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08화
1608화. 눈을 떠도 마찬가지군. (3)
딱히 뒤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쏟아지는 시선을 피할 곳을 찾았을 뿐.
모두가 뻔히 아는 숙소보다 좀 더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이곳이 생각난 것이다. 종종 이곳을 홀로 오르던 청명이 놈의 모습까지도.
같은 시선을 받아 보고서야, 그리하여 같은 길을 걸어 보고서야 백천은 알게 되었다.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반드시 위안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놈은 벌써 몇 해 동안 그런 시선 속에 지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백천은 때때로 그런 청명이 부러웠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는 그 혜안이, 다른 이들은 차마 논하지 못하는 것을 논하는 그 용기가.
그러나 이젠 알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큰 무게를 오롯이 짊어지고 버텨야 하는 일인지.
청명이 물었다.
“소림은?”
“혈교와의 일을 묻는 거라면, 다행히 별 충돌은 없었다. 미련 없이 물러나더군. 그리고 소림 분들은 숭산을 지키겠다고 하시더구나.”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은 것은 아니지만 백천은 굳이 부연했다.
“혜방 스님께 수로채 잔당 처리를 도와달라고 요청드렸다. 허락하셨으니 며칠 내로 그곳에 남은 녀석들도 발을 빼고 섬서로 넘어올 수 있을 거다.”
“그래.”
청명은 이번에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백천이 물었다.
“혜연 스님은?”
순간 청명의 시선이 슬쩍 화산 쪽으로 향했다. 지금은 사람이 머무르고 있지 않은 화산의 전각으로.
“돌아오자마자 내내 방에 처박혀 있는 모양이야.”
백천의 얼굴이 수심으로 물들었다.
“⋯⋯그렇군. 그럼 가서 말이라도 한번⋯⋯.”
“내버려 둬.”
청명이 딱 잘라 만류했다. 짧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혼자 있게 두는 게 나아. 어차피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백천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래.”
지금 혜연이 어떤 심정일지 백천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백천 역시 같은 일을 겪었다면 제정신이 아닐 테지.
그러니 지금은 그저 혜연이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청명이 저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일어날 거야. 그런 놈이니까.”
백천은 말없이 그런 청명을 보았다.
무심한 척하지만 내심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미 혜연이 틀어박힌 방 쪽을 몇 차례 기웃거리기도 한 것 같고.
백천은 코로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실 거다.”
여리지만 강한 사람. 그게 혜연이니까.
“방장은 어찌 됐지?”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노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글쎄. 아마⋯⋯ 돌아가겠지. 소림으로.”
“소림으로?”
청명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백천은 의문 어린 얼굴로 물었다.
“글쎄. 그럴 수 있을까? 그 많은 이들을 차디찬 땅에 묻고 무슨 낯으로 돌아간단 말이냐. 나라면 소림에 남은 이들을 마주하기 두려워서라도 쉽사리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돌아갈 거야.”
청명이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달리 갈 곳이 없을 테니까.”
어쩐지 작은 씁쓸함이 스며 있었다. 백천은 이 씁쓸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소림은⋯⋯.”
“한동안은 나설 수 없게 되겠지.”
설령 숭산에 소림의 힘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도, 이제 법정에게는 소림을 움직일 힘이 없을 것이다. 소림에 남아 있는 이들은 애초에 법정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들이니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숭산에 남은 이들에게도 법정을 몰아낼 만한 힘은 없다. 혜방은 아직 법정을 대체할 만한 입지를 쌓지 못했으니까.
결국 한동안은 불편한 동거가 지속되리라.
시간이 서로 간의 묵은 원(怨)을 녹이고, 상처 위로 덮인 딱지가 절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백천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방장은 무슨 생각을 할까?”
“⋯⋯글쎄. 모르지.”
“그가 조금만⋯⋯.”
백천이 먼 하늘을 보며 한탄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타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면⋯⋯ 그 많은 목숨이 허무하게 스러지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을 입 밖으로 흘릴 수가 없었다. 마치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백천은 저도 모르게 제 목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작게 드는 위화감에 절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슬쩍 본 청명이 상체를 조금 젖히고 팔에 체중을 실으며 입을 열었다.
“믿었겠지.”
“⋯⋯.”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이야.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다른 이들이 뭐라 말해도 이건 틀리지 않은 길이니 결국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천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이 무엇인지.
“그건⋯⋯.”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그게 정말 틀린 걸까?”
알 수 없는 한기가 백천의 손끝에 어렸다.
틀렸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이미 결과로 증명되었으니까.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논하자면 온종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백천은 차마 청명의 저 질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다.
결과를 확인하기까지는 그 누구도 알 방법이 없다. 자신이 택한 길이 진짜로 옳은지, 틀렸는지는 말이다.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이들이야 쉽게 말하겠지만, 당사자는 그리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결국은 버틸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스스로 믿고, 자신이 행하는 일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저 묵묵하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그도 깨달았겠지, 어느 순간에는.”
“⋯⋯.”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야. 후회하고 또 후회하겠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미 끝나 버린 일을 수도 없이 되새기게 될 거야. 처절하고 또 처절하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법정을 동정할 수는 없다. 그건 청명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토록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이를 그럼에도 쉽사리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백천도 이제는 알아 버렸기 때문이리라.
선택 한 번에 수천, 수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이가 살아가는 세계를. 칼날로 이루어진 절벽 위를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이들의 심정을.
