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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596화


1596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1)

압도적인 대승을 뒤로하고, 사패련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십 일간 축제를 벌여도 모자랄 위업을 올린 게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서둘러라.”

잠깐 입술을 깨물었던 호가명이 수하들을 재촉했다. 그 역시 장일소의 명을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련주의 명령에 이견을 제시하는 건 더욱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전장에선 말이다.

들끓던 전장의 열기가 빠져나간 자리로 지독한 악취와 서늘함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련주님.”

“흐음. 그러니?”

장일소가 흘끗 시선을 틀었다.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선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두고 시선을 마주한 장일소는 이내 비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아니, 돌아선다기보다는 ‘등’을 내보이는 것과도 같았다.

마치 ‘자신 있다면 와서 내 등을 찔러 봐라’ 하고 청명을 도발하는 듯한 행위였다.

여유롭게 미소를 흘린 장일소가 장난스레 말했다.

“가자꾸나. 더 약을 올렸다가는 정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겠으니.”

그는 깔깔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규모가 거대한 대군이 미련을 두지 않고 이 피로 물든 땅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으드득.

청명은 그저 입술을 깨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왜 달려들고 싶지 않겠는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놈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청명은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스며 나온 피가 땅으로 한 방울씩 툭툭 떨어졌다.

그리 홀로 서 있는 청명의 곁으로 혜연과 유이설이 다가와 섰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장일소와 그 무리가 눈앞에 있었다면 분노를 모조리 쏟을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달아나 버렸다. 거기에 대고 무슨 분노를 어찌 쏟아낼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이 끔찍한 광경을 황망하게 지켜보며 절망하는 것뿐이었다.

으드득.

청명이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유이설이 걱정 어린 눈으로 청명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질⋯⋯.”

이윽고, 청명의 꽉 물린 입술 사이로 화에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실로 무력했다.

❀ ❀ ❀

장일소는 피로 젖은 제 얼굴이 영 못마땅한 눈치로 혀를 찼다.

그가 손톱으로 그새 말라붙은 입술의 피딱지를 뜯었다.

“지독한 중놈 같으니라고. 까딱하면 죽을 뻔했구나.”

가볍게 말은 하였으나, 실제로 법정은 정말 강했다. 둘의 싸움을 지켜본 이라면 감히 누구도 부정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하지만 대부분은 아마 법정의 무위가 아닌 이런 장일소의 태도에 더 놀랄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퇴각해 버리는 이. 그러면서도 전장의 상황이 아니라 제 얼굴에 난 상처나 훑고 있는 이 괴이한 자의 태도에 말이다.

물론 사패련에 적을 두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이 사실을 감히 지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사패련 소속이 아닌 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장일소의 저런 행동을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오?”

“으음?”

화려한 면경을 들여다보던 장일소가 심드렁한 눈빛을 돌렸다.

얼굴에 잔뜩 노기를 품은 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해태양궁의 궁주십니다, 련주.”

다급하게 옆으로 달려온 천면수사가 장일소에게 그의 신분을 알렸다. 장일소의 두 눈이 짧게 이채를 띠었다.

“먼 데서 오신 분이로군. 인사라도 드렸어야⋯⋯.”

“인사 같은 건 됐소이다!”

“음?”

“다시 묻겠소. 이게 무슨 짓이오?”

“궁주!”

천면수사가 기겁하여 태양궁주를 막으려는데, 장일소가 슬쩍 손을 들며 그런 천면수사를 만류했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짓이라⋯⋯. 뭐가 그리 불만이신지?”

얼핏 보아선 정말로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태양궁주가 다 주변에 들리도록 노골적으로 이를 갈았다.

“그 상황에서 고작 한 사람 때문에 퇴각을 한다고?”

“⋯⋯.”

“제정신이오?”

장일소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마찬가지로 장일소를 호위하던 홍견들의 얼굴에서도 냉정한 적의가 떠오른다.

“감히⋯⋯.”

“쯧.”

