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597화
1597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2)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자인은 처참한 전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길 닿는 곳마다 시신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어, 어이 하여⋯⋯.”
강건한 어깨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으⋯⋯. 으아⋯⋯. 아아아!”
급기야 그가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하자 함께 온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위경(慕容委瓊)이 팔을 붙들며 만류했다.
“제갈가주⋯⋯. 가주의 탓이 아닙니다.”
“이 일을⋯⋯ 이 일을 대체⋯⋯.”
비통한 오열이 흘러나왔다.
제갈자인은 이 모든 일이 그의 탓인 것만 같아 속이 온통 타들어 갔다. 그들이 조금만 더 빨리 당도했더라면 이런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승패를 바꾸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이 평야에 누운 이들의 절반 이상은 살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체한 고작 반 시진이 모든 일을 뒤틀어 놓았다.
“으아아아아악!”
제갈자인이 광인처럼 울부짖었다.
한 세가의 가주로서 차마 보여선 안 될 모습이지만, 모용위경도 더는 그런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어떤 마음으로 자책하는지 모용위경이라고 모르겠는가. 그만큼 눈앞의 광경은 처참하였다.
‘몇이나 살아남았는가?’
모용위경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모두가 희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아난 이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고작 그런 걸로 위안 삼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사패련!”
핏발 선 제갈자인의 눈에,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멀어지는 사패련의 군세가 보였다.
“장일소오오오오! 이 천벌을⋯⋯. 천벌을 받을!”
제갈자인은 울부짖었고, 모용위경은 소매 안에 감춘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적의 잔당이라도 이곳에 남아 있다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어 울분을 풀어라도 볼 텐데. 그렇게 죽어 간 이들을 위로라도 할 텐데.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을 반기는 건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시신들뿐이었다.
모용위경은 참담한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는가?’
끔찍할 정도의 대패다.
사패련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진 알 수 없다. 저들이 제 부하들의 시신을 얼추 회수하여 떠났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구파일방은 무려 세 문파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사패련의 피해가 이보다 더 클 것 같진 않았다.
모용위경은 직감했다. 길게 이어져 오던 구파일방의 치세가 마침내 끝나고 말았음을.
소림은 이제 다시는 그 권위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과 팽가는 이제 멸문을 걱정해야 하리라.
이제 구파일방에 남은 건 봉문 중인 무당, 종남, 그리고 저 멀리 천산에서 은인자중하는 곤륜뿐이다.
그들을 더 이상 구파라 부를 수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 소림이 무너졌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소림은 단순히 구파 중 가장 강한 문파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림은 그 자체로 구파의 상징이자 강호의 상징이었다.
그런 소림이 사파의 손에 무너졌다는 건, 너무 거대한 의미를 지니고 만다.
‘어찌해야 하는가?’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과 암담함이 모용위경을 휩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아⋯⋯. 아아⋯⋯.”
제갈자인은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저들이 달아날 수 없도록 발을 묶고 그 뒤를 친다는 계획을 법정과 함께 세운 이가 바로 제갈자인이었으니까.
그로서는 이 모든 죽음이 제 탓인 것 같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한참을 흐느끼던 제갈자인이 핏발 선 눈으로 모용위경을 바라본다.
“쫓⋯아야 합니다.”
“가주⋯⋯.”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싸움 끝에 지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모용위경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정하십시오, 제갈가주.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아직은 기회가 있다지 않습니까!”
모용위경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단 일각이라도 빨리 도달했다면⋯⋯ 제갈자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다 늦어 버렸다.
그때, 그들에게로 한 무리가 다가왔다.
‘천우맹.’
그들과 마찬가지로 늦어 버린⋯⋯. 아니.
‘우리와 비할 수는 없겠지.’
천우맹을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만든 게 다름 아닌 그들의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모용위경은 이제야 절절히 깨달았다. 그들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이 모든 건 그들의 오만함이 불러온 결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차마 다가오는 이들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
“모용가주님.”
“⋯⋯당가주님.”
천우맹의 선두에 있던 익숙한 얼굴, 당군악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벙긋거리던 당군악은 이내 입을 닫아 버렸다.
그렇겠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이 참상이 똑똑히 보일 텐데.
오열하는 제갈자인과 고개를 숙여 버린 모용위경, 그리고 할 말을 잃은 당군악. 세 사람 사이로 짙은 절망이 내려앉았다.
저벅.
그 순간, 한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모용위경은 그 정체를 확인하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 익숙지 않은 얼굴이나 충분히 알 수 있다.
저 앞에서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어째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탓한다면, 어찌 그리 오만할 수 있었느냐 탓한다면, 이 많은 죽음을 누가 어찌 책임질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체 뭐라 답해야 할까?
그 물음을 머릿속에 그려 본 것만으로도 무거워서 숨이 턱 막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현종의 존재감. 아니, 어쩌면 그가 스스로 키운 죄악감에 짓눌려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현종이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화산의 현종입니다.”
“⋯⋯모용세가의⋯⋯ 모용위경입니다.”
수없이 해 온 소개가 이토록 힘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현종이 물었다.
응당 나와야 할 질문이다. 전장이 저토록 참혹한 데 비해 모용세가와 제갈세가가 너무도 멀쩡하니 말이다. 뒤늦게 달려왔다는 건 구차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저 화음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천우맹은 이 질문을 할 자격이 있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건⋯⋯.”
“복면인!”
그때 제갈자인의 거의 발작하듯 소리쳐 답했다.
