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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03화


1603화. 웃음도 안 나오는군. (8)

하루. 또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그렇게 사흘이란 시간을 화음에서 보내고서야 청명은 온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장일소의 노림수가 닿아 있지 않았단 사실을.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화음을 내려다보는 청명의 눈이 어둑했다.

불쾌하고 기이한 기시감이 계속 마음을 파고들었다. 청명은 제 팔목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코끝에 옅은 피비린내가 스친다. 현실의 것이 아니다. 그의 기억 속 깊이 잠들어 있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풍기는 냄새다.

‘아니야.’

느리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다.

지금껏 그가 겪어 온,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모든 일의 종착이 결국은 입에 담기도 싫은 그 두 글자에 닿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눈을 뜨고 푸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실로 맑고 화창하였다. 청명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돌아오셨습니까, 태상장문인.”

마중 나온 운암을 보며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청명이는?”

“그것이⋯⋯.”

운암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화산의 중턱 즈음이었다. 저기에 있을 거란 뜻이겠지.

현종은 침중한 눈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순 없다. 아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그저 그 아이의 머릿속에는 현종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가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후우.”

현종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암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망자들은⋯⋯.”

“수습해 주고 오는 길이다.”

생존자가 있는 문파에는 수습한 시신을 넘겼고, 생존자가 없거나 당장 호북으로 시신을 넘겨받으러 올 수 없는 문파의 시신들은 인근에 가매장 한 후 표식을 해 두었다.

그래야 시신이나마 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제자들은 남은 일을 마저 처리하고 화음으로 복귀할 것이다.”

“예.”

묵묵히 화산을 올려다보던 현종이 입을 열었다.

“화음의 중진들을 모두 모아라.”

“예, 맹주님.”

깎아지른 화산의 산세를 담아 내던 현종의 눈이 무겁게 감겼다.

❀ ❀ ❀

실로 둔중한 침묵이 내리깔려 있었다.

천우맹과 화음, 그리고 살아남은 구파의 중진들마저 한곳에 모인 데다, 상황도 그러했다.

“끄응⋯⋯.”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까지 드는 분위기에, 결국 개방의 홍대광이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무어라 한마디를 하려는데, 풍영신개가 그런 그의 어깨를 꽉 누르며 막았다.

홍대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이러다 질식하겠네, 빌어먹을.’

하지만 이해는 간다.

홍대광도 이제 강호에서 굴러먹은 나날이 그리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처럼 심각한 사태에 직면한 건 처음이었다.

온갖 정보를 다루는 개방도인 그도 아연실색할 정도인데, 다른 중진들이 받은 충격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입 닫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닐진대.’

손가락을 꿈지럭대던 홍대광이 현종과 당군악을 흘끗 보았다. 이 분위기를 뚫고 말문을 열 수 있는 이들은 아무래도 저 둘밖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회의의 포문을 연 건 의외로 다른 이였다.

“정리하자면⋯⋯.”

옅은 녹빛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임소병이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으로 꽉 차 있던 실내에 울렸다.

“대패(大敗)입니다.”

그 내용은 비수와도 같았지만 말이다.

“대패라는 말도 부족하지요. 참패, 아니⋯⋯. 모르겠군요. 어떤 말로 이 패배를 다 설명할 수 있을지. 어쨌든 그 정도로 지독한 패배입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야 이렇게까지 질 수 있는지 상상도 잘 안 갑니다.”

그 말에 발끈한 건, 현종을 따라 이곳까지 온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자인이었다.

“그대는 누구요?”

칼날 같은 시선을 받으며 임소병은 피식 웃었다.

“말해 드리지 못할 건 없지만, 남의 신분을 묻기 전에 본인 신분을 먼저 말하는 건 서당에서부터 가르치는 아주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는지요?”

임소병을 노려보던 제갈자인이 이번엔 현종을 쏘아보았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맹주님?”

현종은 담담히 답했다.