백천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그리 동떨어진 이야기도 아니다. 그는 조금 전, 모두가 굳이 짚어내지 않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굳이 헤집어 파냈다.
만일 그게 단순한 기우에 불과하다면? 그저 상황이 맞아떨어져 그리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럼 백천이 한 짓은 이제 겨우 만들어질지 모를 연합을 시작부터 부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심과 의심이 꼬리를 물어 끝내는 서로를 갉아먹도록.
그건 정말 옳은 일이었나? 백천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용기라⋯⋯.’
한때는 그리 믿었다. 스스로 옳다 믿는 것을 굳건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용기라고.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옳음’을 관철하는 것이 용기라고.
하지만 그 ‘옳다’를 정하는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조금 전의 백천처럼, 법정도 믿었으리라.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에 틀림이 있을 리 없다고.
숱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얻어 낸 ‘정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그 정의가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 법정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동정해서는 안 된다. 동정받을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새삼 무서워졌나 봐?”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천이 그를 돌아보았을 때, 청명은 노을로 인한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운 채 옅게 웃음 짓고 있었다.
애쓰는 백천을 볼 때 자주 피식 흘리던 웃음과는 그 결이 달랐다.
백천은 가만히 답했다.
“무섭다기보다는⋯⋯ 그저 안 것뿐이다. 세상에 완벽한 선택 같은 건 없다는 걸. 아무리 애를 쓰고 다잡아도, 결국은 내가 잃는 것들이 생기겠지.”
청명이 말없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이 말을 이었다.
“후회도 하겠지.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했다면 나았을 거라고 통탄하는 날도 올 거다. 하지만⋯⋯ 어떤 결말을 맞게 되든 선택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이유 같은 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도 청명도 알고 있다.
결국 누군가는 선택해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선택을 미룬다는 건, 결국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떠미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디딘 발을 물릴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또 다른 법정이 되어 자신을 저주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다른 이가 그 고통에 내던져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을 거다.”
청명이 조용히 백천을 응시한다. 이제 태양은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고,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빛만이 그의 주변으로 번져 있었다.
백천이 청명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탓이 아니다.”
청명의 입술이 살짝 들썩였다. 하지만 백천이 더 빨랐다.
“분명 어딘가에는 있었을지 모르지. 네가 방장의 선택을 애초에 막을 수 있었던 길이.”
“⋯⋯.”
“너는 아마 여전히 그걸 찾고 있겠지. 너는 그런 놈이니까. 네가 제대로 선택했다면, 그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겠지.”
청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 놈.”
“⋯⋯응?”
갑작스레 쏟아진 비난에 청명이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백천은 그런 그를 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대체 얼마나 자길 대단한 인간으로 여겨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감도 안 잡힌다. 너 좀 이상한 거 아니냐?”
청명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아니⋯⋯.”
이 말 자체가 충격적인 게 아니라, 이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백천에게서 들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을 무시하지 마.”
“⋯⋯.”
“설령 선택한 게 방장이라고 해도, 그걸 따르기로 결정한 건 그곳에 있었던 모두다. 그리고 설령 네가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그 실수를 따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우리야.”
청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모두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다는 그런 같잖은 생각은 하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사숙.”
백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그리고 하늘을 응시했다. 밤이 노을을 밀어내고 있다. 끝내 노을은 사라지겠지만, 마지막까지 색을 잃진 않을 터.
“그러니 궁상떨면서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표정 좀 짓고 있지 마라.”
“⋯⋯.”
“오래는 안 기다린다.”
백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은 껌껌해진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털썩.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이제 다 컸네. 애송이 놈들이.”
잠깐 넋을 놓은 듯하던 그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를 보던 언젠가의 청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 아마 아닐 것이다. 청문은 마지막까지 그를 이런 시선으로 보지 못했을 테니까.
청명이 이끌어 왔다.
무너진 화산은 어떻게든 그의 손으로 되살려내야 한다고 믿고, 어떻게든 끌고 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저들이 되레 그를 이끌어 주고 있었다. 아니, 외려 재촉하고 있다.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 말라고 말이다.
“⋯⋯사형.”
눈을 감자 청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자하게 웃는 모습이 아니다. 얼굴을 굳힌 모습이다.
저 모습은 분명⋯⋯.
– 저는 이 결정을 죽는 그 순간까지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눈을 내리감은 청명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과거, 청진을 구하러 가지 못하게 막던 청문에게 청명이 했던 말이다.
수없이 되뇌었고, 꼭 그만큼 수없이 후회했던 말.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말.
어쩌면 그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인지도 모른다.
과거에 사로잡힌 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잃을 게 두려워 발을 내딛지 못하는. 그저 손에 잡힌 걸 악착같이 지킬 줄밖에 모르는 그런 한심한 존재.
청명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여튼⋯⋯ 잠깐을 못 쉬게 한다니까.”
몸을 일으켰다.
알았으면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과거의 진창 속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라 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곳에는 그런 진창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눈부시고, 그래서 애가 탄다.
지금의 하늘은 과거 그가 청문과 대치할 때와 같은 빛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제 청명은 청문이 서 있던 자리에 서 있다. 그러니 이제는 해 주어야 한다. 과거의 청문과는 다른 답을.
그때의 청명이 가장 듣고 싶었던 답을.
피식 웃은 청명이 아래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환상 속에서 굳어 있던 청문이 그제야 청명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 왔다.