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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00화


1600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5)

혈교주의 붉은 안광이 형형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처음의 기세와 달리, 눈빛이 이전보다 신중해져 있었다.

혈교도들 역시 혈교주의 명이 없어서인지 끌어 올렸던 기세를 모두 잠재우고 다시 시체 같은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여, 여긴 어떻게⋯⋯.”

그 덕에 혜방은 이들에게 연유를 물어볼 여유를 아주 잠깐 되찾았다.

“괘념치 마십시오.”

백천은 혈교주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위기에 서서 서로 돕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소림은 이미 저희를 한차례 돕지 않으셨습니까?”

백천의 그 말에 뒤에 있던 조걸과 윤종이 속닥거렸다.

“방장이 여기 있었으면 달랐겠죠?”

“그럴 리가 있겠느냐? 도우러 왔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다만 많이 지치고 힘들었을 테니 지금 도착하지는 못했겠지. 적어도 한 반나절쯤 뒤에나⋯⋯.”

“허이고, 일 다 끝났겠네.”

조걸이 ‘절도 다 불탔겠지. 옛날 화산처럼.’하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백천이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저것들은 항상 꼭 앞에서 뭐만 하려고 하면⋯⋯.

혜방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당황하더니, 이내 ‘아’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천우맹은 저들이 소림을 노릴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신 겁니까?”

“⋯⋯.”

“⋯⋯도장?”

백천은 대답 대신 슬그머니 뒤쪽을 보았다. 혜방이 아닌, 조금 더 뒤. 정확하게는 윤종의 목 부근을 말이다.

“사형, 걔 떨어집니다.”

“흐음. 생각보다 줄줄 흘러내리는구나. 어디 끈 좀 없느냐?”

윤종은 덜렁거리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백아를 잡아 제 목에 다시 턱 걸쳤다. 입을 쩍 벌린 채 축 늘어진 백아는 그렇게 몸을 쥐고 움직이는데도 꼼짝도 안 할 만큼 탈진하여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백아는 보통 청명이 아닌 다른 사람 목은 절대 감싸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지쳐도 여간 지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제일 무시하는 조걸이 쿡쿡 찔러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정말 죽은 것 같기도 하고⋯⋯.

“⋯⋯반쯤은 그렇다고 해야 할지.”

“예?”

혜방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지만, 백천은 그저 피식 웃었다.

수로채의 잔당이 양민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몰이하는 와중에 백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뛰어왔을 때는 백천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가라고 하더군요, 소림으로.”

혜방의 얼굴에 더 깊은 의문이 스쳤다.

“그게 전부입니다.”

상황은 심각한데 그 와중에 황당하기까지 하다. 지금 혜방의 속내가 딱 그랬다.

어쨌든 뚝뚝 끊긴 이 요상한 대화를 정리해 보면, 저 영물이 물고 온 소림으로 가라는 첩지 하나만 받고 이만한 이들을 이끌어서 바람같이 달려왔다는 말이 아닌가?

제대로 된 영문도 모른 채로 말이다.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당장 법정의 명도 제대로 통하질 않아 반으로 갈라지고 만 소림에선 상상 못 할 일이었다.

“매, 맹주께서 명하신 것입니까?”

백천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화라도 안 나겠죠.”

그 대답에, 혜방은 자연스레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화산검협.’

결국은 그가 이 상황을 예측했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천하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세상의 정보를 모조리 집어삼킨다는 개방도, 심지어 공격받는 소림조차 직전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화산검협은 어찌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눈이라고 하늘에 달린 것도 아닐 텐데.

“그⋯⋯.”

혼란에 빠진 혜방이 무언가 덧붙이려는 순간, 백천이 살짝 손을 들어 막았다.

물론 혜방의 황당한 마음을 백천은 십분 이해했다. 청명이 놈에게 익숙해진 화산 사람들도 자주 어처구니없는데, 그를 사실상 처음 겪어 보는 혜방이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다만.

“궁금하신 게 많겠지만,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시기는 아니라서요.”

백천의 일변한 기세에 혜방 역시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날카롭게 침입자, 혈교주를 쏘아보았다.

백천이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놈들을 정리하고 하시죠.”

혜방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혈교주는 내내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백천과 그 일행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생각만큼⋯⋯ 많이 오지는 못한 모양이로군.”

그가 파악하기로, 화산과 남궁의 전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이곳까지 도착한 건 고작 이 몇몇이 전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아.”

그 말을 들은 백천이 피식 웃었다.

“효율을 중시해서 말이야. 필요한 만큼만 데려왔다.”

사실은 수로채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사방에 퍼져 있는 이들을 모두 끌어 올 수 없었던 것에 가깝지만, 굳이 적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혈교주는 말없이 백천을 노려보았다.

백천의 내심이 긴장으로 조금씩 젖어 들기 시작했다.

혈교주의 말대로, 사실 백천이 이끌고 온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전투를 치르고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이대로 맞붙는다면 아무리 소림과 함께한다 해도 결과를 장담하긴 어렵다.

승리한다 해도⋯⋯ 크나큰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내 상태가 조금만 더⋯⋯.’

백천은 자연히 약해지려는 마음을 꾹 눌렀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는데, 혈교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소림에 화산⋯⋯ 그리고 남궁이라.”

붉은 혈광이 넘실넘실 쏟아진다.

“이대로 죄 쓸어 버린다면⋯⋯. 어쩌면 교 단독으로 호북 이상의 전과를 올리게 되는 거로군.”

붕대로 뒤덮인 입가가 씰룩였다. 백천이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지만 이건 말이 다르지.”