하지만 장일소가 가볍게 혀를 한차례 차니 잘 훈련된 맹견처럼 치솟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호가명과 홍견들은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지만, 정작 모욕을 당했던 당사자인 장일소는 무척 재미있단 얼굴로 웃었다.

“글쎄, 내가 과연 제정신인지.”

“뭐⋯⋯.”

“그럼, 묻지. 우리 지체 높으신 궁주님께서는 어찌 하는 게 좋아 보이셨으려나?”

태양궁주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웃음기 어린 장일소의 눈빛에서 순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모멸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남해에서는 왕족이고, 진씨 왕조의 일원이다. 태생적으로 누구에게도 이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하나 태양궁주가 이 순간 진정으로 모멸감을 느낀 건, 저 장일소란 자기 자신을 비웃고 있음을 알아채고도 쉬이 경거망동할 수 없는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대승이었소.”

태양궁주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나 장일소의 반응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런가?”

태양궁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이자의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대승이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위업이 아니다.

구파일방은 이제 그 형태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분오열될 게 분명하다. 설령 어찌어찌 그 형태는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족히 백 년간은 전과 같은 위세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쉽게 말해, 당대에서 구파일방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는 말이다.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이 천하에 우뚝 선 지 벌써 수백 년. 정과 사, 그리고 새외를 통틀어 그들을 이렇게 끌어내린 세력이 있었던가?

입에 담기도 버거운 마교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위업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이가 지금 이런 말이나 하고 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태양궁주가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위업이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소! 모두가 그 대단함을 실감하고 평할 때나 의미를 지니는 거란 말이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위업, 뒤늦게 받는 정당한 평가 같은 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오!”

“흐음⋯⋯. 그래?”

태양궁주의 말투가 조금씩 정중해졌고, 장일소의 말끝은 조금씩 짧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치듯 물러나 버리면 아군은 승리를 실감하기 어렵고, 적은 패하고도 패하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오. 이건 군을 다루는 방법이 아니오!”

장일소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서?”

“알게 하도록, 그리하여 질리도록 체감하게 했어야 하오! 나라면 절대 저곳에서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오. 저들의 시신이 썩어 문드러져 역겨워질 때까지 모두가 사패련이 이룬 위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오!”

그랬다면 아군은 더욱 용기백배했을 것이고, 적들의 사기는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을 테니 말이다.

“저 건방진 자를 찢어발겨 본보기도 보이고 말이오.”

태양궁주가 으르렁대듯 말한다.

물론 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자신감이라기보다, 장일소의 기에 눌리지 않기 위해 끌어낸 허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몇몇 이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디 승리란 한 올도 남김없이 피부에 닿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장일소가 고수해 온 방식이기도 했다.

사패련이 그 가슴에 진정한 ‘자신감’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넣던 때가 언제였는가?

저 장강에서였고, 그 사천에서였다.

구파일방을 쫓아냈을 때, 사천을 정벌하고 당가의 뒤를 추격했던 때, 그들은 평범한 사파가 아닌 진정으로 ‘사패련’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달아나 버리면 고작 한 사람 때문에 달아난 꼴이 되어 버리지 않소! 설사 물러나더라도 저자의 목은 베어 버려야 했소!”

이어지는 타당한 지적에도 장일소의 표정은 변화조차 없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태양궁주 진평을 바라볼 뿐.

그 특유의 분위기가 진평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내 말이⋯⋯!”

“아아.”

장일소가 가볍게 손을 들어 태양궁주의 말을 끊었다.

“충분해, 그 정도면.”

태양궁주는 속이 다 뒤집혔다. 소매에 숨겨진 주먹을 움켜쥔 채 최대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 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구파를 집어삼킨 사패련의 련주는 감히 남해태양궁이 단독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안하무인인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눈치를 갖추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왕족으로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터.

“과시라⋯⋯.”

장일소가 중얼거리더니 빙긋 웃었다.

“좋지. 그렇게 원한다면 딱히 말릴 생각은 없단다.”

“그러시겠⋯⋯.”

말을 멈춘 태양궁주가 움찔하더니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 하신 것이오?”