“그놈들! 그 빌어먹을 놈들이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
“그⋯⋯ 크흐⋯⋯. 흐으으⋯⋯.”
다시 오열하기 시작한 제갈자인 대신 모용위경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는 이곳에 함정을 팔 계획이셨습니다. 정확히는 저들이 함정을 팔 것이 당연하니, 그 함정에 빠져 주는 대신 저들을 이곳에 묶어 두려 하셨지요.”
“흠⋯⋯. 그 뒤를 두 세가가⋯⋯.”
“예. 한데⋯⋯.”
모용위경이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나타나 저희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복면인, 말씀이십니까.”
현종의 얼굴이 굳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당군악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모용과 제갈, 두 세가를 막아 냈단 말입니까? 그들이?”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어떻게⋯⋯.”
두 가문은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물론 남궁이나 당가, 팽가에는 한 수 처지는 곳이라고 하나, 그래도 오대세가 아닌가?
한데 그 두 세가를 막아 내었다는 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당군악이 물었다.
“그들이 막아서는 바람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세가의 가솔들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보아도 치열한 격전을 뚫고 여기까지 온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당군악의 눈빛에서 의심을 읽은 모용위경이 얼굴을 확 붉혔다.
“지금 저희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당군악이 담담히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날을 세운 모용위경은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정녕 그리된 일이라면 천우맹은 되레 제게 감사해야겠군요?”
“뭐라 하셨습니까?”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천우맹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 아닙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모용세가가 사파에 붙었다는 의심까지 받는 판인데, 그까짓 말이 무어가 그리 큰 잘못이란 말입니까?”
당군악과 모용위경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알고 있다. 이곳에 있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리 침착하게 서로를 헤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참상.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진 관계. 그 모든 게 이들을 극단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만.”
그때, 현종의 묵직한 음성이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당군악은 물론이고, 본래 현종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모용위경 역시 그 말에 멈칫했다.
현종이 침중한 얼굴로 도호를 외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한때 살아 숨 쉬었던 이들이 처참한 꼴로 널브러져 있다. 잠시 눈을 질끈 감은 현종은 이내 한숨처럼 말했다.
“서로 해야 할 말이 많겠지만, 우선은 망자들을 수습하는 것부터 합시다. 그게⋯⋯.”
“수습!”
분노하던 제갈자인이 정신 나간 것처럼 낄낄 웃었다. 과장된 위악이 아니었다. 그 웃음은 정말이지 광인의 것이었다.
“좋지요. 수습!”
그러더니 이번엔 돌연 현종을 표독하게 노려보았다.
“사패련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고, 물러간 저들이 무슨 짓거리를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하릴없이 저 시신들이나 수습해야지요! 그게 패자가 짊어져야 할 형벌 아니겠습니까?”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이제 천우맹주가 아니시면 누가 지시를 내리겠습니까? 명하십시오! 가서 저들을 파묻으라고. 우리가 저지른 죄를 그 두 눈으로 보고 뼈아프게 절감토록 하라! 그렇게 명하시지요!”
“제갈가주!”
모용위경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제갈자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함을 내질렀다.
“이 많은 이들을 이끌고 와서 기껏 한다는 게 시신 수습입니까? 그게 화산의 방식이고 천우맹의 방식입니까?”
모용위경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현종의 눈치를 살폈다.
지독한 모욕으로도 들을 만한 언사였다. 심지어 천우맹은 도와달란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도 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았는가.
“아니요.”
그때, 내도록 감겨 있던 현종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의 눈엔 조금 전보다 짙은 확신, 그리고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건 천우맹의 방식도, 화산의 방식도 아닙니다.”
“그럼?”
현종은 잠시 침묵하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안쓰러움과 서글픔이 모두 묻어나는 목소리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그저, 사람의 도리겠지요.”
순간 그 묵직한 말에 모두 눌리기라도 한 듯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종이 제갈자인과 모용위경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침묵하던 두 사람 역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절망하는 자. 안타까워하는 자. 다가올 뒷일을 걱정하는 자.
어떤 입장이든, 그 모든 이들이 가장 먼저 잊지 않아야 할 건 사람으로서의 예의다. 그 담백한 원칙이 절망에 주저앉아 있던 이들을 움직이게 했다.
“⋯⋯돕겠습니다.”
모용위경이 모용세가의 가솔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갈자인도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를 용서⋯⋯.”
“아닙니다.”
현종이 고개를 내저어 제갈자인의 말을 막았다.
“그보다 해야 할 일이 있겠지요.”
“⋯⋯그리하겠습니다.”
제갈자인을 다독인 현종은 이제 거대한 무덤이 되고 만 전장을 향해 걸음을 뗐다. 그 뒤를 당군악이 따랐다.
저벅. 저벅.
현종의 걸음은 시신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 조금 어긋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던 현종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눈앞에 있는 이를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그저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아릴 만큼 무겁다.
이 수많은 죽음을 가장 무겁게 짊어지는 게 살아 있는 이라는 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 사실이 현종을 괴롭게 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보다 더.
“청명아⋯⋯.”
눈앞의 참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청명을 향해 현종이 안타까이 말을 건네었다.
“네 탓이 아니란다.”
내도록 석상처럼 굳어 있던 청명이 그제야 현종을 돌아보았다.
텅 비어 버린 듯한 동공이 현종의 마음 한구석을 찌른다.
“그럼⋯⋯.”
청명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
“장문인.”
아주 오래된, 저 깊은 곳에서 들끓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 깊고 깊은 절망에 현종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