혈교주가 몸을 돌렸다.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돌아간다.”

쇳소리 섞인 나직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림에 들었던 모든 혈교도가 즉각 몸을 돌렸다.

“⋯⋯어?”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당황한 건 되레 백천이었다.

“무슨⋯⋯.”

“막을 텐가?”

혈교주가 시선만 슥 돌려 백천을 보더니 물었다.

“⋯⋯.”

백천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였다. 지금은 이들과 싸우지 않는 게 좋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패련이 합류하여 적들이 훨씬 더 유리해질 테니까.

“⋯⋯깔끔하군.”

혈교주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조건이 달라지면 계약을 다시 하는 게 기본이지. 우리가 달아난 걸로 하면 되겠군. 오명이야 익숙하니까.”

혈교주가 막 몸을 돌리려는 차였다.

백천이 서늘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다만.”

“⋯⋯음?”

“물러날 거면 곱게 물러나는 게 좋을 거다. 양민들에게 손을 댄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목을 따 주마.”

혈교주가 감정이랄 게 실리지 않은 무감한 눈으로 백천을 응시했다. 둘 사이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심하지.”

혈교주가 딱 잘라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백천이라 했나? 다음에 보자고, 화산의 젊은 검수.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다면.”

혈교주가 소림의 북문을 빠져나가고, 그 뒤를 따라 혈교도들이 살아 있는 시체처럼 그 뒤를 따랐다.

백천의 이마에서 뒤늦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혈교⋯⋯.’

나이는 젊지만, 백천의 경험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저 혈교라는 이들, 특히 혈교주는 지금껏 그가 상대해 온 사파와는 또 그 느낌이 판이했다.

‘마교와도 또 달라⋯⋯. 이 느낌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마교가 맹목적인 광신으로 보는 이들을 질리게 만든다면, 저들은 다른 느낌으로 차갑고 섬뜩했다.

“이대로 그냥 보냅니까, 사숙?”

“그래.”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은.”

“여기까지 와서요?”

조걸은 조금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백천 대신 윤종이 톡 쏘았다.

“우리는 지키는 사람이다, 걸아. 싸우지 않고 지킬 수 있다면 좋아할 일이지.”

“물론 그건 압니다만⋯⋯.”

조걸은 영 마뜩잖단 얼굴로 소림을 빠져나가는 혈교를 응시했다.

“⋯⋯다른 상황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때는 더 최악일 것 같거든요.”

이번엔 윤종도 퉁을 놓지 않았다. 그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잠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감을 느꼈다. 단순히 외양 때문이 아니라 저들이 풍기는 기운 때문일 것이다.

‘사교(邪敎)라⋯⋯.’

윤종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벅. 저벅.

느릿하게 숭산을 내려가던 혈교주가 고개를 돌려 소림을 올려다보았다.

“⋯⋯교주님. 사패련의 련주가 이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장일소.속을 알 수 없는 사내지만, 그가 바라는 게 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에겐 혈교와 소림이 이곳에서 양패구상(兩敗俱傷) 해 주는 게 최상이겠지.

“하지만 그뿐. 지금은 그도 우리를 적대할 수는 없다.”

“그를 믿으십니까?”

혈교주의 눈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신심(信心) 없는 중원인과 믿음이라는 말은 안 어울린다.”

그 말을 끝으로 하산하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장가계부터 이곳까지 헛걸음한 셈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도 사패련에게도 딱히 나쁠 건 없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들은⋯⋯.

❀ ❀ ❀

“아니라고?”

황당함 섞인 물음에, 청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청명아? 놈들이 노리는 게 소림이 아니라니?”

청명의 시선이 황폐한 전장으로 향한다.

유이설의 말이 정확하다. 적들의 피해가 생각 이상으로 크다.

미끼? 패배?

널브러진 시신만으로도 장일소가 이곳에서 쓴 계략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장일소야 그렇다 치고, 만인방이나 흑귀보의 무사들이 전략을 완성시키기 위해 제 목을 쉬이 내놓기야 했겠는가?

그 말인즉.

“애초에 이곳에 모인 게 만인방의 모든 전력이 아니었던 겁니다.”

“⋯⋯뭐라고?”

어려울 건 없다.

저들은 개방의 눈이 닿지 않는 장가계에서 오래 진을 치고 있었다. 그래. 필요 이상으로 오래 말이다.

대규모의 병력을 단번에 빼내는 건 당연히 눈에 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조금씩 빼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무인의 기동력을 고려하면 더더욱.

“대체 왜 그런 위험을 자초한다는 거냐?”

“⋯⋯그게 아닙니다. 장문⋯⋯. 태상장문인.”

“으음?”

“중요한 건 저들이 왜 병력을 빼냈느냐가 아니라, 빼돌린 이들이 어디로 향했는가입니다.”

당군악은 청명이 한 말의 의미를 즉각 이해했는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쨌든 뒤로 빼돌릴 수 있는 병력은 이 할을 넘지 않았을 터.’

그럼 정예 위주로 차출했을 것이다. 빼돌린 소수의 정예집단.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자.

만약 장일소가 이곳에서 벌어질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예측했다면? 그 계획을 이루고도 남는 전력이 있다면 그들을 어디로 보냈을까?

“화⋯⋯.”

쾅!

청명이 땅을 박찼다.

“처, 청명아! 청명아!”

현종이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일언반구 없이 북쪽으로의 질주를 시작했다.

‘안 돼!’

청명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짓이겨진다.

이미 까마득하게 멀어진 뒤쪽에서, 당군악이 화음으로 가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한 줄기 빛살이 된 청명의 몸이 세상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가 떠나온 땅, 화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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