그 당황한 낯을 보며 장일소가 호가명을 불렀다.

“하핫, 가명아. 아무래도 먼 데서 오신 객께서 영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구나.”

호가명이 힐끔 태양궁주를 보고는 해설을 덧붙였다.

“그게 옳다고 여긴다면 태양궁에서 그 영광을 누려도 막지 않겠노라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태양궁주의 얼굴이 멍해졌다.

막지 않겠다고?

“남해태양궁이 이 전쟁에 한 손을 보탠 건 사실이니, 그 영광을 누릴 자격은 충분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저 전장으로 돌아가셔서 옳다고 여긴 바를 행하십시오.”

호가명이 딱 잘라 말했다.

태양궁주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피비린내가 이곳까지도 나는 듯하다. 말 그대로 지옥이 펼쳐진 듯한 전장.

‘전쟁’이라는 이름의 전리품을 온전히 그 혼자 움켜잡을 수 있다. 그건⋯⋯ 태양궁주에게 있어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가 보렴.”

장일소가 뱀처럼 속삭였다.

“내가 허락할 테니.”

“⋯⋯.”

“어서.”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

허락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지금의 태양궁주에게 그건 너무도 작은 부분이었다. 태양궁주가 곧장 고개를 끄덕여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저 하나, 아이를 꾀는 듯한 장일소의 목소리가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체⋯⋯.’

그때, 전장을 바라보던 태양궁주의 두 눈에 무언가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림처럼 영영 정지해 있을 것만 같던 눈앞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저건⋯⋯?’

태양궁주가 속으로 품은 의문을 듣기라도 한 듯, 호가명이 담담히 말했다.

“천우맹.”

“그게 다가 아니지.”

장일소가 덧붙였다. 그러자 호가명이 매서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천우맹이 나타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또 다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지는 않으나, 그 정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제갈세가, 그리고 모용세가로군요.”

전쟁의 불씨를 아직 놓지 않은 이들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전장을 향해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태양궁주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식은땀으로 등허리가 축축했다.

만일 저곳에 그가 다시 머리를 들이밀었다면?

아마 태양궁은 분노한 천우맹과 두 세가의 협공 아래 몰살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왜 그러지? 혹시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나?”

장일소를 돌아보는 태양궁주의 얼굴이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굳어 있었다.

‘이자는⋯⋯ 이미 알았던 건가?’

이쪽도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대승으로 인해 한껏 고양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쪽 역시 희생을 치른 상황에서 또 다른 강적과 연이어 격전을 치렀다면 그 승부의 결말은 짐작하기 어려웠으리라.

이자는 이렇게 되리라는 걸 다 알았던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발을 뺐다. 이미 거둔 승리에는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았다. 그 승리의 전리품에 눈이 잠시 멀어 버렸던 그와는 다르게.

미소 어린 장일소의 눈은 서늘했다. 흡사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눈빛 앞에, 태양궁주는 소리 없이 앓았다.

“나는⋯⋯.”

차마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흐음. 갈 생각이 없어 보이네⋯⋯.”

장일소가 중얼거렸다. 패배감과 굴욕감에 태양궁주가 몸을 떠는 바로 그때였다.

“어서 오렴.”

장일소가 나긋하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의도를 다 알아채지 못한 태양궁주가 멈칫했다. 장일소는 웃으며 말했다.

“사패련에 온 걸 환영한다.”

태양궁주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으려 했다.

그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이쪽을 가만히 지켜봐 오는 호가명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태양존자 진평은 내밀어진 장일소의 손을 잡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왕족인 그가 이런 자세를 취하는 일은 말 그대로 드물다. 그러나 그의 생존본능이 계속해서 확실히 외치고 있었다.

이자에게 대항해선 안 된다고.

무거운 입을 억지로 열며, 진평이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련주.”

수그러든 고개를 장일소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붉은 입꼬리가 섬뜩하게 뒤틀렸다.

“착한 아이로구나.”

그 시선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진평에게서 떠났고, 이젠 많이도 멀어진 뒤편의 전장으로 향했다.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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