“저분께서는 현 녹림의 수장이시자, 천우맹의 군사 역할을 맡아 주고 계신 녹림왕 임소⋯⋯.”

“녹림?”

제갈자인이 현종의 말허리를 불쑥 끊었다.

“왜 녹림이 여기 있습니까?”

그의 두 눈에 노골적인 경멸과 분노가 끓었다.

“사파와 전쟁을 치르고 온 참입니다. 그런데 녹림 놈이 여기에 오만하게 서서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을 저런 언동으로 모욕하는 꼴을 제가 봐야 하는 것입니까? 이게 천우맹이 말하는⋯⋯.”

“목숨을 걸고 싸운 이라.”

하지만 제갈자인이 이를 갈아붙이며 분노를 다 터트리기도 전에 임소병이 냉소했다.

“마치 자기가 그리 싸운 것처럼 말씀하시는군. 구경이나 하다 온 주제에.”

“이⋯⋯ 더러운 산적 놈이!”

분기탱천한 제갈자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살벌한지, 어떻게 한 가문의 가주가 되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임소병은 태연하다 못해 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죽은 이들은 따로 있고, 위로받아야 할 이도 따로 있는데, 솜털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온 사람이 그 위세를 등에 업으려 하니. 댁들이 왜 그리 멍청하게 졌는지 알 만합니다.”

“이⋯⋯!”

제갈자인이 허리에 찬 검을 움켜쥐자, 서늘한 목소리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거기까지.”

당군악이었다.

그는 냉정하게 임소병을 보며 당부했다.

“녹림왕께서는 말씀을 조심해 주십시오.”

불만을 내비치려던 임소병은 그런 당군악의 얼굴을 보고 이내 어깨만 으쓱했다. 더는 대립을 이어 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당군악의 시선이 이번에는 제갈자인에게로 향했다.

“제갈가주.”

“⋯⋯예, 당가주님.”

“천우맹의 인선과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이곳을 떠나시면 됩니다.”

제갈자인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당군악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그래도 같은 오대세가였던 사천당가의 가주가 사파의 편을 들고 나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녹림왕은 사파이기 이전에 천우맹의 군사입니다. 그의 신분과 의도에 대한 의문은 그가 아닌 천우맹에, 그리고 제게 제기하십시오.”

분노한 제갈자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모용위경이 제갈가주를 만류했다.

“이번 일은 가주께서 성급하셨소. 심정은 이해하지만, 자중하셔야 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일단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갈자인은 울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어려운 모양으로 연신 입을 벙긋거리다 결국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며 이를 악물었다. 불만이 얼굴에 노골적으로 어렸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십시오, 녹림왕. 다만.”

괜한 도발로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거다.

“네,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임소병도 이런 사소한 소요에 힘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가 소란이 없었던 것처럼 말을 이었다.

“소림은 반파, 공동은 전멸, 그리고 팽가도 전멸입니다.”

“으으음.”

천우맹의 재정 담당 자격으로 이 자리에 배석한 황종의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소림과 공동, 그리고 팽가.

그 이름만으로 천하를 뒤흔들던 세력이다. 그런데 그 세력의 정예들이 남김없이 고혼이 되었단 사실은 몇 번을 들어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이만한 전과를 얻기 위해 사패련이 잃은 건⋯⋯ 흑룡왕을 비롯한 수로채입니다. 뭐, 그 이전에 동원한 잡졸 놈들이야 희생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수로채 하나.

구파, 오대세가의 세 문파.

어느 쪽이 더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어린아이도 견적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임소병도 구태여 이에 대해 시간을 들여 말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이번 일로 구파일방은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

“구파일방에 남은 전력이라고 해 봐야 종남, 봉문 중인 무당, 그리고 중원의 일에 웬만해서는 관여하지 않는 곤륜. 이 셋이 전부입니다.”

불편함을 참고 자리를 지키던 종남 장문인 종리곡의 입에서 결국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석한 것이다.

