절망감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지독한 참상이, 그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떠한 순간을 강제로 끄집어 올린 탓이다.

으드득.

꽉 움켜쥔 주먹에서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은 이 전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중심에 있는 자 역시 청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를 발견할 수 없어야 정상인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약속한 듯 서로를 두 눈에 담았다. 마치 숙명처럼.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들렸다.

그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보이는 입 모양이 청명의 머릿속에 웃음기 섞인 나긋한 음성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이런⋯⋯. 귀한 손님이 도착하셨군.”

정말로 반가운 손님을 맞이한 듯, 그의 두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얼핏 온화해 보이기까지 하나 이젠 그 웃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는 이 천하에 없다.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서둘러야 하지 않았을까? 응?”

“⋯⋯.”

“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쩌렁쩌렁한 웃음이 청명을 때렸다.

청명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울분이 쌓였지만 갈 데가 없고, 분노가 치밀지만 토할 수가 없다.

장일소의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토록 즐거움에 몸을 맡긴 장일소와는 달리, 호가명은 더없이 심각한 눈으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청명을 주시했다.

그의 눈으로는 그 외견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저자가 뿜어내는 지독한 살기는 이 거리를 격해 호가명의 전신을 차디찬 빙굴 속으로 밀어 넣는 듯하였다.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절대 올 수 없으리라 여겼다. 저 예측 불가능한 괴물을 이 전장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그와 장일소가 얼마나 신중하게 덫을 팠던가. 심지어 흑룡왕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며 매화검귀를 끌어들였다.

그랬음에도 저 괴물 같은 놈은 이 전장에 흐른 피가 채 식기도 전에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만약 저자의 움직임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그들의 함정이 조금만 정교하지 못했더라면 승패가 바뀌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지금 승리를 거머쥔 건 분명 사패련이고, 련주였다.

장일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가 말했잖니.”

저 멀리 있는 이에게 들릴까 의아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설령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장일소가 전하려는 뜻만은 확연히 가 닿을 것이다.

“선택이란.”

웃음기 남아 있던 장일소의 두 눈이 순간 사특하게 광채를 띠었다.

그리고 그는 청명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느리게 사냥감을 위압하는 포식자처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지.”

이윽고.

멀리서 그들을 노려보던 청명 역시 발을 내디뎠다. 호가명의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설마⋯⋯.’

저벅.

청명이 또 한 발짝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호가명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지금 달려든다고?’

이곳에?

호가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불가능하다.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고 해도 그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청명이다. 분노로 눈이 멀었다 한들 그토록 어리석고 우둔한 선택을 할 리 있겠는가.

분명 그럴진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술렁였다.

만일 정말로 매화검귀가 저 걸음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라면?

호가명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놈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

지독한 갈증이 찾아왔다. 호가명의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기세였다. 굳이 놈이 돌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여기서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워진다면⋯⋯.

‘조금만 더⋯⋯.’

어쩌면 장일소는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구파일방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지금, 저 매화검귀마저 잡는다면 더는 이 천하에 사패련을 막을 이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천하가 손에 잡힐 듯하다.

‘조금만⋯⋯.’

호가명의 손끝이 절로 들썩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흐으음.”

장일소가 느긋하게 콧소리를 흘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숨 쉬는 것마저 잊은 채 장일소의 그 손끝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모두 구파일방을 상대로 싸웠고, 심지어 압승을 거두었다. 그 도취감에 한껏 취한 이들을 그저 손짓 하나로 집중시켜 버렸다.

그 정도로 지금 장일소가 가지는 존재감은 거대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천하의 누구도 감히 그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만큼 장일소에 대한 사패련의 충성심 역시 극에 달해 있었다.

저 손길이 아래로 내리그어지는 순간,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그 출신과 문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다.

이만한 위업을 이룬 그들의 련주에게 감히 이빨을 드러낸 저 무엄한 자를 갈기갈기 찢고 징벌하기 위해.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킨 바로 그 순간.

“자, 그럼⋯⋯.”

따악.

장일소가 손끝을 내리는 대신 손가락을 가볍게 튀겼다.

얼핏 의도를 바로 알 수 없는 지시였다. 모두 영문을 모르는 눈치로 바라보니 장일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만 달아나자. 사파답게 말이다.”

순간 모두의 얼굴이 멍하니 풀리고 말았다. 호가명도 예상하지 못한 지시에 입을 벌렸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 선택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획 돌렸다.

“려, 련주님!”

호가명이 얼른 뒤를 따르며 부르니 장일소가 어느새 차분해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실로 태연한 물음에 호가명은 순간 눈앞이 아뜩해지고 말았다.

모두 장일소의 명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장일소는 그런 그들을 휙 둘러보며 말했다.

“뭘 하고 있니?”

한없이 맑은 웃음이 내걸렸다. 어쩐지 섬뜩한 미소에,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퇴각이란다. 움직이렴.”

“예!”

사패련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명령을 끝으로, 장일소는 흘끗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청명이 보인다.

장일소가 또렷한 입 모양으로 말해 주었다.

“끝난 무대에 기어코 오르는 배우만큼 추한 것도 없단다. 여기 네가 나설 자리는 없거든.”

그 비웃음이 청명의 두 눈에 아프도록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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