사실 남은 문파가 셋이라는 건 조금 애매하다. 더 있기는 하겠지. 개방이라든가⋯⋯.

하지만 개방은 사실상 천우맹으로 그 적을 옮겼다. 오대세가에서도 남은 건 제갈과 모용세가뿐.

‘무당과 종남. 모용과 제갈이라⋯⋯.’

실질적으로 전력이 될 수 있는 건 이뿐이다. 심지어 그 와중에 무당의 봉문은 언제 풀릴지 알 수가 없다.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다.

천하를 지배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남은 문파가 고작 네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니.

임소병이 부채로 손바닥을 탁 두드렸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알던 강호는 이제 없습니다.”

이 말이 순간적으로 모두의 숨통을 턱 틀어막았다.

천우맹도들은 물론이고, 제갈자인과 모용위경, 그리고 종리곡조차 한마디 말조차 내놓지 못했다.

지금껏 그들은 언제고 사패련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방식을 두고 수없이 반목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목조차 사치스러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독한 대패가 모두를 실감케 했다. 이건 더 이상 단순한 세력 싸움이 아니다. 저 사패련을 막지 못하면 정말 정파가 멸망하고, 사파 천하가 열릴 지경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법정.”

그때, 종리곡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의 시선이 제갈자인을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그건 저도 잘⋯⋯.”

“소림으로 돌아갔소?”

“⋯⋯.”

“아니면 아직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있소?”

종리곡의 목소리에 점점 더 살기가 짙어졌다.

“이만한 사고를 벌였으면 제 목에 칼이라도 박으며 사죄를 하든가, 하다못해 와서 해명이라도 해야지. 상황을 이 지경까지 끌고 가 놓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단 말이오!”

“가주께서는 말씀을 삼가십시오. 방장께서는 노력하셨습니다. 다만⋯⋯.”

“노력? 우습군. 이런 걸 노력이라고 하오? 하기야 노력했겠지! 웬만큼 노력하지 않고서야 이리 많은 정파인들을 사파 놈들의 아가리에 밀어 넣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아주 대단한 노력을 하셨소.”

다시 발끈한 제갈자인이 일어서려 하자 모용위경이 그를 얼른 잡아끌었다.

“진정하십시오.”

“이게 진정할 일입니까!”

“흥분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모용위경이 한숨을 쉬고는 종리곡을 바라보았다.

“종리 장문인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방장께서는 사파를 막기 위해 노력이라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남은 우리의 간절한 부름을 끝끝내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

“우리가 피 흘려 싸우려 할 때, 봉문 해 신선놀음하던 종남이 지금 와서 방장을 비난하는 건 옳지 못합니다.”

“신선놀음?”

거슬리는 말에, 종리곡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럼? 그 머저리 같은 계획에 찬동하고 휘말려 종남까지 다 뒈졌어야 입을 열 기회라도 생겼을 거란 뜻입니까?”

“장문인!”

“법정이 살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그가 죽었다면 책임은 다름 아닌 그대들이 졌을 테니! 모두가 죽은 전장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게 무어가 그리 자랑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것이외까? 그게 제갈과 모용의 명예요?”

“장문인⋯⋯.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듣다 못한 현종이 말렸다. 그러자 종리곡이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 예. 천하에 이름 높은 천우맹주가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입을 다물어야겠지요.”

“⋯⋯장문인.”

“예. 하명하십시오, 맹주님. 강호제일세 천우맹주의 말씀을 누가 감히 귀히 듣지 않겠습니까?”

명백히 날 선 반응이었다.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가 신경이 예민하니 그럴 수밖엔 없다지만, 가슴이 갑갑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시시각각 극으로만 치닫는 회의를 지켜보며 홍대광은 머리를 감싸 쥐고 쥐어뜯었다.

‘개판이 이것보다는 낫겠다.’

조금이라도 품어 보려 했던 희망이 시시각각 분쇄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이 인간은 또 어딜 간 거야?’

홍대광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이 명백한 그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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